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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회


8. 인민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들


왕이 평양에 들어온것은 5월 7일이였다. 대동관에 대가를 머무른 왕은 이튿날에는 평양성의 나많고 점잖다는 선비들을 불러서 평양성을 끝까지 지키겠다고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한 왕과 조정의 의사는 선비들을 통하여 널리 백성들에게 전파되였다. 또 그 이튿날 조정의 문무제관을 거느리고 몸소 함구문루에 거동한 왕은 평양의 지형을 손수 가리켜가며 적을 막아 성을 지킬 공론들을 했다. 또 며칠후에는 각 고을과 읍들에 령을 내려 많은 군량을 평양성으로 날라들이게 하는 한편 일본군이 거쳐 올수 있는 지방의 창고들의 곡식은 오는 가을에 회수할것을 조건으로 하여 그곳 백성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적이 략탈하거나 불사를것이 없도록 했다. 다음에는 올해의 전세는 란시니만치 다시 답험(논밭에 가서 실지로 조사)하는 거페를 덜고 작년의 례에 준해서 받도록 령을 내렸다. 이같은 조치들은 평양을 지키기 위한 장구지책이고 또 그러한 장구지책을 쓸수 있는 가능성과 자신을 보이는것이라고도 할수 있는 일들이였다.

그뿐만이 아니였다. 림진강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서 강변군 3천여명을 추려보냈다.

또 왕은 앞서 말한바 당시의 령의정으로서 국왕으로 하여금 거연히 한성을 버리게 했다는 책임문제로 파직시켰던 리산해를 이번에는 또 강원도의 평해로 정배를 보냈다. 이런 거조는 왕과 조정이 다시는 적앞에서 더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사를 더욱 선명히 한것이라고도 할수 있었다.

평양백성들은 마음을 놓았다. 기뻐했다. 자기네의 고향을 왕과 그의 조정과 함께 지키게 된다는데 더욱 마음이 든든했고 기뻤던것이다. 한때 《왕이 종시 이 평양까지 오구야말게 되였다.》는 원망을 겸한 불안감이 사라지기도 했던것이다. 그들은 왕이 거동하는 길거리에 깔은 새 황토를 될수록 밟아 더럽히지 않도록 삼가하기까지도 했다. 자기네가 존경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이에게 대해서는 이런데까지도 마음을 곱게 쓰는것이 백성들이다.

그러나 왕과 그의 조정은 오래지 않아서 동요하기 시작했다.

림진강의 방어선이 무너졌다. 5월 18일에 림진강을 지키던 우리 군사가 허무하게도 전멸되다싶이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온것은 20일이였다.

그 직후에 충청, 경상, 전라 3도의 5만여명의 군사들이 룡인에서 괴멸된 사실도 있었지만 적이 림진강을 건느게 되였다는 소식은 그보다도 더 큰 동요를 조정에 일으켰다. 림진강을 무사히 건너서면 적은 또 이 평양의 직통로로 들어서게 되는것이다. 그러니만치 왕과 조정은 전날 적이 조령을 넘었다는 소식을 들은 때와 마찬가지로 당황하고 떨었다.

평양성안팎의 민가에서들도 곳곳에서 곡성이 일어나고 그들의 슬픔을 말하는 흰 댕기가 녀인과 아이들의 머리에서 많이 보이게 되였다. 림진강방어선으로 뽑혀나갔던 평양군사들중에는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태반이였다. 요행 살아서 돌아온 군사들의 말에 의하면 림진강의 패전은 어처구니가 없다고 할만치 허무맹랑한 일이기도 했다.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피를 흘리지도 않고 한성을 점령한 일본군은 조선왕을 추격하여 또 북으로 진군해오던 길에 림진강에 걸려서 주저앉게 되였다. 강을 건늘 배가 없었던것이다. 배라는 배는 다 거두어서 이편 북쪽강변에 붙들어매두고있는 도원수 김명원의 군대와 한줄기 강을 사이에 두고 10여일이나 마주 노리고만 있던 일본군의 선봉장 소서행장은 마침내 한 꾀를 냈던것이다. 즉 자기 진에 늘어세웠던 기치와 창검을 걷고 군막들에 불을 지르고 뒤로 물러갔다.

김명원도원수의 막하에 있던 신할은 곧 강을 건너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자고 했다. 그것을 기회라고 본것이였다. 이때 김명원도원수는 미타해하면서도 이렇다할 방책도 내놓지 못했으나 그것을 반대했다. 그것은 기회가 아니기때문이였다. 역시 그렇게 생각했기때문에 류극량이라는 한 로련한 별장도 반대했다. 그러나 이 기회에 한번 큰 공을 세우겠다는 야망만이 앞서서 신할은 전투를 기피한다는 리유로써 류극량의 허옇게 세인 머리를 베이려고까지 했다.

《머리를 땋고부터 군사노릇을 해온 내가 이제 내 한목숨이 아까와서 그런것은 아니요. 내딴은 나라일을 그르칠것이 걱정돼서 하는 말이였소.》

이런 말을 한 류극량은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배에 올랐다. 이때 마침 당도했던 평양군사들은 한응인의 재촉에 밥도 변변히 먹을 사이가 없이 전투에 참가하게 되였다.

강을 건넜다. 곧 적들이 파놓은 함정으로 뛰여든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전투서렬을 펼 여유도 없었다. 천지를 진동하는 조총소리와 번뜩이는 창검과 함성이 넓은 강변을 뒤덮어 일어났다.

한 지휘자의 경망하고 무모한 오산때문에 위험에 빠지기는 했으나 조선군사들은 용감히 싸웠다. 그중에도 《한평생 군사로 늙어온 내가 사내대장부답게 죽을데는 여기다.》 하며 적진중으로 돌진한 별장 류극량이 끝까지 용전분투하는 모습은 더욱 장쾌한것이였다. 활로써 십여명의 적을 죽인 류극량별장은 화살이 떨어지자 말을 몰아 창검이 겹겹한 적진중으로 달려들어 한칼로써 수십명의 적을 무찌르고 죽었다.

이러한 림진강싸움의 소식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온 군사들의 이야기로써 널리 퍼졌다. 이야기를 서로 옮기고 전하는 백성들은 무모한 한응인, 신할따위나 무능한 김명원 같은 관료들의 오산이나 실수를 원망하고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물론 그 점도 없지는 않았다.) 그보다도 헌헌대장부 류극량의 영웅적인 모습을 즐겨 묘사하여 서로 전하고 들어가며 감탄하기 위하여서였다. 이러한 경향은 누가 그런것이 마땅하다고 해서 그런것이 아니라 그들의 본능이다싶이 한 대중의 흥미였고 그들의 지향이였다.

이보다 앞서 더욱 백성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된 이름이 있다. 그것은 리순신이다. 지난 5월 7일과 8일 량일간에 옥포와 적진포에서 일본병선 40여척을 섬멸했다는 리순신장군의 첫 첩보는 평양뿐아니라 온 조선백성들의 감격과 환성을 불러일으켰고 기백을 북돋우었다. 이 첫 승리는 임진조국전쟁 전기간에 걸쳐 리순신장군이 쟁취한 위대한 승리와 공훈중의 한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위대한 승리와 공훈의 서막이였던것은 물론이고 앞으로 7년간에 걸친 국란을 승리로써 총결한 조선인민의 영웅성과 애국주의의 표본이였고 따라서 승리에 대한 자신심의 첫 싹이였던것이다.

이때 백성들이 애석하게 아끼는 또 하나의 이름이 있었다. 그것은 양주에서 일본군을 맞아 싸워서 60여급을 베이고 적을 격퇴한 신각이였다. 물론 한낱 작은 승리에 지나지 않는것이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한이래 팔도강산이 반이상이나 적들에게 강점된 륙지에서의 첫 승리였던것이다. 말하자면 그 역시 옥포바다에서와 같이 륙지에서도 승리한 조선인민의 승리의 첫 서막을 보여준 한사람이였다. 그러나 그는 비명에 죽었다. 신각은 도원수 김명원이 한강을 지킬 때에 그 막하의 부원수로 있었다. 한강을 버리고 물러설 때 그는 도원수를 따라가지 않았다. 그때문에 조정에서는 그의 목을 베여올리라고 선전관을 파견했다. 파견된 사형리와 길을 어기여 신각의 승전을 알리는 첩보가 왔다. 조정에서는 그의 형을 취소하기 위해서 부랴부랴 사람을 띄웠다. 이번에는 그 사람과 길을 어기여 신각의 머리가 왔다.

이같이 애석히 죽은 신각의 이름도 역시 백성들속에 널리 전해졌다. 이 역시 조정의 경솔한 조치를 원망하거나 비난하기 위해서보다도 (물론 그런 점도 없지는 않았다.) 그가 보여준 승리의 서막에서 백성들은 승리에 대한 자신과 희망의 서광을 느꼈기때문이였다. 그렇다고 이때의 백성들이 전체 전국의 위기를 몰랐다거나 또는 주책없이 동요하는 조정의 귀족관료배들의 무능무모하고 경솔한 처사에 대하여 무조건 관대하거나 무관심하고 단지 어떤 자그마한 승리와 장쾌미에 취하여 그것을 례찬하는것으로만 만족하는 뼈빠진 락천가들이여서 그런것은 결코 아니였다.

오히려 그들은 자기네의 고향을 직접 지켜야 할 사람들의 누구보다도 절박한 처지에서 전국을 보고있었고 따라서 동요하는 대동관을 감시하는 눈으로 지키고있었던것이다.

사실 대동관안의 왕과 조정은 술렁술렁 끓고있었다. 말바로 어쩔줄을 모르고 허둥지둥하는 대신들과 그 이하의 관료들- 대신들중의 한사람인 류성룡은 자기의 란중일기 《징비록》에서 림진강의 패보가 이르렀을 때에 얼마나들 놀랬는가를 말하면서 그 일례로 평안감사 송언신 같은 사람은 《혼불부체》였다고까지 묘사했다. 즉 얼혼이 다 나간 사람같았다는것이다. 물론 송언신 한사람만이 아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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