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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금별메달에 비낀 한생 

 

김 수 조(연출가)

 

 • 1931년 10월 2일 서울시 종로구에서 출생.

 • 1950년 7월 남조선문학예술총동맹 무용가동맹 선전부장.

 • 1950년 11월 10일부터 국립예술극장 무용단 단원, 단장.

 • 1995년부터 피바다가극단 총장.

 • 2010년 11월 30일 사망.

 • 김일성상계관인, 공화국영웅, 인민예술가.

                                                           

 

 

우리 인민이 자랑하는 예술가들중에는 피바다가극단 총장이였던 김수조도 있다. 그의 이름은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개페막행사,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들인 《백전백승 조선로동당》, 《아리랑》 등 세계를 경탄시킨 기념비적걸작들과 더불어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있다.

그는 공화국공민으로서 받을수 있는 명예를 다 받은 복된 인간이였다. 김일성상계관인이고 인민예술가이며 문예인들중에는 흔치 않은 공화국영웅이다.

과연 그는 어떤 행운을 타고났기에 만사람이 부러워하는 영광의 절정에 올라설수 있었던가.

 

 

항쟁의 거리에서

 

그는 가난과 고생을 숙명으로 걸머지고 태여난 불우한 소년이였다.

김수조의 고향은 서울 종로구이다. 그가 태여날 때 아버지는 품팔이군이였고 어머니는 삯빨래와 삯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하고있었다.

그가 8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식구들을 먹여살려야 할 무거운 짐이 어머니의 여린 어깨우에 들씌워졌다.

어머니에게는 올망졸망한 다섯 아들이 매달려있었는데 제일 큰아들이라야 그때 겨우 12살에 불과했다. 어머니가 혼자 힘으로 그 자식들을 먹여살리느라 죽을 고생을 다했다. 어찌나 고생했던지 목이 너무 가늘어져서 제대로 돌리지조차 못했다고 한다.

풋절이가 돋아날 때면 어머니는 광나루를 건너가 남의 집 남새밭에서 풋절이를 솎아주고는 품삯으로 솎아낸 풋절이를 한짐 이고 오군 하였다. 고추철이면 남의 집 고추를 따주고 나머지를 훑어오군 하였고 김장철이면 남의 집 김장을 해주고 대신 버린 배추잎들을 거두어와서 김장을 담그군 하였다.

다섯 아들중에 셋째인 김수조가 어머니일을 많이 거들어주었다. 어머니가 광나루를 건너갔다 올무렵이면 어린 수조는 어머니를 마중가서 이고 오는 짐을 넘겨받아 집까지 메오군 하였다.

겨울에는 흔히 큰 뚝배기 하나에 시래기를 넣고 끓인 된장지지개가 반찬으로 올랐다. 그러면 다섯 자식이 저마끔 덤벼들었는데 지지개우에 서로마다 경계선을 긋고 옆에서 침범할가봐 숟가락으로 방어하면서 순간에 요정내군 하였다. 어머니가 밥을 퍼가지고 들어설 때는 이미 뚝배기가 텅 비고난 뒤였다.

어렸을 때 김수조는 옹근연필을 한번도 써보지 못했다. 늘쌍 남들이 쓰다 버린 꽁다리연필을 똘똘 만 종이에 끼우고 공부하였다. 옷도 새옷을 사입는다는건 엄두도 내지 못했고 항상 형들이 입던 옷을 물려받아 입군 하였다.

학교에 싸가는 밥곽에는 1년내내 간장에 담그었던 고추잎이 밥 한구석에 놓여있었다. 중학입학시험을 치르는 날 부자집 애들은 부모들과 함께 승용차까지 타고 와서 점심시간에 명절처럼 한상 차려놓고 먹는데 김수조는 자기의 초라한 밥곽을 남들이 볼가봐 산에 올라가 혼자 먹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래도 시험에서 합격되여 그가 경복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였을 때 어머니는 기뻐할 대신 학비를 댈 일이 아름차서 한숨만 쉬였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가난속에서 자랐다. 후날 김수조는 자식들을 키우느라 그리도 고생해오신 어머니를 하루라도 편히 모셔봤으면 원이 없겠다고 외우군 하였다고 한다.

그가 중학교에 들어간 이듬해에 조국이 해방되였다. 해방을 맞이한 김수조의 가슴은 앞날에 대한 꿈과 랑만으로 부풀어올랐다.

하지만 머지않아 사람들의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고 해방의 환희는 분노로 변해버리고말았다. 《해방자》의 탈을 쓰고 상륙한 첫날부터 미군은 조선인민에게 불행만을 강요하였다.

미군정은 우리 민족의 리익에는 아랑곳없이 철두철미 자국의 리익만을 추구하였다. 왜정때와 다름없는 식민지통치가 실시되고 겨레를 참담한 수난속에 몰아넣은 민족분렬정책이 강행되였다.

미국이 두동강낸것은 단순히 삼천리강토만이 아니였다. 반만년세월 혈연을 맺고 살아온 겨레의 마음마저 두동강내버렸다. 어제날까지 한형제로 지내온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반미냐, 친미냐를 따지게 되였고 좌와 우로, 애국과 매국으로 갈라서게 되였다.

준엄한 선택의 시대였다.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자기가 가야 할 길을 정해야만 했다. 김수조도 마찬가지였다.

상급생들의 영향을 받아 사회과학소조에 들어간 그는 거기서 착취사회의 부패상에 대하여, 위대하신 김일성장군님의 항일무장투쟁과 새 조국건설로선에 대하여 많은것을 깨닫게 되였다.

태여나서부터 착취사회가 들씌운 빈궁과 천대를 진저리나게 겪어온 그에게 있어서 절세의 애국자이신 김장군님께서 세우시는 인민의 나라는 희망의 등대가 아닐수 없었다. 피눈물겨운 지난날의 생활체험이, 정의에 끓고 리상에 불타는 열혈의 심장이 그에게 주저없이 김일성장군님을 따라야 한다고 뜨겁게 웨치고있었다.

김수조는 투쟁의 대오에 들어섰다.

그는 반미투쟁에 적극 참가하였으며 미제가 식민지노예교육을 강요하기 위해 《국대안》이라는것을 조작했을 때에는 그것을 반대하여 경복중학교내의 학생조직을 책임지고 근 1개월간의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반동적인 학교당국은 그를 비롯한 진보적학생들을 강제로 출학시켰다. 출학후 김수조는 조직의 지시에 따라 경복중학교와 배화녀고 등 여러 학교들을 맡아 학생운동을 지도하였다.

투쟁은 날이 갈수록 더욱 격렬해졌다. 미제와 매국역적들의 망국적인 《5. 10단선》을 반대하는 거족적항쟁의 불길이 타오르자 그는 격노한 군중과 함께 매국노들의 선거사무실을 습격하는 등 과감한 투쟁에 서슴없이 뛰여들었다.

그 나날에 김수조는 여러번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가 처음으로 경찰에 체포된것은 1948년 6월경이였다.

원래 경복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경찰의 끈질긴 추격을 피해 수시로 거처지를 옮겨다니던 김수조는 그날 어느 정도 경계가 해이된줄 알고 잠시 집에 들렸다가 그렇게 되였던것이다. 경찰에 붙잡혀간 그는 경복중학교에서 있은 《국대안》반대 동맹휴학의 주모자로 치안재판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감방생활을 하다가 40일만에 석방되였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또다시 항쟁의 거리로 달려나갔다. 그 시기 남조선전역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와 관련하여 인민의 대표들을 선출하기 위한 서명투표가 거세차게 벌어지고있었다.

마침내 자기의 운명과 미래를 맡길수 있는 참다운 조국, 인민의 새 나라가 세워진다는 소식은 김수조의 젊은 심장을 격정으로 끓어번지게 하였다.

그는 폭압의 광풍이 기승을 부리는 속에서도 학생들속에 들어가 새 생활이 창조되고있는 북녘의 현실을 널리 소개선전하였고 그들을 인민대표선거를 위한 서명투표운동에 힘차게 불러일으켰다.

그러던 그는 아지트가 발각되는 바람에 다시금 경찰에 체포되였다. 출옥후 두달 남짓해서 당하는 두번째 체포였다. 전과 다름없는 가혹한 고문이 가해졌지만 김수조는 끝까지 조직의 비밀을 지켜냈다. 결국 첫번째와 마찬가지로 치안재판에 회부된 그는 40여일간의 옥고를 겪은 끝에 풀려나왔다.

몇달동안에 두번씩이나 체포되여 옥살이를 하다나니 그의 몸상태는 말이 아니였다. 출옥하여 집에 들어가니 어머니가 도수장에 가서 사온 돼지꼬랭이로 탕국을 푹 끓여주었는데 어찌나 입에 맞았던지 김수조는 하나도 남기지 않고 말끔히 그릇을 비워버렸다고 한다.

한달이 넘어서야 그는 겨우 병석에서 일어나 걸어다닐수 있게 되였다. 조직에서는 그에게 남조선연극인동맹에서 사업하면서 무용가동맹을 내올데 대한 과업을 주었다. 그때까지 남조선의 진보적예술인들을 망라한 음악가동맹이나 연극인동맹 같은 조직들은 있었어도 아직 무용가동맹은 내오지 못하고있었던것이다.

그리하여 김수조는 동지들의 소개로 함귀봉무용연구소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평소에 전혀 꿈도 꾸지 못했던 무용과 연분을 맺게 된 계기가 된것이다. 후에 북에 들어온 그가 한다하는 안무가로 되였을 때 남에서 같이 싸운 그의 동지들은 김수조가 무용을 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하였다고 모두들 놀라워하였다고 한다.

함귀봉무용연구소는 서울 명동에 있던 무용전습소였다. 당시 서울에 그런 전습소가 적지 않았는데 수업료가 하나같이 록록치 않았다. 하지만 함귀봉무용연구소에서는 입소금만 내면 월사금은 그리 독촉하지 않았기때문에 돈없는 사람들이 그리로 많이 찾아갔다.

일본에서 무용을 배운 함귀봉은 명동유치원 원장과 사범학교 교원을 겸하면서 무용연구소를 운영하고있었다. 그는 충청도 대지주의 아들이였지만 성정이 착해서 곤난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었고 혁명조직에 자금도 대주군 한 량심적인 사람이였다.

연구소에는 무용을 전문하려는 사람들뿐아니라 영화배우나 유한부인 같은 각이한 계층의 사람들이 몸매를 가꾸기 위해 드나들고있었다. 김수조는 그곳을 발판으로 하여 진보적인 경향을 가진 무용가들을 한사람한사람 규합해나갔다. 후날 일생의 반려자로 된 리규봉도 그 연구소에서 처음 알게 되였다.

리규봉은 원래 배화녀고 학생이였다. 그 역시 서울에서 살 때에는 흰쌀밥을 먹는게 늘 소원이였다고 회상할 정도로 빈곤한 집안에서 자라났다.

어려서부터 목청이 고와 방송국에 가서 노래부른적도 있다는 그는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합창단에 뽑혔고 그의 재능을 알아본 음악교원에게서 개별수업까지 받았다고 한다.

해방정국의 거센 돌풍은 리규봉에게도 들이닥쳤다.

혁명조직의 한 성원이였던 작은 오빠의 영향을 받아 북반부를 동경하게 된 그는 민청산하의 민주주의학생련맹에 가맹하여 학교내의 사회과학소조에도 참가하고 노래보급소조에서 북의 노래들도 배웠다.

그후 동료들과 함께 5. 1절기념행사에 참가하였다고 하여 종로경찰서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나온 그는 학교당국에서 학생들의 행사참가를 주도한 5명의 학생들에게 퇴학처분을 내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리규봉을 비롯한 수많은 학생들이 학교측의 부당한 조치에 격분하여 진급시험도 거부하고 교장실앞에서 여러날동안 롱성투쟁을 벌렸다.

그 투쟁에 참가하였다고 하여 그는 퇴학을 당했고 압력을 받은 음악교원도 그에게 음악을 가르쳐주려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음악을 배울수 없게 된 그는 이렇게 된바엔 유치원에서 률동교원이나 하자고 마음먹고 함귀봉무용연구소에 들어갈 생각을 하게 되였다.

그는 입소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민관 맞은켠에서 여러달동안 신문팔이를 하였다. 쪼꼬만 녀학생이 세라복을 입고 신문을 파는 모습이 유표해서였던지 신문은 제법 잘 팔려나갔다. 그래도 돈이 되지 않아 어머니에게 힘들게 말했더니 어머니가 집안의 옷가지들을 있는대로 걷어모아 입소금을 마련해주었다. 그렇게 되여 리규봉은 낮에는 새로 입학한 보육사범학교에 다니고 밤에는 무용연구소에 가서 무용을 배우게 되였던것이다.

무용연구소에서 리규봉은 3기생이고 김수조는 4기생이였다. 연구소에서는 안무도 배워주어 전습생들끼리 무용구도를 그려가지고 이건 희망이다, 이건 새 출발을 상징한다 하며 서로 교환도 하고 춤으로 옮겨보기도 하였다. 그때 김수조가 하는걸 보니 환상이 있어보이고 남들이 생각 못하는 새로운것을 착상할줄 알더라는것이다.

하루는 김수조가 리규봉을 찾아와 주기적으로 열리는 전습생들의 작품발표회에 2인무를 함께 창작하여 내놓자고 하는것이였다. 그래서 둘이 같이 쌍무를 준비해서 내놓았는데 제목은 《남북통일》이였다. 그 작품이 작품발표회에서 제일 잘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일을 계기로 두사람은 가깝게 지내게 되였다. 알고 보니 집들도 같은 방향이여서 전습이 끝나면 그들은 시국이야기랑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함께 집으로 돌아가군 하였다. 그 과정에 리규봉은 자기가 다니던 배화녀고의 학생투쟁도 김수조가 뒤에서 지도하였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이따금 김수조는 처녀에게 소설책들도 가져다 주었다. 그럴 때마다 처녀는 총각한테 축잡히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밤을 새워가며 열심히 읽고는 퇴근길에서 독후감을 나누었다고 한다.

1949년 2월말경 김수조는 1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남조선무용가동맹의 전신인 무용반을 조직하였다. 예술인들을 투쟁에로 불러일으키고 대렬을 늘이기 위한 사업을 계속해나가던 그는 그해 10월 세번째로 경찰에 체포되였다. 미군첩보대의 앞잡이로 전락된 경복중학교시절의 동창 하나가 그를 밀고하였던것이다.

다행히도 밀고자는 김수조에 대해 경복중학교시기의 활동내용밖에 아는것이 없었다. 김수조는 14일간의 계속되는 고문속에서도 학교때의 활동이상은 없다는것과 그에 대해서는 이미 치안재판에서 형을 받았었다는것을 마지막까지 주장하였다. 결국 아무런 새로운 단서도 잡지 못한 경찰은 근거불충분으로 그를 석방하지 않을수 없었다.

투쟁의 격랑속에서 그는 점차 조국과 민족을 위해 한몸 바칠줄 아는 름름한 투사로 커가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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