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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7 회


27. 평양성내의 간장탕수


평양성안에는 아직도 사람이 많았다. 이사짐을 꾸리노라 아직도 좌왕 우왕하는 사람들도 있었거니와 일단 나갔다가 빈몸으로 되돌아오는 사람들도 많았고 또 부근농촌에서 들어온 농민들도 많았다. 그들은 많이 사창고앞으로 모여들었다. 혹은 이 골목, 저 골목으로 흩어져가기도 했다.

이날 중낮부터 성안에서는 장, 된장냄새가 코를 찔렀다. 마치 만여호나 되는 집집에서 일제히 장을 졸이기라도 하는것 같았다. 그 짜고 매운 냄새에 눈이 쓰리기까지도 했다. 그럴 까닭이 있었다. 총총히 인가가 들어앉은 골목들에서 집집의 대문턱밑으로 흘러나오는 장이 거리로 번지기 시작했다. 폭양에 메마른 거리바닥에다 허연 소금버캐를 앉히면서 흐르는 장이 사람의 신발을 적시게까지 되였다.

평양성안에 간장탕수가 났다! 이러한 말로써 퍼지는 소문은 옛말로도 듣지 못한 큰 괴변같은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사람이 하는짓이였다. 골목마다 패거리를 지어다니며 집집의 간장, 된장독들을 뒤엎어쏟고 혹은 깨뜨려버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펄펄 날듯 하는 사람도 있어서 혹시 문이 걸린 집이 있으면 담장을 뛰여넘어서까지 기어이 장독을 부시고야만다는 소문이 떠돌아서 이 괴변같은 일을 더욱 수상스럽게 윤색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이 중들이였으므로 사람들은 《이것도 서산대사라는 중이 시켜서 하는 일인가?》 했다.

서산대사라는 중이 사창의 쌀을 터쳐놓은것은 모두들 잘한 일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장독들을 뒤집어엎고 깨뜨려버리는데는 우선 놀랬고 또 그리 잘하는 일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못할짓을 하는것 같이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조선사람은 장을 소중히 여긴다기보다도 신성시하는 풍습이 있었다. 지금도 그런 풍습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옛날일수록 더욱 그랬다. 장이 가득가득한 독과 항아리들이 늘비한 장독대는 그 집의 치장거리이고 자랑이기도 했다. 《움막에 진간장이 있었다!》는것은 뜻하지 않았던데서 진귀한것을 발견한 때에 쓰는 말이였다. 장맛이 변하면 집안에 무슨 변화가 생길 흉조였다. 새며느리를 맞자 장맛이 변하면 그것은 집안에 들이지 못할 사람이 들어왔다는 징조였다. 장은 그같이 령감한것이기도 했다. 그러한 장독을 뒤엎고 깨뜨려버린다는것은 천벌도 두려워 않는 부랑패류들이나 할짓이였다.

평양성내의 골목골목에서 간장이 내를 이루어 쏟아져서 신발을 적시게 되자부터 그 골목들로 드나드는 사람들이 더욱더 많아졌다. 그중에는 물론 비고 떠났던 자기네 집으로 되들어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뉘 집이든 주인없는 집들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들이 강도는 물론 아니였다. 절도라고도 할수 없었다. 왜냐하면 빈집의 세간들을 뒤져내다가 혹시 그 집주인이 턱턱 찾아들어오더라도 그들은 달아나거나 숨지도 않는것은 물론, 마치 그 집의 이사짐을 도와주러 오기나 했던것 같이 이미 꾸려놓았던 세간은 가지고 나갔다. 그것을 보는 주인들도 당연히 그럴수 있는 일로 아는 모양으로 나무랄 생각도 않는것이 례사였다.

《남의 집 장독까지도 몽땅 들부시는 판인데-》 이러한것이 어떤 집주인에게는 체관을 주었고 어떤 사람에게는 남의 세간을 공공연히 날라낼 용기를 주었다고도 말할수 있었다.

이때 함구문밖의 여러 마을들에서도 간장탕수가 났다. 그뿐아니라 그 무연한 전야에서는 일대 청야전술(량곡을 비롯한 먹을것을 깡그리 감추는것)이 시작되였던것이다.

서산대사와 작별하고 저의 집으로 달려간 차돌이는 낫을 들고나가서 우선 저의 밭의 곡식부터 후리기 시작했다. 따라나온 어머니는 《이애가 미쳤나?》 했다.

《왜놈들이 성안에 들어오면 이 곡식은 우리가 못 먹어요. 왜놈들 잘 처넣으라구 둬두갔소.》

이러한 아들의 말을 알아들은 어머니는 울었다. 울면서도 자기도 밭으로 나가서 지금 한창 열리는중인 오이, 참외들을 걷고 남새들을 뽑아버렸다. 동네사람들도 다 그렇게 했다. 자기네 손으로 지었던 농사를 자기네 손으로 적지를 만든 사람들은 또 각기 저의 집 돌각담을 헐어다가 우물들을 메우기 시작했다.

《평양지》를 보면 불과 성벽 하나사이지만 성내의 우물들은 물맛이 나쁘고 불결한데 이 함구문밖의 우물들은 물맛이 좋았다는것이다.

《모르거니와 성내에는 사람과 말, 소의 오물이 많기때문일것이라》고도 했다. 말하자면 하수도가 없었던것이다.

우물을 메우는 사람들은 될수록 돌로 메웠다. 언제든 자기네는 반드시 이 고향으로 돌아올것이므로 그때 다시 파내기 쉽게 하려는것이다.


동대원의 일본군은 이날(6월 14일) 저녁에야 대동강을 건넜다. 걸어서 건늘수 있는 왕성탄여울목을 알기는 알았지만 (또 조선군사가 타고 갔던 배들을 붙든것도 있었지만) 이날 새벽에 조선군사의 습격을 받아 적지 않은 군사가 살상된 소서행장의 군대는 무너지고 찢어진 대오를 재정비하는데 그만한 시간이 걸렸던것이다. 또 강을 건너서도 곧 성내로 들어오지 못했다. 금수산과 모란봉일대에 자기 군대를 머무른 소서행장은 평양성을 내려다보면서도 들어갈 생각은 못했던것이다. 동대원전투에서 중과부적이라고도 할만 한 압도적인 수적우세로써 조선군사를 섬멸할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 전투는 자기네가 조선땅에 발을 들여놓은이래 처음이다싶이 맹렬한 공격을 받은 전투였고 따라서 전례없이 큰 손실을 당한 전투였다. 그런만치 지금 더우기 그 지형이 생소하고 시가가 복잡한 성안으로 서뿔리 들어설 용기가 없었던것이다. 그 어느 골목, 어느 집 모퉁이에서 또 치명적출혈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구로 소서행장은 상한 자기의 귀로 달라붙는 쉬파리를 날리면서 금수산에서 묵새기지 않을수 없었다.

일본군이 평양성내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것은 15일 저녁때부터였다.

이동안에 평양부근의 농민들과 또 일단 떠났다가 되돌아온 평양사람들이 네것내것 없이 성안에 남아있는 재물을 날라낼수 있었다. 마침 열사흘, 열나흘이라 밤에도 낮같이 밝은 달이 있었다. 물론 처음에는 장정들만이 량식을 져내려왔다. 그러나 차차는 녀인들, 아이들까지도 들어와서 세간을 나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적질을 했다고도 할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평양사람들이 손쓸 사이가 없이 내버리고 떠났던 많은 재물을 건져낼수 있었다. 의롱속의 옷과 피륙과 이부자리들을 져냈다. 놋기명, 사기그릇, 초대, 방등, 쇠거울 같은 부엌잡은것과 사치한 방안세간들이 촌부녀들에게는 역시 탐나는것이였다. 심지어는 다리미, 인두, 빗접고비까지도- 부엌구석에서 젓갈항아리와 혹은 벽장에서 꿀, 약과, 다식단지들을 뒤져내기도 했다. 방안의 삿과 돗을 걷고 심지어는 장판을 도려내고 묘하게 된것이면 문짝, 쌍창까지도 떼갔다.

이러한 결과는 그후 반년이상이나 이 성을 강점하고있은 일본군에게 물자의 고갈로 인한 생활의 불편과 비위생과 동삼의 추위와 그리고 또 소금과 장의 부족으로 인한 무기력과 야맹증과 부황증 같은 많은 질병까지도 끼쳐주었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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