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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회


1. 이야기의 시초


임진년(1592년) 5월 초닷새날-

이른새벽부터 대동문과 장경문밖의 나루터에서 강을 건너 동대원에 집결했던 평양군사 3천여명이 평안감사 송언신의 령솔하에 장림벌을 지나 남으로 행군했다.

지난 4월 그믐날 한성을 내놓고 떠나서 개성을 거쳐 엊그제는 벌써 황해도땅에 들어섰다는 왕의 행차를 맞으러 가는 길이다.

《왕이 종시 이 평양까지 오구야말게 되였다!》

혹은 입밖에 내서, 혹은 속으로들 이런 말을 되씹는 평양사람들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어두운 그림자가 비끼였다.

남쪽 한끝인 부산앞바다를 수많은 병선으로 뒤덮어온 일본군이 우리 조선땅에 발을 붙인것이 4월 13일, 그 다음날로 부산진이 함락되고 그 이튿날은 동래 또 그 이튿날은 량산과 울산이 또 그 다음날은 밀양이… 이같이 단 며칠동안에 여러 고을과 많은 진영들이 함락되고 무너졌다.

이것이 그후 무술년에 이르기까지 전후 7년간에 걸쳐 우리 나라가 일본의 침략을 당하게 된 이른바 7년풍진 임진왜란의 시작이였다.

고려의 뒤를 이어 조선봉건왕조가 선지 2백년, 이동안이 조선봉건왕조로서는 《태평성대》라는 시기였다. 대륙의 국경을 맞대고있는 명나라와의 관계는 평온무사했다. 또 그 당시의 형용사를 빌어 《해양만리》에 있는 일본은 그들이 이르는바 《전국시대》로서 저희 나라가 어지러웠던만치 그 먼바다를 건너 남의 나라를 엿볼 겨를이 없었다.

먼 고구려시대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력대의 왕조가 자주 외적의 침략을 받아온데 비하여 이 2백년간의 평온무사는 조선봉건왕조로 하여금 일종의 잠병이라고도 할 《태평성대주의》에 떨어지게 했다고도 할수 있다. 물론 이동안에도 약간한 변란들이 없지는 않았다. 첫째로 일본의 해적들-저희 섬나라에서 부족하고 구할수 없는 물자를 정당한 통상으로써보다도 밑천 안 드는 략탈로써 얻으려는 일본은 국가적기업으로까지 해적선을 꾸려 내세우기도 했다. 다음은 리시애란, 림꺽정란 같은 국내의 반란들을 들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반란들은 모두 그때그때에 어렵지 않게 진압할수 있은 사소한 일들에 지나지 않았다.

이리하여 조선봉건왕조의 정권을 둘러싸고 넘나드는 량반과 봉건관료배들의 《태평성대》의 꿈은 더욱 깊어갔다. 말하자면 국내국외에 별로 경계할 적도, 근심할 사변도 없이 2백년을 평온무사히 지내왔으니 앞으로도 역시 이 《태평성대》는 계속되리라고 믿는 꿈이였다. 이들에게 바쁜 일은 오직 더 많은 토지를 얻고 또는 정권을 독점함으로써 그 《태평성대》를 자기네의 일문일당의 《태평성대》로 만들기 위한 책동과 음모였다.

그중에는 그러한 《태평성대》가 오래가지 못할것을 알고 10만양병설을 제창한 현명한 사람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2백년동안이나 계속해온 《태평성대》는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될것이라고 믿는 《태평성대주의》자들에게는 10만양병설 같은것은 평지에 풍파를 일으키자는 망발이였고 자기네의 단꿈을 어지럽게 하는 불길한 잠꼬대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망발도 잠꼬대도 아니였다. 오히려 너무 뒤늦게 울려진 경종이였다.

오랜 동안의 전국시대가 끝나고 국내를 통일한 일본사무라이의 원흉 풍신수길의 눈이 조선과 대륙으로 돌려진지 이미 오랬다.

동남해안에는 조수를 따라서 대패밥, 자귀밥 같은 생생한 나무지저귀들이 밀려오는지 오랬다. 그것은 풍신수길이 조선침략의 준비로서 저희 나라 해안에서 많은 병선을 만드느라고 깎는 나무지저귀였던것이다.

임진란이 일어나기 6년전이였다. 그후에도 여러번 그런 일이 있었지만 그때 풍신수길은 《일본국사》라는 명목으로 다찌바나라는자를 렴탐군으로 조선에 보낸적이 있었다. 명목이 국사라 조선조정에서는 그를 정식으로 맞아들일수밖에… 외국사신을 맞는데는 대접겸 또 이편의 위풍도 보일겸 의장병이 필요했다. 부랴부랴 농민들을 동원하여 창을 들려서 길거리에 늘여세웠다.

《일본국사》다찌바나는 자기를 환영하기 위한 조선의장병들을 둘러보면서 《당신네 나라의 창대는 왜 이다지도 짧은가?》하며 웃었다. 또 이자는 자기를 위하여 차린 연회석상에서 그 주인인 상주목사에게 《나는 수십년동안을 창검속으로 달려다니기에 머리가 세였거니와 당신은 한평생 기생의 노래와 풍악속에 묻혀서 아무런 근심걱정이 없으려든 왜 그렇게 머리가 셌느냐?》고 했다. 상주는 거진(큰 진이라는 뜻)이고 상주목사는 병마첨절제사를 겸하여 린근 여러 진의 병권을 잡은 사령관이다.

풍악과 기생들의 웃음속에 묻혀있는 사령관, 우습강스러울만치 빈약한 무기, 이것만으로도 그 당시의 조선봉건왕조의 허실을 알기에 족했을것이다.

그후에 조정에서도 일본의 정세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하여 사신들을 파견한적이 있었다. 갔다온 사신중의 한자는 그 눈이 록록치 않은 야심가의 눈이라 했고 한자는 그 반대로 보잘것없는 쥐새끼눈이라고 해서 한때 그런 관상론으로 조선조정에서 론난이 많았던 일본관백 풍신수길의 눈은 이러한 정보에 미상불 득의의 웃음으로 빛났을것이다.

드디여 일본은 전국시대를 거쳐 동원태세로 있던 대군을 몰아 조선에 대한 침략전쟁을 일으켰다. 부산에 발을 붙인 일본군은 천리에 걸쳐 기치창검을 번뜩이며 낮에는 포성으로, 밤에는 불로써 3군이 서로 호응해가며 한성을 향하여 육박했다.

이리하여 조선봉건왕조의 《태평성대주의》자들인 량반관료배들의 꿈은 삽시간에 깨여졌던것이다.

28일에는 충주가 함락되고 그곳을 지키던 도순변사 신립이 전사했다. 충주가 함락되였다는것은 곧 적이 조령을 넘었다는것을 말하는것이다. 조령은 그 지형이 한 군사로써도 능히 만명의 적을 막을수 있다고 할만치 지키기 쉽고 치기 어려운 요해처였다. 그러나 신립은 그곳을 지키지 않았다. 신립으로서는 그럴만한 리유가 없지도 않았다.

그는 왕한테서 직접 출전명령을 받았으나 군사는 한명도 받지 못했다. 군기고의 무기들은 녹이 쓸고 병영들은 텅 비였던 때라 주어보낼 군사가 없었다. 신립은 현지에 와서야 이 고을, 저 고을의 군사를 7천~8천명 그러모았을뿐이다. 그러한 적은 오합지졸을 가지고서라도 큰 적을 막기 위해서는 비상한 각오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조령을 내놓고 충주로 물러나서 달천강을 등지고 소위 배수진을 쳤다. 그리고 조령에다가는 조선군복을 입힌 허수아비들을 세워놓았을뿐이였다.

조령밑에 다 와가지고도 사흘씩이나 넘지 못하고 쳐다만 보고있던 일본군은 조선군사의 머리에 까막까치들이 앉아노는것을 보았다. 과연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조령을 넘어선 일본군은 신립의 배수진을 돌파하고 곧 한성의 직통길로 들어섰다.

조령을 끝내 지킬수도 없었으려니와 설사 그럴수 있었더라도 그때의 판국을 뒤집어놓을수야 있었으랴마는 그러나 적이 그렇게까지는 빨리 한성으로 육박해오지 못했을것이다. 적이 조령을 넘었다는 소식에 한성장안은 물끓듯 했다. 또 뒤이어 충주싸움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는 순변사 리일이한테서 《왜적이 오늘래일중으로 한양을 침범하게 되리라.》는 장계가 왔다.

왕 선조는 백여명의 조정신하들과 왕자와 후궁들을 데리고 4월 그믐날 새벽에 궂은비를 맞아가며 한성을 떠났던것이다.

평양에는 전부터 《서울소식 가마구비에서 먼저 안다.》는 말이 있었다. 이때도 어느 풍편에 들어온 소식인지 개성에 머물러있던 왕의 조정에서 《왜적이 아직도 한강을 건느지 못하고있거늘 적이 한강근처에 오기도 전에 왕으로 하여금 거연히 왕성을 떠나게 한것은 국왕의 위의를 손상할뿐아니라 나라를 그르친것이라.》 하여 당시의 령의정이던 리산해를 파면시켰다는것과 그뿐아니라 다시 돌아가서 한성을 지키자는 공론이 일어났다는것이였다.

이것은 뜬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였다. 이러한 소식을 듣고 기뻐한것이 어찌 평양사람들뿐이였으랴. 왕과 조정이 다시 돌아가 한성을 지키게 된다면 그 얼마나 기쁜 일이랴. 실로 그렇게 되기를 바랐었다. 그러나 그 역시 한낱 헛소문이나 다름이 없었다. 한성은 지난 5월 초사흗날 함락되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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