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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처럼 믿고 삽니다》

 

이듬해인 1951년 4월 30일 권원한은 또다시 어버이수령님을 모시고 진행된 5. 1절경축공연에 참가하게 되였다.

그날도 권원한은 독창을 하였는데 전선으로 떠나올 때 동구밖까지 바래주던 어머니에 대한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마친 그가 청중을 향해 인사를 하려는데 인민군군관이 무대우로 올라와 꽃다발을 안겨주는것이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노래를 잘 부른다고 하시며 부관을 시켜 자신께서 받으셨던 꽃다발을 가져다주게 하시였다는것이 아닌가.

꿈같은 영광에 몸둘바를 몰라하며 권원한은 꽃다발을 가슴에 안은채 그이께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다음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권원한을 비롯한 예술인들을 5. 1절경축연회장으로 불러주시였다.

그들이 연회장에 들어서자 수령님께서는 어서들 이리 와 앉으라고 하시면서 예술인들을 자신의 곁에 앉혀주시였다.

분에 넘치는 은정을 받아안고 권원한이 송구함을 금치 못해하자 그이께서는 제 집처럼 생각하고 편히 앉으라고 하시고는 지금 어떻게 생활하고있는가, 극장일은 재미있는가고 따뜻이 물어주시였다.

동무들이 서로 돕고 이끌어주니 극장일이 재미있다는 권원한의 대답을 들으시고 수령님께서는 그럼 됐다고 하시면서 손수 음식그릇들을 그의 앞으로 당겨놓아주시였다. 그러시다가 갓김치를 가리키시며 이 갓김치는 별맛이니 맛보라고 이르시고는 동무가 어제 《고향의 어머니》를 부를 때 자신께서도 몹시 감동되여 돌아가신 어머니생각을 했다고 추억깊이 말씀하시는것이였다.

갓김치를 시원하고 맛있게 잘 담그시던 어머님, 아들이 갓김치를 좋아한다고 늘 터밭에 갓을 많이 심고 가꾸시던 어머님을 회고하시면서 어머님이 담근 갓김치는 정말 별맛이였다고, 평생을 두고 그 맛을 잊지 못하겠다고 외우시는 그이를 우러르며 권원한은 뜨거운 눈물을 삼켰다.

너무도 일찌기 사랑하는 혈육들을 잃으신 장군님이시였다. 눈보라만리, 혈전만리를 헤쳐오시며 장군님께서 겪으신 상실의 아픔은 그 얼마였으랴. 허나 그 모든 아픔과 괴로움을 조국과 겨레를 위한 크나큰 사명감으로 꿋꿋이 이겨가시는 그이의 로고를 생각하니 눈시울이 젖어드는것을 어쩔수가 없었다.

연회가 끝난 다음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다시금 권원한을 찾으시여 그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료해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곁에 있던 한 일군에게 이 동무가 남반부에서 온 유명한 독창가수라고 소개하고나시여 당중앙위원회 제3차전원회의때 동무의 노래를 처음 들었는데 그때 노래를 아주 멋있게 불렀다고 다정히 추억해주시였다. 그러시고는 이미전부터 동무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는데 좀처럼 시간을 낼수가 없었다고 하시며 녀가수의 지난날과 가정형편에 대하여 하나하나 물으시는것이였다.

권원한으로부터 13살에 성악콩클에 참가했던 일이며 서울에 가서 음악을 공부하고 무대생활을 하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들어주시던 수령님께서는 아버지가 적들에게 무참히 학살되였다는 사연을 아시고는 안색을 흐리시며 나라를 위해 잘 싸운 가정이라고,  동무도 애국의 심정을 안고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평범한 가수의 가정을 두고 그토록 마음쓰시는 그이의 진정에 권원한은 눈앞이 흐려와 고개를 떨구었다.

사실 어버이수령님의 손길이 아니였다면 여직껏 생사조차 알길 없었을 그의 가족이였던것이다.

향하리에서의 공연이 있은 후 남반부에서 들어온 예술인들의 실태를 료해하시던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권원한을 비롯한 일부 사람들이 후퇴의 다급한 정황속에서 가족을 데려오지 못했다는것을 아시고 즉시 대책을 세워주시였다. 그리하여 수령님의 명령을 받은 인민군소조가 남으로 나가게 되였다.

당시 권원한의 가족은 서울 중구 필동의 어느 한 집에 은거하고있었다. 경찰들이 서울, 인천지구에서 통일애국사업을 하고있는 아버지를 체포하기 위해 피눈이 되여 날뛰고있었던것이다.

어느날 아버지의 행방을 알아차리고 경찰들이 달려들었다. 군견까지 끌고와 집안팎을 샅샅이 뒤지던 경찰들은 끝내 천정에 숨어있던 아버지를 찾아내였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북으로 가라는 마지막말을 남기고 경찰들에게 끌려갔다.

그때 권원한의 다 자란 동생들은 의용군으로 나가고 집에는 어머니와 함께 나어린 네 동생들과 두살 난 권원한의 아들애가 남아있었다. 졸지에 가장을 빼앗기고 불안과 공포에 떨고있던 그들에게 구원의 손길이 와닿을줄이야 그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어버이수령님께서 보내주신 인민군소조가 권원한의 집에 당도했던것이다. 인민군군인들을 따라 뒤문으로 빠져나온 가족들이 남산꼭대기에 올라가보니 북으로 들어갈 다른 가족들이 그곳에서 기다리고있었다.

그들은 북을 향해 길을 떠났다. 서울에서 몇십리정도 벗어났을 때 인민군군인들이 자기들은 계속 남으로 나가면서 다른 가족들을 찾아야 한다는것이였다. 그들은 일행을 인솔할 책임자로 권원한의 녀동생인 16살난 권경한을 선정했다. 한 군인이 소형권총을 쥐여주자 그는 와뜰 놀라면서 자기는 그런 일을 못한다고 우는소리를 했다. 군인은 너밖에 맡길 사람이 없다고 타이르며 권총다루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되여 30여명의 행렬을 권경한이 이끌게 되였다.

그들이 인민군군인들과 헤여져 얼마쯤 걸어왔을 때 어디선가 방송에서 권씨성을 가진 쌍둥이형제가 북으로 가고있는데 신고하면 상금을 주겠다고 불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속에는 5살밖에 되지 않은 권원한의 쌍둥이남동생들도 끼여있었다. 아마 경찰은 얼굴이 똑같아 표가 나는 쌍둥이들을 발견하면 북으로 가는 행렬을 쉽게 잡을수 있을거라고 타산한것 같았다.

황급해진 어머니가 쌍둥이들더러 갈라져서 걷게 하였다. 별수없이 한 애는 어머니와 함께 가고 다른 애는 누이와 함께 10리쯤 떨어져서 논두렁길을 따라오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렇게 갈라져서 걷다가 길이 합쳐지는데서 어머니를 만나면 떨어지지 않겠다고 발버둥치고 그러다가는 다시 헤여져 걷군 하며 겨우 위기에서 벗어난 그들은 드디여 몇달후 평양에 있는 유가족소개위원회 집결소(지금의 3대혁명전시관자리에 있었다.)에 도착할수가 있었다.

조국의 운명이 판가름되는 준엄한 시절이였다. 누구에게나 가슴아픈 상처가 있었고 영영 만날수 없게 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한 때 한 가수의 마음속 괴로움까지 념려하시며 잃을번 한 혈육들을 찾아주신 어버이수령님의 은정이 고마워 권원한은 그이께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수령님께서는 그러는 녀가수에게 아들을 잘 키워야 하겠다고 자애깊게 당부하시였다.

그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전선지구경비사령부협주단의 후퇴과정에 대하여서도 상세히 알아보시였다.

권원한이 후퇴로정을 더듬어가며 말씀드리자 수령님께서는 장하다고, 그렇게 먼길을 걸어보기는 처음일거라고 거듭 치하해주시였다.

그이께서는 확신에 넘쳐 말씀하시였다.

《보시오. 예술인들에게도 심장이 있고 신념이 있습니다.

사람은 신념이 강하고 량심이 있어야 합니다.》

수령님께서는 자신께서 산에서 싸울 때 보니 평상시생활에서 변덕이 심하고 동지들과 한 약속을 쉽게 어기는 사람들이 어려울 때 인차 변절의 길로 굴러떨어졌다고 하시면서 그런 사람은 자기가 한번 먹은 마음을 돌려세웠기때문에 래일도 모레도 또 딴마음을 가질것이라고 근엄하신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이어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동무의 생활경력을 들어보니 곡절도 있고 고생도 겪어보았다고, 그야말로 소설감이라고 하시며 이제부터 로동당의 품속에서 부르고싶던 노래도 마음껏 부르고 하고싶던 예술활동도 마음껏 하라고 뜨겁게 고무해주시였다.

실로 그날에 하신 그이의 말씀은 녀가수의 심장을 한생토록 높뛰게 한 태양의 빛이였고 열이였다.

권원한은 1951년 7월 베를린에서 진행되는 제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게 되였다.

축전참가자명단에서 권원한의 이름을 보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일군에게 그가 이번 축전에 가면 인기가 대단할것이라고 하시면서 국제무대에 처음 나가는것만큼 잘 돌봐주어야 하겠다고 이르시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령님의 높은 신임을 받아안은 녀가수를 축하해주었다. 혁명시인 조기천도 그들중의 한사람이였다.

수령님께서 권원한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전해들을 때마다 조기천은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달려오군 하였다. 열혈시인과 열혈가수는 서로의 세계에 공감하였다. 흥분하면 습관대로 땅바닥에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려가면서 자기가 목격한 인민군전사들의 투쟁모습에 대하여, 예술에 대하여 격정을 토로하는 조기천을 권원한도 진심으로 따르고 존경하였다.

조기천은 축전장으로 떠나는 권원한을 바래주면서 싸우는 조선의 기상을 떨치고 돌아오라고 격려하였다. 권원한이 본 시인의 마지막모습이였다. 베를린으로 가는 렬차안에서 조기천이 희생되였다는 소식에 접하고 녀가수는 오래동안 슬픔에 잠겨있었다고 한다. …

베를린축전장은 영웅조선에서 온 사절들을 열광적으로 맞이하였다.

《싸우는 조선의 벗들을 환영한다!》

《영웅적조선인민 만세!》

《영웅적조선인민 만세!》

가수생활을 시작해서 처음 서보는 외국의 공연무대였다. 하지만 권원한은 민족적자부심을 가슴 벅차도록 느끼며 긍지에 넘쳐 노래를 불렀다. 그들의 공연은 가는 곳마다에서 절찬을 받았고 권원한의 독창을 비롯한 우리 예술인들의 여러 종목이 축전에서 1등상을 받았다.

그 소식을 들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못내 만족해하시면서 축전이 끝난 후 우리 예술단만은 따로 떨어져 이전 쏘련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에서 공연을 더 하도록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하여 예술단은 3개월간에 걸쳐 외국순회공연을 하게 되였다.

우리 예술단의 공연을 본 외국인들의 반향이 대단했다. 그중에서도 권원한의 독창은 류달리 각광을 받았는데 그가 노래를 부르면 관중들은 엄지손가락을 펴보이면서 연거퍼 재청을 요구하군 하였다. 어느 나라에선가 그가 《우리 님 영웅되셨네》를 불렀을 때 그 나라의 한 청년작가는 무대에까지 올라와 조선의 예술이 이처럼 아름다운줄 몰랐다, 참으로 훌륭하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중국에서 공연할 때에는 주은래총리가 직접 권원한에게 축배잔을 권하며 조선의 녀가수가 중국노래를 잘 부르는데 정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자기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후날 권원한은 자기의 일생에서 제일 힘들었던 때가 두번 있었는데 한번은 후퇴할 때였고 다른 한번은 전쟁시기 8개 나라들을 돌며 순회공연을 할 때였다고 회상하군 하였다. 사실 그때 해당 나라에 도착하면 다음날부터 공연인데 그 나라 노래를 그 나라 말로 불러야 했으므로 밤새워 준비하지 않으면 공연을 보장할수 없었던것이다.

그런 나날들이 반복되여 어지간히 피로도 겹쌓였지만 어버이수령님의 한없는 믿음속에 사는 권원한에게 있어서 그 모든것은 행복한 《고생》이기만 했다.

예술단이 외국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1951년 12월 12일 수령님께서는 친히 연회까지 마련해주시고 이번에 독창가수들의 수고가 많았다고 하시며 권원한에게 국제무대에 처음 나가서 이름을 떨쳤다고 축하해주시였다.

은혜로운 어버이품에 안겨 시작된 권원한의 새 삶은 그후 더욱 활짝 꽃펴났다.

전후 그는 수많은 무대들에서 독창가수로 활약하는 한편 민족가극들인 《콩쥐팥쥐》, 《견우직녀》, 《금란의 달》에서 주역을 맡아 형상하였으며 《이완 쑤사닌》, 《청년근위대》와 같은 외국가극들에도 출연하였다.

사람들은 그가 부르는 노래를 즐겨 듣군 하였다. 지어 그가 출연하는 날만 골라서 구경가는 관중들도 많았다고 한다.

권원한이 인민들의 사랑을 받을수록 누구보다도 기뻐하신분은 어버이수령님이시였다.

그가 부르는 노래를 들으실 때마다 노래를 잘 부른다고, 예술은 이처럼 아름다워야 한다고 거듭 치하해주신 수령님께서는 1955년 7월 12일 제5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할 권원한의 독창을 들으시고 노래에서는 권원한동무가 확실히 관록이 있다고 하시면서 민족가극도 많이 했고 다른 나라의 가극과 노래도 한것만큼 축전기간에 그를 내세워 우리 나라 민족예술을 널리 소개하는것이 좋겠다고 값높은 신임을 안겨주시였다.

1958년 10월 23일에도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권원한이 부른 노래를 들으시고 권원한동무는 성악가수로 력사가 있다고, 자신께서는 지금도 그가 부르던 《어뢰정의 노래》와 《고향의 어머니》, 《젊은 병사의 노래》가 인상에 남아있다고 뜻깊게 추억하시며 그를 잘 평가하여주어야 하겠다고 은정깊은 말씀을 하시였다.

참으로 수령님의 그 말씀들은 조선의 가수로서 받아안을수 있는 최상의 영예였다.

권원한은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도 오래전부터 알고계시는 가수였다.

위대한 장군님을 모시고 공연을 본적이 있는 한 녀성은 권원한의 생일 80돐 독창회에서 이렇게 회상하였다.

《〈직녀의 아리아〉를 들으니 정말 감회가 새롭습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권원한선생이 주인공으로 출연했던 가극 〈금란의 달〉과 〈견우직녀〉, 〈콩쥐팥쥐〉를 여러번 보셨는데 1957년 9월에 저희들은 장군님을 모시고 민족가극 〈견우직녀〉를 관람하였습니다. 그때 권원한선생이 주인공을 했는데 장군님께서는 주역을 담당한 배우가 선녀처럼 인물도 곱고 노래도 잘 부르며 률동도 좋다고 치하하시고나서 그런데 가극의 내용과 형식이 발전하는 시대의 요구와 우리 인민의 사상감정을 잘 반영하지 못하고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그때 벌써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시대의 요구와 우리 인민의 사상감정에 맞는 새로운 우리 식의 가극을 구상하고계셨던것이다.

권원한은 행복했다. 크나큰 어버이사랑은 권원한의 가슴속에 마를줄 모르는 삶의 희열과 창조의 열정을 안겨주었다.

그는 《예술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무대생활에 전념했다. 늘 기량훈련으로 낮과 밤을 보냈고 평양은 물론이고 멀리 지방과 먼바다어로선단에까지 찾아다니며 노래를 불렀다.

인간으로서, 예술인으로서의 권원한의 면모는 후비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여실히 엿볼수 있었다.

공훈배우 강증녀는 권원한에게서 성악을 배운 가수이다. 전후에 그는 수업을 받기 위해 퇴근하면 권원한의 집으로 종종 다니군 했다. 어떤 때는 권원한이 밥을 지을 때 들어서기도 했는데 웬만한 사람 같으면 싫은 내색을 하거나 갔다가 후에 오라고 하겠건만 그는 그럴줄을 몰랐다. 오히려 집안사람들에게 밥은 좀 있다가 먹자고 하고는 하던 일을 밀어놓고 수업에 달라붙군 하였다는것이다. 후비들중에 앓는 사람이 생기면 집에서 별식 한가지라도 내가지 못해 안달아하였고 후비들이 기량발표를 하는 날이면 본인이상으로 마음을 조였다고 한다. 그 정도로 그는 예술을 사랑했고 후비들을 제 자식처럼 소중히 여겼다.

권원한은 전형적인 녀성이라 할만치 마음이 곱고 순진한 성격이였다. 평소의 목소리도 부드럽고 조용조용했다. 항상 소박했고 남을 내려다보지 않았으며 아이들을 고와하고 새와 짐승들을 고와하는 정서적인 성격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한때 교원생활을 해서인지 리지적이였고 사고가 정돈되여있었다. 평소에 말하는걸 들으면 영화를 보는것보다 더 재미있었다고 한다. 그는 생활에서 리기적이고 지조가 없는것, 방탕한것을 싫어했다. 일신상의 괴로움이나 가정의 불행을 예술활동에서 표현하는 일이 결코 없었고 늘쌍 생기도는 눈에 웃음을 담고있었다.

사람들은 권원한을 두고 평생 조선치마저고리만 입고 살아온 녀성이였다고 한결같이 추억한다. 남에 있을 때나 북에 있을 때나 늘 치마저고리차림새였고 양복을 입으면 오히려 불편하게 여겼다고 한다. 조선옷을 입은 그의 모습은 언제나 고왔다. 문예인들가운데 권원한과 문예봉이 그런 측면에서 유표했다.

좀처럼 양장을 하는 일이 없던 권원한은 베를린축전에 갈 때 단체복을 입어야 했기에 어쩔수 없이 양복을 입은적이 있었는데 그때 보는 사람마다 권선생은 조선옷을 입어야 어울린다고, 양복입은 모습을 보니 어색하다고 말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있다.

어느덧 1970년대가 시작되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정력적인 지도밑에 가극혁명의 장엄한 포성이 온 세상을 경탄시키며 울려퍼졌다.

우리 식의 절가화된 노래와 방창, 무용과 무대미술로 이루어진 《피바다》식혁명가극은 인류가극사에 그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전혀 새로운것이였다. 더우기 가극의 노래 한곡한곡은 얼마나 사람들의 심장을 틀어잡는 명곡중의 명곡들이였던가.

권원한은 온넋을 뒤흔드는 충격과 감동으로 하여 진정할수가 없었다.

생일 80돐 독창회무대에서 그는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하였다.

《… 종래의 가극들은 모두 먼 옛날의 전설이야기를 담은것들이였습니다. 아리아라든가 대화창이라든가 하는 형식도 모두 우리 인민의 미감에 맞지 않는것들이였습니다. 수령님의 남다른 사랑속에서 성장한 저는 그때 주인공역을 하면서도 이 땅은 수령님의 력사로 흐르고 이 강산엔 수령님의 사랑이 꽉 차있는데 수령을 노래한 가극은 왜 없을가, 언제면 수령님을 노래한 가극이 출현하여 마음껏 노래할수 있을가 하고 생각하군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장군님께서 그 소원을 풀어주셨습니다. 어버이수령님께서 몸소 창작하신 가극의 내용들은 더 말할것도 없고 맑고 유순한 선률, 절가화된 노래들과 방창들… 정말 그 형식도 얼마나 황홀하겠습니까. 저는 장군님의 믿음으로 가극혁명의 성악강사로 참가했는데 장군님의 비범한 예지와 위대한 령도에 대하여 절감할수록 그이의 지도를 받으며 혁명가극에 출연하고싶은 마음만은 금할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벌써 저의 나이는 이미 60을 바라보고있었습니다. 그때처럼 세월이 야속했던적은 정말 없었습니다. …》

우리 나라에서 창조된 동서양의 가극들에 출연했던 로가수로서, 종래 가극의 제한성과 《피바다》식혁명가극의 우월성을 직접 체험한 력사의 증견자로서 터치는 진심의 고백이였다.

권원한은 그 간절한 마음을 주체예술의 후비들을 키워내는 사업에 고스란히 쏟아부었다. 그리하여 혁명가극 《밀림아 이야기하라》와 《금강산의 노래》의 녀주인공들을 비롯한 수많은 가수들을 훌륭히 키워냈다. 총련을 포함한 해외동포예술인들속에도 그에게서 성악지도를 받은 가수들이 적지 않다.

노래를 떠나서는 살수 없는 그였기에 나이가 많아 성악강사를 그만두게 되였을 때에도 로병기동예술선동대에 망라되여 노래를 계속 불렀다.

많은 세월이 흘러갔다. 지난날의 가수들은 무대를 떠나고 새 세대 가수들이 등장했다. 어느덧 권원한의 이름도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거의나 사라져가고있었다.

그러나 어버이는 자식을 망각하는 법이 없다.

2000년 11월 25일.

수십년세월이 흘렀어도 권원한을 잊지 않고계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에게 80돐생일상을 보내주시고 로가수의 독창회를 열도록 은정깊은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권원한은 뜨거운 눈물속에 그 사랑을 받아안았다.

노래와 함께 시작한 인생을 노래와 함께 총화하고싶은것은 가수라면 누구나가 품게 될 마지막소망일것이다. 권원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건만 그때 침상에 누워 병을 치료하던 몸인지라 누구에게도 자기의 소원을 내비치지 못하고있던 그였다.

그런데 그 옛날의 녀가수를 마음에 새기시고 생일상을 보내주신것만도 그지없이 고마운데 이렇듯 가슴속에 품고있던 마지막소망마저 헤아려주시고 독창회까지 마련해주셨으니 정녕 장군님의 은혜로움에 80고령의 로인인들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않을수 있으랴.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고목에도 꽃을 피우는 그 사랑에 떠받들려 권원한은 백발청춘의 모습으로 독창회무대에 나섰다.

친지들과 제자들, 동시대인들과 수많은 새 세대들이 그의 독창회를 보았다.

로가수는 걸어온 생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사연많은 노래들을 부르고 또 불렀다. 민족비운의 그 시절을 《봉선화》로 추억하기도 했고 가렬했던 전화의 나날을 《승리하고 돌아오라》에 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전후의 가극무대에 울렸던 《달미의 아리아》와 《직녀의 아리아》도 불렀고 꿈결에도 부러워하던 혁명가극의 주인공이 되여 《혁명의 꽃씨앗을 뿌려간다네》를 긍지높이 부르기도 했다. 그것은 그대로 노래와 함께 돌이켜보는 녀가수의 인생사이기도 했다.

관중들은 후더운 감동속에 그의 노래를 들었다. 로가수가 로당익장의 열정에 넘쳐 《휘파람》을 흥취나게 부르자 만장이 감탄하며 떠나갈듯 한 박수갈채를 보냈다.

실로 가슴뿌듯한 광경이였다.

권원한의 생일 80돐 독창회를 보면서 이전 쏘련의 인민배우이며 유명한 가극가수였던 아브호바의 생일 70돐 독창회를 떠올린 사람들도 있었다. 그날 아브호바의 독창회가 열린 오페라극장은 삽시에 울음바다가 돼버렸다고 한다. 그렇듯 명성높던 녀가수에게서 꺼져가는 초불마냥 가냘픈 소리가 흘러나왔을 때 관중들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수 없는 세월의 무정함에 다들 구슬퍼지는 마음을 누를수 없었던것이다.

만일 그들이 활기와 랑만에 넘쳐 노래하는 80나이의 권원한을 보았더라면 이 세상에 세월의 힘으로도 막을수 없는 위대한 사랑의 힘이 있다는것을 깨닫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을것이다.

그날의 독창회에서 권원한은 자기를 축하하러 달려나온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한생 가슴속깊이에 간직하였던 심정을 터쳐 노래를 불렀다.

 

품고있는 생각도 모두다 말을 하고

움터나는 희망도 터놓습니다

하늘처럼 믿고 삽니다 장군님을 믿고 삽니다

천년세월 흐른대도 김정일장군님만을

 

저물어가는 20세기를 바래우며 로가수가 인생의 총화로 하고싶던 고백이 그 노래에 담겨져있었다.

독창회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독창회에 참가했던 4. 15문학창작단의 로작가들은 흥분된 심정을 눅잦힐수가 없어 공연장소에서 집까지 먼길을 차도 타지 않고 우정 걸어서 갔다고 한다. 권원한의 빛나는 한생을 통하여 위대한 태양의 빛발이 자기들의 한생에도 비쳐든다는 생각이 갈마들어서였을것이다.

권원한은 그후에도 위대한 장군님께서 안겨주신 청춘의 활력을 안고 여생을 보냈다. 그는 아침마다 어김없이 발성훈련을 하군 하였고 그의 집으로는 성악수업을 받으러 다니는 후비들의 발길이 그칠줄을 몰랐다.

86살이 되던 2006년 봄날 어느 새벽에 권원한은 조용히 생을 마쳤다.

돌아가기 전날 그가 누워있던 방에서는 불후의 고전적명작 《어디에 계십니까 그리운 장군님을 나직이 불러보는 로가수의 목소리가 절절하게 들려왔다고 한다.

소녀시절 자기를 비쳐줄 해님을 그리며 무대생활의 첫 발을 뗐던 녀가수는 림종의 시각 자기의 운명을 빛내여주고 보살펴준 인생의 태양을, 사랑의 태양을 목메여 부르며 간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한생을 태양을 노래한 태양의 가수였다고 해야 할것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하지만 위대한 어버이사랑은 대를 이어 계속되기에 권원한의 한생은 그가 부른 노래와 함께 인민의 추억속에 길이 남아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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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선택 3^bb 1. 한생을 태양의 가수로 1) 해님을 목메여 부른 소녀 운명의 선택 3^bb 1. 한생을 태양의 가수로 2) 태양의 품을 찾아 수천리 운명의 선택 3^bb 1. 한생을 태양의 가수로 3) 《하늘처럼 믿고 삽니다》 운명의 선택 3^bb 2. 금별메달에 비낀 한생 1) 항쟁의 거리에서 운명의 선택 3^bb 2. 금별메달에 비낀 한생 2) 그가 안긴 품 운명의 선택 3^bb 2. 금별메달에 비낀 한생 3) 서울에 안고 간 김정일화 운명의 선택 3^bb 3. 한 무용가의 운명 1) 운명의 배에 돛을 달고 운명의 선택 3^bb 3. 한 무용가의 운명 2) 깃들인 인생의 보금자리 운명의 선택 3^bb 3. 한 무용가의 운명 3) 우리 장단, 우리 춤가락으로 운명의 선택 3^bb 3. 한 무용가의 운명 4) 최승희의 무용은 오늘도 계속되고있다 운명의 선택 3^bb 4. 《동요할아버지》가 부른 노래 1) 설음의 시, 눈물의 동요 운명의 선택 3^bb 4. 《동요할아버지》가 부른 노래 2) 한생을 꽃봉오리로 살고싶어 운명의 선택 3^bb 4. 《동요할아버지》가 부른 노래 3) 그의 삶은 영원하다 운명의 선택 3^bb 5. 무대에서 찾은 한생의 진리 1) 방황의 먼지오른 고달픈 청춘시절 운명의 선택 3^bb 5. 무대에서 찾은 한생의 진리 2) 인생의 가치 운명의 선택 3^bb 5. 무대에서 찾은 한생의 진리 3) 누려온 행복, 못다 이룬 소원 운명의 선택 3^bb 6. 조선화의 거장으로 성장하기까지 1) 《해변》 운명의 선택 3^bb 6. 조선화의 거장으로 성장하기까지 2) 《5월의 농촌》 운명의 선택 3^bb 6. 조선화의 거장으로 성장하기까지 3) 《고성인민들의 전선원호》 운명의 선택 3^bb 6. 조선화의 거장으로 성장하기까지 4) 후대들의 추억에 새겨진 모습 운명의 선택 3^bb 7. 설음을 불사른 웃음의 한생 1) 족쇄를 찬 희망 운명의 선택 3^bb 7. 설음을 불사른 웃음의 한생 2) 환생 운명의 선택 3^bb 7. 설음을 불사른 웃음의 한생 3) 웃음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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