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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 사납게 찌프러져있던 히라오까의 상판이 요즘 갑자기 밝아지고 희색이 만면해졌다.

그도 그럴것이 며칠전에 장기출장에서 돌아온 호연의 애비 이꾸따로를 만난것이였다.

그날 그가 먼저 호연의 분수없는 경거망동에 대한 량해를 바라면서 이왕 발을 잠그었던 일이고 또 그간 비밀사업에 미립이 생겼겠으니 아들애를 그냥 고등계의 일을 협력하도록 해줄것과 아울러 신변보호까지 청탁하였다. 그는 그것이 심중히 생각던 끝에 내린 결심이라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히라오까는 그가 이렇게 호의적으로 나오자 내심 쌍수로 환영하면서 그의 청탁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침발린 말로 호연의 《공로》를 치사해주었다. 히라오까는 실종된 변영근대신으로 호연을 문흥지구에 파견하면 그야말로 제격일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는 호연에게 철도공사장의 로무계 서기라는 간판을 씌워 박아넣기로 했다. 또한 호연을 매사에 신중한 민형사한테 붙여주면 그가 영민한 두뇌로 크게 한몫 하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요즘 그는 어깨바람이 나서 돌아쳤다.

그는 오늘 사와다의 실태보고를 심각하게 받으면서 좀 여지를 두고 무르익혀보려던 계획을 이제는 더 끌수 없게 되였음을 즉감했다.

그는 안경알을 번뜩이며 목석같이 앉아있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까딱 움직이지 않는단 말이지. …》

《예, 곳곳에 밀정을 붙이구 미행감시를 했으나 경태는 아무와도 접촉하는 일없이 하숙집에서 곧바루 학교에 가고 오후에는 롱구훈련에만 빠져있습니다.》

《사와다군, 놈들이 우리보다 한수 더 쓰면서 우리 발등을 앞질러 밟군 하는것 같은데 그놈들이 어느 어스크레한데서 우리의 일거일동을 지켜본다는것을 명심해야 돼.》

《주임님, 알겠습니다.》

히라오까는 그냥 앉아서 듣기가 번거로왔던지 움쭉 일어나서 팔짱을 끼고 창문가에 다가갔다.

《요즘 경태네가 다른 롱구팀들과 순회대항전을 하고있다지?》

《예, 얼마전에는 수삼고보와도 대항경기를 하였습니다.》

《혜신고보팀에 후보선수는 몇이나 되게?》

사와다는 조용히 일어나 주임에게 슬그머니 다가가며 대꾸했다.

《대여섯명은 잘되는데 경태만큼들 끌끌해보입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

눈치빠른 사와다는 그가 머리속으로 새로운 《작전》을 꾸미고있다는것을 감촉했다.

《사와다군! 》

히라오까는 얼굴을 사와다에게로 홱 돌리며 《1방안대루 하라구! 쥐도 새도 모르게!》하고 칼로 베듯 단호하게 명령했다.

《하잇!》

사와다는 꼿꼿이 차렷자세를 취하면서 저력있게 대답했다.


오늘 농업학교 롱구팀과의 훈련경기에서 기력을 뽑고난 경태는 온몸이 노근하여 느릿느릿 교문을 나섰다.

늦은저녁무렵의 혜신거리는 의례히 소란스러웠다. 가까운 역에서는 원목차량을 길게 이어달고 방금 들어선 기관차가 가쁜숨을 몰아쉬고 가게들에서는 빈지문짝을 맞추느라고 부산을 피웠다. 장을 금시 파한듯 네거리로는 짐을 이고진 장사군들이 제각기 흩어져갔다.

경태가 앞마당에 손수레군들이 시름없이 널려앉아 한담하며 담배를 피우고있는 운송점근방을 좀 지났을쯤이였다. 낯선 사나이가 곁에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같이 발걸음을 옮기며 거쉰 목소리로 말을 거는것이였다.

《신경태군인가?》

경태는 힐끗 얼굴을 돌려 자기의 우측에 바싹 붙어 보폭을 맞추어 걷고있는 키작은 그 사나이를 의아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는 몸매가 다부지고 굵은 목이 쩍 벌어진 어깨우에 들어박힌 력기선수같은 사나이였다.

《예, 그런데 거긴 누구신지?》

그 사나이는 찌르는듯 한 송곳눈으로 경태를 치떠보며 나직하게 대꾸하였다.

《고등계 사와다요.》

한순간 크게 공명되여 들리는 그 말소리에 경태는 머리가 아찔해지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고등계라는 말이 비수같이 숨통에 닿는것 같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자기뒤에도 두명의 사나이들이 따르고 그뒤에 또 한명이 외면하는체 하며 슬금슬금 뒤따르고있었다. 그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당장 총알같이 몸을 빼여 무작정 어두운 골목길로 도망치고싶었다. 아니, 철림이한테로 막 달아빼고도싶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 놈들의 권총탄알이 자기의 뒤통수를 단박에 뚫을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온몸이 전률하며 오금이 과다드는것이였다.

사와다는 허둥거리는 경태의 심리를 가늠한듯 거쉰 목소리로 그를 안심시켰다.

《경태군, 겁낼건 없네. 우린 군을 조용히 만나야 할 일이 있어 그럴뿐이니 남들이 이상스럽게 여기지 않도록 이렇게 그냥 걸으면 되네.》

근방의 어느 집에서인가 동자질을 하는 칼도마소리가 간간이 가락맞게 들려왔다. 경태는 그 칼도마소리의 가슴쓰린 정겨운 맛을 비로소 절감하는것만 같았다. …


히라오까는 느슨한 미소를 짓고 안경너머로 경태의 미끈한 생김새를 마치 금새나 가늠하듯 한참동안 묵묵히 훑어보았다.

사와다는 립회인으로 출입문옆자리에 잠자코 앉아있었다.

히라오까는 시들히 바라보며 별치 않은 질문을 하다가 차츰 열기를 띠였다.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첫 상면을 하지만 이미 이름난 롱구선수로서의 경태군과 면목을 익혔구 또 레코드판에 찍힌 명성으로두 알고있으니 우린 구면인셈이라구 할수 있지.》

그는 자기 말의 반응을 가늠하듯 경태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나 경태에게는 그 말이 그 어떤 험악한 사태를 예고하는 종소리처럼 들릴뿐이였다.

《뿐만아니라 호연군을 통하여 경태군의 생각이며 기호 또 학도들간의 교제범위를 상세하게 알구있으니 서로간 안팎으로 구면이라구 해야 할지. …》

경태는 호연의 말이 나오자 금방 가슴이 얼어들었다.

이때 출입문에서 손기척소리가 들리였다.

사와다가 얼른 일어나 나갔다가 곧 되돌아와서 보고했다.

《주임님, 속돌개경찰대에 붙잡힌 신암군 청년 세놈을 압송해왔답니다. 세놈 다 빨찌산입대를 기도한자들인데 신암경찰서에 넘기겠는지 해서. …》

《넘기긴 왜 넘겨. 우리 관할구역에서 우리 손에 잡힌 놈들인데… 허 참, 그 먼 내륙군에서두 도강을 기도하다니. … 어벌뚝지 큰 놈들… 구류장에 처넣으라구 하게!》

《알았습니다.》

사와다는 곧 나가 히라오까의 령을 알리고 도로 들어왔다.

경태는 도강기도자들이 체포되였다는 말에 또다시 가슴이 섬찍해지고 살벌한 분위기에 속이 후둑후둑 떨리였다.

히라오까는 저력있는 목소리로 경태를 주근주근 구슬리였다.

《경태군이 여기루 오는것을 본 사람은 없어. 그리구 뒤일두 빈틈없이 맞물려놓겠으니 마음을 푹 놓아두 돼. 여유를 좀 주겠으니 자기가 한 일들을 심심히 돌이켜보라구. 우리의 요구에 순순히 응하면 모든 일이 다 무사해질거네. 이 히라오까는 빈말을 모르는 사람이야. 자, 그럼…》하고 그는 사와다에게 눈짓을 했다.

사와다는 경태를 데리고 나갔다.

사실 히라오까는 경태에게 집중감시를 붙여놓고는 그의 움직임을 샅샅이 추적하여 뒤에 숨은 놈들의 거처를 모조리 조사한 다음 일거에 벼락같이 일망타진할 잡도리를 했었다. 그러나 밀정들을 줄줄이 달고 보름나마 미행감시를 하던 사와다의 보고를 듣고 자신의 계획을 당장 취소하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그것은 호연의 정체가 드러난 즉시부터 지하조직에서 경태와의 련계를 일체 단절한것이였다.

《주임님, 놈들이 우리가 경태를 미끼로 삼고있다는 기미를 채는 날엔 그를 즉시 제거할거란 말입니다. 제 소견엔 시급히 우리가 선손을 써야 할것 같습니다.》

역시 사찰계에 오래동안 몸을 담근 사와다다운 판단이였다. 그리하여 오라를 지우거나 수갑을 채우지 않고 쥐도 새도 모르게 슬쩍 검속한것이였다.

워낙 히라오까는 그 어떠한 중세기적인 고문과 극형에도 끄떡 안하는 사상범들의 철의 기상앞에서 혀를 내두르며 쓰디쓴 무력감을 한두번만 절감한것이 아니였다. 육체는 만신창되였어도 꺾이지 않는 그들의 정신력앞에 그는 사뭇 두려움을 느꼈었다. 그리하여 그는 육체적고문보다 《정신적고문》에 더 흥미를 느끼게 된것이였다. 그는 경험으로 봐서 경태쯤한건 어지간한 《정신적고문》에도 의지가 꺾일것 같이 생각되였다.

한편 맨 구석쪽 류치장에 따로 갇힌 경태는 벌써부터 제정신이 아니였다.

히라오까의 방을 나선 경태는 사와다를 따라 좁고 음침한 복도의 좌측 고문실에 들리였다. 개구리알집같은 물방울이 징그럽게 맺혀있는 천정에 드리운 불그레한 5촉전등빛에 비치우는 풍구가 달린 불덕우의 갖가지 쇠꼬쟁이들, 터슬터슬한 긴 각목탁우에 놓인 수동절단기, 쇠집게, 큼직한 양철주전자, 주리대, 피칠갑이 된 삼바줄 등 끔찍스러운 형구들을 그는 겁에 질려 바라보았다.

그를 더욱 기겁하게 한것은 으슥한 구석쪽에 우악하고 험상궂게 생긴 《박부르도그》가 바위처럼 버티고 서있는것이였다. 경태는 그가 즉시 자기를 형틀에 옭아매려는것 같아 속이 후닥거렸다. 그러나 각종 형구들을 돌아보는척 하는 사와다와 부동자세인 《박부르도그》의 태도로 보아서는 자기를 당장 형틀에 매달것 같지는 않아 조금 안심되였다.

사와다는 맨 안구석 류치장의 자물쇠를 철커덕 연 다음 경태를 그안에 밀어놓고 수갑을 채웠다. 침침하고 곰팡내와 악취풍기는 류치장안은 금방 질식할것 같았다. 그는 오늘 난데없이 련행되여 졸지에 바깔 세상과 격페되고보니 막 미칠것 같았다. 오늘 벌어진 일은 마치도 현실이 아니라 악몽처럼 느껴졌다. 자기가 잡혀온것을 아무도 모르는것이 가슴을 쥐여뜯고싶도록 절통했다.

아, 다시는 만나지 못할 설향이! 설향이가 자기의 행방을 몰라 안타깝게 찾아헤매일 모습이 머리속에 그려지자 눈물이 저절로 솟아올랐다.

아, 가련한 인생, 가련한 신세, 설향의 눈물어린 모습이 눈앞에 자꾸 밟혀오며 가슴을 란도질하였다. 설향의 애처로운 모습이 문득 철림이로 바뀌였다. 철림이! 너는 내가 고등계에 홀치워온줄 깜깜 모르고있겠지. 그 어떤 일에도 겁을 타지 않는 그의 당돌한 얼굴이 불쑥 떠올랐다. 철림이라면 미물같은 나처럼 순순히 끌려오지 않았을것이다. 그라면 밀정놈들에게 에워싸인 막다른 경우에라도 림기응변의 단호한 용단을 내려 바람처럼 사라졌을것이다. 만약 자기가 여기에 갇힌걸 알기만 하면 철림은 구원의 손길을 뻗쳐줄것이다. 그러한 참다운 벗을 두고도 호연놈을 가까이했던 자신이 증오스럽기 짝이 없었다. 발광이 났다. 내 이제와서 아무리 가슴을 쥐여뜯으며 천백번 후회한들 무슨 소용인가! 자기를 오늘과 같은 함정에 몰아놓으려고 별의별 요사를 떨며 겨드랑밑에 다가붙은 놈을 벗으로 믿고 속마음을 털어주지 않았던가!

이윽고 경태는 가까스로 자신을 수습하고 호연에게 루설하지 않은 비밀이 어떤것이였는가를 속으로 곰곰히 따져보았다. 그는 자기로서도 주저되는 두려움이 없지 않아 혜신반일회결성과 그 책임자로 철림이 선출된 사실, 반일회성원들, 삐라살포, 송수옥… 이러한 중대비밀만은 감히 입밖에 내지 못했던것이다. 그것은 얼마나 천만다행한 일이였는가. 그러나 다음순간 놈들이 호연놈이 꼬리를 감춘 뒤에도 손을 쓰지 않고 지금껏 즘즉해있은것은 필경 자기를 미끼로 남겨두었다가 바로 그 중대비밀을 들춰내려는 흉계였을수 있다는데 생각이 미치였다. 그런데 놈들이 아무러한 사전전조도 없이 불시에 검속한것은 순 자기의 입을 열어서 그 중대비밀을 알아내려는 기도가 분명하였다. 그러니 놈들은 기어코 나의 입을 열려고 갖은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을것이다.

경태는 비로소 외통목에 서있는 자기의 어쩔수 없는 위치를 통절히 깨달았다. 한순간 그는 그 어떤 우악한 손아귀가 자기의 목줄을 사정없이 옥죄는듯 한 몸서리쳐지는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너무도 막막하고 기가 질렸다.

(철림이와 어떻게 련계를 지을수는 없을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의지할데가 있으면 이 두려움이 한결 덜릴것 같았다. 경태는 비로소 아무데도 마음을 의지할 곳이 없는 인간이 이 세상 가장 가련하고도 불쌍한 인간임을 속으로 피가 흐르도록 절감하였다.

불현듯 언제인가 철림이가 지름길을 헛갈려 캄캄한 홍계수범골에서 혼자 헤매일 때 하다못해 세살난 아이라도 곁에 있으면 힘이 될것 같더라고 하던 말이 새삼스레 상기되였다. 비록 처한 환경은 달라도 미칠듯 한 공포의 고적에 시달리는 심정에서야 다를바 없지 않는가. 그런데 철림이 단매에 때려눕힌 《박부르도그》는 어떻게 고문실에 버티고 서있는가? 사와다가 일부러 위압감을 주려고 고문실을 거치게 한것같았다. 마치 말로 좋게 구슬릴 때 순순히 응하지 않을 때에는 보기에도 몸서리치는 그 피로 얼룩진 형틀에 비끄러매고 불로 지지고 주리를 틀겠다는 암시나 하듯이… 저 험상궂은 《박부르도그》는 손에 잡히는 형구들로 무자비하게 두들겨패댈것이다.

이 헤여날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아버지의 도움을 받을수 없을가? 만약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무슨 수를 쓰든지 자기를 뽑아내줄것 같이 생각되였다. 하지만 바깥세상과는 절벽같이 둘러막힌 피비린 우리안에서야 아버지한테 이 형편을 전할 아무런 방도도 없지 않는가. 그 누구의 힘도 빌릴수 없는 가련한 몰골이 된 자기를 놈들은 내키는대로 개 다루듯 할것이다. …


한편 어느날 철림을 교무실에 불러 학급생들의 출석정형을 따져보던 학감은 씁쓸한 표정으로 《경태생도는 지구별롱구승자전때문에 타군들을 순회하며 지도하고있으니 학급장은 그리 알고있으시오. 아마 일정한 시일이 걸릴거요.》하고 슬쩍 일러주었다.

철림은 올해는 유별나게 롱구경기를 너무 서두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잠자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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