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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품을 찾아 수천리

 

1950년 6월 28일, 서울이 해방되였다.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광명의 날이 왔던것이다. 만세의 환호성이 서울시내를 진감하였다.

서울이 해방되여 며칠이 지난 어느날 종로거리를 지나가던 사람들은 가슴설레는 광경앞에 모두 걸음들을 멈추었다.

화신백화점 맞은켠에 《한청빌딩》이라고 불리우던 건물이 있었는데 그 건물의 벽면우에 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장군 노래》가 씌여진 커다란 현수막이 내려드리워지고 확성기에서 한 녀가수의 힘찬 노래소리가 울려퍼지고있는것이 아닌가.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

오늘도 자유조선 꽃다발우에

력력히 비쳐주는 거룩한 자욱

 

그것은 권원한이 부르는 노래였다. 그토록 해빛을 갈망하던 녀가수가 해방된 서울거리의 한복판에서 가슴속에 끓어넘치는 격정을 터쳐 목청껏 태양송가를 부르고있는것이였다.

가장 크나큰 긍지가 이 노래와 련결되여있었다.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미래가 이 노래와 련결되여있었다.

어른들도 아이들도 대렬을 지어 지나가던 인민군병사들도 후더운 심장의 박동에 맞추어 노래를 따라불렀다.

 

아 그 이름도 그리운 우리의 장군

아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장군

 

권원한은 해방된 서울의 가는 곳마다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 무대가 따로없었다. 강당에서도 부르고 큰 길가에서도 불렀다.

전쟁이 일어나자 리원녕은 정치공작대로 서울에 파견되였었는데 그때 서울의 어느 거리에서 서울시민들에게 노래를 보급하던 권원한의 모습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있다.

그때껏 권원한은 그처럼 열렬한 청중을 가져본적이 없었다. 이름있는 가수가 심장으로 부르는 《김일성장군의 노래》에 매혹되여 김장군님을 따라가겠다고 하면서 학생들은 책가방을 멘채로, 로동자들은 밥곽을 든채로 용약 인민군대에 탄원해나섰다고 한다.

이전 국립예술극장의 명가수였던 공훈배우 김점순은 중학졸업을 앞두고 서울해방을 맞았다.

어느날 리상철이라는 수학교원(그는 의용군으로 공화국에 들어와 김책공업종합대학에서 박사로 있었다.)이 찾는다는 련락을 받고 가보니 교원은 어느곳에 가서 노래를 배워와 학생들에게 보급하라는 과업을 주는것이였다. 어려서부터 노래에 남다른 소질이 있던 김점순은 중학교에서도 써클이 제기되면 선참으로 뽑히군 하였었다.

김점순이 수학교원의 말대로 그곳을 찾아가보니 뜻밖에도 거기에 권원한이 있더라는것이였다.

전쟁전 김점순은 권원한이 주역을 맡았던 가극 《까르맹》에 합창성원으로 출연했던적이 있었다. 그때 학교 음악교원이 《까르맹》의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그를 소개하였던것이다. 합창성원들중에서 유일한 중학생이였던 그는 대뜸 권원한을 비롯한 모두의 주목을 받게 되였다.

권원한도 그러한 점순이를 알아보고 몹시 반가워하였다. 그는 김점순 등 찾아온 사람들에게 인쇄한 악보를 나누어주고나서 《김일성장군의 노래》와 《애국가》, 《인민공화국선포의 노래》, 《민주청년행진곡》을 비롯한 노래들을 배워주었다.

그후 김점순은 권원한을 따라 남조선음악가동맹에서 조직한 공연에도 참가하였다. 공연은 시공관에서 여러날동안 진행되였는데 공연을 마친 후 출연자들은 그길로 의용군에 탄원하였다. 곧 그들을 모체로 하여 전선지구경비사령부협주단이 조직되였다.

전선지구경비사령부협주단에 대해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못하다. 아마 전쟁시기에 무어져 전쟁시기에 존재를 마쳤기때문일것이다.

협주단의 정치사업은 백인준이 맡아보았고 단장으로는 후날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총장으로 있은 백민이 임명되였다. 그외에 협주단에는 부단장들과 작곡가, 지휘자, 연출가들이 있었고 각 부문별로 조장, 파트장들도 있었다. 권원한은 20여명으로 이루어진 녀성성악조를 책임지고 중대장으로 임명되였다.

군복이라고는 난생처음으로 입어보는 예술인들인지라 모든것이 생소했다. 한번은 권원한이 대렬앞에서 《구보로 갓!》 해야 할것을 《답보로 갓!》 하고 구령을 치는 바람에 웃음보가 터졌다는 일화도 있다.

하지만 협주단예술인들의 사기는 드높았다. 자기들이 부르는 한곡한곡의 노래가 천만사람의 심장을 움직인다는 자부심을 안고 그들은 용기백배하여 공연활동을 진행하였다.

권원한도 그 대오속에 서있었다. 얼마동안 서울에서 전선으로 나가는 의용군부대들을 위한 공연을 진행하고나서 예술인들은 전선과 해방지구들을 돌며 순회공연을 벌려나갔다. 당시에는 그러한 공연활동을 《전선위문공작》이라고 불렀다.

장편소설 《녀가수》에서는 그들의 모습을 이렇게 서술하고있다.

《이때부터 협주단은 낮과 밤이 따로없는 위문활동을 벌리기 시작했다. 화물자동차로, 기차로, 도보로 전선과 후방을 돌며 멀리 전라북도의 중요항구 군산의 해안방어부대까지 나갈 때도 있었다. 때로는 바다가 모래불에서 모기와 싸우며 야숙을 하고 몇끼씩 굶기도 했다. … 전선이 멀어져가고 행군길도 늘어만 갔다. …》

9월 중순 맥아더의 대부대가 인천으로 밀려들었다. 조국앞에 엄혹한 시련이 닥쳐온것이다.

권원한은 소편대에 망라되여 인천방어전투에 참가한 전투원들을 고무해주었다.

전선의 형편은 시시각각으로 긴박해졌다. 후퇴대렬이 북으로 흘러가기 시작하였다. 생사를 가늠하기 힘든 운명의 갈림길앞에서 매개인들은 자기가 갈길을 선택해야만 했다.

일시적인 기분에 사로잡혀 따라나섰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대렬에서 떨어져나갔다. 허나 권원한은 그리할수가 없었다.

해방된 서울거리에서 그리도 열렬하게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던 그였다. 장군님의 정치가 고마워 감격에 울고웃던 남녘겨레들의 모습을 뜨겁게 새겨안고있는 그였다. 자신의 인생도 겨레의 밝은 앞날도 오로지 위대하신 장군님의 품에 안길 때에만 꽃펴날수 있다는것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기에 권원한은 태양의 품을 찾아 주저없이 북행길에 올랐다.

비단 그만이 아니였다. 후날 인민의 사랑을 받는 재사들로 자라난 김린욱, 리정언, 홍승학, 김영규, 박섭, 김수조 등 수많은 예술인들이 전선지구경비사령부협주단의 후퇴대렬에 속하여 북행길에 올랐다. 그들속에는 김점순이나 리규봉과 같이 이제 금방 중학문턱을 넘어선 애어린 처녀들도 있었다. 하늘땅이 뒤집힌대도 끝까지 김일성장군님을 따라가겠다는 하나된 지향이 나이도 각이하고 살아온 경력도 제나름인 그들을 한대오에 서게 하였던것이다.

간고한 행군이 시작되였다. 그들이 가야 할 앞길에는 넘어야 할 산도 많았고 건너야 할 강도 많았다. 얼마 못 가서 사람들이 지쳐 쓰러지기 시작하였다.

장편소설 《녀가수》의 한 대목을 또다시 펼쳐본다.

《끝없이 걷고 또 걸어야 했다. 밤이면 굶주림과 추위에 잠을 이룰수 없었다. 날을 따라 북풍이 몰아치고 황이 든 잎사귀들이 우수수 흩어져내렸다. 홑옷을 입고있는 사람들이여서 바람이 차질수록 다가오는 겨울에 대한 불안으로 몸을 떨었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였다. 고향이 멀어져갈수록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발을 힘들게 옮기군 하였다. …》

믿음이 없이는 끝까지 가낼수 없는 길이였다. 자신과 동지들에 대한, 승리에 대한 믿음을 목숨처럼 부여잡고 그들은 한걸음한걸음 북으로 행군해갔다.

휴식구령이 내리면 그 자리에 털썩털썩 주저앉아 배낭을 멘채로 곯아떨어지군 하였다. 행군도 힘겨웠지만 그에 못지 않게 견디기 힘들었던것이 배고픔이였다. 다행히 가을철이였던지라 벌판에 들어서면 김장배추며 무우들이 한창 자라고있어 밑둥이 실한 무우들을 골라 툭툭 털고는 이발로 껍질을 벗겨 먹었다. 그리고는 10분도 지나기 전에 여기저기서 아이구, 아이구 하며 배를 그러안고 돌아갔다. 텅 빈 속에 매운 무우를 먹었으니 상처에 고추가루를 뿌린것처럼 위가 쓰려났던것이다. 그렇게 몇번 혼나고난 다음부터 무우는 다치지 못하고 배추잎만 뜯어먹었다. 행군을 하면서 먹어야 했으므로 따로 고를새도 없이 배추잎을 한줌 뜯어서는 고갱이를 골라먹으며 대오를 따라가군 하였다.

간혹 폭격에 맞아죽은 가축들을 보는 경우도 있었는데 아무리 허기진 몸들이였어도 소금이 없으니 한점도 먹을수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고생하며 행군하다가도 인민군군인들을 만나면 다섯명이고 여섯명이고 앉혀놓고 공연을 하군 하였다.

초기에 평양을 목적지로 삼고 떠나온 그들이였건만 평양이 강점되였다는 소식에 접하고는 다시금 북쪽으로 발길을 옮기지 않으면 안되였다. 정세가 날로 준엄해지고 갈길이 더욱 험해지자 대렬속에서는 동요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대렬이 순천에 이르렀을 때였다. 미군비행기들이 날아와 맹폭격을 퍼붓더니 이상하게도 하늘에서 흰 눈송이같은것들이 떨어져내리는것이였다. 자세히 눈여겨보니 미군락하산부대가 아닌가.

너무도 급작스레 들이닥친 정황속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대렬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져버렸다. 권원한을 비롯한 살아남은 사람들은 서로의 행방을 찾아 울며 헤매다녔다.

그럴 때 연극조 조장이 권원한을 찾아와 본심을 털어놓았다. 재간만 있으면 예술이야 아무데서 해도 될텐데 고생을 사서 하지 말고 함께 남으로 나가자는것이였다.

권원한은 그러는 그를 억이 막혀 바라보았다.

한때 남조선영화계에서 인기를 끌던 그였다. 전쟁이 일어나자 파죽지세로 남진하는 인민군대의 혁혁한 전과에 현혹되여 협주단에 뛰여든 그였지만 워낙 정치적신조가 뚜렷치 못하고 승리에 대한 믿음이 허약했던지라 사느냐 죽느냐 하는 판가리시각에 처하자 마음이 흔들리고있었던것이다.

자기가 걷는 길에 대해 신념과 긍지를 갖지 못한 인간만큼 불행한 존재는 없을것이다. 지조도 량심도 없이 시세에 맞춰 저 하나의 안일만 쫓아다니는 삶이라면 물결을 따라 이리저리 떠다니는 부평초의 신세와 다를바가 뭐겠는가.

그가 되돌아가자고 애원하는 그 사회가 어떤 사회인가. 돈이 모든것을 좌지우지하는 사회, 예술도 돈에 팔리워야 하고 인간의 존엄마저도 돈앞에서는 무릎을 꿇어야 하는 황금만능의 사회가 아니던가. 과연 그런 곳에서 무슨 참다운 예술을 운운할수 있단 말인가.

결코 다시는 되풀이하고싶지 않은 생활이였다. 권원한은 단호히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남으로 가겠으면 너 혼자 가라. 난 김일성장군님을 찾아가겠다.》

그리고는 수습된 대렬과 함께 북으로의 행군을 계속했다.

북으로 가는 길에서 그들이 겪은 죽음의 고비는 그 얼마였던가.

묘향산줄기근처의 어느 강을 건늘 때였다. 폭격으로 인도교가 파괴되여 대오는 밤에 철교를 건너야 했다. 우에서는 미군폭격기들이 대낮같이 조명탄을 걸어놓고 연방 폭탄을 퍼붓는데 밑에서는 사나운 물살이 와와 소용돌이치고있었다. 침목들을 밟고 건느자니 너무 급하고 아찔해서 녀성들은 어쩌는수 없이 철다리를 기여 건느기 시작했다. 폭음은 쉴새 없이 울부짖고 물기둥들은 몰방으로 솟구쳐올랐다. 여기저기서 적탄에 맞은 전우들이 강물속으로 떨어져내렸다.

대오가 철교를 다 건넜을 때는 날이 푸름푸름 밝아올 무렵이였다. 적기들은 여전히 교대로 날아들며 끊임없이 맹폭격을 들이대고있었다. 그들은 큰길에서 벗어나 다급히 산으로 올리붙었다. 푹푹 빠져드는 락엽을 헤치며 안전한 곳에 이르러 인원을 점검해보니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희생된 사람들중에는 콘트라바스연주가 리경애도 있었다. 몸이 가늘고 키가 커서 《코스모스》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던 녀성이였는데 적기에서 날아오는 여러발의 기총탄을 맞고 숨을 거두었다.

적기들이 한바탕 폭격을 하고 물러가면 다른 적기들이 밀려올 때까지 몇분가량 동안이 있군 하였다. 그 틈을 타서 남자들이 산밑으로 내려가 희생된 동지들의 시신을 할수 있는껏 옮겨왔다. 그들은 조국의 이름없는 산기슭에 동지들을 묻었다. 적기들이 밀려오면 몸을 숨겼다가 적기들이 물러가면 다시 나가 흙을 덮어주고 하면서…

서울이 다시 해방되였을 때 백민이 거기에 나갔었는데 그때 리경애의 어머니가 딸에게 입히겠다고 솜저고리를 지어가지고 찾아왔더라는것이였다. 그런 어머니에게 차마 딸의 최후를 알려줄수가 없어 백민은 어머니가 지어온 솜저고리를 그대로 받아가지고 왔다고 한다.

신념과 의지의 힘으로 한걸음한걸음을 옮겨간 그들의 북행길이였다. 죽더라도 장군님의 품을 찾아가다가 죽겠다는 필사의 각오가 있었기에 그들은 사선을 뚫고 시련의 언덕을 넘어 드디여 12월초에 만포에 가닿을수 있었다.

그때 그들의 행색은 말이 아니였다. 떠날 때 입고있던 여름군복은 다 해지고 신발도 닳아떨어져서 새끼줄로 동여매고있는 사람들이 태반이였다. 하지만 간난신고를 이겨내고 끝끝내 장군님의 품에 안겼다는 긍지와 기쁨에 넘쳐 그들은 개선대오마냥 보무당당히 만포시내에 들어섰다고 한다.

만포에 도착한지 얼마 안되여 전선지구경비사령부협주단은 해산되고 권원한을 비롯한 대부분의 예술인들이 국립예술극장에 소환되였다.

1950년 12월 23일은 권원한의 한생에서 가장 뜻깊은 날로 새겨져있다. 그날 권원한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 축하공연에서 처음으로 어버이수령님을 모시고 노래를 불렀던것이다.

오늘에 와서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자강도 장강군 향하리에서 진행된 공연이였다.

긴장된 분위기속에 막이 열리는 순간 합창대가운데 서있던 권원한의 가슴은 후두둑 높뛰였다. 관람석에 앉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 무대를 바라보고계시는것이 아닌가. 목이 꽉 메여왔다. 넘쳐흐르는 태양의 강렬한 빛에 온몸이 격정으로 떨려났다. 꿈결에도 뵙고싶던 그이를 우러르며 권원한은 가수들과 심장을 합쳐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목메여 불렀다.

서울해방의 환희에 겨워 서울의 한복판에서 부르던 노래였다. 엄혹했던 후퇴의 행군길에서 마음속으로 부르고 또 불러보던 노래였다. 소녀시절 자기를 덥혀주고 곱게 비쳐줄 밝은 해님을 그려보며 《오 나의 태양》을 부르던 그가 마침내 태양의 품에 안겨 태양의 노래를 목청껏 부르고있으니 정녕 이보다 더 큰 행운이 어디에 있으랴.

그것은 노래이기 전에 심장의 웨침이였다. 위대한 수령님을 우러러 터치는 열화같은 흠모의 환호성이였다.

그날의 공연에서 권원한은 독창도 하였다.

너무나 벅찬 흥분으로 하여 어떻게 노래를 불렀는지 그자신도 알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노래가 끝나자 환히 웃으시며 선참으로 박수를 쳐주시는것이였다.

수령님께서는 곁에 있던 일군에게 노래를 잘한다고 하시며 처음 보는 가수인데 어데서 온 동무인가고 물으시였다.

남반부에서 온 가수인데 서울이 해방되였을 때 우리한테 왔다는 그 일군의 대답을 들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예술적인 재능이 있는 동무라고, 이런 배우는 어디서 찾으려고 하여도 찾기 힘들다고 하시면서 남반부에서 들어온 작가, 예술인들을 잘 돌봐주어야 한다고 간곡히 말씀하시였다고 한다.

그 말씀을 전달받으며 권원한은 북받치는 감격에 오열을 터치고야말았다. 은혜로운 태양의 품에 안겼다는 무한한 행복감이, 더없는 인생의 환희가 그의 가슴속에서 뜨겁게 일렁이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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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선택 3^bb 1. 한생을 태양의 가수로 1) 해님을 목메여 부른 소녀 운명의 선택 3^bb 1. 한생을 태양의 가수로 2) 태양의 품을 찾아 수천리 운명의 선택 3^bb 1. 한생을 태양의 가수로 3) 《하늘처럼 믿고 삽니다》 운명의 선택 3^bb 2. 금별메달에 비낀 한생 1) 항쟁의 거리에서 운명의 선택 3^bb 2. 금별메달에 비낀 한생 2) 그가 안긴 품 운명의 선택 3^bb 2. 금별메달에 비낀 한생 3) 서울에 안고 간 김정일화 운명의 선택 3^bb 3. 한 무용가의 운명 1) 운명의 배에 돛을 달고 운명의 선택 3^bb 3. 한 무용가의 운명 2) 깃들인 인생의 보금자리 운명의 선택 3^bb 3. 한 무용가의 운명 3) 우리 장단, 우리 춤가락으로 운명의 선택 3^bb 3. 한 무용가의 운명 4) 최승희의 무용은 오늘도 계속되고있다 운명의 선택 3^bb 4. 《동요할아버지》가 부른 노래 1) 설음의 시, 눈물의 동요 운명의 선택 3^bb 4. 《동요할아버지》가 부른 노래 2) 한생을 꽃봉오리로 살고싶어 운명의 선택 3^bb 4. 《동요할아버지》가 부른 노래 3) 그의 삶은 영원하다 운명의 선택 3^bb 5. 무대에서 찾은 한생의 진리 1) 방황의 먼지오른 고달픈 청춘시절 운명의 선택 3^bb 5. 무대에서 찾은 한생의 진리 2) 인생의 가치 운명의 선택 3^bb 5. 무대에서 찾은 한생의 진리 3) 누려온 행복, 못다 이룬 소원 운명의 선택 3^bb 6. 조선화의 거장으로 성장하기까지 1) 《해변》 운명의 선택 3^bb 6. 조선화의 거장으로 성장하기까지 2) 《5월의 농촌》 운명의 선택 3^bb 6. 조선화의 거장으로 성장하기까지 3) 《고성인민들의 전선원호》 운명의 선택 3^bb 6. 조선화의 거장으로 성장하기까지 4) 후대들의 추억에 새겨진 모습 운명의 선택 3^bb 7. 설음을 불사른 웃음의 한생 1) 족쇄를 찬 희망 운명의 선택 3^bb 7. 설음을 불사른 웃음의 한생 2) 환생 운명의 선택 3^bb 7. 설음을 불사른 웃음의 한생 3) 웃음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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