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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8 회


28. 사창고앞에서


달이 휘영청 밝았다.

환히 열려있는 사창고 문앞에 무드기 쌓인 무명과 명주필우에 올라앉은 주복이는 옆에 놓인 큰 버주기에서 길게 늘어나는 검은 엿을 뜯어넣고 첩첩 씹으면서 《그래서.》 하고 차돌이의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 엿버주기는 어떤 촌사람이 어느 빈집에 들어갔더니 있더라고 하면서 이번 일에 수고하는 주복이랑 먹으라고 가져다준것이였다. 차돌이 역시 무명필에 걸터앉아 엿을 먹으며 말했다.

《더 그래서 할게 뭐 있나요? 그리구는 다지요.》

차돌이의 이야기는 이상 더 들어보잘것도 없이 이렇게 끝났다. 마주 앉은 두사람은 한동안 엿만 먹고있었다. 이때는 창으로 모여드는 사람이 없었다.

일본군이 대동강을 건느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성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일시 끊어진 때였다. 텅 빈 거리에는 달빛만이 가득찬듯 했다. 달이 밝을수록 그림자가 더욱 짙은 버드나무밑에는 간혹 발걸음소리도 없이 지나가는 고양이들의 파란 눈동자가 보일뿐이였다.

《그때 내 눈으루 다 봤는데두 속으루는 지금두 행여나 살아서 턱턱 찾아들 오지나 않나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이윽히 달을 쳐다보던 차돌이는 문득 이런 말을 했다. 더 할 이야기는 없지만 마음에 그득한 감회는 넘치는듯 한 말이였다.

《누가?》

《누구긴 누구야요, 갑손이랑… 지금두 눈에 선한 사람들 말이요.》

퍽 둔총스럽게 들리기도 하는 전주복이의 물음에 차돌이는 좀 발끈한 투로 대답했다.

《임욱경인 아마 살아올 생각은 안했을걸- 갑손이는 몰라두.》

《임욱경인 별사람인가요? 임별장뿐아니라 천하없는 사람이라두 살아올 맘이 없는 사람이 어데 있단 말이요.》

《너 임욱경일 잘 아니?》

《그저 그때 한번 본것뿐이요.》

《그러면서 뭘…》

《그럼 전서방은 임욱경의 속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아우?》

《나? 나야 그저 알지.》

《그저 알다니, 어떻게요?》

《뭐이 어떻게야. 그렇게라두 생각해야 내 속이 좀 편하니 그렇지.》

《그러다보니 전서방이 좀 싱겁댔군.》

《네 속은 상게두 예리다. 하긴 지금 한창 그렇갔다.》

《그렇긴 뭐이 그래요?》

《너 지금 자꾸 맘이 싱숭생숭하지.》

《싱숭생숭은 왜 해요?》

《말말아. 나두 총각적에 옆집 체니가 내 맘에는 그득한데두 말을 안 들어줄 땐 가을바람만 불어두 눈물이 쑥쑥 나게 처량하더라.》

《하! 그러다보니 전서방이 음흉두 하댔네.》

《남의 큰애기하구 밸 탔는지, 남의 큰애기 밸 탔는지두 모를 총각놈은 말구 내가 음흉해?》

《그따위 소리하면 나 성내요. 난 괜찮아두…》

이렇게 하던 말을 도로 삼키듯 한 차돌이는 앞에 늘어진 버들잎을 하나 따서 풀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밝은 달빛이라 그런지 무척 청아하게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또 지금 그의 심정탓인지 애절한 가락이기도 했다.

《하! 제법인데. 뉘 집 큰애기 바람낼만 하다.》

《에이, 여보.》

주복이의 말에 차돌이는 눈을 흘기였다.

《너두 무던하다. 해두 풀피리는 정말 법근이가 잘 분단다.》

《그래요? 거 또…》

《그만하면 너두 괴짜다. 그래서 뉘 집 큰애기가 반한거 아니가?》

《그따위 소리 자꾸 하면 나 정말 성내요.》

다시는 풀피리를 안 불듯이 버들잎을 뱉아버린 차돌이는 주복이의 시룽거리는 말이 더는 듣기 싫은 모양으로 성큼 일어나서 옆에 있는 로적낟가리로 뛰여올라갔다. 큰 거리 한가운데 조산(쌓아서 만든 산)같이 치쌓은 벼섬꼭대기에 올라간 차돌이는 푸른 달빛에 젖은듯이 서서 대동강쪽을 바라보고있었다.

《그러다가 갑손아! 갑손아! 찾지 말아.》

아래서 쳐다보던 주복이는 이런 말을 했다. 이때까지 갑손이의 이야기를 목이 메게 해온 차돌이가 사실 그럴것 같기도 했다. 저 역시 문득문득 《임욱경이!》 하고 입밖에 내서 중얼거리게 되는 주복이는 다시 못 찾아보고 가더라도 전해달라더라는 임욱경의 말에 금시 또 뭉클해지기도 했다. 그럴수록 주복이는 또 실없는 말을 해야 했다.

《그러다 괜히 또 큰애기를 찾지 말아. 남이 들으면 얌전한 총각 미쳤다구 할라.》

《내 그놈네 집엘 가볼테요.》

차돌이는 이렇게 동문서답투로 말하며 내려왔다.

《김순량인가- 그놈네 장독이 성했으면 좋갔네. 내 손으루 짓부셔놓게.》

《그놈네 장독이라구 그냥 뒀을래던? 그 소금장사가 벌써 다 하늘루 올려보냈지.》

《정말 그 돈서방인가 하는 소금장사는 왜 남의 장독하구는 그렇게 해본답디까. 처음에는 여기 쌀을 져가러 왔다가 영명사 젊은 중들이 그런다는 말을 듣구는 쌀두 그만두구 나섰다지 않소. 소금장사는 아마 남의 장독하구는 무슨 상극인 모양이요.》

《그럼 너두 소금장사가? 남의 장독을 부수러 간다니.》

《나야 갑손이 생각에 화가 나서 그러지 않소.》

《모르긴 해두 돈서방두 화김에 그런지두 모르지. 잔뜩 증이 났던김인데 좀 좋아! 와랑저랑 짓부시기가… 그런데다 또 고충경인가 하는 활량이 와서 보구는 그렇게 하면 왜놈들이 이제 장독대를 쩔쩔 핥게 될게라구 하는 말에 더 신바람이 났지.》

《그럼 전서방두 화김에 시작한 일이요?》

《모르지.》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차돌이는 참말 김순량이네 집을 찾아가는지 저편 큰 거리로 갔다. 얼마후에 또 패를 지어온 수십명 중들이 쌀과 무명필을 날라갔다. 그들과 함께 여느 사람들도 십여명 따라왔다. 사람들이 또 모여들기 시작했다.

《텁석부리 욕심꾸러기라더니 정말 이 아주바니가 꽤 부지런히 나릅네다.》

《힘이 없어 더 못 지네. 젊었을 때 같으면야 이만만 하겠나.》

주복이의 말에 이렇게 대답하는것은 늙은 가마구비봉군 오장이였다.

《어데 가까운데루 날라다두는데가 있소?》

《잡약산동네루 나르네.》

《그 동네루 무던히들 모인다.》

《그럴밖에 안 있나. 일왈 가깝구 또 여기 성문이랑 보통벌이 빤히 건너다뵈서 왜적들이 출몰하는걸 잘 볼수 있거던. 그런데 마침 조용한 짬이니 하나 물어보갔네.》

지금은 벙거지만을 쓰고 창대는 작시미삼아 짚으며 쌀섬을 져내온 늙은 봉군은 짐을 다시 문밖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도대체 이 일이 어떻게 시작된건가? 처음에 서산대사가 뭐라구 하던가?》

《나보구는 뭐라구 하지 않았소.》

《그럼 법근이보구는 뭐라구 했다던가?》

《글쎄요. 법근이보구두 별말 한건 없나봅데다.》

《그래두 그 대사가 시켜서 하는 일이라면서?》

《그건 그래요.》

《어떻게 들어야 할 말인지 모르갔네.》

《모르시갔소? 하기는 우리두 일이 이렇게 크게 벌어질줄은 몰랐소.》

늙은 봉군과 주복이가 주고받는 말이 딴은 이렇게 선문답 비슷하게 되였다.


새벽부터 칠성문쪽으로 쓸어나오기 시작한 피란민들을 저의 집 뜰앞에 나서서 보고있던 주복이앞에 씨근거리며 법근이가 나타났다.

《주복아, 너 이런 때 한번 큰 날파람을 안해보겠니?》

《…》

주복이는 무슨 소린가 하기보다도 무슨 한가한 실없는 소리를! 하는 모양으로 법근이를 쳐다만 보았다.

《이런 때 우리가 한번 평양성안의 주인노릇을 해보잔 말이다.》

흥분한 법근이는 또 이런 말을 했다.

《뭐인가 하면 사창고문을 터쳐놓구 거기 있는 쌀을 이 사람들에게 다 풀어멕이자는 말이다.》

《사창고쌀을 우리가 풀어멕이다니?!》

주복이는 더 알수 없는 말이라는듯 했다.

《금방 우리 서산스님을 만났는데 스님말씀이 나더러 너하구 같이 사창고를 터쳐놓으래는거야.》

《그건 왜?》

주복이는 더욱 모를 일이라는듯 했다.

《자, 이런! 답답하게… 서산스님말씀이…》

뒤더수기로 손이 가기까지 하는 법근이는 마치 귀먼 사람과 맞선듯이 한마디씩 잘라하는 투로 말했다.

《일왈 사창고를 터쳐놓구는 말이야…》

법근이는 하던 말을 또 끊어야 했다.

주복이의 아버지, 어머니가 나왔다. 법근이가 사창고를 터치고 어쩌고 하는 말에 놀랜 두 늙은이는 그 이야기를 듣자기보다도 《그 무슨 큰일날 소리를 하는가?》 해서 된 소리건 안된 소리건 그런 이야기를 할테면 좌우간 남이나 안 듣게 집안에 들어와서 조용조용히나 하라는것이였다.

《아주바니- 우리 서산스님이 말이요. …》

안뜰로 들어온 법근이가 이번에는 주복이 아버지에게 우선 말해야 했다. 서산대사가 사창고를 터치라는것은 알기 쉽게 말해서 어제 밤에 동대원싸움에 나갔던 우리 군사들중에는 저의 집에 나인하고 어린아이들만 잔뜩 있는 보통벌머사니라는 사람이 있는데 우선 그런 사람네가 시재 굶지 않도록 사창고쌀을 주도록 하자는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뭘, 우리가 그 쌀을 평양사람들한테 풀어멕이구말구 한단 말인가.》

이번에도 역시 주복이가 물었다.

《너 그건 모르는 소리다. 서산스님말씀대루 머사니네 집에 쌀을 줄라구 사창문을 열어만 봐라. 지금 저렇게 모두 빈손만 들구 떠나는 사람들이 다 와서 가져가게 되지 않나. 그러게 우리 스님말씀이 이건 자신의 의사만이 아니라 온 평양사람이 그랬으면 하는것이라구까지두 말씀하시더라.》

이런 법근이의 말에 머리를 끄덕인 주복이는 《그렇다면 알겠다. 해볼만 한 일이다.》 하며 먼저 일어섰다.

《알갔네? 이젠 또 다른 일두 있다.》

따라일어서는 법근이는 또 이런 말을 했다.

《뭐이가? 할만 한 일이면 하자꾸나.》

주복이에게 늙은이들앞에서 그럴것 없다는듯 한 눈치를 보인 법근이는 《그 큰 쇠를 깨뜨릴래면 도끼 같은걸 가지구 가야 하지 않을가?》 할뿐이였다.

《손으루 비틀다 안되면 돌로 치자꾸나.》

이같이 의논이 맞아서 두 젊은이는 나섰다. 그러나 두 늙은이는 큰일날 일이라고 주복이를 붙들었다. 우선 그런 일은 무법천지의 란민들이나 할짓이라고 했다. 그보다도 피란을 가느냐 마느냐, 가면 어데로 가느냐 하는 집안일도 아직 작정이 안됐다. 작정은 고사하고 의논답게 말도 해보지 못했다. 주복이가 심술을 부리듯이 드럭드럭 화만 냈기때문이였다.

《피란은 무슨 피란! 다 죽구맙세다가레.》 하는가 하면 또 피란을 갈 바에는 이꼴저꼴 다 안 보게 두메산골로 아주 가자고 하기도 했다. 이때의 주복이는 저로서도 제 맘의 갈피를 잡을수 없었던것이다. 세상에 더없이 귀하고 아껴온 무엇이 깨진것만 같았다.

왜군이 성안에 들어온다면 바로 그 문밖인 이 집에서는 물론 살수 없을것이고- 그렇다고 이미 농사를 지어놓은 보통벌의 농터를 버리고 멀리 떠나가서는 더욱 못살것이고- 그러니까 보통벌건너 어느 산속에다 움막이라도 틀고 배겨있으면서 지어온 농사를 거두도록 해보자는 늙은 부모의 말이 마치 《비록 깨졌더라도 파기상종으로 살림을 아주 버릴수는 없다.》고 하는 말이라면 주복이의 말은 《깨진바에는 마자 부시고말자.》는것 같기도 했다. 너무 소중히 여겨온것이기때문이였다.

그뿐아니라 목전에 송두리채 쓸어나오는 성안사람들을 보면 알뜰한 살림이 깨진것은 자기네만도 아니였다. 아니, 그렇다기만 보다도 평양이라는 한 성을 통채로 기울여 쏟아버리듯 하는 이통에는 안 깨질것이 없다고도 생각되였다. 이런 처지에 안 깨질수도 없고 그래서 이미 깨지기도 한 그릇을 소중히 들고 돌아간다는것은 우습강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웃을수는 더우기 없었다. 더욱더 화만 났다.

집안에서는 어머니, 아버지와 안해가 세간을 정리하고 짐을 꾸리노라기에 분주했다. 그러나 저만은 그런 일이 손에 안 걸려서 밖으로 나가 칠성문쪽으로 쓸어나오는 피란민들을 구경이라도 하듯이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기도 하던 주복이는 어떤 사람이 지고 오던 짐바가 끊어져서 저의 마당귀에 짐짝을 내려놓고 난처해하는것을 보자 집으로 달려들어가서 헛간기둥에 걸어두었던 새 자락바를 내다가 던져주었다. 그러자 또 큰 보따리를 이고 어린것의 손목을 잡고 나오던 한 녀인이 더는 못 걷겠다고 우는 모양인 어린것을 띠개도 없이 맨손으로 업는것을 보고는 바자길에 바래널었던 무명필을 걷어서 내버리듯이 던져주었다. 뜻밖에 저희앞에 떨어지는 바와 무명필을 집어든 그들이 웬 영문인지를 몰라서 쳐다볼 때 주복이는 오히려 화를 냈다.

《어서들 지구 업구 가라구요.》

주복이는 실로 어서 보기 싫다는듯이 버럭 고함을 지르기까지 했다. 아닌게 아니라 이때의 주복이의 눈에는 피발이 선듯도 했다. 바로 이런 때에 찾아온 법근이가 한번 《큰 날파람》을 해보자는것이였다. 주복이는 그런 일이라도 하면 답답한 제 속이 좀 풀릴것도 같았다. 늙은 어머니,아버지가 붙드는것이 성가신 그는 없어도 된다고 했던 도끼까지도 집어들고 나섰다. 그러나 몇걸음 안 가서 《아버지두 소가지구 가서 쌀섬이나 실어오두룩 하시소.》 하며 도끼는 마당에 내던지고 칠성문으로 들어갔던것이다.

사창고앞으로 지나가던 피란민들은 황황한중에도 잠시 걸음을 멈추지 않을수 없었다. 육중한 관창문 쇠빗장고리에 채워놓은 강아지만 한 수쇠자물쇠를 매돌 같은 돌로 내려치는 소리가 우선 요란스러웠다. 처음에는 모두 《란민》, 《폭도》들의 《략탈》이라는 생각에 겁들을 먹었다. 그러나 하나는 농사군씨름군인 전주복이고 하나는 돌중이지만 그 역시 잘 아는 법근이라는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안심하고 가까이 가서 구경까지 하게 되였다. 일전에 행궁앞에서 검으로 창대를 잘라서 사람들을 웃긴 법근이와 량반 하나를 공중배지기를 들어서 평양사람들로 하여금 쾌재를 부르게 했던 전주복이는 더 유명해지기도 했으려니와 《쇠주머구》와 《승검술》은 사람들이 마치 큰 장난꾸러기아이들이나 같이 귀엽게 부르는 이름들이기도 했다. 그러한 전주복이와 법근이가 사창고의 문을 깨뜨리는것은 결코 저희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것이 아니라는것을 사람들은 용이히 믿을수 있었다.

한번 만인의 의사와 의분을 몸소 행동으로 보여준 이 두 젊은이는 평 양사람들에게는 이미 공인으로 인정되였던것이다.

《낮에는 그 늙은 대사가 산에 올라가서 약초를 뜯었는데…》

이번에는 늙은 봉군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옳지! 그전에 또 우스운 일이 하나 있었군. 머사니인가 하는 사람네 집에 쌀을 가져가지 않았겠나. 헛간두 없어서 우선 뜰안에다 몇십석 쌀을 쌓았는데 처음에는 그 집 댁네가 울더라네. 그 다음에는 어른아이 할것없이 인간수대루 나와서 하루종일 쌀섬을 타구 올라가 앉아있네그려. 다섯씩이나 올망졸망한것들을 데리구 쌀섬에 올라앉아있는 그 댁네는 말할것두 없구, 병아리새끼들같이 쌀알을 후벼내서 먹어두 보구 캐득거리구 하는 어린것들까지두 얼마나 대견하면 저럴가! 해서 보구들 있는데 떡돌에 앉아서 조는듯 하던 그 대사가 그 모양을 보구는 합장하구 머리를 숙이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지 않겠나! 그러지 않아두 맘들이 다 예려진 판인데 나부터두 덩달아 눈물이 난단 말이야. 나뿐인가, 거기 있던 사람들은 다 울었지. 그 늙은 중이 그렇게 사람을 울리거던!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래 그 대사가 지금 어데 있습디까?》

《그두 또 웃을만 한 일이야. 머사니댁네가 하두 고마와서 저의 건넌방을 치울테니 다문 얼마라두 와있어서 신셀 갚게 해달라구 간청을 하는데두 고집불통하구 종시 빈집으로 갔다구 사람들이 웃데.》

《왜요?》

《아마 과부네 집이 돼서 그런게라구.》

《그런지두 모르지요.》

《그렇게 사람이 꼬장꼬장해서야…》

《꼬장꼬장해서 안된거 있소?》

《아니, 내 말은 그 대사가 말일세. 이렇게 띄워놓구 생각하면 이 란시에 한 인물같기두 한데- 마주앉아보면 사람이 너무 맑지구 담해보이기만 해서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을 다 거느릴것 같지가 않아서 하는 말이지.》

《너무 점잖아서 말이요?》

《그렇지, 말하자면…》

《그 대사가 하더라는 점잖은 말 하나 더 들어보실라우? 할수만 있으면 이 군량을 다 날라내서 성안에 들어온 왜놈들이 보돌을 핥게 했으면 좋겠다구 했답디다.》

《그 대사가? 누가 그러던가?》

《머사니네 집으루 쌀지구 갔던 중들이 성안사람들이 다 쌀을 져내기 시작했다구 말했더니 그러더랍니다.》

《그러다보니 그 로승이 손자의 병법두 아는 모양일세그려.》

《그런 병법에는 왜놈 보돌핥이는 법두 있소?》

《그런건 없지만- 지장은 무식어적식이라- 남의 나라루 쳐들어간 군사는 저의 나라의 군량을 가져가지 않고 쳐들어간 그곳의 곡식을 먹도록 해야 한다구 했으니 이 편에서는 우리 곡식을 왜적들이 못 먹게 하는것두 병법에 맞는 일이거던.》

《그따위 힘든 문자보다는 왜놈들에게 장독대랑 보돌을 핥이자는 말이 더 낫쉐다.》

《말은 같은 말인데 그건 육담이지.》

《육담이라니, 쌍소리란 말이요?》

주복이는 자못 못마땅한듯이 말했다. 실상 그 말은 주복이 자기의 말이였다. 왜적들이 이제 장독대를 핥게 되리라는 고충경의 말을 본따서 한 제 말이지만 자기로서도 재미있게 들리는 그 말에 다 말하자면 권위를 붙이기 위해서 서산대사가 한 말이라고 선전을 하는셈이였다.

주복이와 늙은 봉군이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얘야!》 하며 주복이 아버지가 가까이 왔다.

《박참봉댁에서 사람이 또 왔구나.》

《누가요? 또 빚 채근합디까?》

물으며 앞을 둘러보던 주복이는 곧 알아볼수 있었다. 로적낟가리밑에 세워둔 저의 황소옆에 전날 빚채근을 왔던 노랑수염이 서있었다.

《저 사람 말이 우리는 시재 없는줄 아니 그저 우리 소루 여기 쌀을 한바리나 두바리쯤 박참봉댁으로 날라다달라구 하누나.》

이런 아버지의 말에 《여기 쌀이라니요?》 하고 주복이는 되물었다.

《그리 멀지두 않댄다, 북촌 좀 못미처라는데…》

먼저 이런 말을 내놓은 아버지가 《여기 쌀루 두행부 못하갔으면 한바리라두 좋으니, 그렇게 하면 우리가 진 빚을…》 할 때 주복이는 다 들을것도 없다는듯이 아버지의 말을 막았다.

《이 쌀루요? 안돼요.》

《아니, 이 사람아, 안될 일이 뭐란 말인가?》

노랑수염이 직접 나섰다.

《님자가 애초부터 그 빚을 안 갚을 심사라면 몰라두 그렇지 않으문야 좀 좋은가? 이왕 터친 이 쌀루 님자네 소품만 내면 그 빚을 다 벗을수 있는데 안된다는 소린 웬 소린가?》

《누굴 도적놈을 만들지 못해 그러우?》

주복이는 노랑수염을 흘겨보며 이런 말을 했다.

《어째 도적놈이야?》

《그만한 경우두 모르우? 나라쌀 가지구 내 빚 갚으면 내가 도적놈이지 뭐요.》

이런 주복의 말에 《아니, 이 사람이…》 하던 노랑수염은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다 안 나온다는듯이 주복이를 흘겨보았다.

《누가 모르는줄 알구 그따위 수작인가?》

그리고 다시 말을 살렸다.

《이 사창을 제손으루 터쳐놓구 주인인척, 젠체하구 나앉아서 뭇놈한테 어서 가져가라, 실어가라 하구 퍼주는 놈은 어떤 놈이야. 누가 모르는줄 아나? 박참봉나으리는 촌에서두 그 소문을 다 듣구서 나를 보낸게야. 그래 이짓은 도적놈의 행사가 아니구 님자가 진 전주님네 빚값으루 한두바리 실어내는것은 도적놈의 행사가 되니 못하겠다?》

마디마디 힘주어서 어성을 높이는 노랑수염의 말에 쌀을 나르러 왔던 사람들은 일손을 멈추고 주복이와 노랑수염앞으로 모여섰다. 그가운데서 《모르면 좀 가만히나 있으소.》 하는 주복이의 말은 뜻밖에 퍽 부드러웠다.

《그러지 말구 쌀이 소용되거들랑 얼마든지 가져는 가소. 짐바가 없으면 짐바 한감내기 상목두 끊어주갔소. 그래두 내 빚값으루는 한섬두 실어다 못 주갔소. 그 빚을 지금 못 물구 이담에 리의 리새끼, 허케 리자까지 물게 된대두 이 나라 쌀루는 내 빚 못 물갔소.》

《허- 과시 당당한 말이로군!》

옆에 서있던 늙은 봉군 오장이 시꺼먼 벙거지밑의 거슬거슬한 구레나룻을 내려쓸며 듣다가 붉은 상모달린 창대끝으로 한번 땅을 구르며 말했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라! 내 그 말에 반하겠는걸! 과시 주인싼 말일세, 아닌게 아니라!》

《정말 이런 때는 나라의 주인이 누군지 알갔쉐다.》

《그러다보니 지금 우리 하는 일이 그저 제 욕심채기나 하느라는 일이 아니드랬소.》

《이 사람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하노. 이제야 알았나?》

모여선 사람들이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

《나라의 주인? 주인 좋갔다!》

코방귀를 뀌듯 한 노랑수염이 뒤를 다지며 말했다.

《그래 전주님말씀대루 거행을 못하겠다는 말인가? 그러면 님자 도리는 고사하구… 그래두 좋을가? 무사할가?》

이런 말을 하자 주복이가 대척할 사이도 없었다.

《이건 어디서 본때없이- 그래 무사 못하면 어떡할테란 말인가?》

한 젊은이가 당장 드잡이라도 할 기세로 나섰다.

《아까부터 가만히 듣구만 있자니 뭐 이짓이 도적놈의 행사라구? 촌에 피란나가 앉아서 빚준 재세하구 남의 등에 이 쌀을 공짜루 먹어보겠다는 박참봉인가 한 놈은 뭐이가?》

《뭐이긴 뭐야, 그놈이 바루 그놈이지. 장리변으루 생사람 세워놓구 등가죽 벗겨먹는 놈 아닌가.》

《그런 제 주인을 닮아서 남 할 일하는 사람보구 도적놈행사니, 어쩌니 하구 탑삭탑삭 아가리질하는 이놈두 한몽둥이루 때려눕힐 놈 아닌가.》

《여보게, 초면에 하게한다구 나무럼일랑은 말게. 하나 님자 하는 행동을 봐서는 여보게두 과남해. 하나 여보게 해줄테니…》

저마다 죽일놈, 살릴놈하고 노랑수염을 몰아세우는 젊은이들중에 한 늙은이가 나서서 허두를 이렇게 내놓고 《리로울거 없으니 어서 잃어지게.》 하고 타이르는 투로 말했다. 주먹이 가까운 판이라 겁을 집어먹었던 노랑수염은 그 늙은이의 말이 반가왔던지 두말않고 돌아서서 창앞쪽으로 사라졌다. 그자의 등뒤에 던지는듯 한 사람들의 웃음이 터졌다.

《자, 또 어서들 한섬씩이라두 더 져내지.》

누가 이렇게 하는 말에 사람들은 다시 사창고로 들어갔다. 밤이 깊어갈수록 성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더욱 많았다. 밝은 달빛아래 련락부절 들고나는 사람들이 사창고안팎에서 웅성거릴 때 문득 모란봉쪽에서 요란한 조총소리가 두세방 울려왔다. 창안에서 쌀섬을 내오던 사람, 막 지고떠나던 사람들이 모두 그쪽을 바라보며 주춤했다. 이 사창앞에서만이 아니라 속속들이 빈듯 하던 이 골목, 저 골목에서도 부산한 신발소리와 함께 세간들을 꾸려서 지고 든 사람들이 뛰여나왔다.

《덤비지들 말구 잠간만 기다리소.》

이때 그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웨친 주복이는 또 무슨 소리가 나기를 기다리는듯이 귀를 기울이는 모양이였다. 잠시후였다. 모두 긴장한중에 사창고지붕너머로 새가 날듯이 푸드득 소리를 내며 날아온 화살 한대가 로적낟가리 벼섬에 내려꽂혔다. 주복이가 올라가서 뽑은 화살에는 흰 헝겊오리가 매여있었다. 장경문쪽에서 고충경이가 날려보낸 화살의 흰 헝겊은 왜놈들이 아직도 성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표식이였다. 이때 고충경이와 법근이는 몇몇 젊은 사람과 중들을 데리고 을밀대로부터 암문 장경문쪽에서 왜놈들의 동정을 살피며 서로 련락하고있는중이였다.

사람들은 다시 일을 계속했다. 일본군이 성안으로 들어오는 날 아침까지도 이 일은 계속되였다. 그러면서도 이때의 우리 사람들은 종당은 왜적의 손으로 넘어갈 이 량곡을 불살라버릴 생의는 못했다. 서산대사를 비롯하여 고충경이, 전주복이, 법근이랑도 할수만 있으면 우리 량곡을 적에게 안 주도록 했으면 하는 생각이 없지는 않으면서도 불을 지른다든가 하는 비상수단은 엄두도 못 냈던것이다. 그러나 그 일부분을 빼낸것만으로도 적에게 그만한 타격을 주었다고 할것이였다.

혹시 이때 조정에서 평양백성들이 사창고를 터쳤다는것을 알았다면 왕이하 대감령감들은 노발대발했을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조정대관들중에서는 가장 사리에 밝고 현명한 인물이였다고 할수 있는 류성룡이조차도 앞으로 나올 명나라 원병에게 공급할 군량걱정을 할 때마다 《평양성을 도루 찾기만 하면 그안에는 십만석이나 있으니 걱정이 없으련만…》 하여 마치도 그 십만석 군량을 어떤 믿을만 한 친구에게 맡겨두기라도 한듯이 든든히 생각한 모양이였다. (그의 《징비록》에 그같이 씌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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