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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 회


18. 대동강싸움에 나선 고충경


《아! 스님-》

문득 법근이의 착급한 소리가 서산의 생각을 깨뜨렸다. 여전히 그 흉물스러운 탈바가지들을 쓴 왜놈들이 욱실거리는 모래불에서 하나, 둘, 셋, 넷으로 낡은 솜뭉치같은 연기가 불쑥불쑥 뿜어지는것이 뵈였다. 그러자 난데없는 태풍이 몰아치듯이 련광정 앞면을 막았던 방패들이 혹은 쓰러지고 자빠지며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련달아 생벼락을 치는듯 한 폭음이 울려왔다. 종사관 두사람이 경상을 당했다. 그들을 부축해낸 련광정에서는 편전을 쏘기 시작했다. 그러나 화살들은 강가운데 떨어져 흘러갈뿐이였다. 그 이상은 더 가지 못했다.

대안의 왜놈들은 더욱 기세를 올려 떠들었다. 그중의 몇놈은 조총을 가지고 물가로 더 가까이 나서서 불질을 계속했다.

도원수 김명원은 우리 궁수들에게 배를 타고 강 한가운데까지 나가서 활을 쏘라는 령을 내렸다.

련광정밑에서 전통을 메고 활을 잡은 5~6명의 궁수들이 쾌속선 두척에 갈라탔다.

성첩에 붙어서서 내려다보던 법근이가 부지중 《아!》 소리를 질렀다. 벙거지에 야청군복을 입은 군사들사이에 갓망건에 흰 직령으로 평복을 한 사람이 하나 끼여있었다.

《고공! 여보슈, 충경공-》

법근이가 웨쳐부르는 소리에 활과 전통을 들여놓은 매생이에 막 올라타려던 그 사람은 돌아서서 이쪽을 쳐다본다. 흰 얼굴에 새까만 나비수염이 표나게 보이였다.

《나두 같이 갑세다. 스님, 저두 갈랍니다.》

법근이는 미역졸가리같이 꾸기고 찌든 검정가사와 장삼을 벗기 시작했다.

《아는 사람이냐?》

《예.》

《너는 활두 없이 가면 어떡헐테냐?》

서산은 법근이의 허리의 검을 보면서 물었다.

《배라도 저어주지요.》

《그런 일로 저 위험을 무릅쓴단 말이냐?》

서산의 말은 걱정만이 아니라 책망하는 언사이기도 했다. 적들은 지금도 계속 불질을 하고있다.

법근이는 미처 대답을 못했다.

《저분은 혼자서도 할수 있길래 혼자 나섰게 하는 말이다.》

《그래두 좀 도움이 되겠지요.》

법근이는 장삼소매에서 꺼낸 수건으로 머리를 싸매며 대답했다.

《…》

서산은 다시 말이 없었다. 그러나 다심하달가? 지금 그의 얼굴에는 전에없이 착잡한 주름살이 얽히는 표정이 나타났다.

말잔등에 걸터앉듯이 성첩을 넘으면서 서산의 얼굴을 다시 보는 법근이는 문득 속이 뜨거워지는듯 했다. 그 맑고 흰 눈섭사이의 미간이 흐려진듯도 한 서산의 얼굴에서 법근은 지금 《나》를 그냥 보낼것이냐 말것이냐 하는 다심한 걱정을 보았던것이다. 그것이 법근이는 기뻤다. 비단 존경하는 스님이 아니라도 누구든 이렇게 자기를 아끼고 걱정해준다면 마음이 뜨겁고 기쁜 법이다. 또 한편 죄송하기도 했다. 실은 《그래두 좀 도움이 되겠지요.》 한것은 후에 보태서 생각한 말이다. 우선 오래간만에 뜻밖에 만난 고충경이가 반가왔고 그를 따라 저도 한번 모험을 해보고싶었던것이다. 어쨌든 기쁜 법근이는 한층 더 용기가 나기도 했다.

서산은 법근이가 내려가는것을 굽어보면서 혼자 고개를 끄덕이였다. 우선 그 몸이 경첩한데, 또 그 몸과 같이 그 마음까지도 날렵한데, 앞뒤를 재노라기에 굼뜬 늙은이들이 따를바 아니게 발랄하고 담대한 행동이 여하튼 가상했다.

법근이는 성돌짬에다 손톱발톱을 박듯이 더듬어가며 반쯤 내려가서는 훌쩍 몸을 날려 강변에 내려섰다.

《고공께서 이 웬일이시오?》

《법근대사는 또 웬일이요?》

이미 매생이에 올라앉아서 이렇게 되묻는 고충경은 빛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버릇대로 두손바닥을 마주 비비며 소리없이 웃었다. 법근이 역시 별로 대답할 말이 없는듯이 따라웃었다.

《매생이를 저어주실테요? 그럼 나가봅시다.》

고충경은 자리를 옮겨 앞으로 나앉았다. 노를 잡은 법근이는 앞선 두척의 배를 따라 저어가기 시작했다.

기와장을 부시고 성돌을 깨뜨리던 철환이 지금은 낮추 날기 시작했다. 매번 화약을 달이고 알을 쟁여야 하는 화승총들이라 련발로 콩볶듯 하는 불질은 아니지만 4~5명이 쏘는 총알은 련달아 강물에 떨어졌다. 석양바람에 약간 출렁거리는 잔물결을 채는 소리가 차차 가까와지기도 했다. 왕청같이 빗나가는 놈도 있지만 어떤 때는 바로 등뒤에서 큰 고기가 뛰노는듯이 물결을 퉁기기도 했다.

《몇번 찾아가서두 못 뵈였는데 그샌 어델 가셨소?》

법근이는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실은 제 말이 혹시 떨리지나 않을가 해서 바재이기도 했지만 가만있기는 더욱 싫어서 우정 한담 같은 말을 시작했다. 그리고는 만족했다. 제 말소리가 제법 태연했기때문이다.

《말씀 들었소. 살림이라구 하댔으니까… 가만있자!》

배머리에 나앉아 앞을 바라보며 차근차근한 소리로 말하던 고충경은 초연이 자욱한 적진으로 역시 얼굴을 돌린채 뒤손질부터 하며 말을 이었다.

《배를 좀 아래루 흘려저으시우. 앞의 배를 따라가면 총알받이가 더 심할것 같소.… 벌써 그랬을걸 그랬군.》

끝의 말을 혼자말로 중얼거리는 고충경은 무척 긴장해보였다. 본시 칼칼한 낯이 더 해쓱해지고 얼굴도래의 선이 더욱 날카로와졌다. 그의 말대로 매생이를 엇비슷이 흘려저어가는 법근이는 (그 생긴대루 얌전하고 차진 샌님이였구나.) 하고 생각했다. 지금같이 긴장하고 흥분하게 되는 경우에는 오히려 지꿎게 너스레를 꺼내는, 말하자면 일부러 허풍을 떨어볼 사이도 없이 흠칫 목이 졸아들게 총알이 귀전을 스쳐갔다. 염라대왕의 사자란 놈이 한번 찡긋 추파를 해보이며 휙! 휘파람을 불고 지나간듯도 했다. 다시 고개를 들자 한번 하늘을 우러러 크게 웃어보고싶기도 한 법근이는 뒤를 돌아보았다.

성첩우에 조그마한 로인의 얼굴만이 바라보인다. 그보다도 흰나비 한쌍같은 눈섭만이 보이는듯도 했다. 원인무목(멀리 있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이라지만 그 은실같은 눈섭밑의 눈까지도 보이는듯 했다. 그뿐아니라 아직도 이편을 바라보는 스님의 그 뜻밖의 다심한 시선이 몸에 느껴지기도 하는 법근이는 숙연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중들은 언필칭 일체 중생의 인연을 끊어야 한다고 말한다. 실은 끊어버릴 인연도 별로 없는만치 인정에 굶주린것이 많은 중들의 신세였다.

그동안 고충경은 갓과 중치막을 벗었다.

활 한바탕거리가 되게 강심에 나뜬 두척의 쾌속선은 동안을 두고 나란히 배를 세웠다.

《자, 우리두 이쯤 배를 세울가요?》

고충경이가 돌아보며 말했다. 바람결따라 매운 화약냄새가 풍겨왔다. 고충경의 료량대로 이쪽에는 총알이 확실히 덜 왔다.

주위에 총알이 자주 떨어지는 저편의 두 쾌속선에서는 벌써 활질을 시작했다.

《배가 돌지만 않도록 하시구 젓지는 마시우.》 하고 고충경은 활에 살을 먹여 들었다. 살이 날았다. 그러나 맞지 않았다. 다음 살도 총수 한놈의 머리우를 스쳐지나갔을뿐이였다. 활을 잡던 손을 내리고 머리를 흔든 고충경은 한번 큰숨을 내쉬며 앞을 응시하고 앉았다.

《배가 흔들려서 그럴가요?》

그의 관자노리에서 진득이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본 법근이는 실수가 제게 있는것 같아 물었다. 《아니.》라는 뜻으로 고개를 흔든 고충경은 역시 적들을 바라보면서 제 나비수염을 몇번 감빨았다. 무엇이 난처하거나 깊이 생각할 때 하는 버릇이였다.

저편 쾌속선에서는 계속 활질을 했다. 화살이 네댓씩 한꺼번에 날기도 했다. 그러나 이편 사람이 먼저 하나 상했다. 바람결에 돌아가는 배를 바로잡으려고 일어섰던 군졸이 어깨에 철환을 맞았다.

고충경은 활을 다시 들었다. 물결에 드노는 매생이와 호흡을 맞추듯이 만궁으로 밟아든채 까딱않고있던 그의 활줄이 핑- 울었다. 살이 날았다. 그러자 뒤의 련광정, 대동문, 장경문과 그사이의 성첩들에서 《와-》 웨치는 환성이 일어났다. 모래불에 한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금방 발포하려던 한놈이 울꾸리에 살이 박혀서 번뜻 자빠졌다. 그옆에서 장약을 하던 놈과 장약이 끝난 총을 들고 목표를 살피던 적들까지도 주춤했다. 적들의 허한 몇순간이였다. 이쪽 궁수들의 시위소리가 연해 났다. 그 어느 화살엔가 또 한놈이 어깨죽지를 맞고 조총을 떨어뜨렸다. 적들은 지껄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모래불은 비였다. 그러나 아주 달아난것은 아니였다. 이편 화살이 못미칠만큼 물러선 적들은 풀판에 엎드려서 다시 불질을 시작했다. 이제는 맞은편쪽으로 더 다가들지 않으면 활질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련광정에서 징을 울렸다. 군사를 거두라는 신호였다. 두척 쾌속선이 돌아섰다. 이쪽에서도 매생이를 돌렸다. 저어가던 법근이가 문득 큰소리로 웃었다.

《왜 웃으시오?》

《잔등이 선뜩하는걸 보니 나는 진땀이 난 모양인데 고공은 어떠시오?》

《안 그럴리가 있소.》

사실 퍽 피로한 모양으로 배창날에 내려앉아 다리를 뻗고있던 고충경은 강물에 한손을 잠그며 말했다.

《본시 서툰 솜씬데다 손이 떨리기까지 하던데요.》 하며 웃은 고충경은 금시 또 정색하여 말했다.

《우리가 활 한바탕안에 다가들기만 하면 장약하는품이 안 들어서 빨리 손쓸수 있기때문에 저놈들의 조총두 그리 무서울것은 없을것 같소.》

이때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와락 밀어뜨린듯이 매생이가 흠칫하고 한발쯤 앞에서 물이 퉁겨졌다. 까맣게 물복이 앉은 배전에 한번 줄칼질을 한듯 생생한 자국이 드러났다. 또 적의 화살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모래불에 적의 궁수가 수십명이나 나섰다. 멀리서 계속 불질을 하는 몇놈의 철환보다도 화살이 더 어지럽게 날아왔다.

고충경은 다시 활을 잡았다. 두척의 쾌속선에서도 다시 활질을 시작했다. 고충경이가 활을 쏘는 동안 법근이는 한손으로 매생이를 저으면서 한손으로는 빼든 검으로 날아오는 화살을 후려 분질렀다.

일변 물러서며 일변 활질을 하던 대동강의 작은 접전은 곧 끝났다. 이편의 배들이 멀어지자 적들의 총과 활질도 그쳤다.

배들이 대동문앞에 닿자 련광정에서는 돌아오는 그들에게 큰문을 열어주라는 분부를 내렸다. 협문이 아니고 큰문으로 맞으라는것이다. 그리고 쾌속선으로 나갔던 군사들을 불렀다. 남은 두사람도 응당 불렀을것이였다. 그럴 의사가 물론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알고본즉 두사람중의 하나가 바로 어제 행궁앞에서 검을 뺐던 중이라는것이다.

어제의 일은 그전 여드레날 일같이는 추궁을 안했다. 그러나 범인이 목전에 나타난 이상에는 그저 둘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 그를 불러 본다면 그 가상한 의기를 먼저 칭찬은 하더라도 다음에는 죄를 주어야 할것이였다. 그렇게 된다면… (류성룡은 생각했다.) 혹시 아직도 저기 서있는 서산로승에게까지도 루가 미치게 될지도 모를것이다. 그 젊은 중이 서산을 따라온 중인것도 알기때문이였다. 이 일은 있었지만 없었던것으로, 설혹 있었더라도 이편에서는 모르는것으로 덮어두는것이 현명한 처사였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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