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제 19 회


19. 차돌이와 보패


밤 2경(22시부터 24시까지)을 알리는 인정이 난지 이미 오래다.

한척의 작은 매생이가 이편 북쪽기슭에 배전을 스치다싶이 강뚝을 따라서 대동문앞으로 올라가고있었다. 희묽은 구름에 덮인 하늘은 젖빛으로 흐렸다. 중천에 열이튿날달이 떠있으나 희묽은 구름보다도 더 해쓱하게 흰 형태만이 보일뿐, 또 낮의 폭양을 받아온 대동강 역시 젖빛안개속에 잠겨있었다.

가만가만 저어가는 노대의 삐그덕소리가 약간 날뿐, 기름처럼 고요히 흐르는 물우를 미끄러지듯 거슬러올라가는 매생이에는 아직 애티가 벗지 못한 두 남녀가 타고있었다. 흰 모시적삼에 역시 흰 무명치마로 가뜬히 감싸세운 무릎우에 한쪽겨드랑이로 돌려낀 머리채를 올려놓고 붉은 갑사댕기코를 만지작거리는것은 열여덟살 나보이는 처녀였다. 그앞에서 귀밑채까지도 굵직굵직하니 칭칭 땋은 머리채로 체두머리를 하고 남은 끝을 한옆에 질끈 찔러서 까만 댕기가 그쪽 귀뿌리를 스치며 흔들리게 몸을 일면서 노질을 하는것은 역시 그 처녀와 나이 비슷한 총각이였다.

《이제는 꽤 무던히 왔다. 한참만 더 가면 된다.》

눈앞에 우중충 솟아 안개속에 은은히 잠긴듯 한 대동문을 쳐다보며 총각이 말했다.

《정말!》

처녀도 대동문을 쳐다보며 말을 시작했을 때였다.

《거 누구가?》

웨치는 소리가 들린다. 성벽그늘밑에서 저벅거리는 신발소리가 나며 어스름달빛에 번들거리는 창끝이 어청어청 다가온다. 기찰하는 우리 군사였다.

《우리는… 우리 사람이요.》

총각이 더듬더듬 대답했다.

《뭐? 우리 사람?》

《예.》

《웬 사람들인데 이런데서 배질을 하는거야?》

《예. 저기 저쪽 성밖엘 갔다가 늦어서 마상일 타고 와요.》

《어데 좀 보자구.》

꺼먼 벙거지의 륜곽이 크게 보이게 강기슭으로 나선 군사는 매생이를 굽어보며 말했다.

《아니, 게다 또 웬 처자(처녀)까지… 저놈들이 총질을 하든지 하면 어떡헐 작정인가?》

기찰군의 말은 반은 걱정으로 하는 꾸중이였다.

《그러게 아야 여차즉하문 올라뛸라구 기슭으루 내내 붙어서 와요.》

총각은 기찰군을 쳐다보며 말했다.

《집이 어덴데?》

《흥복(지금의 흥부)이야요.》

《흥복이? 그럼 상게두 한참길이게? 하기는 릉라도까지만 가면 좀 낫기는 하갔군. 조심해서들 가라구.》

나이지긋한 기찰군은 실로 걱정해서 말하고는 돌아섰다. 총각은 노질을 계속했다.

《하, 이거 벌써 몇번째야.》 하는 총각의 말은 좀 귀찮다는 투였다.

《정말 오늘은 너 나때문에 수고한다.》

몽롱한 안개속에서 맑은 이슬방울같이 빛나는 눈을 들어 총각을 마주보며 처녀가 치하하는 말이였다.

《얘, 난 너하구 이렇게만 가자면 이달음으루 양덕, 맹산까지두 가갔다.》

총각은 처녀의 치하를 이런 투로 받았다. 처녀는 고개를 숙이고 댕기를 만지던 손으로 배전에 찰락이는 물에 금을 그을뿐이였다.

《남들은 우정 피란들두 가는데…》

《엊그제 우리 오라버니가 왜놈들 하구 겨루어본데가 여기 어데 아니니?》

문득 처녀는 이런 딴전으로써 총각의 말을 잘라버리듯 했다.

련광정앞을 지나서는 펀펀히 드러난 조천석바위를 에둘러 매생이를 강 가운데로 내저어야 했다.

《아마 그렇갔지.》

총각은 좀 헐끔해진 모양으로 짧은 대답을 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조금이라도 강뚝이 멀어진 때라 더 불안하기도 했고 긴장도 했다. 다시 강뚝으로 나붙은 쪽배는 미끄러지듯이 장경문앞으로 거슬러올라갔다.

《거 누구가?》

또 기찰하는 소리다.

《우리 사람이야요.》

이번에는 처녀가 먼저 대답했다. 녀인의 음성이면 저편에서 곧 안심하리라 생각했기때문이였다. 역시 이 험난한 때 웬일이냐? 집이 어데냐? 물은 기찰군은 《철딱서니들이 없지. 지금이 어드런 때라구! 어서 썩썩 조심해서들 가라구.》 했다. 다시 노질을 하려고 할 때 문득 어데선가 울부짖는 사람의 비명이 들렸다.

《저놈들이 또 한놈 끌어내다 죽이는 모양이군.》

기찰군이 맞은편 강뚝을 건너다보며 하는 말이였다. 여기저기에 불그스레하게 보이는 우등불사이를 거쳐서 앞의 모래불로 우뚝우뚝 걸어오는 모양인 시꺼먼 그림자들이 어렴풋이 바라보였다. 그중에서 몸부림치는양이 보이는듯도 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알아들을수 없는 말이지만 애원도 했다, 발악도 했다 하는 소리다.

철썩- 강에 큰돌을 던진듯 물소리가 나자 비명은 뚝 그쳤다. 처녀는 제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희미하지만 우등불빛에 분명히 긴 검날이 번뜩였고 그러자 철썩- 소리와 침묵.

《저런 놈들, 저희놈의 목을 저렇게 자르거던.》

우리 군사의 말이다.

《왜 저희끼리 죽일가요?》

총각이 물었다.

《저놈들은 아마 싸움에 상한 저희 군사가 날래 낫지 않으면 귀찮아서 죽이는 모양이다. 접때두 몇놈 끌어내다 죽이는데 대구 앓는 소릴 하는걸 보니. 모르긴 해두 지금 죽인 놈은 어제 우리 편 활에 채 죽지 않구 상했던 놈일지두 모르지.》

《어제 그 활 잘 쏘던 사람 누군지 아시우?》

총각이 자랑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건 우리…》 하던 총각은 처녀의 깔끔한 눈찌에 금시 말문이 막히고말았다. 딴은 고충경이와 한동네 산다면 금방 집이 흥복이라고 한 말과 차이가 날것이다.

《우리 잘 아는 사람이라우. 아주바니, 수고하시소.》

매생이를 젓기 시작한 총각은 실은 자랑을 하고싶었던것이다. 이왕이면 지금 저와 매생이를 같이 탄 처녀가 바로 그 명궁수의 누이동생이라는것까지도 말하고싶었다.

매생이는 청류벽 그늘밑으로 들어섰다. 마침내는 반월도에 가리워서 일본군의 초막들도, 그앞에 피워놓은 우등불들도 보이지 않게 되였다. 오직 간간이 그 알아들을수 없는, 마치 무슨 산짐승들이나 원숭이떼가 싸우고 지껄이는듯 한 소리가 들려올뿐이다. 이제는 놈들의 진지가 마주보이는 위험한데는 벗어났다. 숨이 나갔다.

《얘, 네 고집두 정말 무던하더라.》

총각이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내가 무슨 고집?》

처녀는 놀랜 눈을 들며 물었다. 그런 눈에 제 눈이 시린듯 총각은 마주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청류벽 그늘밑으로 접어들면서부터 배를 중류로 띄웠던것이다. 여기는 누가 남의 말을 들을 사람이 없는데다. 총각은 여기를 별렀던것이다. 더욱 대담해질수 있는 기회가 이때였던것이다. 그러나 총각은 《고집아니구. 내 맘을 그렇게두…》 했을뿐 말문이 막힌다. 가슴만이 울렁거렸다.

《차돌아! 너 좀 가만있으렴.》

불쑥 보패가 떨리는 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지금 난 정말 맘이 아파죽겠다.》

《…》

《지금이니 말이지, 내가 오죽해서 남의 총각한테, 너한테 이런 수굴 시키면서 이맘에 여길 오갔니?》

처녀의 음성에는 차차 눈물이 배기 시작했다. 마침내는 치마폭에 얼굴을 묻고 제 무릎에 엎드렸다.

《오죽하면… 남들이 알면 나를 뭘루 알라구…》

보패는 느껴울기 시작했다.

《내가 잘못했다. 안 그러마, 정말 내 안 그러마.》

총각의 말소리도 비감해졌다. 부끄러웠다. 제가 모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도 사모해온 보패를 슬프게 했다. 무섭게도 했다. 나를 무엇으로 알가? 총각은 이같이 후회했다.

보패는 지금 영명사로 제사를 지내러 가는 길이다. 오늘이 돌아가신 형님의 대상날이였다.

고충경은 2년전에 상처를 했었다.

벌써부터 사돈댁 장인, 장모는 자식남매는 맡아서 길러줄터이니 재취를 하라고 권해온지 오랬다. 그러나 고충경은 그때 젖먹이였던 딸만을 외가에 맡기고는 지금 아홉살짜리 사내놈과 안살림을 누이동생인 보패의 손에 맡겨놓고 재취할 생각은 않는 모양이였다. 사돈댁의 권고뿐아니라 여기저기서 혼처들이 떠들어오기도 했다. 그 혼처들이 그리 기우는것도 아니였다. 30이 넘어서 중년 상처한 홀아비의 후취로서는 과남하다고 할만 한데도 있었다. 그러나 고충경은 번번이 응하지 않았다.

그런 오라비의 처사를 보패는 제탓이 아닌가도 생각해왔다. 철들기 전에 아버지를 여의고 아홉살때에 어머니마저 여읜 보패는 오라버니가 아버지대신이였고 형님이 어머니대신이였다. 착한 형님이였다. 실로 어머니다왔다. 그런 형님을 잃은 때는 어린 두 아이들보다도 보패의 정상이 더 보기에 딱했다.

이제 새댁을 맞아들인다면 어린 자식들에게보다도 우선 철든 보패에게 더 계모가 될것이 아닌가! 오라버니는 이렇게 생각하는것이나 아닌가? 사실 보패 제자신의 생각이 우선 그랬다. (고충경이도 그 점을 잘 알았다. 그렇기때문에 보패가 나이차기를 기다려서 출가시킨 후에 차차 재취를 하리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어차피 언제든 그래야 할바에는 조카들이 한살이라도 더 어려서부터 새 어머니의 손을 타도록 하는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하는 보패는 아무리 오라버니일이라도 혼인반사에 처녀가 참견할수 없어 말은 못하나 마음으로는 급하기도 해서 오라버니의 눈치만을 살펴왔었다. 그러면서도 또 한끝으로는 그런 생각은 집안모양이라든가를 생각해서 하는 생각이지 어린 조카와 물샐틈없이 지내는 지금이 그대로 좋기도 했다. 사람나름이겠지만 어떤 사람이 들어올는지 모를 새 오라범댁 생각을 하면 보패는 저 먼저 불안해지기도 했다. 그만치 보패는 어린 조카가 귀여웠다. 그런데 일전에는 그 조카와도 리별하게 되였다. 룡강 사는 맏처남이 와서 하루밤을 새우다싶이 무슨 의논을 하더니 고충경은 어린 아들을 외가로 보냈다. 그때 고충경은 보패도 같이 따라가라고 했다. 어린 조카를 아무리 저의 외가지만 남에게만 맡기기가 안심이 안되고 떨어지기도 싫고 해서 저도 따라가고싶었다. 그러나 과년한 처녀로서 형님도 없는 사돈댁에 가서 신세를 끼칠 생각이 없었다. 또 이 란시에 오빠의 곁을 떠나서는 못살것만도 같았다. 오빠의 보호없이는! 어련히 오빠가 사리를 잘 가려서 처신하랴. 오빠의 그늘밑에 있자. 또 내가 떠나면 오빠의 상답을 누가 보며 옷을 누가 시봉하리 하는 보패였다. 고충경이도 보패에게 당장 가라고는 안했다. 차차 가도 좋으리라고 했다. 어쨌든 어린 조카마저 떠나보낸 보패는 이 며칠동안을 남모르게 눈물로 보냈다. 열여덟 짧은 반생이나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대신이던 형님의 죽음으로 아프고 외롭던 많은 슬픔이 다시 생생한 추억으로 떠올라 서러워졌다.

설음속에 또 이 슬픈 기억의 날이 온것이였다. 고충경은 모르는듯 했다. 왜 모를리 있으랴만 아무 말도 안했다. 자식들이나 장발했다면 몰라도 이런 란시에 망처의 제사를 제가 차릴 생각은 않는 모양이였다. 보패가 그런 말을 비치였을 때 《그만둬라.》 한마디 했을뿐 그는 오늘도 어데론가 나가고 없었다.

그래도 보패는 그만둘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소상, 대상을 철모르고 지냈던 한까지 겹쳐 보패는 집에서 제사는 못 지낼망정 저 혼자서나마 그 혼백앞에, 그보다도 제 마음속에 새겨진 죽은이의 기억앞에 한자루의 초불을 밝히고 그앞에 꿇어앉고싶었다.

고충경은 그자신 선비였고 대대로 유생집안이라 절에 가서나 중을 불러서나 재를 올리는 가풍은 아니였다. 그렇지만 집에서 제사도 못 지낼 형편이므로 궁리한 끝에 생각난것이 시식이였다. 절에 가서 시식을 지낸다면 제문은 아니나마 그래도 중들이 고인의 혼을 부르고 명복을 비는 진언(불교에서 부처의 말)이라도 읽어줄것이 아니냐.

생각이 이에 미친 보패는 나중 오빠의 책망을 들을셈 하고 절로 찾아갈 결심을 했던것이다. 혼자힘으로 마련할수 있는껏의 제물을 장만하기도 했다. 이제는 영명사까지 가는것이 문제였다. 걸어서 성내를 꿰간다면 영명사에 다 가기도 전에 저편 성문이 닫힐것이고 따라서 시식을 지내고 밤으로 돌아올수도 없을것이였다. 보패는 여기서 더 큰 각오가 필요했다. 오빠가 알게 되면 꾸중을 들을셈 하고 차돌이에게 부탁해서 매생이로 가기로 했다. 보패는 이런 사정을 나많은 아주머니한테만은 말했다. 그 아주머니는 고충경이가 어데 간 때마다 와서 보패와 같이 집을 보아주는 늙은이였다.

한사정근처에서 매생이를 띄운것이 초경(20시부터 22시까지) 좀전이였다. 저편에는 승냥이인지 귀신인지 모를 왜적의 떼가 득실거리고 이편에는 우리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창검을 번뜩이는 군사들이 우뚝우뚝 서있는, 말하자면 등등한 살기로 가득한 강을 한밤중에 남의 총각과 단 둘이 한매생이를 타고 간다는것이 처녀의 몸으로서는 얼마나 무서운 모험이고 또 얼마나 수통스러운 일이라는것을 모르는바가 아니였다. 그러나 보패는 그보다도 더 애끊는 슬픔과 추억을 이겨낼수가 없어서 이 길을 떠났던것이다.

총각도 처녀의 그런 심정을 모르지는 않았다. 사랑하는만치 사랑하는 처녀의 슬픔이 곧 자기의 비감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가슴속에서 용솟음치는 청춘의 피는 그런 동정이나 사리보다도 더 뜨거워서 처녀를 실은 이달음으로 어데로든지 가서 마음껏 품어안아보고싶은 욕심도 없지는 않았다.

피차 침묵중에 더우기 혼자생각에 잠겼던 보패의 귀에는 백은탄 여울물소리가 어데서 갑자기 쏟아지기라도 하는듯이 소란스러웠다. 중천의 달도 안 보이게 깎아지른듯 솟은 청류벽의 한없이 깊고 짙어보이는 그림자속으로 그들의 쪽배가 들어섰다. 청류벽중턱에 제비둥지같이 붙어있는 산수암에는 불빛도 목탁소리도 없다.

《얘, 보패야!》

《왜?》

깊은 그림자, 소란한 물소리에 휩싸여 무시무시하던 보패는 차돌이가 정답게 불러주는 소리가 이번에는 미덥기도 했다. 그러지 않아도 노상 마음이 안 끌리는바도 아닌 총각이였다. 아니, 내심으로는 사랑하는 차돌이였다.

《너 내 맘만은 알지?》

다시 말을 시작한 총각의 떨리는 소리다.

《…》

보패는 또 물에 금을 그을뿐.

《이러다가 란이 나서 이제 너희는 너희대루 또 우리는 우리대루 떠나가구말게 되면 풍비박산 섶가랑잎같이 산산이 헤져서 서루 보지두 못하고 썩구말지 누가 아니?》

《넌 왜 또 그런 슬픈 소릴 하니?》

추연한 보패의 말이다.

《너두 슬프니?》

《…》

《그럼 네 맘두 내 맘하구 같구나.》

총각은 이상 더 말을 못했다. 너무 기뻤던것이다. 침묵중에 백은탄 여울물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다. 지금 청춘의 심장을 억세게 고동시키는 이들의 피가 되여온 대동강물의 소리인것이다.

《얘, 난 아무데도 안 가갔다.》

내려쏘듯 하는 백은탄 급한 물살을 거슬러 억세게 노질을 하며 총각이 또 말을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니 너의 오라버니두 여길 안 떠날 생각인가부더라.》

《글쎄.》

《글쎄가 아닌가부더라. 그러게 난생처음으루 제 포재를 그 많은 사람앞에서 보란듯이 내논거 아니가.》

《활 말이지?》

《그래, 그 선산님이 이번에 활질을 한건 앞으루두 왜놈하구 해본다는 제 마음보를 내놓은거 아니갔네? 그럴래면 여기 있을거구, 그러면 너두 여기 있을거구, 그럼 나두 어데 안 간다.》

《우리 오라버니가 여기 계시문야 나두 어데 안 가지.》

《얘 보패야, 남의 속 좀 작작 태우렴. 차돌이 너 안 가면 나두 안 간다구는 말 못하니?》

《그건 이 담에.》

《그래라, 모르갔다. 그런데 제기랄거, 나야 활을 쏘나 검을 쓸줄 아나. 석전 같으면 위-잉 딱! 하니 한번 해보갔는데.》

《돌팔매는 왜 어드래서? 참! 우리 오라버니하구 우리 집에 간혹 오는 중하고 이야기하는데 왜놈이 조총을 가졌대두 매번 장약하는 품이 들어서 이편에서 가까이 가기만 하면 연방 쏠수 있는 활이 더 빠르다구 하시면서 그러구보면 돌질 잘하는 석전군두 한몫할거라구 하시던데.》

《글쎄.》

이번에는 제편에서 《글쎄.》 한 차돌이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얘, 난 그 법근인가 하는 중이 너희 집에 자주 다니는것이 싫더라.》

《왜?》

《누가 아니? 혹시 너때문에 다니는지.》

《너는 그저… 그 사람은 중 아니니?》

《중두 중나름이지. 여북해서 사람들이 난봉중이라구 할라구?》

처녀는 말없이 총각을 책하듯 눈을 흘길뿐이였다.

매생이는 이미 청류벽 짙은 그림자를 벗어났던것이다.

이때는 전금문과 그 좌우로 련달린 성벽이 없었다. 그래서 이쪽 장경문에서 시작된 청류벽이 끝나고 또 저편에는 흥부쪽에서 뻗어온 금수산이 모란봉으로 맺히고 뚝 떨어져서 그밑의 부벽루가 눌러앉은 언덕으로 끝나고만 그 두사이에는 그저 환히 트인 동구로 남아있었다. (즉 지금 우리가 보는바와 같이 릉라도다리에서 전금문을 거쳐 모란봉을 둘러싸고 을밀대로 련결된 북성이라는것이 그때는 없었다.)

동구 저편에 솟은 을밀대우의 달빛을 받아서 지금까지 어둡던 강물과는 달리 동구앞의 강물은 은색고기비늘을 깔아놓은듯 흰 파문을 그리는 잔물살로 금실거렸다.

총각은 새삼스럽게 다시금 보패를 쳐다보지 않을수 없었다. 흰 김이 깔린듯 한 엷은 구름속의 은은한 달빛을 받아 더욱 희고 맑은 갸름한 얼굴, 반듯한 이마에 푸른 눈섭은 청산을 그린듯, 달을 쳐다보는 또렷한 두눈에는 별빛을 담았다. 그 아름다운 마음속까지도 꿰보이는듯 얼마나 맑은가! 얼마나 정숙한 처녀인가. 좀더 구수한 맛이 있었으면싶었다. 너무 점잖아서 그럴가, 좀 차겁게도 보인다. 지금까지 그만치나마 따스한 말을 해준것은 저 도툼한 입술탓이던가? 그러나 그 입술마저 좀 부드럽기는 하면서도 또 얼마나 단정히 맺힌것인가!

(내가 행실머리없이…)

총각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제발 애비없이 자란 후레자식소리만은 안 듣도록 해다고.》라고 걱정하시는 늙은 어머니의 말이 귀에 울리는듯도 했다.

흔히 《깜정차돌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는 이 총각 현수백이는 고충경이네 이웃에 사는 늙은 과부의 외아들이였다. 몇해전에 아버지가 작고하기 전까지는 현수백이도 서재에서 글을 읽었다. 반날갈이나 되는 밭을 뜯어 겨우 먹고사는 구차한 살림이지만 늙은 두 내외는 만득으로 본 외자식을 기성명이나 하게 한다고 글방에 보냈던것이다. 아버지가 작고한 후에는 서재(글방)는 못 가고 농사를 하게 되였지만 그래도 책을 아주 접어치운것은 아니였다. 그것은 어머니의 성벽때문이기도 했다. 어머니가 늘 이르는 말은 《너두 고충경이만큼 처신을 해라. 그 사람이 정말 쳐다보이는 사람이니라.》 하는것이였다. 이 《쳐다보이는 사람》이라는것은 고충경이가 벼슬을 한다거나 세도를 쓴다거나 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오직 점잖다는 뜻이다. 그런 어머니의 생각과 말은 아주 단순한것이였다. 대를 두고 이웃에 살아오지만 언제 한번 고충경의 의관이 삐뚤어진것을 본적이 없고 또 그 집안에서 큰소리가 나본적이 없다는것 그것이였다. 큰소리를 내지 않는다는것, 이것은 한 집안의 안해로서, 어머니로서는 그 이상 더 기쁘고 그윽한것이 없는 집안의 화목을 말하는것이다.

시골농가의 아낙네로 늙어온 차돌이 어머니에게는 벼슬이니, 세도니, 큰 재물이니 하는것은 엄두에도 없는 일이였다. 그런것은 모르기도 했다. 고충경이네는 대대로 탕건 하나 올려놓은 사람이 없었다. 부자라고 할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차돌이 어머니에게는 문제가 아니였다. 오히려 집에서는 자기네 터밭의 밭이랑을 타기도 하는 고충경이 더 갸륵하고 더 가깝게 생각되는 사람이였다.

자기 아들도 더 바랄것 없이 그저 고충경이를 닮았으면 하는 어머니는 겨울 농한기마다 서재에서 채 떼지 못한 책을 가지고 짬짬이 고충경이한테 가서 배우라고 했다.

그렇게 지내오던중에 늙은 어머니에게는 한가지 뜻하지 않았던 근심이 생겼다. 얼마전까지도 한이불안에서 재워온 아들의 잠꼬대중에 간혹 보패의 이름을 듣게 되는것이다. 명절에 보패가 지은 새옷을 입었을 때마다 《보패야!》라고 부르는 아들의 잠꼬대를 더 자주 듣게 된다. 보패가 차돌이의 옷을 짓게 되는것은 차돌이와의 품앗이였다. 고충경이의 처가 죽어서 일손이 하나 없어진 고충경이네는 간혹 남의 손을 빌어야 하는 때가 있었다. 그런 때마다 차돌이가 그 집 김을 매는 대신 보패는 바느질을 해주었다. 눈이 어두운 어머니는 같은 감이지만 바느질만이라도 깨끗하게 해서 입히고싶은 아들의 명절빔 옷을 부탁해온것이였다.

같은 열여덟살, 앞뒤집에서 자라온 총각, 처녀에게 있을만 한 일, 또 그럴만한 일, 그러나 그런 말을 비쳐보기조차 용기가 안 날만치 심히 기우는 혼처같이만 생각되는 어머니였다. 여느때는 제법 가깝게 생각해온 《점잖은 집안》 고충경이네지만 혼처로 생각할 때는 까마득히 먼것만 같았다. 더우기 보패- 그애는 너무 얌전하고 례절있고 범절이 까다롭고 그뿐아니라 지나치게 예쁜것이 흠인것도 같았다.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또 달리도 생각해본다. 지금까지 고려집에서는 어떤 가문에다 혼사를 맺어왔던가? 고충경이의 망처의 친정을 보자면 룡강 어느 촌의 한 농가였고 보패 고모의 시댁도, 왕고모의 시댁도 역시 그 비슷한 처지밖에 안된다. 이렇게 꼽아보는 늙은 어머니는 《우리두…》하는 용기가 안 나는바도 아니였다. 그러면서도 《애비없이 기른 자식》하면 고충경이 같은 사람은 더우기나 한팔 접어보지나 않을가 하는 생각에 주눅이 들고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실상은 어머니의 눈으로 보기에는 어느 한곳 나무랄데 없이 귀한 아들이기는 하면서도 《제발 남한테 후레자식소리만은 안 듣도록 해라.》 항상 이르는 말이 그 말이였다.

《더구나 점잖은 사람은 이편에서도 점잖은 대접을 해야 하느니라.》

《남이 보는데서 인사나 깍듯이 한다고 점잖게 대접하는 보람이 아니니라.》

이렇게 타이르던 어머니가 언젠가는 《남의 가문에 체면 깎이는 일은… 더구나 남의 집 백설같은 처자에게 티끌만치라두 흠절이 될만 한 소문이 나게 하든가 해서는 못쓰는 법이니라. 그건 큰 적악이니라. 그런 적악을 해서는 구만리같은 네 전정에두 해로우니라.》 이같이 밑도 끝도 없이 말을 비약시킨적이 있었다.

그것은 지난봄이였다. 차돌이는 놀랐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머니앞에 그냥 앉아있을수 없어서 강가로 달려나간 차돌이는 그 흔한 자갈돌을 가지고 한사정 석주들에 댔다떼듯 하는 솜씨로 돌팔매질로 그날의 남은 해구멍을 막았던것이다.

《남녀유별이라? 제기랄것!》

속으로 투정을 하는 차돌이는 《7세에 부동석》같은 문자가 단순히 례모에 관한 말만이 아니라 저한테는 마치 《못 올라갈 장나무는 쳐다도 보지 말라.》고 억누르는 말같기도 했다. 《어머니의 말씀도 그런 뜻이 아닐가?》 하면 더욱 언짢았다. 어쨌든 어머니의 말대로 채심을 하노라니 보패를 대하는 태도가 자연 버성겨질수밖에… 그러나 그것은 겉뿐이지 차돌이의 맘속은 더욱더 깊이 곪는것도 같았다.

그래오던차에 이밤에 영명사까지 데려다달라는 보패의 부탁을 받았을 때 차돌이의 마음은 막 날았다. 하도 기쁜김에 보패의 슬픈 심정은 미처 생각도 못했다. 이 기회에 그저 대담해지려고 제 마음에 채찍질을 했을뿐이였다. 그래놓고 지금 생각하면 저도 모질었고 보패는 애처로왔지만 어쨌든 제게 향한 보패의 마음만은 알아쥔듯 했다. 《그건 이 담에-》했던 보패의 그 한마디!

지금 차돌이는 배에서 내리기 전에 보패의 그런 말을 한번만 더 듣고싶었다. 그러나 지금 또 보패의 그 말을 자아내려면 저는 더 지싯지싯한 총각이 되고말것이였다.

이전페지   다음페지

facebook로 보내기
twitter로 보내기
cyworld
Reddit로 보내기
linkedin로 보내기
pinterest로 보내기
google로 보내기
naver로 보내기
kakaostory 로 보내기
flipboard로 보내기
band로 보내기
←되돌이

감상글쓰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