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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3 회


23. 서산이 울다


날이 밝아오고 강건너의 소란한 함성과 말발굽소리가 멎고 총소리도 좀 적어지고 먼지도 가라앉기 시작한 때였다.

《대사님, 죄송하지만 저를 저의 집까지 좀 데려다주실수 없으실가요?》

지금까지 부벽루의 한 기둥에다 이마를 기댄 얼굴을 두손으로 가리우고 쪼그리고 앉아있던 보패가 역시 한 기둥옆에 서있는 로승앞으로 가서 말했다.

한밤사이에 백지장같이 해쓱해진 얼굴에 몇오리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떨리는 손으로 쓰다듬어올리는 처녀를 한번 쳐다본 로승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였다.

《스님.》

역시 이때까지 어느 한 기둥뒤에 붙어섰던 한 중년의 중이 합장하고 나서며 불렀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좋으리까?》

서산은 이렇게 묻는 그의 앞으로 돌아섰다. 그들은 서로 마주보았다. 여러 중들도 모여와서 서산을 쳐다보았다. 모두 온 한밤을 악몽에 시달린 사람들같이 붉어지고 퀭해진 눈들이였다.

서산은 자기의 대답을 재촉하는 모양인 여러 눈동자를 피하듯이 긴 눈섭밑의 눈을 내려깔았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하면 좋으리까?》

이 마당에 처한 지금 이는 지당한 물음이였다. 어찌 산중의 중들뿐이랴. …

실로 어떻게 할것인가?

그렇건만 이 물음에 대해서 지금 누가 명확한 대답을 할수 있을것인가? 답답한 서산은 내려깔았던 눈을 감기까지 했다. 몇순간의 침묵이 흘렀다.

《어떻겠소.》

마침내 눈을 뜬 서산은 이런 물음으로써 말을 시작했다.

《저 아수라왜적들과 한하늘을 이고 같은 땅을 밟으며 살수 있겠소? 나는 그럴수 없을것 같소이다.》

《저희들 생각도 그래서 여쭙는 말씀이 아니오니까.》

《그렇다면 우선 저 아수라들을 피할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죽거나 혹여 구차히 잔명을 부지한대도 저 왜적의 손발이 되여 여생이 욕될것이요.》

《그러면 스님께서는 향산으로 들어가시렵니까?》

《…》

《그러시다면 저희들도 모시고 같이 가겠습니다.》

잠시 말이 없던 서산은 또 이런 말을 하는 중들을 보며 말했다.

《이제 왜적이 강을 건너선다면 향산이 여기서 멀긴들 하며 또 그 산속인들 무사하겠소.》

《그러면 더 멀리로 가시렵니까?》

《어데가 더 멀겠소. 멀다면 또 얼마나 멀겠소.》

이러한 서산의 대답은 남의 말에 대한 대답이라기보다도 남의 말을 뇌까려 타박하는 언사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태도며 음성은 결코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도리여 온공히 묻는듯 한 말이였다. 물론 속이 타는듯 한 신경질은 느껴졌다. 또 몇순간의 침묵이 흘렀다.

《생각해서 다시 의논합시다. 내 성안엘 좀 다녀오리다. 그동안에도 사태가 위급하거든 우선 동금강암으로 가는것이 좋을듯 하오.》

이런 말을 남기고 서산은 한 젊은 중이 내다주는 조그마한 바랑을 지고 지팽이를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걸음 안 가서 그는 지팽이를 세우고 귀를 기울였다.

《다른것은 몰라도 듣기에는 저 왜인들도 우리 불도를 세워서 많이 숭상한다지 않소.》

등뒤에서 이런 말이 들렸던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어제 밤에 시식을 지내준 늙은 로전승의 음성이였다. 그 말에 걸음을 멈추고 흰 눈섭이 떨리게 미간이 어두워진 서산은 돌아섰다.

《그 어찌하시는 말씀이오니까?》

로전승을 바라보는 서산이 이같이 따지듯 했다.

《만약에 저 왜적들이 진정 불제자라면 우리는 그런 불제자이기를 그만둬야 할것이 아니겠소. 모르시는 말씀이요.》

잔잔하나 쟁쟁 울리는 음성으로 이런 말을 하는 로승의 얼굴에는 마주보기 어려울만치 엄숙한 노기가 떠올랐다. 그 단아한 얼굴이 전에없이 붉어지기도 했다. 그는 다시 지팽이를 옮기기 시작했다.

보패와 차돌이는 로승의 뒤를 따라 기린굴앞의 골짜기를 지나 가파롭고 초협한 언덕길로 올라갔다. 열린채 있는 암문에는 수직하는 군사도 없었다. 뒤에서 차돌이가 이슬에 젖은 발을 탕탕 구르는 소리에 보패도 제 신발을 굽어보았다. 버선뿐아니라 치마기슭에까지도 이슬에 젖어 누런 몽당물이 배였고 훑이운 풀물로 여기저기 시퍼런 얼룩이 졌다. 렴치불구하고 당돌함을 무릅쓰고 로승에게 동행해주기를 청한것은 역시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처녀의 몸으로 이런 새벽에 남의 집 총각과 같이 자기 마을로 들어갈수는 없었던것이다.

따로따로 떨어져간대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옷주제를 하고서는… 로승이 동행해준다면 이런 산길에서부터도 누가 보나 보는 사람들이 우선 안심할것 같았다.

한편 차돌이는 처음에는 좀 불만했었다. 《설마한들 내가 이런 때까지두 저한테 지싯거릴라구?》 하고 보패가 자기를 믿어주지 않는것 같아서 불만이였다. 그러나 곧 보패의 마음을 짐작할수 있었다. 그 얌전한 보패가 여북해서 처음 보는 로승에게 그런 부탁을 했으랴. 이런 경우엔 보패뿐아니라 체면과 사리를 생각하는 처녀들이라면 의례히 다 그럴것이다. 남의 총각, 이 나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차돌이는 제가 무안스럽기도 했다. 처음에는 저 혼자 매생이를 타고 돌아갈가 하기도 했다. 낡은 매생이지만 버리기가 아깝기도 했다. 그러나 위험한 일이였다. 왜군들은 지금도 총질을 한다.

동쪽에 을밀대고개를 등진 골짜기(지금의 경상골)의 송림속은 아직도 침침했다. 한밤동안 식은 밤기운이 가라앉은 풀숲의 이슬방울은 아직도 차겁게 빛났다. 울창한 나무가지에 깃들었던 산새들은 이제야 깬듯이 푸득거리고 그밑에서는 여물지 못한 풋벌레들이 아직도 씨르륵거렸다. 바위밑에서 이쪽을 엿보는듯 한 다람쥐를 만나게도 된다. 동행이 있어도 호젓한 길이다. 이때 보패는 차돌이가 뒤따라오지 않는다면 더욱 호젓할뿐아니라 불안했을것도 같았다. 지금 앞장선 로승만이라면 인간근처와는 반대로 멀고먼 구름 서리운 산속으로 들어가게 될는지도 모를것 같았다. 지금 여기도 높은 소나무가지사이로 비껴드는 새벽빛이 푸른 구름으로 서리운듯 했다. 보패는 자기 오라버니가 간혹 문갑에서 꺼내서 벽에 걸어놓는 신선도(신선이 노는 모양을 그린 그림)를 생각하기도 했다. 지금 옆으로 쳐다보는 로승의 모습, 그 긴 눈섭은 달빛에서보다도 더 은실같이 희였다. 그 머리의 송낙은 바위에 돋친 이끼와도 같았다. 수묵색장삼이 우선 바위빛이다. 그러고보면 로승이 하나의 이끼돋은 파리한 바위로 보이기도 했다.

여기서 서산에 대한 처녀의 수줍은 관찰과 감상을 작자가 대신 좀더 보충해서 말하면 이렇다. 보패는 이런 깊은 송림속에서 보는 로승이 현실적인간이라기보다도 신선도 그림속의 인물같이 보였던것이다. 흔히 신선들을 그리는 선비들은 신선 역시 사람이기는 하지만 될수록 그 배경에 고삭은 나무드덜기나 이끼돋친 바위맛이 나도록 그린다. 즉 배경도 고목한 암, 그가운데 신선도 고목한 암같은 인물로. 그렇기때문에 삼복더위에라도 땀냄새나 산사람다운 온기조차도 있을것 같지 않은 로승하고만 동행이 됐더라면 인간세상과는 멀리 깊은 산중으로 가게 될것 같기도 했던것이다. 이같은 생각은 안했지만 차돌이 역시 서산대사를(고충경이네 사랑방에 갔을 때 간혹 보았던) 신선도의 사람같이 보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송림을 벗어났다. 자그마한 언덕에 올라섰다. 성안이 바라보인다. 그것은 놀라운 광경이였다. 말바로 발칵 뒤집힌듯 했다. 부벽루에서 바라본 강건너의 수라장이 성안으로 옮아온듯도 했다. 성안은 충천한 먼지속에 휩싸여있었다. 그 먼지속으로 큰 거리, 좁은 골목 할것없이 쏟아져나온 사람들이 복작거리고 붐비는양이 바라보인다. 저저마다 꾸레미와 보따리들을 이고 지고 늙은이들을 부축하고 어린것의 손목을 잡은 사람들이 서로 엇갈리며 반달음박질로 오고간다. 황황한 그들의 얼굴이 낱낱이 보이는듯도 했다. 서로 찾고 웨치고 울고 한숨짓는 그들의 붐비는 소리가 충천한 먼지와 함께 하늘에 사무친듯 했다.

그런 광경에 넋을 잃다싶이 서있던 보패와 차돌이는 불현듯 옆에서 누가 북받치는 통곡을 참노라 《으흐흐.》 흐느끼는듯 한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서 돌아보았다.

지팽이끝에 얹은 두손등에 턱을 고이듯 하고 서있는 로승의 긴 눈섭으로 내려덮인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있었다. 붉은 가사를 수한 그의 척한 어깨는 소스라치게 떨렸다. 끓어오르는 울음을 참기에 숨이 꺽꺽 막히는듯도 했다.

보패와 차돌이는 더욱 놀라운 눈으로 마주보았다. 땀도 안 흘린듯 한 신선도속의 로인이 뜨거운 눈물과 북받치는 통곡으로 온몸을 떨고있는것이 놀라왔던것이다. 그러나 그런 눈으로 마주본것은 한순간일뿐 다음순간 보패는 차돌이의 눈에, 차돌이는 보패의 눈에도 뜨거운 눈물이 넘치는것을 보았다. 더 참을수 없는 보패는 로승곁에 쪼그리고 앉아서 흐느꼈다. 이쪽 풀판에 두다리를 내던지고 주저앉은 차돌이는 흐르는 눈물을 씻을 생각도 않고 성안을 내려다보고있었다. 문득 갑손이를 웨쳐 불러보고싶기도 했다. 그리고 보통벌머사니아주버니도 임욱경별장도… 또 뭐라고 이름지어 부를지는 모르나 지금 내려다보이는 온 평양사람들을 다 한꺼번에 목청이 터져라고 웨쳐 불러보고싶기도 했다.

아아, 어떻게 하면 이속이 씨원할것인가?

저렇게 황황히 붐비고 애타하는 사람들! 지금 보면 그 어느 누구나가 다 남이 아닌것 같았다.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동생이라고 부르면 그 누구든 조금도 이상해 않고 《오냐!》 대답하고 껴안고 같이 울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이런 느낌으로써 다시 서산을 쳐다보는 차돌이는 그 로승 역시 정다운 할아버지였다. 그뿐아니라 그의 뜨거운 눈물로써 제 마음이 정하고 맑게 씻기우고 또 넓게 트이는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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