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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회


6. 함구문밖의 고충경이네 집을 찾아서


긴긴해도 어느덧 기울었다. 평양거리 여기저기의 좀만 집들이 트인데면 어디서나 볼수 있는 아름드리 버드나무그림자들이 길길이 행길에 가로걸쳐 맞은편 집들의 담장을 넘어 지붕을 덮었다.

구골에서 반마장쯤 더 내려가면 거리는 바른손쪽으로 활직같이 구부러진다. 거기서부터는 한성안이지만 거리랄것도 없을만치 인가도 드물고 사람왕래도 적은데다 함구문 못미처 있는 청석다리에서부터는 바람조차도 싱그러운 맛이 난다. 그밑을 흐르는 물은 법수머리다리의 물과 한줄기인 평양강물이지만 제법 산개울같이 물도 정하거니와 그우에 실실이 드리운 수양버들잎들도 도시의 때가 끼지 않고 눈부신 신록으로 푸르렀다.

여기뿐아니라 성안전체를 신록으로 덮는 그 많고 큰 버드나무들은 평양이 얼마나 오랜 도시인가를 말하는것이다. 평양성의 남문인 함구문밖으로부터 서문인 보통문안으로 해서 북쪽 칠성문안의 만수대고개에 이르기까지 창창한 송림 역시 그렇다.

태고때는 제쳐놓고라도 고구려 장수왕이 국내성에서 이곳으로 천도해온이래 1천 1백 60여년, 이동안에는 일시 황페한적도 있었으나 고려의 서경으로 다시 복구된이래 지금에 이르기까지 오랜 고도 평양이였다. 이곳 사람들은 대대로 자기네의 성안팎에다 나무를 가꾸어왔다. 천여년의 기나긴 력사중에는 무참한 병화도 여러번 겪었다. 그때마다 집들과 함께 나무도 불탔을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자기네의 성시를 이룩함과 함께 또 나무를 심었던것이다.

서북쪽의 성주변에는 언제나 굴한적이 없는 그들의 기개를 상징하듯 사시로 창창한 송림으로 방풍장을 이루었고 성안에는 부드러우면서도 탄력있고 풍성한 록음을 주는 버들을 심었다. 성 동남쪽을 유유히 감돌아흐르는 대동강과 지금은 없어졌지만 성내를 꿰흐르던 평양강과 또 시내 곳곳에 파놓은 풍월지, 영월지 같은 련못가에 류록장을 이루어 아름다운 그림자가 흐늑이는 평화스러운 운치를 사랑하는 그들은 자기네의 성시를 불러 류경이라고도 했다.

청석다리를 건너 함구문을 나서면 거기서부터는 완전히 전원이다. 서쪽의 보통강과 동쪽의 대동강이 합수되는 사이에 삼각주를 이룬 십리 넓은 벌판의 기슭도리에는 옛날 고구려시대의 토성이 그냥 남아서 쟁반의 체두리같이 둘러있고 그안의 평탄한 전원은 정전이라는 전설그대로 장기판같이 째이게 깔려있다.

그 전원가운데 혹은 두세집 혹은 네댓집씩 모여앉은 작은 마을들도 우물뚝과 마당귀에 실실이 푸른 늙은 버드나무들이 둘러서서 역시 그들의 선조들이 만들어준 평화로운 그늘속에 깃들어있다.

함구문을 나선 주복이와 법근이는 성문밖 초입수에 가까운 마을로 찾아가는중이였다. 거기는 젊은 중 법근이가 오매불망 못 잊는다는 처녀의 집이 있었다. 그 처녀의 집을 고려집이라고 한다는것은 주복이의 말로서 우리가 이미 들은바이다. 혹은 개성집이라고도 한다.

그 집의 현재 주인인 고충경이까지 개성에서 이곳으로 와서 사는지는 벌써 4~5대째나 된다. 그런데 아직도 개성집 혹은 고려집이라는 이름이 마치 택호나 같이 붙어있다는것은 좀 괴이쩍은 일이라고도 할수 있다. 왜냐하면 그럴만한 무슨 특색이 아직도 남아있어 그런가 하면 그렇지도 않기때문이다. 또 그 집의 래력을 지금도 누가 기억하고있어 그런가 하면 역시 그런것도 아니였다.

고충경이네 래력을 새삼스럽게 캐본다면 그의 조상은 개성 두문동 72현중의 한사람이였다는것이다. 즉 고려왕조의 벼슬아치의 집안으로서 불사이군이라는 고집을 세워 조선봉건왕조에서는 벼슬도 과거도 하려 하지 않는다는, 말하자면 새 왕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리유로써 리성계에게 가혹한 박해를 받아온 일흔두사람중의 하나였던것이다.

이러한 래력이 이 평양으로 이주해왔던 고충경의 조상에게는 하나의 꼬리표로 달려왔던것은 사실이였다. 그러나 그것도 그 당시의 평양사람으로는 영문이나 본부의 관속들이나 아는 정도지 일반사람들은 별로 아는이가 없었다. 더우기 지금 와서는 그런 먼 옛날을 념두에 두고서 고려집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을것이다.

그 후손들이 4~5대째나 여기서 장가들어 살아온만치 그 집세간이나 살림살이에 이곳 사람들과 다른 무엇이 있는것도 아니였다. 말의 사투리가 다르지도 않았다. 색다른 점을 찾자면 2백년동안에 혹은 깨지고 혹은 잃어지고 남은 비취빛나는 고려청자 반상기가 아직도 몇개 남아서 고충경의 밥상에 오르는것일가. 그것은 지금 우리가 박물관에서나 볼수 있는 출토품이 아니라 그의 조상들이 쓰던 세정품으로 남아있는것은 물론이다. 이런 이야기는 2백년동안 그 깨지기 쉬운 사기들이 세정품으로 남아있다는것으로서 그의 집안이 지조있는 사람들이라는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고충경은 바로 얼마전까지도 남문거리에서 송방(상전방)을 보던 한 상인이다. 《평양지》에 의하면 그는 문무가 겸전한 사람으로 알려져있다. 글도 잘하거니와 활을 잘 쏘는 사람이였다. 지금의 고충경이뿐아니라 그의 집안은 대대로 장사를 하면서도 자식들은 반드시 딸자식까지도 집에서 글을 가르쳐왔다. 이 한가지만으로도 이웃사람들은 고려집은 지조있는 집안이라고들 했다. 이 지조는 일종의 고집으로 통하는 말인듯도 하다. 대대로 성안에서 장사를 해오지만 어떤 고집에선지 그의 살림집은 역시 이 문밖에 있었다. 이웃사람들은 그 까닭을 《살림까지 성안에서 하면 아이들이 발그라질가봐 그런 모양이라》고들 했다. 또 오랜 장사치집안이면서도 그 집살림은 별로 느는것 같지도 않았다. 그 당시의 치부는 땅으로 나타나는데 그 집에서 어데다 땅을 많이 샀다는 소문이 나본적은 없었다. 그 역시 어떤 고집이랄가, 그 집터곁에 예전부터 집안일손으로 다룰수 있는 정도의 남새밭이 있을뿐이였다. 오히려 이번에는 큰 랑패를 보게 된것이였다. 본시 큰 장사도 아니였지만 남도에서 모시와 종이를 무역해다가 도매상을 해온 그는 지난봄에 같은 상인들과 어우름으로 물건을 사러 보냈던것이 벌써 올 때가 지났건만 사람도 물건도 종적이 없어지고말았다. 불의에 일어난 란리로 길이 막혔거나 무슨 변이 생긴 모양이였다. 그래서 모자라는것을 장리로 돌려서까지 환을 잡아보냈던것이 지금은 빚만 남게 된 형편이다.

그런 가위에 고충경이로서는 또 참을수 없는 일이 하나 있었다. 장리로 무명을 돌려주었던 채권자한테서 빚에 대해서는 말이 없고 매파할미를 보내서 누이동생을 저의 둘째아들의 첩으로 달라는 교섭이 왔다. 그것이 이십여일전이였다. 그때 그 매파할미를 곱게 돌려보내고난 고충경은 남모르게 이를 갈고 가슴을 치기까지 했다. 그는 당장에 가게방과 재고를 그저 버리나 다름없이 족쳐팔아서 빚을 청산하고는 집에 들어앉고말았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것은 그의 누이동생 보패도 모른다. 만일 법근이가 알았다면 그 역시 분개했을것은 물론 주복이조차도 주먹을 쥐락펴락했을것이다.

남의 집 꽃다운 규수를 첩으로 달라는자는 애련당골 김감역의 둘째 아들이였다.

그런 일이 있은것을 통 모르는 법근이는 《댁의 선조께서는 아조(우리 나라)의 한양근처까지도 곁이 발라서 이리로 내려오셨던 모양인데 지금은 상감께서 이 평양으로 오신다니 어떠시오?》 하고 충경에게 한번 이런 롱담을 걸어보리라고 속으로 벼르며 걸었다. 무관한 사이니 할수 있는 롱담이기는 하지만 혹시 좀 찔리는 말일는지도 모른다.

고충경은 어찌 보면 한 오세객(세상을 등진 사람)으로 자처하는 사람이 아닌가싶기도 했다. 봄가을철이면 그를 어떤 절에서나 암자에서 볼수 있다. 법근이도 그를 묘향산절에서 처음 보았을 때는 한 유발승(머리를 깎지 않은 중)으로 알았다. 어덴가 속인같지 않게 표일한데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불도를 숭상해서 절을 찾아다니는것은 아니였다. 산수가 좋다는데 치고 절이나 암자가 없는데가 별로 없었으므로 경치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자연 절에 들리기마련이였다.

철따라 간혹 한 유산객의 행색으로 나타나는 때의 고충경은 속인은 속인인데도 어덴가 탈속한데가 있었다. 그보다도 하나의 시정배나 백면서생에게는 있을법도 않은 일종 거만에 가까운 패기와 오연한 맛도 있었다. 그것은 어떤 한가지에 통한 일예일능지사(재간과 능력있는 선비)의 품격과 같은것이여서 보는이의 눈에 따라서는 반감이 아니라 존경도 할수 있는 오연한 맛이였다.

법근이는 그 맛에 초면이면서도 고충경에게 끌렸던것이다. 절에서부터 사귀게 된 법근이는 평양온 때면 그의 상전방이나 집으로도 찾아가게 되였다. 고충경이도 그 젊은 중을 흔연히 맞아주었다. 법근이는 한낱 고리백정이지만 이때는 이런 신분의 차이가 교우관계에도 하나의 장벽이 되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고 또 지금도 절의 불목하니만은 바로 아닌 정도의 중에 지나지 않지만 비굴하거나 하소한데가 없이 분방한 일면이 있는 법근이를 고충경은 언제나 웃음으로 맞아주었던것이다. 그뿐아니라 둘이는 서로 통하는 이야기거리도 있었다.

지금까지 법근이는 《돌중》, 《난봉중》으로만 소개되였다. 이외에도 《평양지》에 의하면 법근이에게는 《승검술》이라는 별명이 또 하나 있었다. 까놓고 말해서 법근이는 하나의 파계승이라고도 할수 있다. 제 말대로 천대, 학대받는 고리백정의 신세가 싫어서 한벌 장삼과 가사로써 그런 신분을 가리울수 있는 중이 되였으나 또박또박 불경을 외우고 꽤 까다로운 금욕의 계행을 지키기에는 그의 젊은 육체와 정신은 너무나 정력이 넘쳤던것이다. 그가 검술을 배운것도 이질애질한데서 시작된것이였다. 또 멀지 않은 30년전에 한때의 풍운아로 나타났던 림꺽정이가 같은 천민이였던 까닭이랄가. 깊은 산속의 젊은 중들중에는 그 여풍을 따른달가 저희끼리 칼장난을 하는 패들이 있었다.

그중의 하나였던 법근이는 그 역시 젊은 때에 한 소일거리로 배워서 활을 잘 쏘는 고충경이와 마주앉으면 무예에 대한 이야기거리가 있었다.

그런 이야기에 또 한잔 술까지 있어 마침내는 나직이 읊조리는 노래에 가만가만 드노는 무릎장단으로 가락을 맞추는 때의 고충경은 하나의 탈속하고 표일한 오세객의 풍모가 더욱 뚜렷해보이는것 같았다. 대대로 내려오는 시정배이면서도 오세객의 풍모를 지녔다기보다 타고났다든가 감추지 못한다고도 할 고충경은 그 역시 두문동적의 저의 조상 같은 사람이 아닐가?

이런 생각에 아까 말한것 같은 롱담으로 혹시 좀 찔리는 말일지는 모르나 한번 웃을수 있는 이야기거리를 삼자는 법근의 생각은 좀 엉뚱하달가 일종 시인다운 비약적인 착상이라고도 할수 있다. 여기서 그 집을 아직도 고려집이라고 부르는 그 까닭이 설명될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법근이만이 아니라 민중은 누구나 다 시인다운 일면을 가지고있기때문이다.

그 희고 단아한 얼굴이 새까만 나비수염과 빛나는 눈으로써 좀더 날카로와보이기도 하는 고충경이 어떤 대꾸를 할가?

이런 생각을 하는 법근이는 지금 또 그 누이동생을 보게 될 기쁨도 물론 잊을리가 없었다. 그러나 실은 법근이는 한번도 보패와 말을 해본적도 없었고 그 얼굴을 익히 볼 기회도 없었다. 간혹 그 집에 갔을 때 닫혀있는 장지문 저쪽에서 고충경의 말에 대답하는 극히 짧으나 랑랑히 울리는 말소리를 들었을뿐이였다. 또 간혹 오라버니가 시키는대로 주안상을 웃간 문턱안에 들여놓을 때에 잠간잠간 보군 했을뿐이였다.

그런 기회에도 법근이는 그 처자를 마음껏 볼수는 없었다. 어쩐지 눈이 시린듯도 했다. 그보다도 제가 너무 뻔뻔스러운 놈같이 생각되기때문이였다. 보패가 들여놓는 담소한 주안상의 그릇들중의 어떤것은 비취빛하늘에 백학이 날았다. 그 학들은 만져보기도 하나 그 처녀는 저 같은 사내가 바라보는것만으로도 더럼을 탈것 같았다. 그만치 법근이는 그 처녀를 눈부시게 본다. 그만치 그 처녀를 모르기도 한다. 말하자면 법근이는 그 처녀를 잘 알아서보다도 잘 알고 존경하는 고충경의 누이동생이므로 사모한다는 편이 맞을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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