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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2 회


32. 마을사람들의 모임


이튿날 아침이였다. 서산은 이 동네 로농 김첨지에게 부탁하고 또 법근이를 시켜서 이 잡약산마을을 중심으로 부근의 부락들에 아직도 남아있는 농민들과 피란민들중의 장정들을 청하기로 했다. 안뜰에는 멍석들을 련폭해 깔았다.

먼저 온 고충경이를 합장하고 맞아들인 서산은 깔아놓은 멍석 한끝에 자리를 정하자 전날 밤에 써놓았던 편지중의 한장을 그의 앞에 내놓았다. 고충경이가 편지를 읽는 동안 서산은 옆에 서있는 법근이에게 물었다.

《너와 같이 산에서 검이나 활을 가지고 놀던 사미(젊은 중)들은 몇이나 되느냐?》 하고 또 《어느 절의 누구누군지 일러보아라.》 하였다.

법근이는 미리 외워두었던듯이 자기 동무중들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서산은 앞에 놓인 손벼루에 이미 갈아두었던 먹을 찍어가며 받아쓰고있었다.

서산의 편지를 다 읽은 고충경은 인사가 아닌듯 하지만 뒤집어보았다. 한가운데 꺾인 자국이 있고 좌우가장자리에 구멍들이 난 그 종이는 아닌게 아니라 판각한 불경책의 한장이였다. 필시 그것은 대사가 항상 바랑속에 지니고 다니던 책일것이다. 서산앞에는 새 종이에 쓴것도 한두장 있었다. 종이가 그뿐이던 모양이다.

《제한테 종이가 있었는걸요.》

이런 말을 하고싶기도 했던 고충경은 다음순간 자기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의식했다. 《혹은 이런 불경책장이 새 종이보다도 더 글의 내용을 살릴는지 모른다.》는 생각- 무척 간결하면서도 서산대사를 잘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가 지금 어떤 일을 꾀하고있다는것을 력력히 짐작할수 있을뿐만아니라 충동을 받을만 한 글이고 글씨였다. 하물며 또 이 편지를 읽을 사람들은 불경책이라면 부처앞에서나 마찬가지로 합장배례하고 대하는 중들이다. 서산은 그런것까지도 료량해가지고 한 일일는지도 모른다. 또 지금 자기를 불러다놓고 이 편지를 보이는 한편 법근에게 중검객, 중 궁수들을 (어느 정도의 검객, 궁수들인지는 모르나) 묻는것은 간접으로 이 고충경의 의향까지도 알아보자는 심산이 아닐가?

《로회한 늙은이!》

고충경의 미소는 이러한 뜻이였다.

《지금 로장께서는 옛날 고려의 승병장 성근의 뒤를 따르실 의사인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병(군사)은 궤도(불도에 어긋난다는 뜻)라고 했은즉 일평생을 산중에서 고고히 처신해온 대사가 그렇게 할수 있겠습니까?》

고충경은 한번 이렇게 로승에게 도전해보고싶은 충동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순간 그는 또 자기 입가에 미소를 느꼈다. 이번에는 그 미소끝에 입속으로 가만히 혀를 차기도 했다. 그러한것은 말로써 사람을 저울질해가며 흥정을 하는 장사치들의 때라고 생각된때문이였다.

고충경은 한번 옷깃을 여몄다. 나는 이미 이 로승의 사람으로 나 혼자서나마 허락하지 않았던가. 그는 이런 생각을 한것이였다. 서산을 전부터 잘 알아서 그런것은 아니다. 전부터 그 이름은 익혀들어왔고 또 간혹 묘향산에 갔을 때 먼발치로 본적도 있었지만 인사하고 만나기는 이번이 처음이였다.

지금까지의 서산대사는 일반백성들에게는 한낱 깊은 산속에 들어앉은 혹은 그 머리에는 돌이끼가 돋았을지도 모르는 한 늙은 도승의 이름일따름이였다. 그러던 서산이 지금은 백성들앞에 퍽 가까이 나선 사람으로 되였다. 아직 그 범위는 넓지 않으나 지금의 이 평양주변에는 그의 이름을 중심으로 민심이 모이는 인화(인심이 합하여진다는 뜻)라고도 할수 있는 기운이 엉기기도 하는중이였다.

고충경이가 스스로 서산의 사람으로 자처하기까지는 자기 내심의 갈등이라고도 할수 있는 약간한 주저가 없지도 않았다.

사창고의 쌀이 터지고 성안에 간장탕수가 났다는 소문과 아울러 전파되는 서산대사의 이름을 들었을 때 고충경은 우선 놀랐고 또 한편 자기의 미소를 느끼기도 했던것이다.

《그 로승이 과연 일을 시작하는구나!》

《과연 그 주책이 크다!》

고충경은 우선 이같이 놀랍게 생각했다. 실은 이때 고충경은 룡강고을로 김응서를 찾아갈 예정이였다. 일전에 자기 처남한테서 고산진 첨절제사로 있던 김응서가 얼마전에 부친상을 당해서 자기 집에 와있다는 소식을 들었던것이였다. 곧 떠나려고 하던즘에 서산의 소문을 듣게 된 고충경은 어쩐지 발등을 밟힌듯 한 느낌도 없지 않았다. 그 새까만 나비수염밑의 미소는 그때문이였다. 사창의 쌀을 터치고 간장탕수를 낸 그 로승의 거조는 종당은 승병을 일으키는데까지 진전할것이라고 짐작이 되기때문이였다.

먼저 시작한것이 누구이든 이 나라 백성으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시작한것이다. 또 이 사람, 저 사람이 시작했더라도 결국은 하나로 힘을 합쳐야 할 일이다.

고충경은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석연치가 못했다. 일왈 속인이 승병막하에 들어간다는것부터 자연스럽지가 못하다. 쾌한 일은 더우기 아니였다. 승병도 군사다. 그 막하에 들어간다면 중들의 절제를 받아야 할것이다. 그것은 더욱 쾌한 일이 못된다. 역시 지금이라도 김응서를 찾아가고싶었다. 아직은 의사뿐이였지만 지금까지 생각해온 자기 계획을 버리고싶지도 않았던것이다.

그러나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놈들이 언제 들어올는지 모르는 성안으로 드나들며 사창고의 쌀을 나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그것부터 해야 할것이였다. 그래서 룡강으로 데리고가려던 보패를 차돌이 어머니를 따라 잡약산마을로 보내고 자기는 차돌이와 함께 성안으로 들어왔던것이다.

《이 사미들은 법근이와 같이 칼과 활을 익혀온 젊은 중들이올시다. 그 재조들이야 볼것이 있겠습니까마는 고공께서 이 사미들을 거느려주셨으면 해서 오시라구 한것이올시다.》

서산은 십여명 중들의 이름을 적은 종이를 고충경이앞에 내놓았다.

《성안에서 나온 대장쟁이가 몇이 있습니다. 나 역시 장난삼아 쓰던 살촉을 만들어온 대장간사람인데 그 사람들의 말이 짐작에 로장밑에서 할 일이 있을것 같다고 나더러 여쭤보라고 하길래 머물러두었습니다. 일은 꽤 쓸만 하게 하는 사람들이올시다.》

서산이 주는 종이를 받아들고 한번 훑어본 고충경은 이런 말을 꺼냈다. 동문서답같은 말이였으나 서산은 대단히 기뻐했다. 그는 말했다.

《그야말로 고소원이올시다. 그 사람들은 동금강암으로 가서 일하도록 하겠습니다. 거기는 참숯을 만들 나무가 많습니다. 그리구 농사를 지어보지 못했거나 또 손수 병장기를 잡을수 없는 승려들은 민간으로 다니며 쇠붙이를 모아들일것이올시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이미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었다. 전주복이네 부자를 비롯하여 두 봉군 오장과 돈정신, 황서방, 현차돌이 같은 사람들은 벌써부터 와서 서산대사와 고충경이가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고있었다. 그다음에는 이 동네 로농 김첨지를 따라온 50~60명의 농군들과 아직도 이 근처부락에서 묵고있던 40여명의 피란민들도 모여왔다. 다 마찬가지로 땀에 젖고 먼지가 올랐지만 그러면서도 본시부터 누런 흙물이 든것과 아직도 어느 구석엔가 희게 바래운 하들한 맛이 남아있는 그 옷으로써 농군과 피란민을 가려볼수도 있었다. 또 그 머리모양으로 우선 눈에 뜨이는 중들도 20여명 있었다. 법근이를 따라들어온 영명사의 젊은 중들이였다. 복색과 머리모양까지도 다른 백여명 장정들로 그리 넓지 못한 뜰안은 빼곡 찼다. 바자문밖에도 그만한 수의 아낙네들과 아이들이 모여섰다. 아이들은 저마다 틈을 비집고 짧은 머리채가 달린 머리들을 맞쪼아가며 뜰안을 들여다보고있었다.

뜰안에 들어선 남정들중에는 멍석자리가 모자라서 추녀밑에 늘어서기도 하고 열어놓은 방문턱과 토지방에 걸터앉기도 했다. 서로 인사와 롱말을 건네기도 하고 혹은 제옆에 자리가 있으니 오라고 부르기도 하는 소리에 뜰안은 떠들썩했다. 이때 앉은자리에서 허리를 펴고 반쯤 일어선 김첨지가 말했다.

《그만하면 올이는 거진 다 왔나부웨다.》

그 말에 한번 뜰안을 살펴본 서산은 고충경이와 하던 말을 끊고 일어나서 군중에게 한번 합장하고 앉았다. 뜰안은 금시 조용해졌다.

《여러분께서 보시다싶이 평양성에는 이미 왜적이 들어왔소이다.》

나직하나 어덴가 쟁- 울리는듯 한 금속성여운이 들리는 서산의 말이 시작되였다.

《그런데 왜적이 들어온 평양성이 불과 십리어간에 지나지 않건만 이곳에 아직도 머물러계신 여러분께서는 농터를 버리시지 않고 농사를 계속해하실분인줄로 압니다. 예로부터 란시에는 대개 사람들이 흩어져서 실농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여러분께서는 그렇지 않으시고 눌러 농사를 하신다는것은 앞으로 나라에 큰 도움이 될 일이올시다.》

로승의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있던 사람들은 한층 긴장한 얼굴로 피차 《그렇든가?》 묻듯이 서로 마주보았다. 목이 갈린듯 그래서 오히려 더 쟁- 울리는듯도 한 서산의 말소리는 계속됐다.

《여러분께서 이미 부쳐놓으시고 김까지도 매신 저 십리벌농사를 실농않고 거두신다는것만도 큰일이고, 그뿐아니라 또 그렇게 하시는것으로써- 바로 왜적이 들어있는 평양성밑에서까지도 여러분이 농사를 버리지 않는다는것으로써 저 뒤산테밖에서도 농사를 하게 될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밖의 먼곳에서는 더 말할것도 없을것이올시다. 그렇게 된다면 그 얼마나 크게 보람있는 일이오니까.》

서산은 이렇게 말을 끝냈다. 그의 말이 끝나서도 뜰안의 사람들은 역시 한동안은 잠잠했다. 마치 지금 그 말만으로는 미흡해서 또 다음 말이 있으려니- 하여 기다리는듯도 한 침묵이였다.

《옳거니!》

조용한중에 문득 누가 저 혼자 무릎을 치기라도 하듯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복이 아버지였다. 토방돌에 걸터앉은 그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혼자 흐흐흐 웃고나서 서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사, 대사의 말씀을 듣구보니 나부터두 맘을 좀더 크게 먹을걸 그랬소. 이때까지는 생각이 그저 어떻게 하면 우리 식솔이 굶지나 않게 농살 해보나 하기만 했더랬소.》

《거 정말 실토의 말씀이웨다.》

이때 멍석자리 한가운데 앉았던 김첨지가 그 말을 받았다.

《지금 형편이 다 부쳐는 놓구두 임자없이 된 땅두 많구 해서 나부터두 내해라구 할 사람이 없는, 밭가까운 논마지기나 다루어볼가 했던데…》

이러한 김첨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실토나마나 안 그럴래니 어떻게 할테란 말인고?》 이렇게 남의 말을 가로채듯 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의 시선은 그쪽으로 쏠렸다. 뒤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은 상투가 우뚝우뚝 늘어선 앞의 사람들의 머리를 피하느라 몸을 틀기도 하고 혹은 반쯤 궁둥이를 들기도 하고 바라보았다. 김첨지옆에 뿔난 관을 쓰고 앉은 꼬부장한 로인이였다.

《나 우선 저 대사한테 한가지 묻갔소.》

로인은 끝이 좀 피기까지도 한 낡은 관뿔로 앞의 사람의 등을 떠받듯이 더욱 허리를 굽혀서 체소한 몸을 한무릎 나앉으며 말했다.

《보통벌농사를 그냥 한다니- 저 산너머 사람들에게 본뵈기루 그저 하는체만 한다는 말이요, 정말 저 농사를 다 한다는 말이요?》

이런 로인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은 다시 서산대사에게로 모였다.

《예, 다 할것이올시다.》

이때까지 여러 사람들의 말을 듣기만 하려는듯이 긴 눈섭을 드리우고 앉았던 서산이 얼굴을 들며 이렇게 대답했다.

《아뿔싸! 그러다보니 대사가 여기 형편은 통 모르는군. 그럴래니 일왈 일손이 있나. 이제부터는 필시 여기까지두 왜적들이 나와서 로략질을 할게구 또 그건 고사하구라두 일왈 나부터두 조카놈까지 자식놈이 셋씩이나 군총으루 뽑혀나갔는데 좀 보오, 이 잡약산 앞뒤동네를 다 털어모은 남정이 여기 모인 이 사람들이 다요.》

이런 로인의 말에 뜰안에 모인 사람들을 새삼스럽게 둘러보는이도 있었다.

《서재골아주바니.》

이때 그 로인의 뒤에 몇사람 건너앉아있던 벼슬자국 있는 한 장정이 말했다.

《아주바니말씀만 말이라구 하지 마시구 대사님의 말씀을 다 들어봐야 할거 아니요.》

《남의 말 들어보나마나 자네 눈으로 보면서도 모르갔나?》

로인이 이번에는 체소한 몸을 뒤로 홱 돌리면서 말했다.

《여기 마루일군이 몇이나 되나, 대관절? 제 앞채기할 젊은이라구는 상사에 자네 같은 외아들짜리가 몇이 있구는 다 한줄 꺾인 로축들 아닌가. 무슨 재간에 보통벌농사를 다 한다노. 난 말만 앞세우는건 천하없는 사람이라두 싫어.》

로인은 제 말에 흥분까지도 하는 모양이였다.

《아니, 할라기만 하면야 사람없어 못하갔소.》

이 자리에서 독판을 치듯 하는 로인의 말이 퍽 역한것을 참았던듯 한 말소리가 났다.

이때 자기네는 한낱 길손이라 농군들에게 자리를 사양해야 할것으로 알고 추녀밑에 둘러서있던 피란민중의 한사람이였다.

《나부터두 올데갈데없이 이러구있는데 여기서 농살 한대면 한몫하갔소.》

《이분 말씀이 옳쉐다. 아무리 란시라두 우리 조선땅에서 농사할 조선사람이 없기야 하갔소. 하나 우리가 생각하던것과는 일이 좀 따웨다.》

역시 피란민중의 또 한사람은 이런 말을 했다.

《내놓구 말이지, 우린 여기서 배포될 일이 뭐 그런것이 아니구… 하기야 농사두 크지오만- 그보다두 어떻게 하면 저 왜적들과 싸우갔나? 그런 의논이 나올줄루 알았는데요.》

《옳쉐다. 그래야 공론들이 제대루 될것 같쉐다.》

멍석자리 저편끝에 모여앉았던 농군들중에서 누가 또 이런 말을 했다. 그러자 뜰안은 다시 떠들썩하기 시작했다.

《실상인즉 내 생각두 그래서 대사님의 말씀을 들어보자던거웨다.》

벼슬자국 있는 젊은 농군의 말이였다.

《이 훈장네 아주바니(관쓴 로인을 눈으로 가리키며)말씀마따나 나는 남의 외아들이 돼서 군총으루두 안 나가구 이때껏 농사만 하드랬소. 하나 세상이 이렇게 되구보니, 실지 말이지 성안에 들어온 왜적을 떠이듯 하구서 그놈들밑에서 수걱수걱 농사나 하면 뭘 하갔소? 또 저 왜놈들이 우리 농사 잘하라구 가만둘리두 만무하구요. 그렇지 않갔쉐니까?》

《거 다 옳은 말씀들인데…》

이때 안방문턱에 걸터앉았던 황서방이 말했다.

《좌우간 시재는 보통벌농사를 짓기루 하구 볼거 아니갔소. 그러느래면 왜적과 싸우게두 될게구, 그래서 차차…》

이렇게 말하던 황서방은 제가 좀 주제넘다는 생각이 들기라도 하듯이 하던 말을 끊고 서산을 바라보았다.

《훈장로인께서는 지금 댁에 남은 권속이 몇분이나 되십니까?》

서산이 물었다.

《나 말이요? 식군 상게 많쉐다. 우리 두 늙은이하구 열소리 하는 막내자식놈하구 맏며느리하구 그것에 달린 올망졸망한 친손주가 셋이구 이제 말한 조카자식의 소생으루 에미없는 넛손주가 둘이구, 그렇소. 건 왜 묻소?》

이런 로인의 말은 중이 남의 일에 별참견을 다 한다는듯도 했다.

《댁에 그렇게 어린 자여손이 많으시다면 댁에서는 불일내로 향산의 어느 절이나 암자로 이사해가시는것이 좋겠습니다.》

《아니, 나더러 어떡하라구요?》

훈장은 로승의 말을 못 알아듣겠다는듯이 물었다.

《지금 어느분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마는 여기서 농사를 짓는것이 곧 왜적과 싸우는것이올시다. 실지 또 싸우면서 할 일이올시다. 더우기 가을이 성숙한 때는 그 곡식을 탐내는 왜적들과 크게 싸우게 될지도 모를것이올시다.》

이같이 시작한 서산대사의 말에 뜰안 사람들은 또 잠시 두선거렸다.

《옳지!》, 《일이 그렇게 될게로군.》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니까…》 서산대사는 말을 계속했다. 훈장로인뿐아니라 앞으로 놈들과 싸우게 되는 경우에 주체궂은 로약자들이 많은 집에서는 묘향산의 절이나 암자로 이사해갈것을 권했다. 오래지 않아서 묘향산의 중들은 거의다 이곳으로 나오게 되리라고 했다. 예전에는 묘향산에 절과 암자들이 많았다. 지금은 그렇게까지는 많지 않으나 아직도 피란민들이 거접할수 있는 절과 암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뿐아니라 여기서 이사해가는 사람들에게는 그곳 중들이 해온 농사를 대신 계속하도록 농토를 줄수도 있고 또 이곳에 가지고있는 식량만치는 그곳의 식량으로 바꾸어줄수도 있으리라고 했다.

《아니, 그게 정말이요?》

서산의 말이 끝나자 훈장늙은이는 또 이렇게 따져물었다.

《아니, 로장의 말씀이 빈말이라구 해서 묻는게 아니웨다. 그래만한 피란처를 궁리궁리하던차인데 욕거순풍(가고싶을 때 순풍이 분다는 뜻)으로 너무 맞차운 말씀이 돼서 되려 내 귀가 혹시 잘못되지나 않았나 해서 물은 말이웨다.》

그 말에 사람들은 웃었다. 《왜들 웃노?》 하듯이 웃는 사람들을 둘러보고 《좌우간 나를 두구 운을 뺀 말씀이니 나부터 떠날 차비를 하야갔소. 그럼 난 먼저 자리를 일어야갔소.》 하며 훈장은 일어섰다. 뜰안의 웃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우선 공론하는 자리에서 말썽군 하나가 없어지는것만으로도 씨원한 사람들은 한마디씩 했다.

《아주바니, 아주바니 바쁜 생각에 아이들을 잊어버리질랑은 마소.》

《정말 이번 일엔 손주아이들 덕을 입는줄이나 압소.》

그 로인의 등뒤에 이런 말을 던지기도 했다. 다시 조용해진 때 서산의 뒤에 서있던 법근이가 불쑥 이런 말을 했다.

《로약자들을 떠나보낸대두 여기가 성안에서 너무 가깝지 않을가요?》

《지금 그 말은 네 말이냐? 혹은 여기 계신분들의 말씀이냐?》

서산은 이렇게 물었다.

《너무 가깝다구들두 하구, 혹이는 가까와두 할수 없다구 하는이들두 있습니다.》

《가까와두 할수 없다는이들은 어차피 여기를 떠날 형편이 못되는분들일테지.》

《예, 그런이들두 있구요. 또 혹은 스님께서 여기다 자리를 정하시는것 같은데 지금 왜적이 들어있는 평양성에서 불과 십리밖에 안되는 여기서 어떻게 하실 료량인지 알수 없다는이들도 있습니다.》

《누가 그따위 소릴 해?》

지금까지 자리 한기슭에서 오고가는 말을 듣고만 있던 주복이가 불쑥 골을 올린듯 한 소리로 물었다.

《법근대사의 그 말은 아마 내가 한 말을 두구서 하는 말같쉐다.》

토지방밑에 역시 창대를 세워짚고 서있던 늙은 봉군이 한걸음 나서며 말했다.

《내 말은 이런 공론이 있기 전에두 나 혼자 짐작에 서산로장이 혹시나하는 생각이 없지두 않아서 일왈 그러자면 사람을 많이 뫄야 할게구 또 그러자면 아무래두 세월이 좀 걸려야 할텐데, 그렇게 일이 다되기 전에는 여기가 너무 발딱하구 앞이 밭을것 같애서 한 말이드랬소.》

《지금 그 말씀에도 일리가 없는바는 아니올시다. 그러나…》

이번에는 고충경이가 말을 시작했다. 그는 이때까지 새로 접은듯 한 흑갑사 갓끈을 한손으로 만지면서 여러 사람들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지금도 말씀들이 있었습니다만 왜적들은 필시 이곳으로도 로략질을 하러 올것이올시다. 그렇게 민간으로 다니며 략탈하는 도적들이 노리는것은 언제나 인축과 재물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없는 곳에는 재물도, 소나 돼지 같은 육축도 없을것이고- 그래서 략탈질하려는 적들은 구경 사람을 찾아다니게 될것이올시다. 그러니까 십리밖에 사람이 없으면 이십리밖으로, 이십리밖에도 략탈할것이 없으면 또 그 다음으로 이렇게 적들은 백리밖에라도 사람을 찾아나갈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혹시 우리가 백성들뒤에 숨어서 이 란시에 제 한목숨을 보전하기만 위주한다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다면 좀더 멀거나 가까운것이 별반 차가 없을것이고, 만일 그래도 더 멀리로 물러선다면 이곳에 막부득이 남아있는 사람들을 버리는셈밖에는 다른것이 없을것이올시다. 그러나 봉군 오장께서 근심하시는것도 일리가 있다고 한것은 만약에 우리가 우리 세력을 키우기 전에 혹시 왜적에게 한 병력으로 보인다든가 해서- 이곳이 단지 략탈질 할수 있는 한 부락이 아니고 군사를 일으켜 쳐야 할 곳으로 왜적이 알게 된다면 그때는 잠시 물러서는것도 한 방략일것이올시다. 그렇기때문에 지금 로약자들을 뒤로 피란시키는것은 지당한 조치올시다. 그래서 여기는 농사짓고 싸워야 할 때는 싸울수 있는 사람들만이 남아있게 되면 아직 우리 세력이 단약하더라도 멀고가까운것은 별반 개의할바가 아니올시다. 그러니까 우리는 역시 이곳에 있어야 할것이올시다.》

이러한 고충경의 말이 끝나자 그때까지 긴 눈섭을 드리우고 잠심해 듣던 서산은 빛나는 눈을 들어 고충경을 보면서 두손을 모아 합장하며 말했다.

《소승의 생각도 정히 그러하올시다.》

그러자 조용하던 뜰안은 문득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 말소리로 흥성거리고 떠들썩해졌다.

《옳쉐다.》

《이제야 됐소.》

《일이 그럴거 아니요!》

이같이 단마디 말을 웨치는가 하면 《왜적들이 십리안짝에 있대두 무서울거 없쉐다. 놈들이 그보다 더 가까운 모란봉에 있을 때두 사흘씩이나 쌀을 날라내지 않았소? 그때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일했소. 저것들이 모란봉까지 와가지구두 성안으루 들어설 생의를 못하는건 동대원싸움에서 우리 사람들한테 된서릴 맞아서 그런게라구…》

《또 그뿐인가요. 왜적들이 나는 재간이 없는 한해야 저희놈들이 십릴 오면 그동안에 우리두 십릴 갈수 있는데야 무슨 걱정인가 이런 생각두 했더랬소. 그런데야 여기가 가까와서 안될거 있소?》

이같이 긴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또 한편에서는 이같이 쑤군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가만보니 저 로승이 제속에 배포는 다 해가지구두 저 할 말을 꼭 남한테 시키구야마는 모양 아닌가?》

《그거야 아마 여러 사람의 의향을 들어보자는거갔지.》

《남의 속을 빼본다? 그러구보면 무서운 늙은이 아닌가!》

《자, 그만들 하구 이제는 앞으로 할 일들을 의논해봅시다.》

어떤 농군이 이런 말을 해서 좌석은 다시 조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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