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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림은 성근의 진정이 담긴 허물없는 충고에서 속이 뜨끔하도록 충격을 받았다. 성근은 경태를 불과 두세번쯤 대면했을뿐이겠는데 벌써 그의 사람됨을 속속들이 꿰뚫어보고있었다. 쥐여짜면 그한테서는 인간미, 진실미가 통 느껴지지 않는다는 속뜻이였다. 성근의 웅심깊은 충고는 우정에 너무 도취되여 경태의 달라지는 모습을 분간하지 못하는것 같은데 이제라도 새로운 눈으로 들여다보고 옳바로 이끌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의미로 해석되였다.

(내가 여직껏 경태에게서 장점으로 여긴것은 무엇이였던가?)

새삼스럽긴 하지만 름름한 체격과 삐여진 미모로 하여 늘 첫눈에 띄이고 남들의 선망에 눈길을 끄는것이였다. 다음은 부접이 좋아 그 누구와도 쉽사리 어울리며 림기응변의 익살로 대뜸 남들의 환심을 사는것이였다. 이것은 철림이가 못내 부러워하던 측면이였다.

(그렇다면 단점으로 본것은?)

그것은 어떤 일에서나 쉽게 달고 쉽게 식으며 옳은 주견과 절제가 없고 무슨 일에서나 리기적인것을 전제로 삼는것이였다.

한편 변호연은? 경태의 장점으로 보는 부면들을 약점으로 보고 그에게 붙는 위험인물이 아닌가?

설향이가 세심하고 직심스럽게 알아낸 《스즈게 묘시》, 김수찬이 밝히고 간 《류연호》, 이렇게 지금의 이름으로까지 세가지로 불리우는 그 위험천만한자에게 경태는 어느 정도의 비밀까지 루설했을가?

모름지기 변호연은 경태의 속을 뽑아 히라오까에게 그시그시 밀고했을것이다. 그렇다면 경태가 알고있는 비밀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한무선을 운명직전에 만난것,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받은것, 삐라살포에 참가한것, 야학운영… 천연산 절터에서의 혜신반일회결성모임!… 여기까지 속으로 더듬어보던 철림은 저도 모르게 헉! 하며 벌떡 잠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아! 내가 과연 무슨 어망처망한 일을 범한것인가?!)

가슴이 후두두 떨리였다.

(비록 때늦었지만 시급히 변호연이라는 미지의 인물의 밑뿌리를 몰박아 들추어내자. 이런 단호한 결행만이 조직을 지키고 수옥동지의 신변안전을 담보할수 있다!)

철림은 이렇듯 자신을 심심히 돌이켜보게 한 성근의 적절한 충고가 더없이 다행스럽고 진정으로 고마왔다.

그는 우선 경태부터 만나 툭 빠개놓고 맵짜게 충고하면서 오금을 단단히 박아놓기로 결심하였다.


×


한편 호연은 히라오까를 만난 직후부터 시시각각으로 자기 신변의 위태로움을 느끼며 매일 밤 악몽속에서 허덕이였다.

사이또와 변영근의 실종사건은 호연으로 하여금 어느 한시도 마음을 놓을수 없게 했다. 아무러한 내색도 하지 않지만 침통한 그늘이 비낀 히라오까의 살기어린 얼굴, 저녁마다 령감이 밤낮 쏘다니더니 어데가 잘못된것 같다구 지청구를 하는 영근이 녀편네의 궁상맞은 목소리가 가슴을 조이였다. 그러다가도 문득 다음번 실종순서는 내가 아닐가 하는 끔찍한 생각이 들면서 겁이 더럭 나고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였다. 영근이도 없는 집에서 자다가 어느 괴한의 우악진 손에 목조르기 당할것같기도 하고 어둑컴컴한 골목에서 복면한 사나이의 시퍼런 단도가 목줄에 날아들것만 같기도 하였다.

이제는 어느것이 환각이고 어느것이 악몽인지 모르게 혼탁되여 그를 시달구었다.

웬 영문인지 이제부터는 경태의 하숙방에 다시 갈 생각만 해도 을스산하고 오금이 저리였다. 그렇다고 하여 발길을 끊을수는 없었다. 히라오까의 령을 거역하거나 주는 과업을 포기하는것은 스스로 제 목에 올가미를 거는거나 다름없는것이였다.

어느날 호연은 공부가 끝난 후 롱구장에서 경태의 롱구훈련을 점도록 구경하다가 슬근슬근 그를 따라 하숙집에 들리였다. 그는 점점 만나기 힘들어지는 경태의 꼬리를 오늘은 놓치지 않을 잡도리를 했다.

오늘따라 경태는 전에없이 부드럽고 우선우선하게 자기를 대하는것같았다.

땀을 흠뻑 흘리고난 경태는 부엌칸에 내려가 대야에 물을 퍼담아들고 뒤울안에 나가 푸푸하며 요란스럽게 세면을 하고 들어왔다.

그는 늘 하던 습관대로 침대에 올라가 사이문쪽에 머리를 두고는 두다리를 쭉 뻗치고 반듯이 누웠다. 그리고는 미리 꾸며가지고 와서 그럴듯하게 연방 주어섬기는 호연의 덕담을 느슨한 웃음을 짓고 구수하게 들었다.

바로 그때 철림은 경태가 혼자 있을줄 알고 하숙집에 이르렀다.

그런데 방안에서는 두런두런하는 말소리와 간간이 웃음소리가 들리였다. 그는 직감적으로 호연이 와있는것 같아 잠시 망설이였다. 모처럼 벼르고 온 기회를 놓치는것이 어지간히 불쾌하였다.

철림은 부엌문에 조용히 손기척을 내였다.

하숙집녀인은 문을 열다가 철림을 알아보고 무등 반색하였다.

《어서 오우. 그런데 왜 웃방으로 들어가지 않구. …》

《어머니, 경태한테 누가 와있습니까?》

녀인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거 있잖수. 늘 오는 호연이라는 학생이 아까부터 와있네.》

그는 도로 갈것인가, 좀더 기다려볼것인가 하고 결정짓지 못하고 한동안 서있었다. 바로 그 순간 불현듯 오늘 밤 호연을 한번 크게 놀래워 볼가 하는 그야말로 엉뚱한 생각이 머리속에 번개쳤다. 사람이 갑자기 놀라 기급하면 얼결에 자기의 본색을 드러낸다고 하지 않던가.

그를 한번 놀래워보는데는 지금이 아주 절호의 기회일것 같았다.

(그까짓거. 부러지든 부서지든 한번 맞대놓고 빠개보자! 밑져야 본전이겠지. 또 어느때든지 반드시 툭 빠개놓아야 할 문제 아닌가!)

그는 평소에 머리속에 다져넣었던 생각들이 한순간 비발치듯 했다. 단연코 그렇게 결행하기로 일단 용단을 내리고나니 마음이 거뿐해졌다.

그때까지도 문을 반쯤 열은채 우두커니 서있기만 하는 철림을 이상한 눈초리로 지켜보던 녀인은 《원, 학생두, 얼른 들어오지 않구 그냥 서있을셈인가?》했다.

《어머니, 내 오늘은 여기루해서 웃방에 올라가렵니다.》

녀인은 그가 딴 궁냥이 있어 그러는것 같아서 히뭇이 웃으며 어서 그렇게 하라고 머리를 끄덕여보였다.

철림은 부엌을 거쳐 아래방에 올라가 웃방문곁에 잠시 귀를 강구고 서있었다. 꼭 닫기지 않은 사이문짬으로 그들이 주고받는 말이 똑똑히 들리였다. 그들은 어떠한 소설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한바탕 웃어대기도 하였다.

호연이 한창 열이 올라 무엇인가 설명하고있을 때에 철림은 조금 열려져있는 사이문을 기척없이 더 열고 슬그머니 웃방에 들어섰다.

순간 반듯하게 누운채로 얼핏 눈길을 돌리는 경태에게 철림은 날래게 입에 손가락빗장을 지르는 시늉을 해보이며 눈을 끔쩍하였다.

책장과 마주서서 제 말에 도취되여있던 호연은 철림이 들어서는 낌새를 못 느끼고 계속 말을 엮어대고있었다.

경태는 철림의 암시대로 그 모양대로 그냥 누워있었다.

《작가가 이 작품에서 인디안처녀 아딸라와 역시 인디안인 포로 샤크 따스와의 비극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기본의도가 지상에서의 사랑은 고달프지만 저승세계에 가면…》하고 잔뜩 열을 올려 말하는 호연의 뒤에 발소리없이 바싹 다가선 철림은 《스즈게 묘시.》하고 불렀다.

그 찰나! 호연의 호흡이 딱 멎은듯 했다. 말도 베인듯 끊어지고 손에서 소설책 《아딸라》가 방바닥에 떨어졌다. 호연은 마치도 자기의 뒤통수에 그 누가 권총을 겨누고있기나 한듯 기겁하여 가까스로 돌아보다가 히라오까가 아닌 철림의 무서운 눈과 딱 마주치자 흐윽 하고 다시금 경악하였다.

철림은 그에게 숨돌릴틈을 주지 않고 다우쳐댔다.

《보산농사시험장 장장 류수렬의 아들 류연호!》

그 말에 호연은 방바닥에 털썩 무너져앉으며 어망결에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옳소. 아니요…》하고 비명을 지르듯 얼빠진 소리를 했다.

경태는 벙어리처럼 철림의 느닷없는 괴이한 행동을 어리둥절해서 바라보기만 했다.

《여, 호연이. 이놈아! 네가 이때껏 우릴 속이는걸 우리가 모르구있을줄 알았지? 이놈, 너의 본명은 스즈게 묘시, 조선사람의 껍질을 쓰려구 처음 달아준 이름은 류연호, 혜신고보에 밀정으로 박으며 두번째로 달아준 이름은 변호연, 그래 맞는가?》

방안은 터질듯 공기가 팽팽해졌다.

경태는 움쭉 일어나 사이문을 꼭 닫았다.

《다시한번 말해봐! 맞는가, 틀리는가?》

철림은 격노한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

더는 빠질 구멍수가 없게 된 호연은 그만 위압되여 헛소리치듯 시인하였다.

《아니요. 옳소! 다 맞소!…》

《너는 보산보통학교를 졸업하구 수삼고보에서 공부하다가 여기에 새들었구… 그런데두 뭐, 함흥영생고보에서 전학해왔다구? 응, 이놈! 그래 네놈을 이렇게 꼭두각시로 만든게 누구냐, 히라오까야?》

호연은 자기의 목숨이 경각에 이른 이판에 더이상 버틸수가 없어 사실대로 고백하였다.

《예, 맞습니다. 다 맞습니다. 히라오까주임님이 아니, 히라오까주임이 우리 집에까지 찾아다니며 다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호연은 철림이가 모든 흑막을 손금보듯 꿰뚫어보고있는 조건에서 묻는 말에 달리 대답하거나 거짓소리를 하다가는 사이또나 변영근이와 같이 하늘을 보는것도 오늘이 마지막으로 될수 있다는 생각에 고분고분해졌다.

철림은 침대우에 걸터앉아 벌벌 떨며 당장 죽을상을 하고 방바닥에 머리를 푹 떨구고 앉은 호연을 가소롭게 쏘아보며 련속 들이달구었다.

《그래, 네가 받은 임무는 뭐냐?》

《학급생들의 동향과 수상한 움직임, 사상감정을 알아내는것이였습니다. 》

《네놈이 그래서 학급생들의 집집을 찾아다녔댔구나. 그래, 네가 그새 알아낸것은 무엇이냐?》

《예, 불온서적을 읽는 사실… 반공일이나 공일 그리구 매일 밤 주변에 나가 야학을 가르치는거랑…》

《또?》

《세림리 야학생들이 혁명가요를 부르는거랑…》

경태는 듣다못해 불끈하여 호연의 귀쌈을 불이 번쩍 일게 한대 후려갈겼다.

호연은 앉은자리에서 모재비로 방바닥에 탁 쓰러졌다.

《네놈이 그렇게 더러운 놈인줄 내 여태 몰랐댔구나!》

경태는 혀를 깨물며 통탄했다.

호연은 경태의 책갈피에서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몰래 뽑아다 바친것까지 실토했다가는 당장 무슨 날벼락이 떨어질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다야?》

《예-에…》

《야, 이 개놈아! 이젠 네 정체가 다 발가진 조건에서 또 무슨짓을 하려구 그래?》

《아, 아무것도 안하렵니다. 믿어주시오. 정말 아무짓두 안하렵니다!》

경태가 또 울컥하여 주먹을 부르쥐고 달려드는것을 철림이 제지시켰다. 그리고 호연에게 무섭게 오금을 박았다.

《좋아, 더 두고보자. 네 이것만은 똑똑히 명심해두어. 네놈의 목숨은 이 시각부터 우리 손아귀에 들어있어. 오늘 일을 히라오까에게든, 그 어느 놈한테든 찾아가서 고발하는 순간이면 네놈의 명줄도 끊기는 순간이야. 네놈이 어디에 가서 그 어느 놈한테 무슨 말을 하건 다 듣는 우리의 귀가 있구 네놈의 일거일동을 한순간두 놓치지 않구 지켜보는 우리 눈이 있다는걸 단단히 명심하라! 알겠는가?》

《예예… 날 꼭 믿어주시오. 난 다시는 절대로…》

호연은 갑삭갑삭 머리를 조아리면서 속으로 철림의 말이 공연히 을러메는 위협이 아니라고 생각되였다. 사이또나 변영근도 이렇게 걸려 실종됐을것이라는 끔찍한 짐작이 들었다. 공산군의 무시무시한 줄이 그어디에나 겹겹이 뻗쳐있는게 분명하였다.

《호연이, 이젠 바깥이 새까매졌는데 내 데려다줄가?》

《아, 아니요. 내절루 …》

마치도 철림의 말이 자기를 캄캄한 뒤골목에 끌고가 때려죽이려는 말처럼 느껴져 그는 헤덤비면서 황급히 문을 열고 꽁지가 빳빳해서 사라져버렸다.

두눈을 화등잔같이 휘둥그렇게 뜨고 시종 얼떨떨해서 침대에 걸터앉아 머리를 푹 떨구고있던 경태는 호연이 사라진 후에야 겁먹은 소리로 말했다.

《철림이, 이건 도대체 무슨 놈의 감투끈인가? 대번에 그렇게 그놈의 정체를 쫄딱 발가놓다니? 년 정말 무서운 사람이구나!》

솔직히 철림이로서도 오늘 일은 그야말로 천만뜻밖이였다.

아무때라도 흑백은 명백히 갈라야 하겠기에 한번 크게 놀래워 본색을 떠보려고 어림짐작으로 던져본 말이 신통히도 정통을 찔러 호연이 제 입으로 본색을 말짱 드러내놓은것이였다.

경태는 한동안 덤덤히 있다가 걱정스러워하였다.

《그놈의 정체를 밝힌것은 좋은데 이제는 어떻게 수습할셈이나?》

철림은 무슨 생각에 골똘해있다가 심중히 대꾸하였다.

《뭐, 떨거나 있니. 큰 코 다치기를 잘한셈이지.》

《잘한셈이라니? 이제 그놈이 히라오까한테 직방 고발하면 우리가 즉시 검속될수도 있지 않나. 그놈이 벌써 히라오까한테 가있을지도 모르지 않니.》

《경태, 너 언제 그런 비겁쟁이가 됐니? 생각해봐. 여기서 벌써 얼을 뽑히구 한풀 꺾인 그놈이 그래 제 목숨을 내걸구 밀고할것 같니? 천만에. 그리구 히라오까놈이 이 건으루 란동을 부린다 하자. 우리가 스즈게를 호연으로 둔갑시켜 〈신성〉한 교내에 박아넣은 사실에 대해서 모든 신문사들에 기고하구 사회계를 쑤시여 소문을 쫙 퍼뜨리면 그래, 무사히 수습될것 같니?》

경태는 철림의 론리정연한 말이 사뭇 놀랍기만 했다.

《그런데 너는 그놈의 뒤자료를 어떻게 그리두 환히 꿰뚫구있니?》

《나두 너나 같지 다를거야 있니. 단지 세상의 거울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의 말을 심중히 새겨듣구 모색한 덕이지.》 철림은 이렇게 례사롭게 대꾸하고는 잠시 동안을 두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두 방금전에 그놈의 몰골을 보구 생각되는게 많겠지만 사태가 이지경에 이르도록 내 너를 잘 돕지 못했다. 혁명동지로서, 조직책임자로서 진정으로 돕지 못한 자신을 우선 비판한다. 너두 이젠 자기를 알구 자신이 무엇에 필요한 존재인가를 깊이 새겨볼 때라구 생각해. 나는 우정을 믿구 너를 조직앞에 보증했었지. 하지만 너는 나한테 자기 마음의 전부를 말하지 않고있어. 오늘 보라구. 그놈이 네 속을 뽑다못해 네 뒤까지 밟지 않았니. 우리 학급 서른여섯명가운데 하필 너한테 왜 그놈이 찰거마리처럼 붙었겠니? 서로 기호와 취미에 공감됐길래 친숙해졌겠지. 그랬으니 네가 빡하는 색정출판물두 무데기로 날라오며 접근하는 목적도 못 보았거던. 또 네가 설향동무의 마음마저도 깊이 알려고 안했으니 스즈게 묘시라는 이름두 우습게 스쳐버렸구…》

경태는 설향이 말이 나오자 속이 띠끔 찔리웠다.

자기는 그 일본이름을 우습게 일축했지만 철림은 그것을 단서로 그놈의 본색을 발가놓지 않았는가.

《설향동무는 벌써 우리 조직을 크게 도와주었어. 그가 아니면 그 누구도 밝혀낼수 없는것이였어. 경태, 너는 지금까지 그놈에게 속을 뽑히우구 뒤를 밟히운것만으로두 혜신반일회를 위태롭게 만들었어. 내 오늘 각별한 친구사이에 하기 힘든 말을 직방 터놓았는데 나나 너나 한무선선생님의 당부대로 오직 장군님만을 믿는 신념을 생명으로 간직하구 살아야 해. 이것을 재삼 당부하고싶어. 만약 그것을 망각하면 참다운 인생을 살아갈수 없는거야. 그래 내 말에 잘못된건 없나?》

《없네. 백번 타당한 비판이야.》

경태는 철림으로부터 이렇듯 엄정한 충고는 처음 받았다.

그는 오늘 너무나도 놀라운 사태앞에서 억이 막히고 자기의 모든 내면이 순식간에 발칵 뒤집히는것 같아 속으로 전률했었다. 전혀 예상밖이여서 금시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실인데도 도저히 믿을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갖 환각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였다.

그는 철림의 림기응변하는 과단성있는 행동에서 커다란 위압감을 느꼈다. 그가 벼락치듯 호연을 위엄차게 다그어댈 때 경태는 가슴이 써늘해지고 오금이 저려들었다. 오늘 철림은 원쑤놈을 무자비하게 압도하는 감히 범접하기 두려운 대단한 인물처럼 안겨왔었다. 철림의 앞에서 고양이앞의 쥐모양으로 꼼짝을 못하고 벌벌 떨던 호연의 가련한 몰골이 다시금 상기되자 여직껏 그따위놈한테 얼리우고 속히워온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내가 마음의 전부를 말하지 않고있다는것은 호연이와 밤새 술놀이를 하며 야학을 뚜꺼먹은데 대한 말일수도 있었다. 또한 내가 색정출판물에 빡한다는것은 어떻게 알고있는가?

(아, 이 등신같은 경태야, 너는 서푼짜리도 못돼. …)

호연이 뻔질나게 드나드는것이 얼마나 민망했으면 남에 대한 험담을 모르는 설향이마저도 《오빠, 왜 요새는 철림씨 대신 호연이란 학생에 대한 말이 계속 입에 오르나요. 혹시 마음속에 철림씨와 그가 자리바꿈을 한거나 아니나요? 다는 몰라도 그가 철림씨가 앉았던 자리에나 갈 재목이 돼요?》하며 질색했고 하숙집녀인도 그가 자주 다니는것을 무던히 귀찮아했었다.

철림이도 무엇을 촉감했는지 처음부터 호연을 좋게 보지 않았었다.

그러나 나는 철림이가 너무 꼬장꼬장한탓에 그를 외곬으로만 본다고 오히려 나무람했었지. 그런데 철림이가 직방 그에게 《너는 도대체 누구냐?》하고 숨통을 조인 질문의 답을 비로소 오늘에야 찾지 않았는가!

교수직전의 교실은 의례히 정숙하였다. 이때 흉내를 곧잘 피우는 남학생이 별안간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호연의 빈 책상옆에서 걸음을 멈추고 책상을 손끝으로 톡톡치는 시늉을 해보았다. 그리고는 호연이처럼 팔자걸음으로 출입문쪽을 향하면서 《학우들, 잘있으라구. 난 영생고보에 도루 가…》하고는 눈물방울을 받아 손바닥에 담는 시늉을 했다.

순간 온 교실이 떠나갈듯 폭소가 터졌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호연에 대한 비방이 튀여나왔다.

《그치 정말 그렇게 된거 아니냐?》

《글쎄…》

《혜신고보가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지.》

《그치 삼촌네와 살면서 꽤나 궁금했던거야. 뻔질나게 남들의 집에 찾아다니더니.》

《마치 럼탐군처럼 자꾸 캐묻기를 좋아해. 너의 집은 어디냐, 집에는 누구누구 사나? 아버지직업은 뭐냐? 그래서 내가 한번 〈여, 넌 왜 남의 집 래력은 꼬치꼬치 캐묻는거야?〉했더니 뭐라는지 알아. 온지 얼마안되는데 깊이 알아야 빨리 친해질게 아니야 하더라니까. …》

선생이 들어오는 바람에 말들이 쑥 들어가고말았다.

철림은 아무것도 모르고 떠들어대는 익살스러운 말들을 들으면서 호연이 여러날째 나오지 않는데도 학교에서 모르는체 하는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면 학교당국에서도 그의 내막을 알고있는것이 분명하였다. 그가 일본인이라는것까지는 모른다쳐도 고등계와 련관된 인물임을 어느 정도 알고있는것 같았다.

철림은 그자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난 이상 얼치워 뻐젓이 낯을 쳐들고 나다니지 못하리라는것을 예상 못한바는 아니였다. 그렇다면 그자가 도대체 어디에 숨어 무엇을 하고있는가? 혹시 보산으로 꽁무니를 뺐을가? 그것이 비슷한 짐작같았다. 이런 판국에서야 부모가 있는 곳에서 숨어사는것이 그중 안전할것이였다.

한편 경태의 생각은 그와 달랐다. 그놈이 그날 밤 줄행랑을 놓은 뒤로는 학교에 얼씬도 하지 않는것이 도리여 께름하고 불안스러웠다. 그는 요즘 밤중에 문밖에서 저벅저벅 구두발소리만 들려도 신경이 바싹 곤두서고 가슴이 후들거렸다. 저녁에는 하숙방에 들어가기도 께름직하였다. 그는 철림이가 롱구훈련때문에 자기가 맡았던 세림야학을 다른 동무에게 넘겨준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했다.

어느날 그는 수업후 늦도록 롱구훈련을 하다가 곧바로 설향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슨 영문인지 요즘은 마음을 짓누르는 착잡한 상념을 아무리 털어버리려고 해도 뱀무리가 득실거리는 돌섬에 갇힌듯한 을스산함에서 도저히 헤여날수가 없었다. 오늘만이라도 설향을 만나 울적한 심정에서 벗어나고싶었던것이다.

설향을 찾는 경태의 목소리를 인츰 알아듣고 부엌문을 벌컥 연 어머니는 그를 여간만 반겨맞지 않았다.

경태는 마음이 저절로 후지근해졌다. 오래간만에 아늑한 가정환경에 휩싸이고보니 자기를 그토록 구속하던 뒤숭숭한 일들은 한갖 꿈에 있었던 일같이 느껴졌다. 자기도 하루속히 하숙생활같은것을 싹 걷어치우고 이렇듯 아늑한 환경에서 아기자기한 생활을 누리고싶었다.

설향은 그렇게도 의기양양하고 열정에 넘치던 경태가 오늘은 별로 초절임을 당하기라도 한듯 후줄근해진데 문득 생각이 미치였다.

《오늘 오빠는 별나게 시무룩해졌어. 무슨 일이 있었나요?》

《일은 무슨 일, 나야 늘 그전대루지.》

말은 그렇게 하나 생각은 딴데 가있는듯 한 초점없는 동자며 가끔 짓는 쓸쓸한 웃음은 그의 마음이 결코 평온치 않다는것을 암시해주고있었다.

무슨 일 있었을가? 그는 별안간 경태가 측은하게 생각되였다. 그래서 그는 다른 문제는 더 캐여묻지 않기로 작정하고 자기의 학급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였다.

《그 어간에 우리 학급에 변동이 심해요. 한명은 전학해가구 률곡에 집이 있는 두 애는 퇴학하구…》

《아니, 그럼 박영란이와 송찬숙이가 퇴학을? 왜?》

경태는 그제서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얼결에 이름까지 대며 급히 반문하였다.

《집사정이 어려워서 자퇴했다나봐요. 그런데 그 애들 이름이랑 어떻게 그리 잘 알아요?》

설향은 호기심이 불쑥 동했다. 갑자기 경태가 놀랍게 묻는걸 보니 그 애들도 은해와 같은 일을 하는게 아닐가? 그래서 그들이 그리도 생기에 넘치였고 지금은 그 어떤 필요에 따라 학교를 그만둔게 아니였을가? 경태는 자기의 아차 말실수로 인한 설향의 물음같은건 귀에 닿지도 않았다. 그는 반일회 회원들인 박영란이와 송찬숙이가 별안간 동시에 자퇴했다는것이 몹시 놀라왔던것이다. 그들이 다른 까닭이 없이 녀고에서 나갈수 없다. 그것은 필경 조직적인 계획에 따르는 움직임이였으리라고 피뜩 짐작되였다.

그러나 설향은 그가 대답을 피하는 눈치를 채고 학급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오늘은 또 무슨 일 있었는지 아나요. 생각만 해두 우습지요 뭐. 글쎄 그 새침데기 선화가 등교시간이 박두하자 부엌일을 할 때 입는 허리동아리 다 드러나는 쪼글쪼글한 저고리우에 그냥 외투를 입고와서 온 학급을 웃기지 않겠나요, 호호호.》

그러나 경태는 갑자기 자퇴한 그들의 내막에 대한 의문이 밀려드는통에 설향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참 주어섬기던 설향은 피뜩 경태의 얼굴을 보더니 흥심을 잃고 나무랐다.

《오빤 대체 말을 듣나요마나요?》

《어, 음… 듣지…》 경태는 흠칫하며 동에 닿지도 않는 군소리를 하였다.

《오빤 좀 별나졌어. 멍청이가 된것 같아요. 그 보기두 싫은 호연이란 학생이 오빠를 그렇게 만든게 안야요?》

경태는 그 말에 속이 섬찍하였다.

《설향이, 다시는 그따위놈의 말은 꺼내지두 말어!》

《아니, 그따위놈이라니요?!》

《그러지 않아두 내 오늘 설향이한테 사과하려던 참이였는데… 그놈은 설향이 말대루 스즈게 묘시라는 일본놈새끼였어.》

《네?! 그게 정말이예요?》

《정말이요.》

순간 설향은 그 청천벽력같은 말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원, 세상에!… 그것을 누가 어떻게 알아냈나요?》

《철림이지.》

경태는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철림씨가요?》

《설향이 우정 찾아와서 그 말을 할 때 내가 심중히 새겨들었어야 하는건데… 철림은 설향이 알아낸 그 이름에 그놈의 애비래력까지 죄다 알고와서 그놈의 정체를 순식간에 쫄딱 발가놓구 그놈은 벌벌 떨며 다 인정했어.》

경태는 락심천만하여 한탄조로 이렇게 말하였다. 설향은 얼굴이 해쓱하게 질리여 잠자코 있었다.

《철림은 설향이가 벌써 우리 조직을 크게 돕고있다구 칭찬하더군.》

그러나 자기들의 단꿈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리는듯 한 불안에 싸인 설향에게는 그 말이 별로 반응을 일으키지 못했다.

《오빠, 그럼 이 일이 앞으로 어떻게 번져질가요?》

《그날 철림이가 그놈이 어데 가 감히 혀바닥을 놀리지 못하도록 무섭게 오금을 박아놓기는 했는데… 그놈은 그후부터 학교에 머리두 안내밀구있어.》

《난 막 불안하군요. 오빠, 보라요. 내가 그놈을 싫어할 때 왜 관계를 딱 자르지 못했나요? 참, 이 일을 어쩌면 좋담!》

설향은 비로소 경태의 어깨가 축 처지고 휘주근해진 까닭이 납득되였다.

설향은 곧 마음을 가다듬고 당돌하게 말하였다.

《오빠, 좀 듣기 거북하더라도 제발 내 말을 명심해 들어주세요. 그놈이 조선사람의 탈을 썼으니 애초부터 온통 허위로 빛어졌을게 아니나요. 그런데 오빠는 자신의 마음을 나꾸려는 새빨간 거짓말에 속아 여태 참다운 벗들의 진실은 외면하구 허위에 끌렸으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른거라구 봐요.》

이때 어머니가 사이문을 열고 《이야기는 그만하구 저녁식사를 하자구.》하고 말하였다.


×


변호연의 건은 하나의 큰 비상사건이였다.

철림은 곧 혜신반일회회원들에게 이 사실을 긴급히 통지하고 차후 놈들의 움직임에 대처할 만단의 준비를 갖추게 하였다.

철림은 호연놈의 정체를 발가놓고도 그 미덥지 않은 사실을 두고 수시로 《이것이 소경 문고리 잡은 격이였을가?》하고 자신에게 묻군 하였다.

(모험이였을가? 아니, 그것은 모험이라고 할수 없었다. 우연한 일치였을가? 아니야, 그것은 필연적인 일치야!)

사실 그는 왜놈의 이름을 알아낸 설향의 결바른 마음과 류연호라는 이름을 대준 김수찬선생의 비상한 기억력, 그 신중성을 믿고싶었던것이다. 바로 그러한 결곡한 두 마음이 확신성있는 담보가 되여 그렇듯 모험에 가까운 용단을 내린것이였다. …

그는 오늘 은해를 만나려고 밤길에 나섰다. 그가 북일사진관에 이르러 조용히 은해를 찾자 그의 목소리를 제꺽 알아차린 은해는 벌컥 방문을 열고 널마루우로 튀여나왔다.

《철림동지, 안녕하세요? 어서 들어오십시오.》

은해는 마루아래에 서있는 철림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방에 들어서는 철림에게 은해는 자기의 어머니를 소개했다.

《우리 어머니예요.》

철림은 어머니를 존대하여 깍듯이 례의를 표시하였다.

《어머니, 편찮으시다는데 좀 어떠하십니까?》

《이젠 괜찮아졌네. 어서 아래목에 앉게나.》

어머니는 인사성이 있고 몸가짐이 의젓한 철림을 대견하게 쳐다보며 각근히 아래목을 권하였다.

《학생두 하숙생활을 한다는데 얼마나 불편한게 많겠나?》

어머니는 눈섭이 짙고 류달리 눈정기 뿜는 눈이며 꼭 다문 입이며 말쑥하고 단정해보이는 철림이를 호감이 가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머니, 이젠 그 생활에 인이 박혀서 별루 불편을 모르고 지냅니다. 》

은해는 선채로 무언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코지에서 외투를 벗겨 입는것이였다.

《얘, 이밤에 또 어델 나가려구 그러니. 손님두 와있는데…》

《어머니, 잠간 나갔다와요.》

철림은 은해가 머리수건을 쓰는것을 보고 움쭉 일어났다.

《좀더 앉아있지두 못하구…》

《어머님, 몸조리를 잘하십시오.》

《고맙네. 앞으론 자주 들리게.》

어머니는 철림을 놓아보내는것이 아쉬운듯 한 표정을 짓고 뒤따라 밖에 나서려는 은해에게 말하였다.

《참 곱살한 총각이구나. 몸가짐은 얼마나 의젓하니. 첫눈에 마음드는구나.》

《어머니두, 못하는 말씀 없으시네.》 은해는 제풀에 얼굴이 발깃해지며 어머니를 곱게 흘기였다.

그는 철림이와 나란히 어스름해진 거리를 걸으며 먼저 말을 꺼내였다.

《철림동지, 우리 집에 처음 오셨는데 내가 먼저 자리를 뜨게 해서 참 미안해요. 집안에서는 아무 말이나 마음놓구 할수 없을것 같아서…》

《미안할게 있습니까. 나두 이렇게 거리를 거닐며 이야기를 나누는것이 오히려 즐겁답니다.》

은해는 아직도 자기앞에서 깍듯이 례의를 지키는 그를 방그레 미소를 그리며 지켜보다가 돌연 역습을 하였다.

《철림동지, 서로 그만큼 깊이 알고지냈으면 이젠 말을 좀 낮추세요. 그저 말끝마다 이렇습니다, 저렇습니다가 붙으니 듣기 좀 거북해요. 이렇소, 저렇소라든가 이렇거든, 저렇거든 하던지…》

《그래요?》

《또 그래요, 호호호.》

《하하하, 내 또 착오를 범하는군. 그런 잘못이야 당장 고쳐야지요.》

은해는 남들의 눈에 뜨일것 같아 조용히 소리내여 웃었다.

철림은 주위를 살피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은해동무, 변호연이 우리 학급에 침투된 놈들의 밀정이라는것이 드디여 밝혀졌소.》

은해는 저도 모르게 헉! 소리를 내며 놀랐다.

《녜?! 그게 정말이나요?》

《확실하오. 그것도 조선사람의 허울을 쓴 일본놈이였소. 그래서 다른 동무들한테는 이미 다 통지했소.》

《아니, 그럼 설향이 알아낸 스즈게란 놈이?…》

《바로 그놈이였소.》

은해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여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럼 이젠 어떡하나요? 경태동무를 통해서 우리 조직의 비밀두 거진 새여나갔을게 아니나요.》

《그래서 그놈의 명줄을 걸구 입을 함부로 못 벌리게 못을 박기는 했지만 최대한 경각성을 높여야 할것 같소.》

은해의 생각에는 단순히 호연의 입을 틀어막는것으로 모든 일이 무사해질것 같지 않았다. 애당초 신경태같은 허겁한 인간을 조직에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을것이였다.

조직앞에는 만회할수 없는 위험이 조성된것이였다.

《정말 여우를 찜쪄먹을 놈들이군요. 난 막 가슴이 떨려요. 경태동무가 끝내 화단거리가 돼버렸군요. 경태동무가 그놈과 붙어돌며 무슨 말인들 안했겠나요. …》

은해는 경태의 내막을 상세히 모르나 설향이와의 관계만을 놓고보아도 그의 마음속에 진정이란 없다는것이 헨둥하게 알리였다. 그런데 경태가 이미 저지른 위험천만한 과실은 앞으로 그들의 관계에도 어떠한 그늘을 던지게 될지 모를 일이였다.

은해는 고개를 다소곳하게 숙이고 말없이 걷다가 안타까운듯 한숨을 지었다.

《만약경우 경태동무가 저지른 일이 크게 번지면 설향과의 관계에도 파국적인 결과가 미칠수 있겠지요?》

《그렇게 되기 쉽소.》 철림은 침통하게 대꾸했다.

《난 요즘 설향의 순진한 마음을 외면한게 얼마나 괴로운지 모르겠어요. 한번은 영란이와 찬숙이 어데 갔느냐구 자꾸 묻길래 생활난으로 자퇴했다 하지 않던 하니까 잘 믿지 않더군요. 그 애들의 눈빛을 보면 무슨 새로운 희망이 생긴게 분명하다면서 〈너는 알고있지, 내가 못 미더워 말 안하지.〉하질 않겠어요. 그리도 순박한 설향이가 경태동무때문에…》

철림은 울먹이며 하는 그의 말을 감심해 들었다.

《설향동무의 일은 생각할수록 막 동정심을 자아내거던. (철림은 목이 갈리여 헛기침을 했다.)실제상 그에 대한 경태의 사랑이라는것두 진정이 덜 보이구 제 마음의 굶주림이나 면하기 위한 뜬감정같거던. 그렇지 않다면야 보호자연하는 그가 왜 설향동무의 참다운 앞길을 막아나서겠소.》

그때 은해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하고는 어디론가 다급히 발걸음을 옮기였다.

한참이나 지나서 은해는 신문지에다 무엇인가 무드기 싸안고 잰걸음으로 돌아왔다.

《호떡이야요.》

사실 은해는 저녁쯤에 철림이와 같이 어느 조용한 식당에 들어갈 생각이였댔으나 아무 구석에나 올빼미같은 밀정놈들이 박혀있을것 같아 아쉬운대로 단념하고 중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호떡을 사가지고 온것이였다.

아직도 따끈한 호떡은 속에 사탕가루를 넣고 지짐판에 구운것이여서 별맛이였다.

그들은 혜림소공원걸상에 오누이처럼 가지런히 앉아 호떡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윽고 그들은 다시 조용한 골목길로 걷기 시작하였다.

은해는 무슨 생각에 골똘하여 한참동안 묵묵히 걷다가 할깃 철림의 얼굴을 쳐다보며 여무지게 말꼭지를 뗐다.

《철림동지, 마땅히 나보다 더 잘 알겠지만 순 우정과 동지애를 옳게 분별해야 하지 않을가요?》

《순 우정과 동지애?》

철림은 선뜩 가슴을 찔리는감을 느끼며 말을 기계적으로 되풀이했다.

《철림동지는 경태동무의 무엇을 믿구 그를 혁명앞에 보증해나섰나요?》

철림은 난데없이 철퇴에 머리를 얻어맞은듯 뗑해졌다. 얌전데기로만 알고있던 그의 입에서 별안간 칼끝같은 질문이 튀여나오자 철림은 대번에 혀가 얼어들었다. 속으로 단단히 벼르던 말같았다.

《만일에 경태동무의 일로 후과가 커진다면 조직앞에 어떻게 책임지겠나요. 멀리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동지로 획득해서 조직에 결속시킨 철림동지가 어찌되여 제일 가까운 그만은 옳바로 이끌지 못했나요?》

철림은 숨이 꺽 막히고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여직껏 이렇게 급한 처지에 몰려보기는 처음이였다.

그것은 반일회의 한 회원이 조직책임자에게 공명정대하게 묻는 질문이면서도 맵짠 비판이기도 하였다.

사실이 바로 그렇지 않는가! 까놓고말해서 자신은 혁명앞에 오늘의 경태보다도 어제날의 경태를 믿고 보증한것이였다. 그런데 호연놈과의 관계가 맺어지면서부터 얼렁수로 생활의 매 페지를 훌훌 넘기던 경태라는 인간의 허식적인 까풀이 차츰 벗겨지고 그의 본태가 그대로 드러난것이였다.

오늘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은해의 랭혹한 비판은 철림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소위 우정이라는 고루한 보자기에 감싸두었던 자신의 흐리터분한 구석을 가차없이 파헤쳐준 은해가 더없이 고마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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