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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 회


13. 왕 선조와 서산대사


이런 시골길에서는 볼수 없었던 행차가 나타났다. 우선 눈에 뜨이는것은 그 복색들이였다. 시커먼 털벙거지에 말린 시뻘건 상모를 너풀거리는 구종들이 견마를 잡은 네댓필 말우에는 공작꼬리를 늘어뜨린 안 올린 전립에다 울긋불긋한 동달이 천릭을 떨어뜨린 장령들이 앉아있었다. 그런데 그 행차 맨앞에는 그뒤의 일행과는 달리 소탈하게 차린 한 선비가 있었다.

큰길까지 다 갔던 서산대사는 그가 바로 왕이라는것을 알았다. 역시 한 구종에게 견마를 잡혔을뿐 왕의 위의를 갖출만 한 절월도 일산도 없었고 호위하는 군사는커녕 길잡이 전배 하나 세우지 않았지만 그는 역시 왕이 틀리지 않았다.

보통갓에다 굵다란 모시직령을 입은 왕 선조는 붉은 술띠만 아니면 한낱 유생의 행색이나 다를바없었다. 오히려 그가 탄 말의 굴레 좌우에 세층으로 늘어뜨린 붉은 술과 역시 붉은 실로 수놓은 푸른 가죽다래와 은입사 쇠등자같은 치장으로써 왕의 기마라는것을 알릴뿐이였다. 어제 밤 소낙비에 평양성안은 몹시 질었던 모양으로 행전과 발막신에 진흙이 튄 발로 은입사 쇠등자를 눌러짚고 안장앞턱의 은매미를 두손으로 잡고 앉은 왕은 무슨 생각에 잠긴 모양으로 눈앞에서 까부는 말갈기만을 굽어보고있었다.

몇이랑 안되는 조밭을 사이에 두고 서서 합장하고 섰던 서산이 고개를 든 때는 행차중의 맨끝에 선 정철의 말이 지나가고있었다. 역시 전립이 삐뚜름하니 기울어진 머리를 들어 사면을 둘러보던 그의 눈은 한순간 서산대사의 시선과 마주쳤다. 지금도 취안이 몽롱해서 서산대사를 못 알아보는지 혹은 《이눔! 언감생심 량반을 마주봐? 괘씸한 중놈같으니.》 해서 그런지 흘기듯 목자를 돌리고말았다.

지금 우연히 눈앞을 지나가는 왕과 정철을 보게 된 서산은 3년전의 일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아까도 잠간 스친바이지만 그것은 기축년에 벌어졌던 소위 정여립의 반역사건이라는것이였다. 물론 여기서 그 이야기를 자세히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 서산대사와 왕 선조와의 교섭이 그때 시작되였고 또 앞으로도 있는만치 극히 간단하게나마 이야기해둘 필요는 있다.

한때 벼슬을 하다가 무슨 불만으로 해서인지 호남의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서 재야의 검객, 력사들을 규합하기 시작한 유림출신인 정여립이란이가 있었다. 그의 공모자라는것이 뚱딴지로 황해도 어느 고을에서 드러났다는것이 사건의 발단이였다. 그러니만치 정여립의 일당을 잡으라는 왕명을 가지고 달리는 선전관들의 말발굽소리는 저 호남 한끝에서 이 서도에까지도 요란히 울렸고 금부라졸은 안 가는데 없이 8도에 퍼졌다.

정여립은 잡으러 간 금부도사앞에서 자결하고말았다. 그러나 사건은 그것으로써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더 확대되였다. 근 2년간에 걸쳐 수천명의 희생자를 내게까지 그 사건을 확대시킨것은 동인이니, 서인이니 하는 당파싸움이 아닐수 없었다. 역옥(반역죄사건)사건의 장본인인 정여립이 동인이였던만치 들고일어난 서인들은 붙는 불에 키질을 하는 격이였다. 서인의 거두로서 추관이 된 정철은 하나의 염라대왕으로 나타났던것이다.

2년간이나 끌면서 나날이 확대된 살륙의 참화는 마침내는 동인에게만 한한것이 아니였다. 말바로 봉건적암흑시대중에도 피비린내나는 공포시대의 막이 열리였다. 사람의 운명은 조석을 헤아릴수 없었다. 더우기 다소나마 누구라고 세상에 알려진 사람의 생명은 보존하기 어려웠다. 언제 누구한테 먹혀서 끌려갈지 몰랐다. 누구와 사혐이 있었거나 시기를 받아온 사람이면 《저자도 그 일당이라》는 고자질 한마디로써 당장 염라대왕의 손으로 넘어간 례도 얼마든지 있었다.

서산대사도 그 례의 하나였다. 무업이라는 중의 무고를 받아 한성으로 잡혀갔다.

금부라졸들에게 꺼들려 발이 땅에 닿는둥마는둥 끌려들어간 대궐안의 한 전각, 그것은 이번 반역사건의 련루자들을 왕이 친히 국문하기 위해서 좌기를 차린 국청이였다. 문간에서 거적을 씌워 묶어내는 시체와 길을 어기며 들어선 넓은 뜰, 그 한가운데 놓인 피에 젖은 형틀 좌우에는 곤장과 철퇴와 은빛, 금빛으로 번뜩이는 도끼들을 든 금부라졸과 군사들이 늘어섰다. 삼엄한 국청의 위의라기보다도 인간도살장의 축축한 광경이였다. 들어서자 우선 코를 찌르는것은 피비린내였다. 세모래를 섞어 편 황토와 박석들에는 꺼멓게 멍이 들었을뿐아니라 아직도 생생한 선지피와 살점들까지도 널려있는것이 보이였다. 물매질을 하듯이, 아닌게 아니라 더 고통을 주기 위해서 사람의 몸에 물을 끼얹어가며 철썩철썩 내려패는 곤장끝에서 튀여난것이다.

서산은 거기서 피에 젖은 형틀우에 동그라니 올려매인 몸으로 왕을 보게 되였던것이다.

왕은 쳐다보이는 전각대청 한가운데 놓인 호상에 걸터앉아있었다. 정철이도 그때 본 사람이다. 그는 사헌부, 사간원, 형조의 당상관들과 또 한옆에 지필묵을 갖추어놓고있는 문사랑과 형조, 승지들과 같이 분합밖에 부복해있었다.

문초는 시작되였다. 국청 돈대우에 대령한 선전관이 전상의 말을 받아서 《네 듣거라.》, 《바로 아뢰여라.》고 연거퍼 내리는 호령소리는 추상같았다.

추관 정철은 처음부터 서산에게 있을리 없는 정여립의 관계를 추궁했다. 그러다가 홀출 《이 시는 어떤 심술에서 나온것이냐?》고 묻기 시작했다.

그것은 서산이 젊었을 때 금강산 향로봉에 올라가서 얻은 한수의 즉흥시였다.

일찍부터 한 선승으로, 한 시승으로 명성이 높았던 서산을 시기해온 중 무업은 서산이 역모에 참가했다는 증거로서 그의 《향로봉 시》를 들었던것이였다.

추관 정철은 그 시의 《만국의 도성은 개미집같고 백으로 천으로 꼽는 뭇호걸이라는것들은 초파리같다.》는 구절에서 서산의 반골이 드러났다는것이였다. 그러니까 그런 반골이 있는자가 이번 역적모의에 참가하지 않았을리가 없다는것이다.

국문은 여러날 끌었다. 그동안 서산의 여윈 몸에는 곤장이 여러번 내려지기도 했다. 혹시 왕이 자리를 떠난 때면 정철은 느물거리는 태도로 제 모가지를 도리는 손짓을 해보이며 죽음으로써 위혁을 하기도 했다.

추관 정철을 위시해서 이번 역옥사건을 맡아 치죄하는 조정의 관료들이 서산을 다루는데는 단순히 역모의 한 혐의자로서만이 아니라 인간이하의 천인으로 대했던것이다. 그것은 그럴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다. 조선봉건왕조에서는 제도상 중의 신분은 천인이였다. 세나라시대로부터 고려말에 이르기까지 봉건량반계급의 지배적사상이였던 불교를 그 지위로부터 끌어내리고 그대신 유교를 지배적사상으로 대치하기 위한 정책은 조선봉건왕조 5백년간의 일관한 정책이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교의 사찰을 축소하고, 그 물질적기초인 토지를 박탈하고, 승려의 수를 제한하고, 심지어는 중들로 하여금 수도에는 발을 못 들여놓게 하고, 중 아닌 속인에게는 어린애들한테까지라도 허리를 굽혀 절을 하도록 강제했다.

서산도 그러한 천인의 신분에 속하는 중인것은 물론이였다. 그러므로 중 서산을 치죄하는 정철을 비롯한 유림출신의 관료거두들은 우선 자기네와 적대되는 이교도를 그리고 또 량반으로서 천인을 대하는 립장이 아닐수 없었다. 그렇기때문에 서산이 한낱 동냥중이였다면 또 모를가. 그렇지 않고 그는 불문의 한 거두일뿐아니라 그 덕망으로, 그 인품으로, 그 시문으로 일반사람들에게까지도 명성이 높다는것은 아니꼽고 괘씸한 일이기도 했던것이다. 그러니만치 서산을 다루는데는 더 엄혹했을뿐만아니라 자연히 야유와 랭소가 없을수 없었던것이다. 그같은 야유와 랭소는 정신적고문이 아닐수 없는것이다.

그러한 국청에서의 서산의 태도와 초사에는 이채가 있었다. 그의 대답은 대개가 짧았다. 묻는 사실이 있으면 있다, 없으면 없다는 단마디뿐이였다. 왜 없을밖에 없다든가, 그럴만한 리유가 있다든가 하는 설명이나 변명 같은 군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그뿐아니라 그의 태도는 지금 자기가 친국을 당하는 자리에서 피에 젖은 형틀에 매여있다는것을 잊은듯 한 때가 많았다. 그렇다고 망연자실한 상태가 아니라 묻는 말에 대답한 다음 순간에는 곧 자기 세계로 돌아가서 그때까지 해온 생각의 실머리를 다시 이어가는듯 한 태도였다. 또 그렇다고 고개를 숙이거나 표정이 심각해지는것도 아니였다. 오히려 그는 많이 하늘을 우러러보는편이였다. 그렇다고 만사를 다 허무에 돌린다거나 혹은 허의자탄하는 표정도 아니였다. 때마침 가을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형틀우에서 그 백설같이 흰 눈섭을 들어 맑은 하늘을 쳐다보는 서산은 지금도 지팽이를 가볍게 옮겨놓으며 유산길에 나서기나 한듯이 담담한 얼굴이였다.

그같이 하늘을 많이 보는것은 전상의 왕이나 정철 같은 사람들이 노리는 시선을 피하기 위한것도 아니였다. 그의 깊고 맑은 눈은 서슴지 않고 전상의 사람들을 주시하는 때도 있었다. 그런 때면 마치 서안에 세운 손으로 턱을 고이기라도 한듯이 얼굴도 시선도 표정도 까딱없이 상대방을 응시하듯 바라보았다. 그렇더라도 그 얼굴과 시선에는 당돌하거나 오만한 기색 같은것은 없었다. 무엇을 찾아볼수 있다면 어떠한 처지에서라도 흔들리지 않고 담담할수 있는 만만한 자신이랄가? 아니, 그 만만한 자신 그것도 그대로 로출된것이 아니라 그런 자신으로써 안받침된 태연이라는것이 더 정확할것이다. 그같은 태연은 금시 사라지고 바뀌는 표정이나 작태가 아니라 일종의 정신적인 체중이라고도 할것이였다.

《듣거라. 일찌기 선릉(9대왕 성종)께서 〈불도의 페해를 뉘 모르랴. 인륜을 몰각하고 백성의 재물을 탕진하는 그 페해는 양주, 묵덕보다 우심한바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이단을 숭신치 않도록 하면 그만이지 죽일것까지는 없다.〉 하신 전교를 내리시와 너의 불도들의 명맥이 상금까지 부지해오거늘 그 망극한 성은을 저버리고 네 어찌 감히 불궤를 꾀했느냐?》

문초에는 매번 이런 말이 되풀이되였다.

《소승은 념두에도 없는 일이외다.》

그때마다 이같이 단마디 대답만을 해오던 서산이 한번은 문득 말문이 열린듯 한적이 있었다. 《향로봉 시》로 또 추궁을 받던 때였다.

그때도 잠시 하늘을 쳐다보던 서산이 전상을 바라보며 말을 시작했던것이다. 추관들의 심문에 답변한다기보다도 조용한 자기 승방에서 손님을 대하여 자기가 사랑하고 반한 명산이야기를 하는듯 한 말이였다. 그는 금강산과 묘향산이 그 얼마나 아름답고 장하다는것을 저자신스스로 황홀한 경지에서 이야기했다.

지금 그 잔잔하고도 또렷한 어음과 말의 억양과 또 이따금 자기 말에 스스로 웃는 나직한 웃음소리를 그대로 전할수 없는 이상 그의 말을 다 옮기는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는 산을 사랑하는 사람이였다.

독자들중에는 서산대사가 명산을 찬양한 시를 알고있는 사람은 아실것이다. 산중에도 금강산과 묘향산을 사랑한 그는 또 그중에도 웅장하고 아름다운 묘향산이 더욱 좋았으므로 그 이름을 따서 스스로 서산이라고 불렀다. 묘향산을 일명 서산이라고 불렀으므로 자기의 호를 《서산》으로 삼았다.

살벌한 국정에서 형틀에 결박되여 앉은 서산이 문득 금강과 묘향의 례찬을 시작했다. 그것은 《홀출 금강산》이라고도 할수 있는 일이였다. 그러나 국청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귀를 기울였다. 담담한 그의 이야기는 결코 장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산의 웅건한 규모와 구름우에 솟은 만장봉상에서 굽어보는 천인계곡과 광활한 전망은 듣는이들의 눈앞에도 방불히 떠오르는듯 했다.

그같이 수려하고 웅대한 산속에 들어가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스스로 겸허할줄 아는 덕을 배우게도 되지 않겠는가? 이러한 여운이 들리는듯도 한 서산의 이야기에 누구보다도 움직인것은 그때의 문사랑 리항복이였다. 그는 우선 놀랐다. 또 한끝 서산이라는 중이 괘씸하기도 했다. 어느 앞이라고 감히 그렇게 태연할순들 있으며 게다가 또 《홀출 금강산》격으로 국청을 우롱하다싶이 하는가? 그만치 담대한 위인인가? 혹은 교활하달만치 로회하게 늙은 중놈인가? 어쨌든 보통은 아니다. 역모라는 죄명을 쓰고 그 피에 젖은 형틀에 올려매우기만 하면 누구나 낯빛 이 흙빛이 되고 반죽음이 되다싶이 기가 꺾이는것이 보통이다. 그도 그럴수밖에 없는것이 죄가 있건 없건간에 그 형틀에 올라앉았다가 살아나간 사람이 별로 없기때문이였다.

그런데 한낱 중인 서산의 그 배짱은? 쉽게 대담 혹은 로회라 하더라도 그것은 놀라운 로회이고 무서운 대담이 아닐수 없는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천치바보든가. 물론 그를 천치바보로 볼 사람은 저자신 천치가 아니면 없을것이다. 어쨌든 당당했다. 매질을 하는 집장사령들까지도 함부로 치기가 어려운 눈치였다. 그래서 때로는 《홀장(때리는 시늉만 하는 매질)말고 용대없이 치렷다.》 하는 엄포까지도 내렸다. 그러면서도 (어느모로 보나 헛되이 늙은 인간은 아니구나!) 하고 왕을 비롯하여 전상에서 내려다보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아니할수 없었던것이다.

그때만 해도 지금보다 더 젊었던 리항복은 류성룡을 찾아가서 일생을 산중에서 늙어온 중이 역모가 무슨 역모며 그의 몇십년전 시를 지금에 다 끌어붙이려는것은 억지도 푼수가 있지 않느냐고 분개했다.

류성룡이도 처음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피뜩 정신을 차린듯이 정색한 그는 국청의 문사랑은 그같이 흥분하거나 편벽되여 누구를 두둔하는 법이 아니라고 준절히 일렀다.

《황차 지금이 어떤 때라고…》 하고 뒤를 누르기까지도 했다.

그후에도 얼마 더 끌기는 했으나 서산은 결국 무죄로 석방되였다. 왕의 처분이였다. 그뿐아니라 왕은 서산을 불러 보기까지도 했다. 왕도 이전부터 글 잘하는 시승으로서 서산대사의 이름을 익히 들었던것이다.

편전에서 서산을 불러 본 왕 선조는 한폭의 대를 그려서 그에게 주기까지도 했다. 그 자리에 입대해있던 대신들은 이때에 또 한번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천안을 지척에 뵈옵고 왕의 진필을 받았다! 그것은 궁중 부중의 측근자중에도 흔치 못한 영광이였다. 황차 이제까지 대역죄인으로 치죄받던 중 서산의 처지로서는 마치도 석쇠우에서 타죽어가던 한마리 고기새끼가 피뜩 구름우로 뛰여올라 룡이 된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라고도 할것이였다. 그것은 놀랄만 한 운명의 장난이라고도 할것이였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욱 놀라운것은 지금까지 죽음앞에서 그랬던것과 마찬가지로 역시 그같은 영광앞에서도 담담한 서산의 태연이였다.

서산대사는 물론 어전에서 갖추어야 할 례법대로 숙연히 절하고 받들었다. 그러나 그뿐, 당연히 그럴만한 감격, 감읍의 눈물도, 이마를 조아리는 소리도 없었다. 선가(불교)에서 이르는바 《불립문자》(불교의 도는 마음으로 전하는것이지 문자로 전하는것이 아니라는 불교의 말) 그대로랄가? 이렇다 하고 자기의 소회를 사뢰는 중언부언 같은것도 없이 담담히 물러나갔을뿐이였다. 그렇듯 표연히 사라지는 그의 먹베장삼자락은 《성황, 성공, 돈수백배》식의 번례다의(번다한 례법과 격식)와 문자들로 가득찬듯 한 이 궁중에다 한가닥 청량한 산바람을 풍겨놓고 가는듯도 했다.

만일 이때 왕이 서산을 알아보았다면 행차를 멈추고 그를 불러 보았을것이다. 서산은 좀만 더 걸음을 빨리 했으면 앞으로 나가서 왕앞에 부복할수도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왕의 행차를 멈추고까지 할 말이 없었으므로 그저 동안을 두고 경의를 표했을뿐이였다.

(왕과 조정이 참말 평양을 떠나는구나.)

서산은 묘향산에서 또 어제 류한 동금강암에서도 이미 들었던것이다.

(그러면 종당은 어데까지 가게 될고?)

서산은 또 이런 생각도 하면서 다시 지팽이를 옮겨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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