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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안고 간 김정일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손길을 떠나 김수조의 성장과정에 대하여 이야기할수 없다.

1988년 6월 6일, 당시 조선예술교류협회 축전조직과장으로 사업하고있던 김수조는 위대한 장군님께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개페막행사도안을 해설해드리는 영광을 지니게 되였다.

그날 도안해설을 김수조가 한다는 보고를 받으신 장군님께서는 그 동무는 자신께서 이미 알고있는 동무라고 하시며 잘하도록 하라고 이르시였다고 한다.

그 말씀을 전해듣는 순간 김수조는 눈굽이 달아올랐다.

지난 기간 여러모로 미숙한 그를 창작일군으로 계속 일하도록 크나큰 배려를 돌려주신 그이이시였다.

혁명가극 《밀림아 이야기하라》와 《금강산의 노래》를 창조할 때에는 창조지도일군으로 망라시켜 주체적인 문학예술창조의 방법론을 터득하도록 이끌어주시고 공훈예술가 칭호까지 안겨주신 위대한 장군님이시였다.

얼마후 김수조는 그이앞에서 도안해설을 하였다.

흥분된 그의 기색을 보신 장군님께서는 마음을 푹 놓고 해설하라고 거듭 고무해주시며 창작가들이 생각지 못한 부족점들을 하나하나 바로잡아주시였다.

평양축전을 주체성있게 우리 식으로 준비할데 대하여 강조하신 그이께서는 이어 개페막행사의 내용을 축전의 기본리념에 맞게 평화, 친선, 단결, 환영으로 일색화할데 대한 문제, 개페막행사를 예술화, 기교화할데 대한 문제, 현대과학의 첨단기술을 널리 활용할데 대한 문제 등 개페막행사를 최상의 수준에서 보장할 구체적인 방도들을 뚜렷이 밝혀주시였다.

그러시고는 김수조의 손을 힘있게 잡아주시면서 신심을 가지고 본때있게 해보라고 격려해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현명한 가르치심과 뜨거운 고무를 받아안은 창조집단은 축전개페막행사를 종전의 틀과 개념에서 완전히 벗어난 전혀 새롭고 독창적인 화폭으로 형상해나갔다.

휘황하게 타오르는 봉화대의 홰불과 고구려무사복을 입은 신호악대의 장쾌한 축전개시신호악, 변화무쌍한 배경대와 극치의 황홀경을 펼치며 끝없이 흘러넘치는 바닥춤대렬…

실로 그것은 인류문예사와 세계청년학생축전력사에 일찌기 없었던 장엄한 예술적화폭이였다.

1989년 6월 29일,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개막을 이틀 앞둔 이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개페막행사의 최종시연회를 지도해주시기 위하여 5월1일경기장에 몸소 나오시였다.

개페막행사의 대예술공연을 처음부터 마감까지 주의깊게 보아주신 장군님께서는 시연회가 끝나자 김수조를 부르시여 행사준비가 잘된데 대하여 크게 만족해하시며 7만명을 헤아리는 인원들을 한사람같이 움직이게 한다는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이제는 그에게 그 어떤 큰일을 맡겨도 잘해낼것이라고 하시며 인민예술가칭호를 주도록 하여주시였다.

분에 넘치는 은정의 말씀앞에 감격을 금치 못하는 김수조에게 그이께서는 오늘 검열시연회 사회를 누가 했는가고 다정히 물으시는것이였다.

원래 최종시연회의 사회는 중앙방송위원회의 방송원이 하게 되여있었는데 사정이 있어 나오지 못하여 김수조가 대신하였던것이다.

그가 이런 사연을 장군님께 말씀올리며 갑자기 준비없이 한데다가 목소리까지 석쉼하여 잘하지 못한데 대해 송구스러워하자 그이께서는 어쩐지 동무목소리같다 했는데 옳다고 하시면서 호탕하게 웃으시였다.

 당일행사와 관련하여 미흡한 문제들을 세심히 일깨워주고나시여 차에 오르시던 그이께서는 다시 내리시더니 김수조에게로 다가오시였다.

장군님께서는 미더우신듯 그의 두손을 잡아주시며 이번 행사에서 동무의 수고가 많았다고, 동무가 이젠 경험도 많이 쌓았겠는데 앞으로 있게 될 행사들도 잘해야 하겠다고 간곡히 말씀하시는것이였다.

너무도 크나큰 믿음을 받아안은 김수조는 그이께서 타신 차가 멀리 갔어도 그 자리에 굳어진채 움직일줄을 몰랐다.

사실 그가 평양축전과 같은 큰 행사의 총연출을 감당해낼수 있은것은 전적으로 위대한 장군님께서 벌써 오래전부터 큰 규모의 국가적인 예술행사들의 연출을 맡겨주시고 경험과 기초를 쌓도록 하여주셨기때문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에게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 어버이수령님탄생 70돐과 사로청 제7차대회 행사들을 비롯하여 국가적인 큰 규모의 여러 예술행사들의 연출을 맡겨주시고 그 행사들을 성과적으로 보장하는 과정을 통하여 담을 키우고 경험을 쌓도록 하여주시였으며 행사의 규모와 형식, 군중무용창작방향, 대렬배렬과 흐름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가르치심을 주시여 행사보장의 묘리를 터득하도록 이끌어주시였다.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때 진행된 대군중야회를 준비하던 과정만 놓고보아도 그것을 잘 알수 있다.

그때 장군님께서는 야회를 대공연형식으로 본때있게 준비하여야 한다고 하시며 야회에 들어갈 군중무용의 종류와 합창형식, 연출대본에 이르기까지 비범한 예술적안목으로 구체적인 지도를 주시였다.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개페막행사를 7만명의 대예술공연형식으로 한것이라든가 바닥춤대렬에 력량을 집중하게 한것 등 많은 점들이 위대한 장군님의 현명한 지도와 가르치심에 의해 이미전부터 창조된 형식과 경험에 기초한것들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성과를 고스란히 전사들에게 돌려주시는 그이의 숭고한 인덕앞에 김수조는 뜨거운것을 삼키며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있었다.

예술의 천재이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탁월한 지도에 의하여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개페막행사는 축전력사가 알지 못하는 가장 성대하고 황홀한 화폭을 인류의 심장속에 새겨주었다.

1991년 어느날 김수조를 부르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를 반갑게 맞아주시면서 일군들에게 이 동무가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의 개페막행사를 총지휘한 동무라고, 축전을 통하여 우리 수령, 우리 당, 우리 조국을 세계만방에 빛내이는데 기여한 동무라고 거듭 치하해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앞으로 있게 될 예술행사를 책임지고 한번 본때있게 해보라고 또다시 크나큰 신임을 안겨주시였다.

위대한 은인의 보살피심속에 그후 피바다가극단 총장으로 임명된 김수조는 주체예술의 대화원을 더욱 풍만하게 가꾸어가는데 온넋을 기울였으며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백전백승 조선로동당》의 총연출을 맡아안고 장군님의 의도대로 작품을 훌륭히 완성하기 위해 사색과 정열을 깡그리 바쳐갔다.

영광스러운 조선로동당창건 55돐을 맞으며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백전백승 조선로동당》이 성과적으로 창조되였을 때 그에게 로력영웅칭호를 수여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였다.

그때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총연출을 담당한 피바다가극단 총장동무가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하시면서 그 동무는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개페막행사도 성과적으로 보장한 공로있는 동무라고, 고난의 행군을 헤쳐가는 어려운 때에 큰일을 한것만큼 정치적견지에서 볼 때 마땅히 공화국영웅칭호를 주는것이 어떤가고 일군들에게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리하여 김수조에게 공화국영웅칭호가 수여되였다.

바로 이러한 믿음과 사랑이 김수조를 키웠다. 어찌 그 한사람뿐이랴. 이 나라의 수천만 아들딸들이 그 품속에서 성장하였다.

김수조에게 있어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을 창조하던 나날이야말로 생애의 최전성기였다고 말할수 있다.

그가 위대한 장군님으로부터 어버이수령님의 탄생 90돐을 맞으며 진행할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을 준비할데 대한 과업을 받은것은 2000년 10월 어느날이였다.

창작집단은 어버이수령님의 탄생 90돐과 영웅적조선인민군창건 70돐을 계기로 작품이 창조되는것만큼 제목을 《태양의 노래》로 달고 수령님의 건당, 건국, 건군의 력사를 서사시적화폭으로 펼쳐보이는 식으로 연출대본을 준비하였다.

2001년 7월 중순 어느날 김수조는 위대한 장군님께 연출대본초안을 설명해드리게 되였다.

그의 설명을 주의깊게 들으신 장군님께서는 잠시 생각에 잠겨계시다가 일전에도 말했지만 자신께서 이번에 구상하는 작품은 단지 그전에 하던것과 같은 작품이 아니라 21세기를 대표할수 있는 작품을 만들자는것이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수령님탄생 90돐과 조선인민군창건 70돐을 맞으며 진행할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을 1900년대로부터 2000년대에 이르는 옹근 한세기를 포괄하는것으로 내용구성을 고쳐 다시 완성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순간 뢰성같은 충격이 김수조의 가슴을 세차게 쳐왔다. 한아름에 받아안기에는 너무도 거창한 세계였던것이다.

절세위인의 거룩한 한생을 파란만장의 100년민족사를 배경으로 작품에 그대로 담으시려는 장군님의 무변광대한 사색의 세계가 기성의 틀속에 갇혀있던 그의 넋을 통채로 흔들어깨웠다.

끓어오르는 흥분을 안고 돌아온 김수조는 창작집단과 함께 그이께서 밝혀주신대로 작품을 새롭게 구성해나갔다.

그로부터 얼마후 또다시 그를 부르시여 창조정형에 대한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번에 준비하는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은 이전에 하던 형식과는 달리 내용도 형식도 제목도 새롭게 하여야 한다고 다시금 당부하시며 제목을 그대로 하려고 하는가고 물으시였다.

그가 제목을 그대로 《태양의 노래》로 하려 한다고 말씀드리자 장군님께서는 생각에 잠기셨다가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제목을 《아리랑》이라고 다는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시는것이였다.

뜻밖의 말씀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놀랍기도 하고 의아한 생각도 들어 한동안 그이를 우러르기만 하였다.

장군님께서는 그러는 그들을 둘러보시며 작품에 지난날 우리 인민이 망국노의 피눈물을 뿌리며 부르던 토색민요 《아리랑》과 최근에 나온 《강성부흥아리랑》을 넣어야 한다고, 그러면 탁월한 수령을 모셔야 슬픔의 《아리랑》이 기쁨과 행복의 《아리랑》으로 된다는 심오한 철학이 심어진다고 일깨워주시였다.

김수조는 그이의 앞이라는것도 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때의 흥분된 심정을 후날 회상글에서 그는 이렇게 토로하였다.

《〈아리랑〉!

이 얼마나 단군민족의 유구한 력사가 담겨져있고 김일성조선의 찬란한 민족성이 비껴있는 제목인가.

흔히 지난날 대집단체조를 창조할 때 그 작품의 〈범주제〉, 〈범종자〉는 가지고있었으나 똑똑한 종자 특히 문학적인 종자를 바로쥐지 못하고 창조사업을 시작하는 실례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위대한 장군님께서 몸소 달아주신 제목 〈아리랑〉은 조선민족의 한세기 운명을 론할수 있는 력사적, 철학적종자로서 훌륭한 예술적화폭을 펼칠수 있는 발견이였다.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의 종자와 제목은 이렇게 태여났다.》

위대한 심장이 위대한 창조를 낳는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안겨주신 크나큰 심장을 안고 김수조를 비롯한 창조집단은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을 새 세기를 대표하는 기념비적걸작으로 내놓기 위하여 모든 정력을 다 쏟아부었다.

그들앞에는 새롭게 해결해야 할 형상과제가 한둘이 아니였다. 창작의 번민속에 뜬눈으로 지새운 밤들도 많았다.

그들이 형상안을 찾지 못해 안타까워할 때마다 장군님께서는 손수 명곡들을 골라주시며 작품의 음악적기둥을 세워주기도 하시고 민속무용의 춤가락들과 의상, 소도구들까지 일일이 보아주시며 민족적감정과 정서가 짙게 작품을 형상하도록 세심한 지도를 주기도 하시였다.

그뿐이 아니였다. 옹근 한세기에 달하는 민족의 운명사를 한편의 무대예술작품에 집약적으로 반영할수 있도록 구성의 대도 매 장면들마다 하나하나 바로 심어주시였고 봉화대에 불을 지피는 방식으로부터 레이자조명과 특대형영화화면 등 최신과학기술을 도입하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명철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진정 세인을 경탄케 한 대걸작의 창작가, 총연출가는 다름아닌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이시였다.

창조집단이 《통일아리랑》장을 형상할 때였다.

전반부분에서 분렬의 아픔에 몸부림치며 통일을 갈망하는 민족의 념원을 노래 《아리랑》에 담아 형상하였는데 그 후반부가 문제였다.

갈라진 조국을 통일하여 기어이 하나가 되려는 민족의 신념과 의지를 형상하는데 맞춤한 노래를 좀처럼 선정할수가 없었던것이다.

이미 나온 통일주제의 수많은 노래들을 골라보았지만 새로운 맛이 없었다. 날은 흐르는데 신통한 해결책을 찾지 못한 창작가들의 마음은 더더욱 조급해만 갔다.

그러던 어느날 김수조는 위대한 장군님께서 부르신다는 련락을 받았다.

그가 서둘러 장군님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자 그이께서는 동무의 안타까운 심정을 알고 찾았다고 하시며 자신께서 노래를 주겠으니 그 노래를 한번 써보라고 이르시는것이 아닌가.

김수조가 너무 기뻐 자리에서 일어서자 장군님께서는 흥분하지 말고 앉으라고 하시면서 이건 자신께서 아끼던 노래로서 《아리랑》작품에 쓰게 하려고 아직 공개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였다.

후에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그 노래의 가사와 곡을 받았을 때 창작가들은 너무 기뻐 환성을 올렸다.

 

하나 민족도 하나 하나 피줄도 하나

하나 이 땅도 하나 둘이 되면 못살 하나

긴긴 세월 눈물로 아픈 상처 씻으며

통일의 환희가 파도쳐 설레이네

하나 우리는 하나 태양조선 우리는 하나

 

들으면 들을수록 《통일아리랑》장의 전반부에 나오는 노래 《아리랑》과도 련결될뿐아니라 민족의 통일념원을 반영한 화폭의 조형적형상에도 어울리는 이 노래야말로 그들이 그처럼 찾던 음악이였던것이다. 노래 《우리는 하나》는 이렇게 되여 우리 겨레의 불같은 통일념원과 민족자주정신을 과시하는 통일찬가로 세상에 소리높이 울려퍼지게 되였다.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을 창조하는 나날에 김수조가 받아안은 사랑과 배려는 한량없는것이였다.

그가 건강한 몸으로 일하도록 외국의 병원에서 치료도 받게 하여주시고 창조사업을 끝낸 다음에야 70돐생일을 쇠겠다는 그에게 민족의 풍습대로 쇠여야 한다고 생일상도 보내주신 위대한 장군님이시였다.

어느날 그이께서는 김수조를 부르시여 일이 아무리 바빠도 이번에 남녘땅에 가서 오래동안 헤여졌던 친척들을 만나보라고 말씀하시는것이였다.

실로 뜻밖의 말씀이였다. 그때로 말하면 작품창조로 시간이 천금같이 귀중한 때였던것이다.

그러한 때 모든것을 다 뒤로 미루고 끊어졌던 혈육의 정부터 이어주시려는 장군님의 열렬한 인간애앞에 그는 목이 꽉 메여와 다른 말씀을 더 올릴수가 없었다.

인간에 대한 사랑, 민족에 대한 사랑으로 한생을 헌신하시는 장군님의 숭고한 덕망을 온몸으로 절감하며 김수조는 제3차 흩어진 가족, 친척방문단 성원으로 서울에 가게 되였다.

서울에서 그는 반세기가 넘도록 헤여져있던 조카들과 이모를 만났다. 어머니와 형수, 막내동생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헤여질 때 3살, 2살 나던 조카들이 어느덧 귀밑머리가 희여지기 시작한 50대의 장년이 되여 그의 앞에 나타났다. 삼촌은 그들에게 슬픈 소식부터 전해야 했다.

《너희들의 아버지는 99년 11월에 병으로 돌아가셨단다.》

조카들은 모두 흐느껴울었다. 그러는 그들을 바라보는 김수조의 마음도 쓰리고 아팠다.

미군이 서울로 들어오기 직전에 어머니는 그대로 있으면 죽는다고 일가식솔을 거느리고 시골로 피신하였다고 한다. 그 덕에 겨우 목숨을 건진 혈붙이들이였다. 월북자가족이라 하여 남쪽사회에서 공부도 제대로 못하고 핍박을 받아온 그들이 이렇게 또다시 상실의 아픔을 겪는다고 생각하니 민족분렬의 통분이 가슴에 사무쳐와 견딜수가 없었다.

김수조는 조카들에게 그들의 아버지이며 자기의 맏형인 김수희가 공화국의 품에 안겨 공훈예술가로, 평양연극영화대학 강좌장으로 성장한 과정에 대하여 감회깊이 들려주었다. 그리고 어버이의 믿음속에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등 큰 국가행사들의 총연출가로 자라난 자기의 인생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었다.

하지만 반세기이상 쌓이고쌓여온 하많은 회포를 어찌 2박3일이라는 그 짧은 시간동안에 다 터놓을수 있었으랴.

헤여지기에 앞서 김수조는 자기가 안고 간 김정일화 3상을 조카들에게 안겨주었다. 그가 70평생을 살아오면서 확신한 생의 진리가, 열화같은 심장의 고백이 그 김정일화에 함축되여 담겨져있어서였다.

아버지와 삼촌이 걸어온 길을 알게 된 조카들은 김정일화를 받아안고 감동되여 뜨거운 눈물을 흘리였다.

그들의 모습에서 위대한 장군님을 다함없이 흠모하는 겨레의 마음을 읽으며 평양으로 돌아온 김수조는 더욱더 용솟음치는 열정을 창조사업에 바쳐갔다.

철두철미 장군님의 말씀을 자자구구 따져가면서 드팀없이 구현하는것은 그의 어김없는 사업원칙이였다.

언제인가 그가 내놓은 작품의 수정대책안을 놓고 격렬한 론쟁이 벌어진적이 있었다. 보통관념에 비추어볼 때 너무도 놀랍고 대담하였던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바로 위대한 장군님의 의도이라고, 장군님의 의도야말로 우리가 들고나가야 할 유일한 자막대기이며 모든 창작적환상과 형상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하였다.

마침내 세계의 관심을 모으고 천만의 심장을 격동시키면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이 빛나게 완성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작품창조에 참가한 수많은 창작가들과 출연자들에게 높은 급의 국가표창과 함께 선물을 보내주시였으며 김수조에게는 김일성상을 수여하도록 하시는 더없는 영예를 안겨주시였다.

그는 행복과 영광의 절정우에 올라섰다.

가난한 품팔이군의 자식으로 태여난 그가 절세위인들의 손길아래 김일성상계관인으로, 공화국영웅으로, 인민예술가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성장한것이다.

단지 김수조 혼자만이 아니였다. 함께 북행길에 올랐던 그의 안해도 은혜로운 품속에서 공훈배우로, 김원균명칭 평양음악대학 교원으로 성장하였으며 그의 아들은 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의 로동계급편을 비롯한 여러 영화들을 훌륭히 만드는데 기여함으로써 위대한 장군님을 만나뵙는 영광까지 지니였다.

하기에 김수조는 생전에 늘 이렇게 외웠다고 한다.

《나는 위대한 장군님의 품속에서 인간으로서, 혁명전사로서 받을수 있는 모든것을 다 받아안았다. 삶의 모든것을 깡그리 바쳐 그 사랑과 믿음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것이 나의 소원이고 행복이다.》

그는 그후에도 이러한 념원으로 여생을 불태워갔다.

폭이 크고 대범한, 활력에 넘치는 류형의 예술가였던 김수조는 사생활에 들어가서도 덜렁덜렁할것 같았지만 실은 퍼그나 자상하고 세밀한 성격이였다고 안해는 회상한다. 젊은 시절엔 일기도 꼭꼭 쓰군 하였고 안해가 옷을 빨아서 개여놓으면 눈에 차지 않아 자기 손으로 다시 개여 비닐에 꼼꼼히 포장까지 해놓군 하였다고 한다. 그는 생활에서 절도가 강한 사람이였다. 술,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고 아침운동을 번지지 않았으며 아무리 바빠도 끼니는 꼭꼭 들군 하였다.

창조현장에서는 《땅크》라고 불리울 정도로 내밀성과 배짱이 드센 그였지만 집안에 들어와서는 어질고 착한, 그래서 자식 한번 때려보지 못한 가장이였다. 자식들에게 정 화가 나면 기껏해서 안해에게 저거 좀 때리라고 이르군 하였다고 한다. 아마 진취성이 강하면서도 그렇게 유하고 빈틈없는 성격이여서 수많은 군중을 능란하게 지휘할수 있었던것 같다.

나이가 먹어가는것이 아쉽다고, 그러나 일없다고 고무해주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사랑에 떠받들려 그는 지팽이를 짚고 간호원의 부축을 받으면서도 생의 말년까지 창조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그는 2010년 11월 일흔아홉해의 생을 마치고 우리 곁을 떠났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애석함을 금치 못해하시며 고인의 령전에 화환을 보내주시였다.

김수조의 한생은 우리에게 사람들의 삶을 가꾸어주고 꽃피워주는 참다운 정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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