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45


철림은 송수옥이가 조직적인 조치로 부대에 되돌아가게 된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부터 허전함을 금할수 없었다.

어제 저녁 물레방아집에 모여 혜신반일회가 결성된 이후 진행한 사업도 일일이 총화짓고 철림의 전적인 책임하에 벌려나갈 활동방향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상론했었다. 그런 후 석별의 인사를 미리 나누고 헤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철림과 은해는 오늘 아침 수옥의 뒤를 먼발치에서 슬그머니 따라걷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삼룡리를 지나 자문령숲속길로 마음놓고 걷다가 구름나무, 자작나무, 분비나무숲이 설핀 샘터에서 기다린듯 서있는 수옥과 불의에 딱 마주쳤다.

철림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듯 거북해하며 어줍은 미소를 얼굴에 띄웠다.

《철림동무! 너무 이러면 내 발길이 떨어지겠나요.》 이렇게 안타까이 말하는 수옥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하였다.

《철림동무! 사내대장부가 마음이 그렇게 얘리얘리해가지구서야 어찌겠나요, 모진 멋두 있어야지.》

순간 철림은 가슴이 찌르르해졌다. 언제인가 어머니도 차마 떨어지지 못해하는 자기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자, 그럼 엎어진김에 쉬여간다고 여기 샘터에서 다리쉼이나 하자요. 》

은해는 서운한 마음을 금치 못하여 아련한 얼굴로 잠자코 철림이 하는대로만 하였다.

그들은 나무등걸과 삭정이를 깔고 적당히 둘러앉았다.

《수옥동지, 몰래 예까지 따라온걸 나무라지 마십시오. 솔직히 저는 아무 일에서나 두려운 생각을 가져본 일 없는데 정이 든 사람들과의 리별만은 정말 죽을 맛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철림의 눈에도 눈물이 맺히였다. 은해는 얼굴을 돌리고 살며시 눈물을 훔쳤다.

《나는 누이없이 자라서 그런지 진짜 수옥동지와 헤여지기가 뻐근하단 말입니다.》

《정말 수옥동지는 제 친언니같아요.》

《난 참으로 행복하군요. 귀중한 혁명동지들두 얻구 남동생과 녀동생도 다같이 얻게 되였으니. … 난 떠나가두 동무들을 한시도 못 잊을거예요.》

수옥은 정어린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며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떠나면서도 제일 마음에 걸리는것은 진설향동무예요. 너무 곱게 자랐지만 얼마나 세심하구 마음씨가 아름다워요. 은해동무가 잘 도우라요. 그는 반드시 훌륭한 동지가 될수 있어요.》

《네, 언니의 당부대로 힘껏 도울래요.》

수옥은 떠나는 시각까지도 동지들의 신변이 사뭇 안심치 않아 걱정스럽게 다시금 당부했다.

《놈들의 동향을 분석해보면 호연놈이 밀고한 자료를 쥐고 경태동무를 미끼로 삼아서 배후의 조직과 핵심성원들을 일망타진할 잔꾀를 부리는것 같아요. 경찰서의 내부동향은 문동지가 허순사를 통해 뽑아낼수 있어요. 허순사도 앞으로 우리 사람으로 만들것 같아요. 혹시 그 악독한 놈들이 마구 검거선풍을 일으키는 경우에는 어제밤에도 말했지만 동무들은 물론 새로 조직에 들어오는 동무들을 XXX비밀근거지에 들여보내라요. 그곳 동지들과도 이미 합의가 있었어요.》

철림은 확신성있게 답변하였다.

《수옥동지, 마음 푹 놓으십시오. 우리가 배운 방법대루 꼭 그렇게 해내겠습니다.》

수옥은 곧 자그마한 보꾸레미를 들고 움쭉 일어섰다.

철림은 수옥의 발걸음을 더 무거워지게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우선우선한 얼굴로 말했다.

《수옥동지, 놈들의 경계가 삼엄한데 꼭 주의하십시오.》

《난 산길에만 나서면 혼자 걷는게 더 편해요.》

《언니, 언니없이 어떻게 살아갈가.》하고 은해는 수옥의 품에 와락 안기였다.

수옥은 떠나기에 앞서 그들을 그윽한 눈매로 바라보며 정중하게 말하였다.

《동무들, 장군님께서는 지금 백두산에 계십니다!》

《네?! 백두산에요! 그러면 장군님 계시는 곳은 저희들과 한지맥으로 가까이에 잇닿아있구만요!》하고 철림은 격정을 터치였다.

《장군님께서는 백두산에서 일제놈들을 련속 족치고 조국해방의 불길이 온 강토에 타번지게 하기 위한 원대한 작전을 벌리십니다!》

《그렇습니까!》

철림과 은해는 합창하듯 감동겨워 웨쳤다.

《동무들은 앞으로 기쁜 일 생겨도, 슬프고 괴롭고 어려울 때에도 언제나 백두산을 바라보세요! 그러면 앞길이 환히 내다보이고 해방된 조국의 미래가 눈앞에 그려질거예요. 항상 백두산을 마음에 안고사세요. 우리 장군님께서 최후공격작전을 벌리시여 조국을 해방하시는 날 우리 다시 만나자요. 그때는 정말 우리 서로 부둥켜안고 실컷 울것 같아요!》 …

그들은 돌아오던 길에 길가의 삼룡사립학교에 들리였다. 마침 일요일이여서 유난히 호젓한 교정에 들어서는데 기다리기라도 한듯 현선생이 반색하며 마주 걸어왔다. 철림이 은해를 가리키며 소개하였다.

《현동지, 녀고에 다니는 같은 동지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현태광이라구 합니다. 이렇게 알게 되여 반갑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은해는 밝게 웃으며 깍듯이 인사를 했다.

방금 회칠을 한 단층교사의 복도는 여느 학교들과는 달리 벽밑굽이까지 온통 회칠을 하여서 더 눈부시고 산뜻한감을 주었다.

어느 한 교실앞에 이르자 현선생은 《철림동지야 우리 학교에 오면 첫 순서가 풍금인데…》하고 교실안의 풍금곁으로 안내했다.

은해는 학교가 유난히 정갈한데다 주변이 호젓한게 저으기 마음에 들었다.

철림은 풍금뚜껑을 열고 의자를 끄당겨앉더니 《고향의 봄》부터 타기 시작했다. 그 아늑하고 정겨운 선률은 아릿한 그리움을 불러일으켰다. 풍금을 타며 2절까지 코노래를 부르고난 철림은 문득 손을 멈추고 먼 추억을 목메여 더듬었다.

《그날도 먼길 떠나시는 어머니를 바래드리고 오늘처럼 마음이 산란하여 바로 이 곡을 타다가 그만… 그래서 걷기 힘들구 허기져서 령밑 동무 이모네 집에… 허허.》

은해는 그때의 정상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했다. 그는 철림이가 오늘 송수옥을 기약할수 없는 길로 떠나보낸 서운함을 이겨내기 힘들어하는 그 심정이 아리게 맺혀와 자연 눈굽이 젖어들었다.

철림은 곧 기분을 돌려 박력있고 용기가 솟는 혁명가요를 탔다. 철림은 은해가 두툼한 수첩갈피에 베껴준 혁명가요를 거의다 외우고있었다.

풍금소리에 마음이 끌려 온 어린 학생들이 교실문을 열고 들여다보았다.

《다들 들어오세요, 어서. 우물쭈물 말구. …》

학생들은 철림의 말에 용기를 얻어 소릇이 들어와 걸상에 앉았다.

철림은 《아동단가》를 경쾌하게 탔다.


어깨동무 세동무 아동단동무

우리들은 나어린 프로레타리아

올망졸망 동무야 다 나오너라

골목골목 모여서 한뭉치되자


따따따따 손나팔 아동단나팔

공장에서 농촌에서 높이 부르자

굶주리고 헐벗은 우리 동무들

두팔걷고 나와서 진을 치잔다


열댓명의 아이들이 조용히 따라불렀다.

철림은 2절까지 타고는 걸상을 아이들쪽에 돌리고앉아 《학생들, 아동단이란 뭐나요?》하고 물었다.

그들이 알듯말듯해서 머뭇거리자 철림은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아동단은 김일성장군님께서 무어주시고 지도해주시는 어린이조직이랍니다. 그리고 한뭉치되자는 말은 모두 합치여 한덩어리로 되자는것이구요. 프로레타리아란 일본놈들과 지주, 자본가놈들에게 짓밟혀 죽지 못해 살아가는 힘없고 재산도 없는 무산계급을 말합니다. 학생들은 노래 한곡을 불러도 가사의 뜻을 새겨가며 불러야 합니다. …》

현선생은 아까부터 교실문가에 서서 빙그레 웃으며 듣고있었다.

철림은 맨 앞줄 가운데학생에게 물었다.

《학생은 이렇게 혁명가요를 부르다가 갑자기 구장이나 순사가 나타나 무슨 창가를 배우는가고 따져물으면 어떻게 답변하겠나요?》

눈이 초롱초롱한 그 학생은 튕기듯 일어나 거침없이 답변했다.

《녜! 〈하도뽀뽀〉를 배운다고 하겠습니다.》

그 말에 모두들 와 하고 웃었다.


×


같은 날 설향은 벼르고 벼르다가 마음을 다잡고 경태의 하숙집으로 발걸음을 옮기였다. 경태가 너무도 까딱 안하자 온갖 불길한 예감이 꼬리를 물고 설향의 마음을 이를데 없이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경태의 하숙집이 놈들의 덫일수 있다는 지꿎은 억측도 털어버리고 오늘은 그 어떤 정황에라도 단연코 맞부딪쳐볼 용단을 내린것이였다.

그가 하숙집에 이르자 경태의 방 출입문은 반쯤 열려있고 마루바닥에는 청소도구들이 놓여있었다. 그는 제잡담 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오빠!》하고 부르짖었다.

그때 어항에 물을 갈아주던 하숙집녀인이 화뜰 놀라며 쳐다보는것이였다. 설향은 그만 자기도 놀라고 실망했던 나머지 아래도리가 매시근 해지였다.

《아이구, 설향아지미댔구만. 왜 얼른 들어오질 않구.》 녀인은 물소랭이를 원탁에서 내려놓으며 좀 쑥스러워하는 설향에게 자리를 권하였다.

설향은 무척 실망한 표정으로 무릎을 꺾어 나부시 앉았다.

녀인은 그동안 무던히 적적했던듯 설향이 자리에 앉기 바쁘게 사설을 늘어놓았다.

《경태 그 사람이 점심밥을 싸가지구 다니더니 벌써 며칠째 저녁에두 안 들어온다우. 밤낮 경기를 나다닌다더니 또 어디루 간것 같아.》

《어머니한테두 어데 간다는 말을 안하던가요?》

《말하기나새나 늘 바쁘게 지내는것 같드라니… 그런데 아지미는 왜 발길이 떠졌나? 하긴 아지미 발길을 멀어지게 한것두 그 보기 싫은 갈퀴눈때문이지. 이제는 갈퀴눈꼴을 안 보게 되니 먹은게 살루 가는것 같다니까. 》

《…》

《한번은 철림학생이 여게 와서 그 호연인지 뭔지 하는 학생을 만나구 간 뒤부터 영 발길이 끊겼다네.》

《그래요?》

설향은 알면서도 녀인의 생각을 더 듣고싶어 처음 듣는척 했다.

《그날 철림학생은 별스레두 부엌문을 열구 저 아래방으루 해서 이 방에 올라와 뭐라뭐라하는것 같더니 호연인지 하는 학생은 그후로는 전혀…》

《어머니, 그런 일로 와서 따져묻는 사람은 없었나요?》

《있었지. 순사가 둬번 와서 이것저것 묻길래 난 통 모르우다, 동자질에두 눈코뜰새 없는데 내가 그 학생일에 눈을 팔 짬이 있겠수 하구 잘라매군 했지.》

설향은 놈들이 경태의 뒤를 캐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자 그의 신변이 더더욱 걱정되였다.

《이 방이 돼가는 꼴 좀 보게나. 아지미가 자주 와서 제 집처럼 알뜰히 손질해줄 때에는 기름기 찰찰 돌던 방인데… 그때는 내 손 한번 대지 않던 방을 오늘 청소하면서 보니 글쎄 구석에는 먼지가 석섬이나 앉구 널린게 종이부스레기가 아니겠나.》

녀인은 그중 반가운 손님인 설향에게 그간 속에 꿍져두었던 말을 두서없이 늘어놓는것이였다. 녀인의 말에 마음은 한층 더 어수선해지고 몸부림을 치고싶도록 안타깝기만 했다.

그는 녀인이 물소랭이를 들고나간 다음 막막한 심정으로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설향은 자기의 손길이 어디에나 미쳐있는 쓸쓸한 방안을 잠시 둘러보았다. 그의 애달픈 시선은 책높이로 가쯘하게 정돈한 책장이며, 자기가 수놓은 반쯤 걷어올린 창가림이며, 경태의 생일선물로 사다준 한쌍의 금붕어가 꼬리치는 어항이며를 야속하게 더듬었다.

시간의 물결에 실려가버린 봄날같은 꿈을 그리던 그 시절이, 가슴을 휘젓는 시랑송을 감미로운 행복감에 젖어 듣군 하던 그 생활이 소리쳐부르고싶도록 그리웠다. 눈물이 두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마치도 그 여우같은 호연놈이 몰아온 검은구름이 자기들 두사이를 암담하게 만들고 홍수에 휩쓸리운 골바닥마냥 사라져버린 생활의 애달픈 잔해만을 남겨놓게 한것 같았다.

이전페지   다음페지

←되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