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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3 회


33. 전주복이네 부자의 시


마을사람들의 공론이 끝났다. 서재골훈장네를 비롯하여 향산으로 이사해갈 몇집 식구들을 내놓고는 모두 잡약산뒤쪽에서 땅을 파고 세간과 식량을 묻기에 바빴다. 왜군이 략탈하러 오더라도 마을에서는 빼앗아갈것도, 불살라버릴것도 없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앞으로는 이 산속에서 움막들도 지어야 할것이였다. 이미 빈집도 있고 또 이제 비게 될 집도 몇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다. 앞으로는 더욱 모자랄것이였다. 그래서 전주복이네를 비롯하여 성안, 성밖에서 떠나온 사람들은 움막집을 짓기로 했다.

서산은 영명사에서 나온 중들을 불렀다. 그중의 건장하고 길 잘 걷는 젊은이들을 뽑아서는 지리산, 금강산 같은 먼데로 보내고 그 여차의 사람들은 향산과 동금강암 같은 가까운 곳으로 보냈다. 서산의 편지를 지닌 중들은 먼길이면 둘씩 혹은 셋씩 짝을 지어 떠났다. 그들은 길량식도 지지 않았다. 그때는 아직도 곳곳에 절과 암자들이 많았으므로 객승노릇을 하거나 그렇지 못한데서는 동냥중노릇을 해서라도 갈 작정이였다.

그들을 떠나보낸 서산은 뒤산으로 올라왔다. 이미 멀리 보통벌로 흩어져가는 그들을 향하여 다시금 합장하고 머리를 숙여 그들의 앞길이 무사하기를 념한 서산은 사람들이 일하는데로 갔다. 일변 땅을 파고 또 일변 자기네 세간과 량식을 져올리기에 사람들은 바빴다. 그중에 전주복이네 부자는 웬 까닭인지 가래질로 구뎅이를 파다말고 어성을 높여서 말다툼을 하고있었다.

《…모르갔다. 네 맘대루 해서야 네 소 잃지 다른 놈의 소 잃갔네?》

가래줄 한끝을 쥔채 먼산을 바라보며 이런 말을 하는 주복이의 늙은 아버지는 입이 쓰거운듯이 군침을 뱉았다.

《아버지는 말씀을 왜 그렇게 합네까. 그래 내가 내 소라구 내 맘대루 했단 말이요?》

주복이 역시 쓰거운 모양으로 건숭 세워놓은 가래장부를 쥐였던 손바닥에 침을 뱉았다.

《다 늙은 나야 소 아니라 그보다 더한거라두 날 위해선 아까울것이 없으니 하는 말 아니가.》

《글쎄 걱정마시라구요. 뉘 소든 그 소 어데 가갔게 그러시우?》

《어데 안 가다니? 너부터두 그 소 어데 갔는지 모르지 않니.》

이번에는 그 역시 가래줄 한끝을 늦추 잡고 서있던 주복이 어머니가 대들었다.

《남의 솔 갖다가 팔아먹든지 잡아먹든지 해두 이 란리통에 어데 가서 고소 한장 드려볼데두 없이 된 세월 아닌가.》

이같이 다투는 내용은 주복이가 의논도 없이 돈정신에게 저의 소를 빌려준때문이였다. 돈정신은 조금전에 가족들을 데리고 서해변쪽으로 떠났다.

그의 안해는 남편도 같이 간다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고는 먼 두메산골 절에는 가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언제든 하루길로 오고갈수 있는 촌에다 집 한간만 마련해주면 어떻게 해서든 살아갈 도리를 하겠노라고 했다. 오륙을 잘 못쓰는 칠십로모와 갓난것이 달린 안해가 여기 있어서는 이편의 손발을 잡아매게 될것이므로 어차피 어데로든 치워놔야겠다고 생각한 돈정신은 풋낯이나 아는 사람들이 있는 서해변쪽으로 가기로 했다. 그래서 길을 걸을수 없는 어머니를 태우고 사창에서 내온 량식과 세간을 싣고 가기 위해서 소를 빌리자고 했다. 주복이는 두말않고 소를 주었다. 그런줄을 안 아버지와 어머니는 걱정은 뒤서고 우선 어처구니가 없었다. 일왈 돈서방인가 하는 위인을 언제 알기나 했던 사람인가? 또 서해변쪽으로 간다고만 했다니 그 넓은 서해변의 어데란 말인가? 따라서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지 않는가? 언제나마나 애당초 돌아올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되였다. 소금장사라면 한곳에 붙배겨서 농사하는 량민과도 다르다. 소금장사란 흔히 흉물스럽고 믿을수 없는 건달들이 많았다. 도무지 믿을수 없는 아버지는 이제라도 다쫓아가서 소를 찾아온다고 서둘렀다. 주복이는 그럴수 없는 일이라고 한사코 막았다. 그래서 로인은 더욱 애가 탈밖에 없었던것이다.

《허어! 세상살이 밑천으루 믿었던 마루소 한짝 잃었나부다.》

로인들이 흔히 그렇듯이 주복이 아버지의 화는 드디여 자탄으로 변했다.

《글쎄, 념려마시라구요. 괜히 쓸데없는 걱정들을 합네다가레》

주복이의 고집은 여전했다.

《쓸데없는 걱정이문야 좀 좋으리! 공연히 남을 의심하는것두 손복(손해보는것)할 일이지만 너같이 허턱 남을 믿기만 해두 랑패니라.》

《돈서방이 이번에 한 일만 봐두 알거 아니요.》

《일? 돌아가면서 남의 장독 쳐부셔놓은 일 말인가?》

《그것만 봐두 알거 아니요.》

《난 네 말 무슨 소린지 모르갔다.》

속으로는 《그런걸 가지구 돈가를 믿으라니… 그런 일에나 발벗고 나서기를 좋아한다는것은 오히려 더 심술궂은 소행이라고도 할것이 아닌가.》 하는 로인은 더욱 어처구니가 없어서 허허허 웃었다.

《그럼 나두 모르갔소.》

주복이는 그 말은 그만하고말자는것 같았다.

《그래, 어서 일이나 치우자.》

한번 혀를 차는것으로써 만사를 다 타첩하고마는듯 한 로인은 손바닥에 새로 침을 뱉고 가래줄을 당겨쥐였다.

《할 일이 많다. 그 머사닌가 하는 과부네랑 여기서 떠나는 사람들네가 두구 가는 세간이랑 쌀이랑두 다 건사해줘야지 않나…》

또 이런 말을 하는 로인의 말끝에는 몸도 마음도 퍽 지친듯 한 한숨이 들리기도 했다.

《지금 아버지두 그러지 않소?》

가래장부를 대다말고 주복이는 문득 또 이야기를 되살렸다.

《그러다니 뭣이 그래?》

《아버지 이재 그 말이나 돈서방이 한 일이나 다 같애요.》

《뭐이 같애? 네 말 난 정 모르갔다.》

《아버지가 모르갔대면 난 더 모르갔쉐다.》

또 이같이 퉁명스럽게 말을 끊고마는 주복이는 단지 역정만으로 그런것이 아니라 저 역시 그 이상은 더 설명할수 없기때문이였다.

지금 이 장면을 그대로 전하는 작자 역시 그렇다. 주복이의 말은 론리가 아니기때문에…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시가 있는것만은 느낄수 있다. 그리고 시는 진실이기때문에 주복이의 말을 그대로 믿을수도 있다.

지금까지 그들옆에서 두손을 얹은 지팽이끝에 턱을 고이듯 하고 서있던 로승의 얼굴은 문득 잔주름살의 물결이 이는 파안일소(얼굴에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한바탕 웃는것)로써 빛났다. 따뜻한 미소로써 더욱 맑게 빛나는 그의 눈앞에는 황홀할만 한 환상이 떠오르기도 했다. 풍치있게 너그러운 장삼자락과 소매를 구름안개같이 흩날리고 휘감기도 하면서 흥겹게 춤을 추는 자기를 보는것이였다. 시정(시의 정서)과 법열의 도취였다.

언젠가 자기는 《금강산하석(금강산밑에 있는 돌)은 대소시여래(크고작은것이 모두다 부처다.)》라고 하여 아름다운 금강산의 자연을 례찬한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사람들을 두고 달리 또 무엇에서 불보살을 구할것이랴. 아름답고 슬기로운 인정 이외에 더 느껴웁고 더 화려하고 더 고귀한 시정과 불성(부처의 자비로운 천성)을 달리 찾을데가 있으랴.

이때 두 봉군 오장은 산마루 봉수대로 올라가고있었다. 아까 모였던 마을공론에서 이곳 봉수대는 늙은 오장에게 맡기기로 결정했던것이다.

《그래, 나는 여기 와서까지두 또 연대를 지켜야 한다?》

늙은 봉군은 자못 불만한 투로 말했다.

《졸질랑은 맙소.》

젊은 봉군은 약을 올리는 투로 이런 말을 했다.

《이 내가 늙었다구 늙은이대접하는걸 그냥 받자 하니 자넨 또 날 송장대접을 할라나?》

《눈은 밝지요?》

《듣기 싫어.》

《괜히 맞은쪽 가마구비 연대만 바라보지 맙소. 이제부터는 보통벌 땅바닥을 살펴야 합네다. 알갔소?》

《그래, 그 말은 내가 채심해 들을 말일세. 하나 나더러는 왜놈에게 눈만 빨구있으라니 좀 괘씸두 하네.》

늙은 봉군은 연대의 드높은 축석우로 올라섰다. 보통문, 칠성문으로 드나드는 일본군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바람에 흩날리는 붉은 상모가 달린 창을 짚고 연대우에 서있던 그 봉군 오장이 우선 거쉰 목소리로 《왜적이야-》 웨치고 일변 천아성(정황이 있을 때에 군사를 모으는데 부는 나팔소리)을 울리게 된것은 이날로부터 불과 이틀만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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