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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9 회


29. 서산대사의 편지


밤은 깊었다.

먹통만 한 방안에서 몇번째나 심지를 돋구고 기름을 치기도 한 가물거리는 등잔불아래서 로승 서산은 자기 바랑속에 지니고 다니던 조그마한 손벼루에서 먹을 찍어가며 무릎우에 펴놓은 종이에 붓방아를 찧고있었다. 자기 제자들에게 편지를 쓰는중이였다.

서산대사는 각처에 많은 법제자와 법손들이 있었다. 금강산 표훈사에 있는 사명대사, 전라도 지리산의 처영대사, 충청도 공주의 령규대사, 경상도진주의 해안대사, 황해도 구월산의 의엄대사, 이들은 서산의 수다한 제자들중에도 수제자들이였다. 이들 역시 많은 자기네의 제자들을 거느린 대덕(넓고 큰 인덕을 가졌다는 뜻)들이였다. 서산은 지금 그들에게 보낼 편지의 글을 초잡고있었다.

서산대사가 전국 승려들에게 승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격멸하는 전선으로 나서라는 격문을 발표한것은 이 이후의 일이다. 그것은 그가 왕의 부름을 받아 의주에 가서 8도 16종 도총섭(조선팔도 승려군의 총사령)으로 임명된 후에 각 도에 있는 선교종 총섭들에게 승병을 일으키라는 지령을 내린 정식문건이였다. 그 격문이 왕의 허락을 얻어서 발표한 공문서였다면 지금 초하는 편지는 한낱 그의 사신에 지나지 않는것이였다.

그 길지 않은 한장의 편지를 초잡는데 서산은 벌써 몇장째나 종이를 갈았다. 썼다가는 다시 쓰고 하면서 밤깊도록 붓방아를 찧는중이였다. 그만치 그는 고심해야 했던것이다.

우선 그는 지난 열하루날 자기가 평양으로 나온이래 3~4일동안에 지낸 사실들을 간단히 서술했다. 다음에 그는 행여 자기를 도와줄 승려들이 나서준다면 (그는 여기서 자기가 너무 늙었다는것을 자탄했다.) 지금 형편으로는 황페되고말 념려가 십분 있는 보통벌의 농사를 계속할 심산이라고 썼다.

어제 밤, 영명사앞에서 들었던 이 동네의 농군 머사니의 말소리를 다시금 귀가에 느끼면서 여기까지 쓴 그는 더 붓이 안 나가는 모양으로 붓을 든 손을 무릎우에 얹고 앉아서 눈을 감았다.

지금 그가 들어있는 먹통만 한 방 문밖에서는 잠든 사람들의 숨소리가 들린다. 이 집 안채의 큰방은 물론 안뜰과 바깥마당에서까지도 한지잠을 자는 피란민들이 많았다. 장정들은 성내로 쌀을 나르러 가고 지금 이 마을에서 자는 사람들은 거의가 다 로약자들뿐이였다. 바로 토지방밑에서는 꿈속에서도 울분하게 부르짖거나 탄식하는 늙은이들의 잠꼬대가 들리기도 하고 혹은 달라붙는 모기떼에 시달리면서 어머니의 젖가슴으로 파고드는 어린것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서산은 자기가 생각해온바를 그대로 밝힐수 있는 문구를 생각하며 또 붓을 세웠다. 그러나 이 한낱 중의 사신이 그 먼데까지 무사히 가게나 될는지? 하는 의구로써 그의 붓은 다시금 떠듬었다.

이 잡약산에서 지리산이나 진주까지는 퍽 멀다멀뿐아니라 미상불 왜적의 전선을 여러번 돌파해서야 갈수 있는 길이다. 아무리 산길을 평지로 알고 살아온 중들이라도 힘든 길이 아닐수 없다. 도중에서 놈들에게 붙들릴 념려도 없지 않다. 그뿐아니라 잘못되면 우리 편의 관료들에게 붙들리게 되는 경우도 없지 않을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서산은 다시 붓을 누이고 앉았다가 문밖에 세워두었던 지팽이를 더듬어들고 나섰다.

뜰에 내려선 서산은 가로세로 누워있는 사람들사이를 아로새기듯이 골라짚으며 지팽이를 앞세우고 마당으로 나갔다.

달이 휘영청 밝았다. 달빛아래 잠들어있는 로약자들중에는 낯이 익은 장난꾸러기들의 얼굴들을 알아볼수도 있었다. 지팽이를 멈추고 이윽히 굽어보는 어린 장난꾸러기들은 서산이 오늘 이 잡약산근처의 지형을 살필겸 단방초약으로 쓸수 있는 풀잎을 뜯거나 뿌리를 캐기도 하면서 두루 뒤산을 다니던중에 사귀게 된 아이들이였다.

칠성이와 작은칠성이랑 이 동네애들과 함께 로승을 따라다니던 그애들에게는 그 로승이 수염대신으로 기른듯 한 흰 눈섭만으로도 한 구경거리가 아닐수 없었다. 그뿐아니라 저희 어른들이 말하는 그 로승의 이야기를 들었던 애들은 시끄럽지 않게 따라다니면서 로승이 하는양을 보아가며 저희들이 뜯은 풀을 쓸것이냐 못 쓸것이냐 묻기도 했다.

한번은 서산이 그애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 산에는 좋은 약초가 많구나. 참 좋은 산이다.》

별뜻이 없이 이런 말을 했던 서산은 오히려 놀랐다. 어른들로서는 그 까닭을 알수 없을만치 애들은 기뻐했다. 《오만!》, 《할우반!》을 부르며 동네로 달려간 애들은 《우리 산이 좋은 산이래!》 하며 호미와 다래끼들을 가지고 로승을 따라 약초를 캐기 시작했다. 서산으로서는 더욱 놀라운 일이 있었다. 누가 그애들에게 일러주었던가. 애들은 약초를 캐던 숲속에서 혹시 도마뱀을 만나면 그 독없는 도마뱀은 우리 조선뱀이라고 하면서 길을 비켜주고 독사나 늘메기 같은 독이 있고 징그러운 뱀을 만나면 《왜놈의 뱀》이라고 하면서 기어이 때려죽이고야마는것이였다. 물론 어린애들의 생각이고 말이다. 그러나 이 어린애들까지도 왜적을 독사같이 미워하고 때려죽이고저 하는것이다.

이 얼마나 귀엽고 소명한 장난꾸러기들이냐! 하며 혼자 웃기도 한 서산 로승은 나는 이런 락을 모르고 살아왔구나 하는 감회가 나기도 했다. 그러나 유구한 력사를 가진 이 조국땅에는 아득한 옛날부터 그런 락이 있었고 지금도 있고 또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것이다. 그뿐아니라 영원히 있도록 해야 할것이다.

애들이 장난에 취해서 노는것을 보면 지금이 란시가 아니였다. 또 지금 장난에 지친 이것들이 한지에서나마 숨소리 고르롭게 잠든것을 보면 역시 란시같지 않다. 이 어린것들의 고르로운 숨소리가 조국의 호흡이라고도 할수 있지 않은가! 잠결에도 그애들의 이불을 당겨 덮어주는 어머니들의 손길이 바로 조국의 손길이 아니겠는가! 어린 자손들을 앞에 놓고 함함락락히 웃는 늙은이들의 웃음이 조국의 자애가 아니겠는가! 어린것들에게 빨리는 녀인들의 젖줄기가 조국의 생명이라고도 할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거늘 저 왜적아수라들은 우리 조국의 성시와 촌락을 략탈방화하고 자애로운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을 죽이고 젖줄로써 자기 생명을 어린것들에게 이어주는 어머니들을 릉욕하고 그 어머니들의 품속에서 어린것들을 빼앗아 창날에 꿰여 불속에 던진다. 지금 우리 조국은 피를 흘리고 통곡하는것이다.

참을수 있으랴. 차마 보고만 있으랴. 어찌 통곡만 하고있으랴. 우리 조국강산을 피로 물들이는 왜적아수라들을 쳐물리치기 위해서는 필요하다면 우리도 아수라가 되기를 사양치 않을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도 왜적이 피를 흘리게 함으로써 보복해야 할것이다. 왜적아수라들로 하여금 우리의 피를 더는 흘리지 못하게 하며 우리 조국땅에서 물러서지 않을수 없도록 징치하는데는 그러한 보복 이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기 위해서는 이 나라의 모든 사람들은 창과 칼을 들고 혹은 낫과 도끼를 들고 일어서야 할것이다. 산속의 중들까지도 석장(불교에서 중이 짚는 지팽이)을 창과 칼로 벼려들고 나서야 할것이다. 범종(절에 걸어두는 종)까지도 창과 칼이 되여야 할것이다. 저 왜적아수라들을 물리치지 않고는 부처가 앉을 련화대가 남긴들 하며 범종은 누구를 위해서 울릴것인가.

깊은 밤은 고요했다. 밖은 달빛에 이슬방울이 빛나는 풀잎새 하나 까딱하지 않게 만뢰가 구적(사위가 아주 잠잠하고 조용한것)했다. 그러나 사람을 전률케 하는 폭풍전야의 정적이 아닐수 없는것이다. 금수산 모란봉쪽에서 아련하게나마 간간이 들려오는 놈들의 조총소리로써 더욱 그렇다.

자기 처소로 돌아온 서산은 다시 붓을 들었다. 그는 짤막한 한구절을 썼다. 그 내용으로 보나 문장으로 보나 앞에 쓴것과는 맥락이 안 닿을만치 동뜬 말로써 비약시켰다. 즉 《어진 중생들을 위해서라면 살생도 살생이 아니라 오히려 불보살의 자비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끝낸 편지끝에는 또 다음과 같은 시 한수를 적었을뿐이였다.


나라를 사랑하고 사직을 근심함에

산속의 중이라고 다를바있으랴


지금 서산이 초한 사신에 이같이 문맥이 안 닿게 동이 뜬데는 까닭이 있었다.

본시부터 탐관오리들로서 민심을 잃어왔고 또 이번에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저 먼저 도망해서 여지없이 위신이 저락된 수령방백이라는 지방관료들중에는 자기 지방에서 농민들을 불러일으켜 왜적과 싸움으로써 많은 공을 세우고 명성이 높아진 의병장들을 시기하여 역적으로 모함한 례들도 적지 않았다. 그 실례로는 우선 《홍의장군》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곽재우를 들수 있다. 홍의장군 곽재우는 왜적이 부산에 상륙한지 불과 십일이 되는 날인 4월 22일에 누구보다도 먼저 의병을 일으킨 사람이였다. 경상도 의령의 자기 고향에서 심대승이와 함께 농민들을 불러일으켜 싸우기 시작한 그는 자기 고을의 관료들이 버리고 도망한 초계창의 쌀을 터쳐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고 의병의 군량으로 쓰기도 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관료들은 곽재우의 그런 조치를 반역적폭동으로 모함했던것이다.

또 곽재우장군에 뒤이어 충청도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유생 조헌이 역시 그러한 박해를 받았다. 조헌이 의병장으로 나서서 격문을 돌리자 많은 백성들이 따라 일어나고 그의 명성이 높아가는것을 시기한 관료들(이런자들은 더러워서 그 이름들을 여기에 적지 않는다.)은 조헌의 휘하에 집결한 의병들의 부모와 처자들을 잡아가둠으로써 그의 기의를 방해했던것이다. 일일이 다 말하지는 않으나 이러한 사실을 캐보면 적지 않다. 그러니만치 하물며 당시의 신분제도로서 천민이하의 천민인 중들이 왕의 명령이나 조정의 허락이 없이 자의로써 기의니, 승병이니 하는것을 관료들이 안다면 그것은 시기모함여부가 없이 왜적과 싸우기 위한 기의가 아니라 역적도모를 위한 승병으로 뒤집어 잡혀서 불문곡직하고 처단될 념려도 없지 않았다. 즉 서산의 사신에 기의니, 승병이니 하는 문구가 있어 만일 그것이 관료들의 손에 들어간다면 자기 제자들은 승병을 일으키기도 전에 큰 죄명을 쓰게 될지도 모를 일이였다. 지금 쓴 편지에 동이 안 닿는것은 그때문이였다.

다시 등잔심지를 돋군 서산은 초잡은 글로써 여러장의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비록 짧은 글이나 읽는 제자들이 자기의 뜻하는바와 결심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념원으로써 힘을 줄 획에는 힘을 주고 날카롭게 뽑을데는 날카롭게 붓을 달렸다. 글로써 다 말할수 없는 자기 의사를 글자의 표정으로써 알리려는 노력이 있었다.

과연 그같이 정중하고도 분방하게 달리는 붓끝에서 흘러나온 자획에는 서산의 기백이 약동했다. 그 편지는 그후에 발표한 격문보다 앞서서 전국에 승병을 일으키게 한 직접적인 동기가 되였다. 자기네 스님의 편지를 받은 서산의 수제자들은 자기 관하의 승려들을 거느리고 왜적아수라들을 소탕하는 전민족적전선으로 나섰던것이였다. 지리산에서 천여명의 승병을 일으킨 처영대사는 권률장군휘하의 관군과 협동작전을 하고 충청도에서 7백~8백명의 승병을 일으킨 령규대사는 앞서 말한 조헌의 농민의병과 함께 싸웠다.

이때 금강산에 있었던 사명대사는 손에 촌철(작고 날카로운 쇠붙이나 무기)이 없이 오직 그의 당당한 풍채와 헌헌한 기백으로써 백여명의 왜적을 물리친적이 있었다. 때마침 어느 암자에 가있던 사명은 표훈사가 강점되였다는 소식을 듣자 곧 단신으로 적진중에 들어갔다. 표훈사 법당앞에서 창검을 늘어세우고 중들을 결박해놓고 절의 보물을 내라고 강박하던 백여명의 왜놈들은 살벌한 자기네 진중으로 조금도 서슴없이 완완히 걸어들어오는 한 중의 그 호담한 태도와 당당한 풍모에 우선 기가 눌렸다. 법당으로 들어가 사명은 불상앞에 엄연히 좌정하고 앉아서 붓을 들어 썼다.

《우리 조선승려들에게는 자기 손으로 뜯어먹는 향기로운 산채와 자기 손으로 움켜마시는 맑은 석간수만이 유일한 보배일뿐 너희 같은 속인들이 탐낼만 한 보물은 없다.》

그리고 그는 또 썼다.

《이 청정법계는 너희 같은 병마의 발로써 더럽힐데가 아니다. 속히 물러가라.》

이러한 사명대사의 기백에 눌리운 놈들은 더 강박하지 못하고 《이 절에는 한 괴걸한 중이 있다.》는 글발을 절문간에 써붙이고 물러가고말았던것이다.

사명대사는 그 얼마후에 서산의 편지를 받았다. 금강산 여러 절의 중들을 모아놓고 서산의 편지를 읽은 사명은 탁자를 치고 한번 통곡했다. 그리고 나라를 위하여, 조국의 중생을 위하여 왜적아수라와 싸울 충성심이 있는 승려들은 자기를 따라나서라고 호소했다. 드디여 칠백여명의 건장한 중들을 거느린 사명대사는 평양을 향하여 떠났다. 미처 병장기를 마련할 겨를이 없었던 그들은 몽둥이만을 가지고도 적과 싸우고 적의 전선을 돌파하면서 서산을 찾아 이곳으로 달려왔던것이다. 그것은 물론 이후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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