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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히라오까에게 불리워가 진땀을 빼고난 경태의 머리속은 온통 뒤죽박죽되였다.

이틀밤을 무서운 악몽속에서 꼬박 뜬눈으로 새운 경태가 히라오까의 앞에 앉기가 무섭게 놈은 탁상빼람을 드륵 열고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꺼내들었다.

《이것을 누가 주었지?》

경태는 그만 두눈이 휘딱 뒤집혀지게 깜짝 놀랐다. 어느 책갈피에 깊이 끼워둔것 같은 저 10대강령이 어떻게 되여 히라오까의 손에 들어갔는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였다.

《경태군, 말하라구. 누가 주었지?》

그것은 철림이 가져다준것이였다. 그는 가슴이 와들와들 떨리고 머리가 뗑해졌다. 그 경황에도 철림의 이름만은 절대로 대주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머리속에 번개쳤다.

《저… 그건… 학교에 갔다오니 누가 그랬는지 하숙방 책상우에 놓여있었습니다.》

히라오까는 경태의 얼빠진 소리를 미덥지 않게 들으며 비양스럽게 말하였다.

《그렇단 말이지. … 모를 소린데. 아주 친한 사람 아니구서야 이 중대한걸 군의 책상우에 맹탕 갖다놓을수 있겠는가?》

경태는 피뜩 이것은 틀림없이 호연놈의 작간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한테 넘겨씌우기로 했다.

《그때 하숙방에 드나든것은 변호연이밖에는…》

히라오까는 경태의 입에서 호연에 대한 말이 불쑥 튀여나오자 더 따지지 않고 《그럼 세림야학생들에게 배워준 〈녀성해방가〉는 누구에게서 배운거지?》하고 문초했다. 경태는 또다시 기절할듯 경악하였다.

히라오까는 물음마다 깜짝깜짝 놀라군 하는 경태를 느물느물 웃으며 안경너머로 지켜보았다.

《거 별루 놀랄건 없어. 이렇게 우리 손에는 군의 일거일동이 사진찍히듯 다 들어있단 말이야.》

그것도 철림의 혁명가요수첩에서 베껴 배운것이였다.

《저… 그건 지난 방학때 남석토장에 품팔이를 온 한 청년한테서 배운 노래입니다.》

벌써부터 잔뜩 얼을 먹고 내키는대로 둘러대는것 같아 약이 오르기 시작한 히라오까는 독기어린 목소리로 나꾸채듯 물었다.

《그럼 사이또형사와 대장간집주인은 누가 죽였는가?》

경태는 그 말에 대뜸 눈이 화등잔같이 휘둥그래지며 엉치를 반사적으로 들었다놓았다.

《녜-에?!》하고 기급한 소리를 질렀다.

그의 일거일동을 날카롭게 주시하던 히라오까는 그것이 그한테는 금시초문이라는것을 감득했다. 경태가 아주 모르는것으로 보아 그의 뒤에 있는 어떤 큼직한 놈들이 그들대로 따로 움직이고있는것이였다. 그놈들의 꼬리를 잡기 위해서도 경태를 성급하게 설다루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보매 경태가 속으로 재는것이 많은것 같은데 그것부터 뿌리채 뽑아버리는것이 상책일것이였다.

《경태군, 우리가 이렇게 신사적으로 대하는데도 한도가 있는 법이야. 군이 우리 손아귀에 든 이상 아는대루 죄다 불지 않고서는 못 배겨낸다는것을 똑똑히 알아야 돼. 아무래도 모조리 게워놓게 될바에야 괜히 주리를 틀리우구, 시뻘겋게 달아 불찌가 날리는 쇠꼬쟁이에 온 몸뚱이를 지지우구, 다섯리터도 넘는 고추가루물을 코구멍으로 마시면서 자기의 육체를 만신창되게 만들 필요가 있을가? 제 몸을 곱게 건사할 생각일랑 없지 않을터인데. …》

히라오까의 입에서 난데없이 틀리우고 지지우고 하는 따위의 끔찍한 말이 나오자 문득 한무선의 손톱발톱이 모조리 뽑혀 팅팅 부어오른 참혹한 상처가 경태의 눈앞에 무수한 바늘로 찌르듯 밟혀왔다.

《초대총독 데라우찌각하께서 〈조선사람은 일본법률에 복종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죽어야 한다.〉고 일찌기 공언하셨지만 우리의 결심에 따라 재판없이도 임의의 시각에 군을 총살형에 처할수도 있어. 어디 그것뿐인가. 군이 우리한테 넘겨준 지금의 비밀만으로두 밖에 공개되면 군은 즉각에 자기 동료들 손에 천당으로 갈수 있어. 그 두개의 총구앞에서 무사히 벗어날수 있는 방도는 오직 한가지, 우리의 요구에 순순히 응하는거야.》

역시 첫날처럼 문곁에 군말없이 버티고 앉아있던 사와다는 히라오까의 취조와 일장 훈계가 다 끝나는 기미를 채고는 경태를 뒤에 달고 또 고문실을 거쳐서 구류장으로 와 수갑을 채운 다음 투박한 철문을 소란스럽게 잠그고 사라졌다.

방금전 고문실에서 도강자로 짐작되는 한 청년의 벌거벗은 잔등을 시퍼런 불길이 펄펄 이는 쇠꼬쟁이로 지질 때의 살이 타는 연기와 역한 누린내, 두주먹을 부들부들 떨리게 꽉 부르쥐고 두눈을 한껏 부릅뜨고서 신음소리 하나없이 비지땀을 줄줄이 흘리던 끔찍한 모양이 지꿎게도 머리속을 떠나지 않는것이였다. 《박부르도그》는 웃동을 다 벗어버리고도 땀을 뻘뻘 흘리며 오히려 제편에서 악악 소리를 발광적으로 질러대면서 시뻘건 쇠꼬쟁이로 청년의 잔등을 마구 지지였다.

히라오까가 신사적인것도 한도가 있다고 한것은 알고있는 비밀을 모조리 불지 않으면 그렇게 야만적인 악착한 고문을 면치 못할것이라는 경고였다.

경태는 자기의 새하얀 팔과 종다리를 내려다보며 그리도 연하고 보드라운 살이 마구 지지우고 찢기고 짓이겨질 생각을 하면 가슴이 막 떨리고 심장을 가시철사에 칭칭 동여매이는것 같았다.

문득 히라오까의 말이 재삼 무섭게 상기되였다.

《아무래도 모조리 게워놓게 될터인데 괜히 틀리우고 지지우고 다섯리터도 넘는 고추가루물을 코구멍으로 마시면서 자기 육체를 만신창되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 제 몸을 곱게 건사할 생각일랑 없지 않을터인데…》

그는 무의식중에 두손으로 귀를 꽉 틀어막았다.

그러자 다음순간 느닷없이 철이 들면서부터 성가시게 훈계하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머리속에 공명되여왔다.

《경태야, 꼭 명심해라. 이 세상에서는 돈이 생명이다. 세상만사는 다 돈에 달려있는거란다. 오늘같이 먹구 쓰구 입구 살 걱정을 모르게 해준건 돈이다. 그런즉 그 누구를 쳐다볼것두, 바라볼것두 없이 제살궁리는 제가 해야 한다. 그러자면 일본사람들과 엇설것이 아니라 그들을 등에 업고 제살궁리를 하는것이 가장 령리하구 살줄을 아는것이다.》

그렇게도 미워하고 그렇게도 역스럽던 아버지의 말이 지금은 왜 그리도 새삼스럽게 새겨지며 마음을 가라앉히는지 그도 모를 일이였다.

일본사람들과 엇서지 말라. … 실지로 엇선대야 매와 고문, 죽음밖에 차례질것은 없지 않는가. … 히라오까의 최종훈계도 구경 《비밀보따리》란 흥정물을 놓고 곱게 살겠는가, 온 몸뚱이를 짓이기우다 죽겠는가, 당장 용단을 내리라는 가차없이 단호한 공갈이였다.

(아! 내가 그 호연놈때문에 졸지에 지옥같은 막다른 함정에 빠진 불쌍한 신세가 되였구나!)

불현듯 경태는 자기가 철림을 위시한 혁명동지들을 위해서 비밀을 불지 않고 그냥 버티면 히라오까의 말대로 재판도 없이 죽여버릴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새파란 스무살꽃나이에 죽다니… 문득 설향의 아름다운 모습이 가슴을 찢으며 머리속에 떠올랐다. 설향을 두고 얼마나 행복한 꿈을 많이도 꾸어왔던가. 고보를 졸업하고 XX제국대학(그는 롱구선수여서 능히 대학에 진학할수 있다고 내심 장담하고있었다.)에 가면 더욱 좋고 그것이 뜻대로 안되면 설향과 인차 가정을 이루고 호화롭게 살고싶었다. 서울까지는 당장에 못 가더라도 함흥쯤에서 그것도 여의치 못하면 혜신바닥에서 그중 궁궐같은 집을 장만하여 집안을 최신가구들로 그쯘하게 표본으로 꾸릴 심산이였었다. 그리고 설향은 손끝에 물 한방을 묻히지 않게 하며 아이가 생기면 식모, 유모, 침모를 두어 처녀시절의 꽃같은 모습대로 남아있게 해주고싶었다. 자기에게 늘 청신한 향기와 기쁨을 주고 그지없는 행복의 무아경에 잠겨있을수 있게 해줄 현숙한 안해로만 그려오던 설향이! 그는 설향을 다시는 볼수 없게 되리라는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무너져내렸다. 아! 우리의 사랑도 이렇게 끝장나고만단 말인가! 그는 태질을 치고싶도록 절통하고 눈앞이 캄캄했다. 히라오까는 내가 두 총구앞에 서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비밀을 불어도 죽고 안 불어도 죽는다. …

그러니 오직 살아날 길은 비밀을 순순히 다 불고 고등계의 신변보호를 받는 길뿐이다.

그런데 사이또는 누가 죽이고 변영근은 누가 죽여버렸겠는가? 그것은 어쩐지 호연놈의 흉한 정체를 한순간에 발가내는 단호한 용단으로 미루어보면 철림의 솜씨가 아닐가 하는 예감이 들었다. 그처럼 단호하고 결단성있는 철림은 그따위것들은 손쉽게 해치웠을것이다.

문득 철림이가 자기의 마음을 들여다보고있는것 같아 두려웠다. 그가 만일 자기의 마음이 갈팡질팡하고있는것을 안다면 얼마나 통분해하며 경멸하랴! 그러나 놈들이 노리는 비밀은 조직책임자인 철림이와 련관되여있지 않는것이 하나도 없었다. 비밀을 분다는것은 곧 철림을 부는것이였다. 그는 또다시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인간으로서의 초보적인 량심의 티라도 남아있다면 철림을 고발할수 없었다. 그것은 자기자신을 짓밟고 죽이는것이나 다름없지 않는가!

그는 머리를 싸쥐였다. 철없던 시절부터 그렇게도 다정했던 철림이! 차마 그를 어떻게… 또 한무선선생의 녀동생이며 설향의 가장 극진한 벗인 은해를 차마 어떻게… 량심의 한쪼각은 그를 착란의 소용돌이속에 몰아넣었다. 그는 온밤 잠 못 들고 정신적황야에서 몸부림을 쳤다.

그는 웃도리를 홀랑 벗기운채, 두발목과 두손목을 삼바줄에 옭매인채 새우등처럼 꼬부리고 고문실 널바닥에 쓰러져있었다. 《박부르도그》가 징글징글 웃으며 숯불이 이글거리는 불덕에서 시뻘겋게 단 쇠꼬쟁이를 뽑아들더니 거기에 담배를 붙여물고 기신기신 다가왔다. 그의 험상궂은 상통이 바싹 눈앞에 육박해올 때 경태는 《으악!》하고 비명을 질렀다. 화닥닥 놀라 깨였더니 꿈이였다. 그는 그 지긋지긋한 꿈을 잊으려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가 머리가 바스러질듯이 욱신거리고 눈까풀이 무거워져 바른쪽어깨를 깔고 모재비로 다시 누웠다.…

씻은듯이 개인 봄날의 늦은 아침이였다. 밋밋한 언덕너머에서는 운동회를 하는지 북소리, 응원소리가 창창하게 들려왔다. 그리로 막 달려가고싶으나 그는 갈수가 없었다. 이렇듯 차분하고 정겨운 봄날 오직 자기만은 사와다한테 끌리워 천연산의 깊은 막바지로 허겁지겁 가고있었다. 뒤에는 《박부르도그》가 해빛에 번득거리는 시퍼런 군도를 뽑아들고 뚜벅뚜벅 뒤따르고있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맨 골막바지에 이르면 저놈이 저 시퍼런 군도로 나의 두팔부터 단번에 내리찍겠지, 그 다음에는 바른쪽어깨로부터 사선으로 내 몸뚱이를 힘껏 내려찍겠지. 아, 내 그 무지한 아픔을 과연 어떻게 견디여내랴! 그 순간 나는 저 돌투성이의 골바닥에 나딩굴겠지… 아! 저 푸른 하늘을 보는것도, 저 북소리, 응원소리를 듣는것도 지금이 마지막이겠지. 아, 남들은 즐겁게 보내는 오늘 나만은 오직 나만은 그 누구도 몰래 돌투성이 골바닥에 개처럼 묻혀야 하다니!

그는 마구 발광이 났다.

《나를 죽이지 말아주오! 나는 살고싶소! 나는 죽고싶지 않소!…》 그는 모지름을 쓰며 몸을 뒤척이다가 눈을 떴다. 통기창으로 해빛이 흘러들었다. 뚜벅뚜벅하는 투박한 구두발소리가 고막을 긁으며 들려왔다.

(아! 꿈이였구나! )

그는 잠시 버둥거리다가 일어나 앉았다.

몸서리치는 그 참혹한 꿈은 너무나도 생동하여 방금 겪고난 현실처럼 느껴졌다. …

바로 그날 경태는 히라오까앞에 끌려가기가 무섭게 다 불었다.

다만 철림이한테 혐의가 쏠리지 않게 하려고 천연산절터에서 혜신반일회의 결성을 선포한것은 유격대 정치공작원이며 조직책임자는 공작원이 선발해 데려온 젊은 청년이라는것,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배포한것도 그 청년이며 혁명가요를 배워준것은 그 공작원이라는것, 자기는 한 녀고생과 한조가 되여 영림서와 사립병원에 삐라를 살포했다는것까지 죄다 불었다.

히라오까는 스스로 비밀을 토하는 경태의 말을 인내성있게 들으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아까 귀결에 들은 녀고생의 이름이 귀에 익어 다시 따져물었다.

《녀고생 송찬숙이?》

《예. 》

《음, 박영란이와 함께 급작스레 자퇴한 녀고생…》

그는 률곡주재소로부터 인천인가, 서울방직회사의 직공모집에 뽑혔다는 통보를 받은 기억이 떠올랐다.

공산군 정치공작원 송수옥… 혹시 사이또와 변영근이 바로 그 정치공작원의 꼬리를 잡고 뒤를 성급히 밟다가 개죽음을 당한것이 아니였을가?

호연이도 사이또가 영근의 집에서 술놀이를 하며 큰고기를 나꾸고있다는 말을 주고받더라고 하지 않던가! 그것이 분명코 사실일수도 있었다. 그는 제 입으로 거침없이 부는 경태에게 회원들 개개의 이름과 거처들은 구태여 따지고들려 하지 않았다. 문제는 송사리들이 아니라 큰고기였다.

경태는 주목인물인 최철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비치지 않았다. 그러나 히라오까는 경태의 머리속에 들어있는 비밀은 이미 고등계의 수중에 든것이나 같다고 내심 장담하였다.

경태를 도로 구류장에 보낸 후 히라오까는 사와다와 단둘이 이마를 맞대고 쑥덕공론을 벌리였다.

《주임님, 보십시오. 고문없이도 단 96시간만에 기본은 다 분것 같습니다.》

히라오까는 흡족한듯 회심의 미소를 거두지 않은채 코방귀를 뀌며 말했다.

《흥, 96시간만에 꺾인 절개라… 하긴 그런 허겁진걸 절개랄수야 없지. … 말하자면 서푼짜리 〈사상범〉 … 허허허. 이를테면 그네들이 말하는 신념이 없는 겉멋쟁이들은 자기 신변에 위험이 닥치기만 하면 저렇게 저절로 곯아서 꼭지가 물러나기 마련인거야. 이것은 내가 오랜 기간 〈사상범〉들을 다루면서 찾은 진리라네. 신념이 강한 놈은 별지랄을 다 해두 꺾지 못해. 그런 놈들은 제꺽 재판에 넘기구 형무소에 가두는게 상수더군. … 허허.》

《주임님, 경태를 이젠 어떡하시렵니까?》

《군의 생각엔?》

《이미 예견했던 2방안에 넘어가두 되잖을가요?》

《음, 좋아. 이왕 목조르기에 들어간김에 애당초 충견으루 만들어버려야지. 그렇게 되면 그가 아직두 속에 꿍져두고있는 비밀의 잔털까지 우리것이나 같게 되지.》

《녜, 그렇습니다.》 사와다는 맞장구를 치였다.

《당장 전향문을 씌우라구. 그러나 서안의 조선순사들은 누구도 눈치 못 채게, 특히 경태의 구금상황은 절대 극비에 붙여야 돼.》

《알겠습니다. 소뿔은 단김에 뽑으랬다구 와닥닥 해치웁시다.》

경태는 극비밀리에 텅빈 형사실 구석쪽 사무탁에 벽을 마주하고 앉아 사와다의 엄엄한 감시하에 전향문을 쓰기 시작했다. 생각이 막혀 갑자르던 그의 머리속에는 사흘전 사와다가 구류장안에 슬그머니 던져준 책 《내선풍속의 리해의 글》의 6페지에서 본 한구절이 생생하게 상기되였다.

《… 조선사람과 일본사람은 모두 천황의 적자라는 신념에 기초하여 일본사람은 형과 누이의 기분을 가지며 조선사람은 동생이라는 기분을 가지고 대하여야 한다. …》

발광지경에 이른 자기의 마음을 다소나마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던 구절이였다. 종전같으면 모멸감을 느끼며 즉각에 마구 찢어버렸을것이였다. 그러나 지금 생의 캄캄한 막바지에 압착되여있는 경태에게는 방황하는 마음에 한가닥의 위안이라도 줄수 있는것이라면 짚오래기라도 움켜잡고싶은 막다른 심정이였다. 그는 그 구린내나는 글의 한구절에서 암시를 받아 써내려갔다.

《… 나는 지난 기간 황국신민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감히 저지른 국책에 저촉되는 제반 반일불순행위들을 낱낱이 속죄하고 새 사람으로 갱신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겠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천황의 적자라는 신념에 기초하여 참다운 황국신민이 되며 경찰당국에서 주는 어떠한 임무도 성실히 리행할것을 목숨걸고 법률앞에 서약합니다.

19XX년 X월 X일 천황의 적자 신경태》

히라오까는 경태의 전향문을 쭉 훑어보고 사와다에게 귀띔을 했다.

《전향문 아래공백에 지장을 찍게 하고 뒤등에는 손바닥지장을 찍게 하라구.》

히라오까는 경태가 시키는대로 고분고분 지장을 누른 전향문을 금고에 넣고 쇠를 잠그었다. 그는 대단히 흡족한 표정으로 머리를 수굿하고 기가 죽어 서있는 경태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보고는 의미있게 말하였다.

《사와다군.》

《옛!》

《우리 경태군의 전향을 축하해서 무슨 인사차림이라두 있어야 하지 않을가?》

《아무렴요. 그런데 당장 오늘은 좀… 래일루 …》

사와다는 의기양양해하면서도 난색을 지었다.

《좋아. 래일 축하연을 하세. 경태군이 오늘 밤은 마음을 쭉 풀어놓구 네활개를 펴고 자두 되겠어. 그러나 깊이 명심해둘건 며칠동안의 이 모든 일은 어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또 그 누구도 절대로 알게 해서는 안된다는거야.》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히라오까는 학생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경태와 사복차림의 사와다를 거느리고 원래부터 왜놈거류민들이 밀집되여 살고있는 혜선동쪽으로 스적스적 발걸음을 옮겼다.

혜선동은 읍에서 얼마간 유축되여있어 사람들의 래왕이 그닥 번잡하지 않는 침침한 거리였다. 그들이 혜선동끝쪽에 치우쳐있는 불빛이 유난히 환한 한 단층집에 이르자 사와다가 잠시 기다려 달라고 량해를 구하고는 먼저 집에 들어갔다가 인차 되돌아나와 히라오까를 안내했다.

이때 방문이 열리며 웬 젊은 녀자가 가볍게 마루우에 나와 《주임님, 어서 오세요!》하고 깍듯이 인사를 했다. 그 녀자는 신경태가 초면이여서 그러는지 그를 찬찬히 뜯어보며 눈길을 떼지 못했다. 경태는 통 영문을 모르고 따라온터여서 다소 어리둥절했으나 이쁘장한 젊은 녀자가 호기심을 품고 자기를 주시하는것이 그닥 싫지는 않았다.

전등빛이 눈부시게 환한 방안은 산뜻하기 이를데 없었다. 새로 깐 돗자리의 네모서리에 밤색천띠를 두르고 귀를 잠재우려고 압정으로 고착시켜놓았었다. 창문쪽벽에는 큰 경대가 놓이고 대우에는 각종 화장품이 가득 쌓여있었다. 패종시계가 걸린 안벽에 붙여놓은 자개박이 옻칠 의농문에는 수닭모양의 은빛자물쇠가 사선으로 비스듬히 걸려있었다. 의농우에는 깃이 눈같이 흰 비단이불이 여러채 귀를 물려 알뜰하게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한가운데벽은 온통 옷장보에 가리워있고 분명 큰길쪽이라고 짐작되는 벽가운데에는 가게와 잇달린 출입문에 대문발이 드리워져있었다.

탁상보를 씌운 앉은책상우에 축음기와 작은 트렁크형의 레코드판함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사와다가 제집처럼 아래방에 대고 소리쳤다.

《복자양!》

《녜. 곧 들여가요.》

잠시후 사이문이 열리며 마중하던 처녀와 몸이 비등비등하고 늙수그레한 녀인이 음식을 푸짐하게 차린 긴 상을 가까스로 맞들고 들어왔다.

음식상을 방 한가운데 놓고 굵은 허리를 편 늙수그레한 녀인과 동그스름한 얼굴이 소녀같이 어려보이는 예쁘장한 복자는 일시에 경태를 그가 거북해할 정도로 눈독을 들여 뜯어보았다.

늙수그레한 녀인은 흐뭇하게 미소를 짓고 《별루 변변히 차린것 없어두 많이들 드세요.》하고 나가면서 뒤따르려는 복자의 손을 그냥 있으라는 신호로 툭 건드리는것이였다.

그때 사와다가 《자, 오늘 주례는 나니까 내 하라는대로 해야 돼.》하고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복자의 손목을 끌어 경태의 곁에 앉히였다.

경태는 얼떨떨해졌다. 《주례》라는것은 무슨 뜻이며 복자를 자기곁에 붙어앉히는 까닭은 무엇일가?

《자, 먼저 잔에 술부터 따르라.》

복자가 술을 잔에 따라 먼저 히라오까에게 두손으로 받쳐 권하자 그는 손을 홰홰 내저었다.

《아니, 아니, 오늘 주빈은 내가 아니라 경태군이야. 어서 경태군에게 권하라구.》

경태도 처음에는 황송해하며 사양하다가 하는수없이 한잔 들이켰다.

그러자 사와다가 경태더러 다음잔에 술을 따라 복자에게 권하게 했다.

복자는 별로 사양하는 기색도 없이 술잔을 받아 쪽 들이켰다.

술잔을 련거퍼 순배하고 기름진 음식을 먹어대느라 밤이 깊어지자 모두들 어지간히 취했다.

사와다가 경태의 귀에 입을 가져다대며 밑도 끝도 없이 조용히 씨벌이였다.

《경, 경태군, 군이 땡을 잡았어. 앞으로두 우리 시키는대루만 하면 만사가 다 이렇게 술술…》

사실 오늘밤 이 자리도 히라오까와 사와다가 이마를 맞대고 쑥덕공론을 하여 마련한것이였다.

경태가 예상외로 순순하게 고분고분 응해나오는걸 보고 즉시 그를 저들의 졸개로 아주 만들어버릴 꿍꿍이를 한것이였다. 저들의 알쭌한 심복으로 만들기 위해 녀자를 하나 붙여주어 애당초 오금을 비끄러맬 계략을 꾸미였다. 그래서 방금 기생학교를 나온데다 노래를 잘 부르고 생김새도 해사하며 요염한 림복자가 딱 맞춤하다는 견해일치를 본것이였다. 림복자도 보기드문 미남인 경태만 보면 쫄딱 반하고말것이였다. 거기에다 혜신읍 본토배기이며 화장품가게를 꾸려놓고 혼자 사는 복자의 큰이모집을 알아내가지고 여기서 약혼식겸 잔치를 하게 하려고 벼락같이 꾸민 연극이였다.

경태는 곁에서 분내를 풍기며 술을 따라 사붓이 권하고 안주접시를 손가까이에 놓아주면서 부리는 그의 아기자기한 애교에 피가 달아오르고 정신이 혼미해지였다.

저들의 계책대로 경태를 곤죽이 되도록 취하게 만든 히라오까는 《경태군은 이제 아무데두 갈수 없으니 여기서 쉬라구. 래일 아침에 사와다군을 보내겠네.》 이렇게 한마디 남기고는 사와다를 데리고 사라졌다.

… 경태는 머리가 빠개질듯이 너무 지끈지끈하여 눈을 떠보니 벌써 창문밖이 환해졌다. 그는 자기의 품에 안겨 쌔근쌔근 곤하게 잠든 복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펀뜻 정신을 차렸다. 자기가 언제 학생복을 벗고 내의바람이 되였는지? 피뜩 누군가들이 자기의 몸을 힘겹게 들며 옷을 벗기는것 같던 일이 아슴푸레하게 상기되였다.

그다음은 감미로운 환락속에 깊이 빠져있은것 같이 몽롱하게 생각될뿐이였다.

경태는 팔목이며 어깨가 뭉실뭉실한 복자의 해사한 얼굴을 찬찬히 눈여겨보았다. 그 순간 설향의 아름다운 얼굴이 눈앞에 또렷이 떠올랐다가 인츰 사라지였다. 그의 도고하고 차거운듯 한 인상과는 대조되게 복자는 불같이 뜨겁고 고분고분했다. 경태가 자기의 얼굴을 뜯어보는 눈길을 륙감으로 느꼈는지 살며시 눈을 뜨던 복자는 방긋 웃어보이고는 도로 눈을 감으며 어리광부리듯 말했다.

《아직 좀더 자자요.》

문득 경태의 뇌리에 호연이 취중에 하던 말이 떠올랐다.

《경태,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 최대의 쾌락을 느끼는것이 가장 큰 행복이야. 다시말하면 쾌락은 행복의 척도라는거야, 알겠어? 》

그 말에 자기자신도 몇마디의 맞장구를 친것 같았다.

늦은 아침에 사복차림을 한 사와다가 캡을 눌러쓰고 슬그머니 나타났다.

이부자리를 말끔히 거두고 서로 마주앉아 무슨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은 사와다가 불쑥 방안에 들어서자 움쭉 일어났다. 사와다는 문지방을 넘어서기 바쁘게 희떠운 소리부터 지껄이였다.

《아- 기름이 구울듯 알뜰한 신방에서 첫날밤을 치르느라 깨가 막 쏟아졌겠구먼. 허허…》

그 말에 복자는 쑥스러운듯 아래방으로 몸을 피하고 경태는 어색한 표정을 짓고 어줍게 서있었다.

《앉게. 어때? 괜찮지? 저런 녀자와 만나기두 쉽지 않아. 이제는 경태군한테두 색시가 생긴셈이야. 이제부터는 고등계출입을 일체 엄금하구 태연스럽게 등교하라구. 그리구 여기에 거처하면서두 의심사지 않게 하숙집 출입도 하구. … 얼마 남지 않은 졸업때까지는 그렇게 해야 해.》

어느날 저녁 경태가 하숙방에 들어서니 공교롭게도 아버지가 와있었다. 하숙집녀인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있던 병문은 와뜰 놀라며 눈이 휘둥그래져 경태를 뗑해 쳐다보았다.

《아버지, 그간 안녕하셨어요?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내 군청에 일이 있어 왔던김에 들렸다.》

녀인은 《그럼 말씀들 하십시오.》하고 밖으로 나갔다.

병문은 의아한 눈길을 경태에게서 떼지 못하고 《너 대체 어찌된거냐? 그새 뒤숭숭한 소문들두 도는데다가 너까지 까딱안하니 속이 새까맸댔다. 너 요새는 하숙집에두 거의 안 들어오구 순경들두 두세번 왔댔다니 네가 무슨 재구라두 친게 아니냐?》하고 걱정에 겨워 이렇게 물었다.

《무슨 재구를 치기야 뭐… 지금은 쩍하면 수색소동을 일으키는 판국인데…》

그러나 병문은 적당히 얼버무리는것 같은 아들의 김빠진 말을 듣는등마는등하며 자기의 심각한 우려만을 터놓았다.

《아니다. 나두 짐작되는게 있어. 그러니 이 애비를 속일 생각은 말어라. 아닌 말로 삐라요, 수색이요 하는 살벌한 판에 네가 혹시 잘못되기라도 하면 우리 집안이 망한다. 네가 정직하게 말을 안하면 이왕 올라왔던김에 교장선생두 만나구 법기관의 안면있는 친구들과두 만나 알아볼 작정이다.》

사실 병문은 그 어떤 기미를 채서가 아니라 뒤숭숭한 예감과 지레짐작으로 덧걸이를 해본것이였다.

그러나 경태는 아버지가 모든 사실을 어떻게 알고 하는 말같아 속이 찔리였다. 아버지의 딩딩한 잡도리가 공공연히 불집을 일으켜 그가 극비밀리에 하는 일들을 그르치게 할것 같아 겁이 더럭 났다. 하여 그는 할수없이 요즘 자기 신변에 벌어진 어쩔수 없는 사태의 진상에 대하여 죄다 이야기했다.

병문은 처음에는 기절초풍하듯 화뜰 놀라더니 이렇게 입을 열었다.

《이왕 일이 다 꿰진바하군 차라리 잘된셈이다. 고등계만 든든히 업으면 걱정할것 하나없다. 그럴라면 그 사람들이 너를 든든히 믿을수 있도록 속에 한가지라두 숨기는게 없이 몽땅 털어놓아야 한다.》

경태는 속에 켕기는것을 말해야 할지 안해야 할지 한참동안 바재이다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솔직히 주동인물인 철림이만은 사람의 낯가죽을 쓰고서 차마 고발할수 없었어요.》하고 철림의 위치에 대하여 말했다.

병문도 그들의 어린시절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있는것만큼 자기의 의향을 선뜻 입밖에 내지 못하였다.

한참동안이나 음침한 표정으로 덤덤히 앉아있던 병문은 마침내 자기의 랭정한 립장을 밝히였다.

《글쎄 옛정으루 보면 그렇기는 하다마는 그러나 그 옛정이 너를 살려줄것 같으냐? 요즘세월엔 돈구멍수를 열려고 해두 남의 발등을 먼저 밟아야 해. 제살궁리를 하려구 해두 남을 짓밟구 일어서야 한다 그 말이야. 그런데 남의 목숨과 제 목숨을 바꾸겠다는 말이냐? 잔정같은건 짓밟구 제살궁리를 앞세우는게 온전한거다. 나는 아버지로서 너를 위해서 할바를 다 하겠으니 너두 자기를 위해서 네 할바를 다 하거라.》

《그런데 아버지, 내가 아버지한테 한 말이 새나가면 나는 목이 붙어있지 못해요.》

《걱정말아. 그쯤한건 다 알구있다. 아무렴 이 애비가 제 아들을 잡을짓을 할것 같냐!》

병문은 그날 밤으로 경태를 따라가 복자도, 그의 이모도 만나보고 어지간히 흡족해하였다. 그리고 경태가 졸업하는 차제로 덩실한 살림집 한채를 사주기로 약조했다. 병문은 떠나기에 앞서 경태에게 거액의 현금을 맡기면서 기회를 보아 히라오까에게 몰래 찔러주라고 일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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