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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차를 타고온 유영은 철림의 하숙집에 들리였다가 혜신고보로 발걸음을 옮기였다. 빈 하숙방에 무료히 앉아 아들을 기다리느니보다 한발 먼저 아들도 만나고싶고 오래간만에 거리구경도 하는겸해서 길에 나선것이였다.

어린 철림을 앞세우고 입학시험을 치러오던 때가 엊그제같은데 어언간 5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러간것이였다.

떨어지기를 그리도 서운해하는 철림을 난생처음 남의 집에 맡기고 돌아설 때 길가에 그린듯 서서 하염없이 바라보던 쓸쓸한 모습이 늘 가슴을 아릿하게 허비군 하였다. 그때는 지금처럼 철길이 놓이지 않아 철림은 백수십리길을 종종 도보로 다니였었다.

그런데 어느덧 졸업이 림박해지고 한 조직의 책임자로 자란것이다.

《어머니!》하고 철림이 운동장 저쪽에서 어느결에 알아보고는 쏜살같이 달려왔다. 그는 숨을 톺으며 어푸러질듯 달려와서는 어머니의 손을 와락 그러잡았다.

《어머니, 갑자기 웬일이예요. 낮차에 오셨나요?》

《응, 넌 덩지는 커서두 속은 여전하구나.》

《어머니, 외할아버지랑, 미옥이랑 다 잘있나요?》

《오냐, 다 잘있다. 글쎄 미옥은 역까지 따라와서는 오빠의 하숙비건사를 잘하라느니, 내릴 때 보따리를 놓구 내리지 말라느니, 오빠에 대한 말을 자랑삼아 아무한테나 하지 말라느니 되려 제가 에미한테 훈계질이 아니겠니.》

그들모자는 애모쁜 심정으로 즐겁게 웃었다.

《먼길을 오셨는데 하숙집에서 좀 쉬시질 않구…》

《오늘은 어쩐지 너하구 같이 걸어보구싶더구나. 이래서나 너하구 거리를 걸어보지 언제 이렇게 걸어볼 일 생기겠니.》

철림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걸었다.

《얘야, 남들 보는데 별나지 않겠니?》

《아들이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걷는데 별날게 있나요 뭐.》

유영은 자기와 만난것을 그리도 기뻐하는 철림을 정겹게 보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키꼴이 후리후리한 청년이 됐어도 마음만은 아직도 어린애였다.

《참, 어머니두 반일회 회원이 되셨더군요.》

《그래, 수옥동무가 여러번 와서 사람들을 공회청에 모이게 하구 10대강령해설두 하고 담화두 하더니 우리 마을에 분회를 꾸려주었단다. 나두 그래서 밤이면 좀 바삐 지낸다. 그런데 미옥은 밤마다 내옆에 딱 붙어다닌단다. 제가 뭐 엄마호위병이라나.》

유영은 허거프게 웃었다.

철림은 미옥의 그 당돌하고 고집스러운 모습이 정겹게 안겨와 가슴이 쩌릿했다.

《외할아버지두 알고계셔요?》

《외할아버지야 독립군출신이니 그런 문제야 밝지 않으시니.》

유영은 주위를 슬쩍 살피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늘 이렇게 말씀하신다. 왜놈들과 맞서 싸우려면 담이 커야 한다. 너죽구 나죽구 해보자는 마음의 잡도리만 단단히 차리면 두려울게 하나 없느니라 하구.》

《그저 여전하시군요.》 어릴적부터 외할아버지의 손탁에서 자란 철림은 그 담보가 부러웠다.

《그리구 우리 분회책임자가 내 너한테 간다니까 원호물자품목이라면서 이걸 너한테 보내더구나.》

유영은 웃저고리앞섶에서 꼼꼼히 밀봉한 자그마한 봉투를 슬그머니 꺼내주었다.

철림은 사위를 넌지시 살피며 그 봉투를 받아 학생복 안주머니에 간수했다. 그들이 하숙집에 도착하자 발자국소리를 듣고 은해가 부엌문을 삐써 열고 내다보다가 얼른 신발을 신고 나왔다. 그는 철림이한테 인사를 하고는 유영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놀라며 깍듯이 인사를 하였다.

《철림동지의 어머님이 아니세요?》

《그러이, 누구던지?》

철림은 빙그레 웃으며 은해 대신 소개했다.

《어머니, 내 2학년때던지 태평령밑집에서 하루밤 묵고갈적에 이모집에 와있던…》

그제서야 생각이 떠오른 유영은 너무 뜻밖이여서 은해의 손을 그러잡으며 여간 반가와하지 않았다.

《그런걸… 그새 이렇게두 환하게 번졌으니 내 미처 알아 못 봤댔구나. 그 몇해어간에 더 어여쁘구 의젓해졌구먼…》

그 말에 수집은듯 은해의 얼굴은 앵두빛으로 물들었다. 은해는 철림을 잠간 만나고 인차 되돌아서려다 어머니에게 실례가 될것 같아 그들이 각근히 이끄는대로 방에 따라들어갔다.

유영은 제 집처럼 곧 부엌간에 내려가 놋대접과 저가락들을 들고 들어왔다. 그는 보짐을 끄르고 자그마한 법랑소랭이에서 팥보숭이를 묻힌 기장떡과 깨가루를 뿌린 기지떡을 대접에 무드기 담아 그들앞에 놓아주었다.

《어서들 들라구. 기장떡같은 촌음식이야 여기선 맛보기가 힘들거라구. 》

유영은 차분히 웃으며 말했다.

《어머님두 같이 들자요.》 철림이가 이렇게 권하자 유영은 《난 아까 하숙집 안사람하구 같이 들었다. 어서 허물말구.》하고 각기 저가락에 기장떡을 찔러 들려주었다.

은해는 유영이가 각별하게 굴수록 사뭇 송구하여 몸둘바를 몰라했다.

《철림동지, 한가지 보고할 문제가 있어 찾아왔다가…》

《어떤 문제인데?》

은해가 이 자리에서 말해도 일없을가 하여 머뭇거리는 눈치를 채고 철림은 서글서글하게 말하였다.

《은해동무, 우리 어머니두 같은 반일회 회원이요. 마음놓구 말해도 되오.》

유영은 빙그레 웃으며 이를데없이 참하게 생긴 은해를 다정한 눈매로 바라보았다.

《오늘 설향이가 자기 집에서 마련한 의약품을 원호물자로 받아달라고 제기해왔더군요.》

철림은 깜짝 놀랐다. 그가 별안간 이렇게까지 나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것이다.

《아니, 설향동무가?! 정말 천만뜻밖인데…》

은해는 그리된 사유를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전번에도 말했지만 영란이와 찬숙이 어데 갔느냐구 련거퍼 묻는 설향의 너무도 안타까와하는 심정을 계속 외면하기가 정말 괴롭더군요. 철림동지도 잘 알다싶이 설향의 마음에는 티 한점 없지 않나요. 나는 거짓을 모르는 그의 아름다운 마음을 믿구 솔직히 말해주었어요. 그 동무들은 인민혁명군에 입대했다고 하자 몹시 놀라와하더군요. 그런 후 며칠 지난 오늘 글쎄… 설향은 아버지에게두 말씀드렸대요.》

철림은 내심으로 저으기 감탄하며 은해를 높이 추어주었다.

《그야말로 은해동무답소! 정말 대담하게 말을 잘해주었소!》

《철림동지, 너무 비행길 태우지 마십시오.》하고 은해는 유영의 얼굴을 할깃 살피며 손등으로 입을 가리웠다.

《그후 어느날 설향의 아버지는 〈설향아, 지금 나라를 사랑하구 민족을 사랑하는 뜻있는 사람들은 항일빨찌산에 참군하거나 물심량면으로 성심성의껏 원호한다더라. 우리야 뭐 쥔게 의약품밖에 있니. 그러나 산에서는 의약품이 필요하겠으니 의약품을 성의껏 원호하자꾸나.〉 이렇게 말씀하시더랍니다.》

철림은 그들의 지극한 성의에 가슴이 확 달아올랐다.

《참말 쉽지 않은분들이구나.》 유영이도 저으기 감탄하여 말하였다.

철림은 어머니한테 거듭 인사를 공손히 하고 문밖에 나서는 은해를 따라 거리에 나섰다. 은해는 어머니가 계시는데 저 혼자 가겠다며 펄쩍 뛰였으나 철림은 묵묵히 은해의 뒤를 살펴주며 집까지 바래주고서야 돌아섰다. 그는 오늘 은해의 사려깊고 결단성있는 행동에서 어지간히 고무적인 힘을 받았다.

철림이 하숙방에 돌아오자 유영은 깜빡 잊은듯 몹시 아쉬워하며 말하였다.

《아뿔싸, 내 정신 좀 봐. 글쎄 미옥이가 은해언니랑 만나게 되면 꼭 자기 인사를 전해달라구 신신당부하던걸 내 깜빡 잊었댔구나.》

《어머니, 내가 은해동무에게 미옥의 인사를 꼭 전해요.》

《은해는 볼수록 과연 이쁘기두 하지만 경우가 밝구 속이 깊은 보기드문 처녀구나!》

유영은 은해를 쉬이 놓아보낸것을 무척 아수해하는 심정이였다.

철림은 싱글벙글하며 짐짓 유영에게 물었다.

《어머니, 은해동무가 진짜 똑똑해보여요?》

《똑똑해보이다마다, 참해보이구. … 그래 네가 무슨 속심을 가지구 묻는 말 아니냐?》

유영은 아들을 의미있는 눈길로 쳐다보았다. 철림은 본시 쭐나고 소심하던 그전같지 않게 이제는 지내 활달해진 나머지 좀 능청스러워진것 같았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인데 그 어머니의 생각과 그 아들의 생각이 같지 않을수가 있겠나요.》

《호호호, 너 고급학년생이 되더니 말두 신식으로 멋을 피워 하는구나. 》

철림의 속마음을 알아차린 유영은 더없이 흡족해졌다. 마치도 즐거운 일들이 미리 기다렸다가 벌어지는것처럼 맞물리는것이였다.

그날 밤 철림은 어머니에게 사이또놈과 변영근놈을 처단해버린 사실과 변호연의 정체를 발가놓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유영은 깜짝 놀라기도 하고 통쾌해하기도 하면서 어마한 이야기를 심중하게 들었다.

《그래 무슨 끈덕지라두 잡힐 흔적은 남기지는 않았느냐?》

《아니요. 어머니, 걱정마세요. 쥐도새도 모르게 처단한 그 두놈을 화전뙈기의 묵은 감자움에 처넣었댔는데 인츰 그곳 동지들이 더는 찾지 못하게 깊은 웅뎅이에 아주 매몰해버렸대요. 그놈들 머리속의 비밀도 다같이 매장됐으니 한동안이야 즘즉하겠지요.》

《그러나 조금두 마음놓지 말거라. 나는 어쩐지 가슴이 떨리는구나.》

유영은 무거운 낯빛으로 사뭇 걱정스러웠다.

《내 괜히 말씀드린것 같군요.》

《아니다. 네가 해놓은 그 중한 일을 어머니가 몰라서야 되겠니.》

철림은 어머니의 기분을 돌려세워드리고싶었다.

《어머니, 한무선선생님을 잘 아시지요?》

《알구말구. 너를 배워준 선생인데 이 에미 모를수가 있니. 그 아까운 선생이 병보석으로 나와 잘못되였다는구나.》

《어머니두 벌써 알구계시누만요.》

《남석에두 그 가슴아픈 소문이 퍼져 모르는 사람 없다.》

《어머니, 아까 왔던 은해동무가 바루 그 선생님의 사촌누이동생이예요. 》

《그래? 일두 정말…》

철림은 감회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그 선생님이 운명직전에 참으로 귀중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답니다. 선생님은 장백땅에서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뵈웠답니다.》

《그 선생이 장군님까지 만나뵈웠니?》

《예! 장군님께서 인간을 사랑하기때문에 혁명에 나섰다고 하신 말씀은 지금두 이 가슴을 끓게 하구있어요.》

유영이도 그 말씀에 감복을 금치 못해하였다.

《실루 금언이시구나! 나두 이따금 네가 보던 책들을 두루 읽어본다만 그런 글귀는 여태 본적이 없구나.》

《그것은 장군님께서 처음 내놓으신 말씀이예요. 저도 돌아가는 고전들을 거의다 읽었지만 그런 진리는 없었어요.》

《내 짧은 소견에두 우리 어머니들이 강한것두 자식들에 대한 사랑때문이 아니겠니.》

《옳아요! 어머니, 정말 어머니하군 말할 재미가 있거던요. 뜻이 척척 통하니까요.》

《호호호, 자식두…》

《어머니, 그 사랑이 숱한 동지들을 묶어세우구 큰 힘으로 자라나게 하는것이지요. 곰곰히 따져보면 바루 그 사랑이 없으면 마음속에 왕가물이 들어서 래일두 믿음두 없어지구 어려움을 겁내구 자기를 지탱할 힘두 잃게 되는것 같더군요. 그러니 얼마나 고귀한 말씀인가요.》

철림은 움쭉 일어나서 벽장의 맨 안구석에서 잡지를 꺼내였다.

《어머니, 이번에 수옥동지 가져온 〈3.1월간〉이예요. 조국광복회기관진데 장군님의 혁명사상이 다 밝혀져있어요. 우리가 찍은 다섯부를 먼저 드리겠으니 가져다 나누어보십시오.》

유영은 금시 등사잉크내가 풍기는듯 한 《3.1월간》을 소중히 받아 펼치고 읽었다.

철림은 등사가 방금 끝난 때에 어머니 오신것이 마침 잘되였다고 생각되였다.

《정말 훌륭한 책이구나. 모두 읽으면 눈앞이 확 열려지겠구나.》

유영은 오늘 여러모로 마음이 대단히 흡족했다.

말하는품이나 거동이 비할바없이 의젓하고 무게있어보이는 철림이가 더없이 대견스러웠다. 본래 너무나 비위가 약하고 쭐나서 객지에서 종종 배를 곯는것이 유영의 가슴을 에이고 마음을 놓을수 없게 했었다. 한번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중낮이 다되여 하숙집을 떠나면서도 점심밥을 먼저 먹겠다는 말 한마디를 꺼내지 못하여 백수십리길을 허기지여 걸어온 일까지 있었다.

《얘야, 이 해짧은 동삼에 초기를 만나 길가에서 얼어죽자구 그러느냐. 사내자식이 왜 그렇게두 부실하냐.》

유영은 속으로 눈물을 지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체격도 름름해지고 게다가 조직책임자가 되더니 성격도 활달해지고 부접이 좋아진게 첫눈에 알리였다. 유영은 그것이 무엇보다 흡족하였다.

유영은 철림의 말을 듣다가 저도모르게 소릇이 잠들었다. 그는 잠결에 자기의 손등을 쓰다듬는것 같은 부드러운 촉감을 느끼며 눈을 떴다.

철림이가 무엇을 하댔는지 실패를 앞에 놓고 자기의 손등을 쓰다듬고있었다.

《원 애두, 내 손이 어떻다구 그러니. …》

《어머니손이 정말 험해졌군요. 트구 갈라지구… 내 조그말 때 어머니의 손은 매끈했드랬는데…》

유영은 철림의 손에서 자기의 손을 슬그머니 뽑으며 나무랐다.

《온, 별걱정을 다. 험해진들 뭐라니? 내 이제 맵시를 보겠니.》

《어머니, 저때문에 손이 이렇게 됐지요?》

《사내가 너무 잔걱정이 많아두 못쓴다. 나는 손이 험해져두 네가 오늘처럼 혁명가로 자란게 그저 대견하기만 하다.》

철림은 마음이 알찌근해지며 눈시울이 확 달아올랐다.

다음날 유영은 떠날 차비를 하며 피뜩 생각나는듯 《3. 1월간》을 찾았다.

철림은 히죽이 웃으며 《그건 벌써 어머니가 간수했어요.》하고 능청을 부렸다.

《네 무슨 소릴 하니. 난 받은적이 없다.》하고 유영은 뜨아해하였다.

철림은 어머니의 덧저고리안등을 펼쳐보이였다. 덧저고리안등에 우정 같은 색갈의 딴천을 덧꿰매여붙이고 그속에 《3.1월간》잡지들을 넣고 웃가생이도 꼼꼼하게 꿰매놓았다.

유영은 혀를 끌끌 차며 허거프게 웃었다.

《이렇게까지 안한들 내가 발각되게 건사할가봐 그러니? 너 이러느라구 잠두 안 잤겠구나. 참 애두, 이럴 때는 꼭 처녀애같다니까.》

유영은 이렇게 지청구를 하면서도 아들의 다심한 정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철림이 등교한지 한겻은 좋이 지나 유영은 역에 나갔으나 차가 연착되여 기다림칸에서 오래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는 늦게야 객차에 올라 차창옆에 앉았다.

이윽고 렬차는 기적을 길게 울리며 움직이였다. 그 순간 유영은 무심히 차창밖을 내다보다가 누군가가 역나들문을 쏜살같이 빠져나와 홈으로 내달아오는것을 보았다. 뜻밖에도 철림이였다.

차창가에서 손을 흔드는 유영을 따라 달리며 저도 손을 흔들었다. 차가 속력을 내자 철림은 떨어지며 그냥 손을 내흔들었다.

유영은 코마루가 찡해졌다. 다 자란 철림이가 오늘은 별로 지내 극성스럽게 군다는 아릿한 생각이 들었다.


×


설향은 은해가 자기를 조금도 불신하지 않고 선뜻 영란이와 찬숙의 행처를 솔직히 알려줄 때 이를데없이 감동되였다. 그것은 목숨으로 담보해야 할 중대비밀이 아닌가! 그와는 쌍둥이자매나 다름없으나 지향상으로는 뛰여넘을수 없는 계선이 있다고 여겨왔던 은해로부터 커다란 믿음을 받게 되자 설향은 저절로 눈굽에 눈물이 핑 괴여올랐다.

설향은 그때의 격동된 심정을 자기 일기장에 이렇게 담았다.

《정말로 고맙다, 은해! 미련했던 나를 자신처럼 믿어주는 나의 진정한 벗, 은해! 나는 례사로운 우정을 훨씬 초월한 참다운 믿음을 받게 되니 정말 행복하다. 아버지는 네 마음이 그리도 기쁘면 그 믿음에 실지로 보답하자시며 곧 의약품을 마련하시였다. 은해는 우리의 이러한 심정이 깃든 소박한 성의를 반갑게 선뜻 받아들였을뿐아니라 철림씨는 그것을 높이 평가하였다고 하니 나는 하늘로 막 날듯 한 심정이다.》


설향은 요즘 웬일인지 속으로 은해-하면 온 마음이 봄날처럼 밝아지고 경태-하면 마음속 그믐밤처럼 어두워졌다. 날이 갈수록 그를 만나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언제인가 호연놈의 정체가 쫄딱 발기운 직후 고뇌에 찬 그와 흥심없이 만난 뒤로는 지금껏 못 만났었다. 그렇지만 이전같이 그의 하숙집에 무턱대고 찾아다닐수가 없었다. 그것은 종전까지는 그 징글징글한 호연이 뻔질나게 나타나 자연 발길이 멀어지게 했고 지금에는 께름한 그 방이 마치 놈들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노려보는 덫이나 함정같아 절로 찾아가게 되지 않았다.

은해의 말에 의하면 혜신남고보 학감이 수염을 뻑 쓸고 호연은 가정사정으로 타도에 전학해갔다고 알리여 슬쩍 덮어버렸다고 한다.

지금 경태는 얼마나 혹심한 불안과 두려움속에 조바심을 치고있을가. 설향은 고독에서 몸부림을 칠 그의 곁에 있어주고 위로해주고 힘이 되여주고싶었으나 형세가 너무나 삼엄한것 같아 어쩌는 수가 없었다.

한편 랭철하게 판단해보면 별안간 이러한 판국에 직면하게 된것은 그 누구의탓도 아니고 바로 경태자신의 불찰때문이 아닌가!… 그는 무슨 까닭에 철림이와 같은 훌륭한 벗을 자기의 마음속에서 앗아내고 그 자리에 둥지를 틀려는 밀정놈과 딱 붙어돌아갔을가? 만일 그에게 철림의 절반만큼한 강단이 있었더라도 문어처럼 감겨드는 그놈한테 호락호락 넘지 않았을것이였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새겨보면 경태는 남달리 허울이 삐여지고 남아다운 호기를 곧잘 부려도 그 누구든 곁에 다가붙어서 귀맛좋게 구슬리며 무슨 요사를 부려서든지 자기의 취미와 감정을 충족시켜주기만 하면 대뜸 마음을 열어주는것 같았다. 그러기에 그는 자기의 마음을 낚으려는 그놈의 구렝이속을 헤쳐보지도 않고 무턱대고 친교를 맺은것이 아닌가.

구경 경태는 진실은 외면하고 거짓에 속아 그놈과 한동아리로 놀아나던 나머지 이런 파국을 휘몰아온것이나 다름없었다.

설향은 경태가 철림이나 은해에 대하여 너무나도 아는것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온몸에 소름이 끼치였다. 그렇다면 놈들이 그 과녁을 면바로 노리고 그들과 그중 친밀하면서도 그중 물렁물렁한 고리인 경태를 미끼로 택한것이 아닐가?! 그래서 놈들이 경태의 속을 뽑아 단서를 잡고 그 선을 톺아 조직에 접근하려고 별의별 교묘한 수단을 다 썼을게 아닌가! 그놈의 낚시에 너무도 쉽사리 물리운 경태가 그놈의 기도에 말려들지 않았으리라고 감히 장담할수 있을가? 설향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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