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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안긴 품

 

마침내 그가 그토록 동경해마지 않던 새 세상이 밝아왔다. 미제식민지통치의 아성이였던 서울이 인민군대에 의해 해방된것이다. 김수조는 끓어오르는 환희와 격정을 안고 인민의 세상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 일떠섰다.

서울해방후 상급조직의 지시에 따라 남조선무용가동맹 선전부장으로 임명된 그는 무용가들속에 들어가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의 위대성에 대하여, 공화국정치의 정당성과 우월성에 대하여 열정에 넘쳐 해설선전하였다. 한편 의용군에 탄원해나선 수많은 예술인들을 적극 고무해주고 전선위문대를 조직하여 내보내는 사업도 활발히 벌려나갔다.

그후 그자신도 의용군에 탄원하여 남조선연극인동맹 중앙위원회에서 일하던 맏형과 함께 전선지구경비사령부협주단에 들어가게 되였다. 리규봉과도 거기서 다시 만나게 되였다.

조직된지 얼마후 협주단에서는 핵심적인 예술인들로 두개 소대를 편성하여 한 소대는 태백산줄기를 타고 령남지방으로, 다른 한 소대는 대전을 거쳐 호남방향으로 내보냈다. 김수조는 분대장으로서 진격하는 인민군부대들을 따라 안동, 포항계선까지 나가 전선위문공연을 보장하였다.

한달이상의 전선공연을 마치고 협주단에 돌아왔을 때 그들은 뜻밖에도 후퇴명령을 받게 되였다. 엄혹한 시련의 시각이 닥쳐온것이다. 사랑하는 부모형제들과 고향땅을 뒤에 남겨두고 먼길을 떠나야 하는 그들의 심정은 천근만근으로 무거웠다. 리규봉의 회상담은 당시의 모습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한다.

후퇴를 앞두고 협주단에서는 예술인들에게 두달분의 생활비와 담배 몇보루를 내주면서 집에 다녀오라고 외출시간을 주었다. 리규봉은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돈과 담배를 내놓았다. 이전에 월사금이나 책값을 어머니에게 부탁할 때마다 죄스러운 마음을 조이군 하던 그였으니 얼마나 기뻤으랴.

그런데 돈을 보고 어머니가 대뜸 《야, 이걸루 빚을 물게 됐구나.》 하는것이 아닌가. 리규봉은 기가 막혀 인젠 세상이 달라졌으니 그런 걱정 안하셔도 된다고 어머니를 일깨웠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천원짜리 한장만 남겨두고 어머니에게 내놓았던 돈을 도로 거두어넣고말았다는것이다. 정말 어머니가 딸자식이 처음으로 가져온 돈을 한푼도 쓰지 않은채 남에게 주어버리면 어쩌나싶어서였다. 리규봉은 자기가 그 돈을 건사해두었다가 어머니를 위해 쓰리라 생각하였다.

그날 그는 난생처음 어머니와 함께 음식점에도 가고 아이스크림과 생과자도 사드렸다. 허나 어머니는 생과자를 들지 않고 손자를 주겠다고 남겨놓는것이였다. 리규봉의 막내조카를 념두에 두고 그러는것이였다. 그 막내조카가 눈섭이 너무 고와서 언젠가 리규봉이 면도칼로 조카의 눈섭을 밀어주면서 이 눈섭이 다시 돋아나면 고모생각을 하라고 말한적도 있었다.

리별할 때 어머니는 전차가 사라질 때까지 떠날줄 모르고 딸을 바라보며 오래도록 서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어머니의 마지막모습으로 남게 될줄이야…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자기가 왜 어머니에게 그 돈을 다 내놓고 오지 못했을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미여져온다고 리규봉은 말하였다.

그런 심정은 김수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집에 장정이라군 한사람도 없었다. 맏형은 그와 함께 협주단에 있었고 둘째형은 미제의 식민지통치를 반대하는 투쟁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여 청주형무소에서 피살되였다. 의용군에 입대하였던 넷째도 대전해방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오로지 늙으신 어머니가 철부지조카애들과 형수 그리고 나어린 막내동생을 데리고 홀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쓰라린 천대살이를 다시는 되풀이하고싶지 않았기에, 더우기 김일성장군님을 민족의 어버이로 끝없이 따랐기에 그들은 결연히 북으로 발길을 향했다. 그때 김수조의 나이는 19살이였고 리규봉은 17살이였다.

인생은 끊임없는 선택의 련속이라고도 볼수 있을것이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 만나야 할 사람과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 그런 수많은 선택들가운데서 설사 잘못된것이라 할지라도 뒤에 가서 얼마든지 바로잡을수 있는 선택들도 있지만 단 한번의 선택으로 한생이 결정되는 선택들도 있기마련이다. 하다면 19살에 북행길을 결심한 김수조의 선택 역시 그의 뒤날을 긍지와 보람으로 가득차게 한 운명적인 선택이였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인생을 좌우하는데서 선택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것이 자기가 결심한 길을 끝까지 가겠다는 신념이고 의지이다. 그런 의미에서 북으로 간 그들의 길은 선택의 길인 동시에 신념과 의지의 길이기도 하였다.

전선지구경비사령부협주단의 간고했던 후퇴로정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지면을 통해 전한바 있다.

후퇴도중 김수조는 내내 대오의 선발대로 행동하였다. 보총을 메고 먼저 앞서가서 숙영지를 정해놓고는 대렬이 도착하면 다시 떠나군 하였다.

후퇴대렬에서 제일 고생한 사람들은 녀성들이였다. 그중에서도 리규봉 같은 애어린 처녀들의 고생이 막심했다. 그렇게 먼길을 행군해보기는 처음이였던지라 춘천근방에 이르렀을 때에는 다리가 퉁퉁 붓고 자그마한 문턱조차 넘기 힘들어하였다. 처녀들의 발이 물집으로 부르튼것을 보고 박섭 등 나이든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는 처녀들에게 이거 안하면 대오에서 떨어진다고 타이르며 딱총을 놓아주었다. 어찌나 힘겨웠던지 리규봉은 때로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 숨어 엉엉 울기도 하였다는것이다. 그러면서도 대오에서 떨어지면 절대로 안된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따라가군 하였다.

피로가 극도에 이를 때면 걸어가는것이 아니라 마치 온몸이 둥둥 떠가는것만 같았다. 이따금 지쳐있는 처녀앞에 김수조가 나타나 자기의 배낭을 붙잡으라고 말하군 하였다. 그 배낭마저 놓치면 영영 대오에서 떨어질것 같아 리규봉은 총각의 배낭을 꼭 부여잡고 걷군 하였다.

김수조는 그러는 처녀에게 멀리 구름밑의 고개를 가리켜보이며 저 아리랑고개를 넘으면 어디라고, 다음 아리랑고개를 넘으면 또 어디라고 이르며 용기를 안겨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한고개, 한고개 아리랑고개를 넘으며 북을 향해 행군해간 그들은 끝끝내 그처럼 소원하던 김일성장군님의 품에 안기고야말았다.

그들이 지친 몸을 끌고 만포에 들어선것은 새까만 밤이였는데 그곳 사람들이 그들에게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줴기밥을 쥐여주더라는것이다. 그때 뜨거운 눈물과 함께 줴기밥을 삼키던 일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리규봉은 추억하였다.

전선지구경비사령부협주단이 해산된 후 다른 무용가들과 함께 국립예술극장 무용단에 소환된 김수조는 전시예술공작대 제1대 대장으로 임명되여 재진격의 길에 오른 인민군대를 따라 황해도 옹진일대에까지 나가 공연활동을 진행하였다. 그후에도 그는 문화선전성 중앙이동예술단 무용부장으로 사업하면서 전선의 군인들과 후방인민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고 그들을 전쟁승리에로 고무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 바쳤다.

그들은 결코 순탄한 조건에서 공연활동을 벌린것이 아니였다. 결전을 앞둔 전호속에서 공연하기도 하고 신해방지구의 해안연선에서 자체로 무장보초를 서가면서 공연하기도 하였다.

한번은 눈이 두텁게 쌓인 고지우에 올라가 공연한적도 있었는데 공병삽으로 고지우의 눈을 한군데 모아 다져 네모나게 눈무대를 만들고 그우에 가마니짝 둬개를 잘라 펴고는 공연을 진행했다. 군인들이 눈무대를 중심으로 빙 둘러앉아있었기때문에 가수는 나가면 눈무대주위를 빙빙 돌면서 인사도 하고 노래도 불렀다. 무용수들은 그들대로 눈무대우의 좁은 공간에서 적당히 움직이면서 춤을 추었다. 그러다가도 아차하는 순간에 무용수들의 발이 가마니밖으로 나가면 영낙없이 무대우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그럴 때면 관람하던 군인들이 벌떡 일어나 무용수를 부축하여 다시금 무대우에 올려세웠고 무용수는 아무 일도 없었던듯 춤을 계속 추었다.

그들도 전투원들이였다. 전선과 후방의 가설무대를 전호로 삼고 춤과 노래를 무기로 삼아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피로써 지켜낸 이 나라의 애국자들이였다. 김수조도 그들중의 한 사람이였다.

드디여 전쟁이 끝났다. 전후의 조국은 재더미를 털며 일떠서기 시작했다. 창조와 건설의 우렁찬 노래소리가 방방곡곡에서 울려왔다.

이 땅이 바로 새 삶의 터전이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걸고 지켜낸 인민의 세상이였다. 하고싶은 일도 많고 이루고싶은 포부도 많았다. 김수조는 가슴벅찬 흥분으로 온몸을 끓이며 청춘의 나래를 한껏 펼쳤다.

그는 국립예술극장의 무용배우로 오늘은 중앙의 극장무대에서, 래일은 건설의 동음드높은 복구건설장에서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안겨주며 춤을 추고 또 추었다. 비단 국내에서만이 아니였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에는 중국을 방문하는 예술단성원으로, 1955년에는 제5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는 우리 예술단 성원으로 대외무대들에서도 영웅조선의 기상을 남김없이 떨치는데 이바지하였다.

세계청년학생축전과 동유럽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오자 극장집단에서는 그와 리규봉의 결혼식을 차려주었다. 북에 들어온 이후 그때껏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 생활해온 두사람이였다. 전쟁의 불길도 함께 헤쳐왔고 전후의 무대들에도 함께 오르군 하였다. 합숙의 한지붕아래서 생활하면서 팥죽도 함께 쑤어먹군 하였다.

1955년의 한해가 저물어가던 어느날 그들은 칠성각에서 결혼식을 하였다. 비록 고향을 멀리 떠나 부모들의 축복은 받지 못했어도 집단과 동지들이 두사람을 따뜻이 축복해주었다.

1958년 9월 8일 김수조는 그렇게도 뵙고싶던 어버이수령님을 처음으로 만나뵙게 되였다.

그날 동평양체육관에서는 어버이수령님을 모시고 3천명에 달하는 예술인들이 출연한 음악무용서사시 《영광스러운 우리 조국》이 성황리에 공연되였다.

공화국창건 10돐을 계기로 우리 조국이 걸어온 승리와 영광의 력사를 천리마시대에 이르기까지 년대기적으로 보여준 음악무용서사시 《영광스러운 우리 조국》은 해방후 우리의 음악무용예술이 이룩한 성과들을 집대성한 대규모의 종합예술공연이였다.

공연을 보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창작가들을 만나주신 자리에서 무용단 부단장으로 무용창작에 참가한 김수조의 손도 잡아주시며 이제는 신인창작가들이 이렇게 자랐으니 마음이 놓인다고, 해방후 예술인부대를 꾸리기 위하여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예술인들을 하나하나 찾아서 묶어세웠는데 이제는 3천명이라는 대부대로 되였다고 못내 만족해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신인창작가들이 절대로 자만하지 말고 당의 기대에 보답하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시며 다시금 그의 손을 굳게 잡아주시였다.

그후 수령님께서는 그에게 자신존함으로 된 표창장과 선물까지 보내주시였다.

김수조는 감격했다. 그토록 흠모하여마지 않는 위대한분을 만나뵙고 그분의 사랑에 넘친 축복까지 받아안았으니 이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에 있으랴. 참으로 하늘땅을 다 준대도 바꾸지 않을 영광이였다.

자기를 바라보시며 젊었다고 그리도 대견해하시던 수령님의 그날의 영상은 김수조의 가슴속에 어버이의 자애깊은 모습으로 한생토록 소중히 간직되여있었다.

1962년 11월 30일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음악무용극 《밝은 태양아래》를 대극장에서 보아주시고 김수조를 비롯한 창작가들을 또다시 만나주시였다.

정중히 인사를 올리는 김수조의 손을 잡아주시며 수고가 많았다고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신 수령님께서는 이 동무가 얼마전에 창작한 무용 《관개수는 흐른다》가 중국을 방문하는 우리 예술단의 공연종목에서 제일 인기가 있다고 한다는데 이번에 음악무용극 《밝은 태양아래》에서 무용 《홍수와 싸우는 청년들》을 또 잘 만들었다고, 이 동무는 《물박사》라고 하시며 호탕하게 웃으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음악무용극 《밝은 태양아래》에 인민상을 수여할것을 제의하시며 김수조 등 창조성원들과 함께 기념사진까지 찍으시였다. 수령님을 모시고 찍은 그 기념사진은 대를 두고 전해가는 영광의 가보로 오늘도 김수조의 집에 정중히 모셔져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온 그는 안해에게 우리는 오직 어버이수령님 한분만 믿고 평양으로 왔는데 오늘 우리의 선택이 천백번 옳았다는걸 다시금 느꼈다고 긍지에 겨워 말했다고 한다.

진정의 고백이였다.

불과 서른해 남짓한 세월이였지만 암흑과 광명의 두 극단을 체험해오면서 참다운 세상, 참다운 품에 안길 때라야만 참다운 인생을 누릴수 있다는것을 심장으로 절감한 그였다.

정녕 수령님의 품은 그의 청춘을 꽃펴주고 희망찬 미래를 안겨준 위대한 어버이의 품이였다.

은혜로운 품속에서 김수조는 그후 국립예술극장 무용단 단장으로, 국립무용극장과 국립가무단의 예술부총장으로 어엿하게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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