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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어느 일요일 설향은 이번만은 경태를 놓치지 않으려고 아침 일찍 거리에 나섰다.

저 멀리 음산한 재빛하늘을 배경으로 헐벗은 천연산의 병풍같은 모양이 한눈에 안겨왔다. 정작 인적없는 호젓한 거리에 나서니 웬일인지 불쑥 은해와 대천강반에서 아름다운 꿈을 나누던 일이며 이 거리에 자욱자욱 찍힌, 다시는 되돌아오지 못할 천진한 옛시절이 소리쳐부르고싶도록 그리웠다. 하지만 아무리 그리워한들 무엇하랴. 차라리 기억하고 슬퍼하느니보다 잊어버리고 웃으며 살자. 하지만 나는 그 시절을 잊을수가 없어. 그 티없는 시절, 그 티없는 생활을 잊을 힘이 나에게는 없어. …

설향은 오늘 경태를 만나 그동안의 착잡했던 심정도 나누고 그의 생각도 허심히 듣고싶었던것이다.

하숙집녀인은 그전같이 설향을 싹싹하게 맞아주었다. 녀인은 경태와 설향이 친남매간과 같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어쩌나, 아지미 오래간만에 왔는데 학생이 없어서…》

녀인은 무척 아쉬운 표정으로 이렇게 걱정을 했다.

《오빤 또 어디 갔나요?》

《이른 아침을 들고 나갔는데 어디루 갔는지. 그 학생은 집에 붙어있을새가 없이 늘 바쁜가봐.》

설향이 저으기 야속했으나 내색을 않고 망설이는데 녀인은 경태의 방에 들어가 앉았다가라고 각근히 권했다.

설향은 사양하지 않고 녀인을 따라 하숙방에 들어섰다. 방에 들어서는 순간 전에없이 어수선해지고 엉망이 된 서재를 보고 와뜰 놀랐다.

녀인은 혀를 차며 그 사유를 설명했다.

《아지미가 그렇게 정성스레 정돈하구 알뜰히 거두어서 알른알른하던 방이 글쎄 하루밤사이에 형사들이 달려들어 이 모양으로 만들어놓지 않았겠수. 내 대충 손을 대느라구 했는데두 책물계랑 통 깜깜이다보니…》

《이 방두 가택수색을 당했나요?》

《당하구말구. 그날 경태학생이 속에 불이 일어 한마디했다구 그 도척같은 형사가 학생을 마구 줴박구 걷어차며 지랄치는걸 보구 에구, 난 속이 화들화들 떨려서…》

설향은 경관들이 자택생들과 하숙생들의 집을 수색했다는 말은 들었으나 직접 제 눈으로 목격하자 가슴이 서늘해졌다. 경태가 그런 험악한 봉변을 당한것도 모르고 속으로 언짢게 여긴것이 후회되였다. 책장은 뒤죽박죽되고 뒤벽의 도배지는 찢겨서 너덜너덜했다. 그리고 부피두꺼운 책들의 뒤모서리도 찢어져있었다.

설향은 경태를 못 만나게 된것은 서운했지만 자기가 여기에 와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녀인을 찾았다.

《어머니, 내 집에 좀 얼른 갔다올래요.》

아래방에 내려갔던 녀인은 놀라와하며 물었다.

《아니, 왜?》

《제꺽 가서 풀을 좀 써가지고 올려구요.》

《어디라구 게까지 갔다온다구 그러나. 풀같은거야 내 풍로에 인춤 쑤지 않으리.》 녀인은 펄쩍 뛰며 말했다.

《고마와요, 어머니.》

녀인이 서둘러 내려간 다음 설향은 풀을 쑤면 먼저 도배질을 하고 책들도 땜질을 한 다음 서재정돈을 할 생각으로 잠시 묵묵히 앉아있었다.

그는 책장에 되는대로 놓인 책들가운데서 표지가 색다른 책 몇권이 얼핏 눈에 뜨이자 움쭉 일어났다. 책장에 다가가서 그 책들을 뽑아보았다.

소설들인 《아딸라》, 《루네》, 《빠리의 비밀》이였다. 전혀 처음보는 책들이였다. 그중에 《아딸라》는 특별히 재미있는 소설인지 뚜껑이 헐어빠져서 얼룩덜룩한 잡지장을 덧붙이였는데 그마저 닳고 덞어져 있었다. 헌 뚜껑에 변호연이라고 써있었다. 그는 역스러웠으나 그가 돌리는 책이 어떤 내용의것인지에 호기심이 동하여 대충 펼쳐보았다.

인디안인 처녀 아딸라와 한동족의 포로인 청년 샤크따스와의 비극적인 사랑이야기 같았다.

설향은 이 책도 경태가 보는것 같아 좀 손질해주려고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너덜너덜해진 잡지장을 조심히 뜯어내기 시작했다. 헌 잡지장을 말끔히 뜯어내는 순간 설향은 보풀이 인 원래표지의 맨 밑모서리에 희미해진 스즈게 묘시라고 쓴 일본이름에 딱 눈이 멎었다. 덧붙일 때 풀이 잘 발리지 않아서 이름만은 마치 지우다 만것처럼 희미하게 알리였다.

(왜 하필 스즈게 묘시라는 일본인의 이름이 적혀있을가?)

그렇다면 이 책의 원래 임자가 그란 말인가? 《아딸라》와 《루네》의 앞뒤표지에는 정자로 변호연이라고 씌여있었다. 그렇다면 스즈게 묘시가 변호연의 친구일가? 그도 조선학생인데 일본인 친구가 있을수 없지 않는가? 겉에는 변호연, 속에는 스즈게 묘시… 설향은 별안간 이상야릇한 예감이 들어 가슴이 활랑거리였다. 그래서 그는 풀이 되면 뜯어낸 잡지장을 도로 붙여 흔적을 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책장에는 전에 있던 《어머니》, 《철의 흐름》, 《사회진화론》, 《식민지문제의 기본지식》, 《사회주의대의》 등과 같은 서적들은 자취를 감추고 그대신에 변호연의 책들이 꽂혀있는것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책장의 맨 안구석에는 표지가 유난히 알락달락한 월간잡지 뭉테기도 비스듬히 꽂혀있었다. 잡지 하나를 뽑아 펼쳐보니 혼자 보기에도 창피스러운, 남녀가 알몸으로 그러안고있는 사진을 비롯하여 추잡한 색정자료들과 범죄사건이 란잡하게 편집되여있었다.

설향은 경태가 《지하의 선녀》라고 불리우는 가지각색의 갱막장 작부들, 기녀, 매음녀들까지 소개한 메스꺼운 출판물들을 본다는것이 기막히게 놀라왔다. 이런 부면에 호기심을 불어넣고 유혹하는것이 위불없이 변호연일거라고 충분히 짐작되였다. 바로 변호연의 출입이 잦아지면서 이따위 잡스러운 책들이 책장에 꽂혀있기 시작한것이였다.

(오빠는 왜 그런 학생을 계속 가까이할가? 왜 그런 께름한 사람을 우리의 생활속에 끌어들이고있을가?)

의문이 머리속에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더구나 경태는 지하공작을 하고있지 않는가! 철림이도 은해도 이러한 사실까지는 아직 모르고있을것이다. 지금에 와서 보면 자기가 변호연이 드나드는 방에 적색도서를 장서한것이 안심치 않다고 경태에게 미리 귀뜀한것은 천만다행이였다.

설향은 변호연이라는 미지의 인물이 혹시 스즈게 묘시의 유령이 아닐가 하는데 펀뜻 생각이 미치자 온몸에 소름이 끼치였다.

그때 하숙집주인녀인이 겨드랑이에 도배지말이를 낀채 법랑소래에 김이 문문 나는 밑가루풀을 가득 담아 두손에 들고왔다.

《이거야 내 집 꾸리는 일인데 아지미까지… 언제부터 한다한다 벼르면서두. …》

《어머님두, 저랑 같이하면 더 좋지요 뭐.》

설향은 책상우에 낡은 신문지를 펴고 도배지에 풀칠을 했다. 그리고 걸상우에 올라서서 도배지를 붙인 다음 마른 걸레로 자근자근 눌렀다.

《그 두억시니같은 놈들이 공부하는 학생한테 무슨 죄가 있다구 그 개지랄인지 요새는 잠을 자다가두 그것들이 달려들것 같애서 겁이 막 난다우.》

《호호, 어머님이야 뭐 겁낼것 있나요.》

《그래두 그렇나. 에그, 호랑이는 어디서 배를 곯구있는지 그것들이나 꽉 물어갔으면 속이 시원할것 같다니.》

설향은 녀인이 풀칠해주는 도배지를 받아 바르며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것이 자못 즐거웠다.

《어머니, 하숙생 치르는게 힘들지 않나요?》

《그저 대접이 변변치 못해서 그렇지 힘들기야 뭐… 내 살림이 넉넉치 못해서 되려 신세를 지구있다구. 원래 그 사람은 뒤가 없구 성미가 시원시원해서 이제는 한식솔이나 같아졌다우.》

《어머니, 지금두 자주 찾아오는 학생들이랑 있나요?》

설향은 변호연이 요즘에도 그냥 드나드는지 떠보고싶었다.

《경태 그 사람이 장창 바삐 지내다보니 걸음이 좀 떠지기는 했는데 호연이라는 학생이 전번에는 제 생일이라구 음식을 차려들구 오기두 하더군. 난 어쩐지 그 학생은 딱 질색이야. 느물느물거리며 살피기만 하는것 같은 그 갈퀴눈두 싫구… 찾아오는 학생들가운데서 그 송아지친구라는…》

《오, 철림씨 말이지요?》

《옳네, 철림이. 그 학생만 한 사람 없어. 한번은 내가 뽐프가 고장나서 우물에 가 물 길어오는것을 보구는 글쎄 제꺽 물초롱을 들구 드무에 찰찰 넘치게 물을 길어다주지 않겠나. 사람이 정말 참하구 나를 친어머니처럼 대해준다네. 그 학생이라면 밤낮 다닌대두 누가 싫겠나.》

설향은 녀인과 함께 도배를 말끔히 끝내고는 책수리에 달라붙었다.

일손을 놀리면서도 그의 머리속에는 책임자에 대한 께름한 생각이 지꿎게 갈마들었다.

(경태오빠는 마음이 모질지 못하니까 그를 차마 마다하지 못하고 받아주는거겠지. 또 저런 책들도 심심풀이로 보라고 일부러 가져오니 별생각없이 받아들일거야. 오빠는 저따위 지저분한 출판물같은것에 탐을 내지 않을거야.)

설향은 오늘따라 경태를 더욱 만나고싶었다. 만나자바람으로 변호연에 대해서부터 단단히 따져물을 잡도리를 했다. 또 오늘 놀랍게도 알게 된 일본인의 이름이 아무래도 수상쩍다고 귀띔을 해주고싶었다.

《오빠! 지금은 어데 있어요? 이 설향이는 빈 하숙방에 하루종일 와있답니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전과 같이 자주 만날수 없는 오빠! 빈방에 홀로 앉아있어도 오빠의 마음을, 생활의 체취를 느끼고있어요. 오빠, 지금쯤은 무엇을 하고있어요? 막 달려가고싶어요. 보고싶어요. 그러나 오빠, 나를 어리다고만 생각지 마세요. 아무리 만나고싶어도 오빠를 위해서 자신을 극력 자제해야 한다는것쯤은 잘 리해하고있어요.》

설향에게는 언제부터인가 자기의 안타깝고 야속한 심정을 경태에게 마음속으로 말하는 버릇이 생기였다. 설향은 그날 경태를 기어이 만나기로 작정하고 어둡도록 기다렸으나 종시 나타나지 않아 몹시 서운해서 집으로 돌아오고말았다. 그러나 그날 밤은 도무지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마치도 호연이라는 미지의 인물이 딴 속심에서 경태의 머리를 흐리워놓고 나쁜 길로 끈끈이 유혹하는듯 한 어지러운 상념에서 헤여날수가 없었다.

유년시절의 애틋한 생활을 소중히 간직하고 마음 또한 아름다운 경태가 그 어떤 흉한의 꾀임수에 빠져 추접스러운 생활에 마음이 덞어질것 같은 예감이 지꿎게 갈마들었다.

언제인가 은해는 혁명은 꿈이 많고 리상이 높은 사람이라야 할수 있다고 말했었다. 경태도 철림이나 은해와 한길을 걷고있으니 이러한 속물적인 세계와는 인연이 없으리라고 믿고싶었다.

문득 지난 여름 아버지가 달빛이 대낮같이 밝은 밤거리를 함께 걸으며 하시던 말씀이 생생히 떠올랐다. 그날 밤 왕진을 나가서 지내 늦어지는 아버지의 마중을 갔었다.

아버지는 어쩌다 딸과 함께 걷는 밤길이 사뭇 즐거운듯 이제는 키꼴이 늘씬해진 그를 대견하게 눈여겨보며 생각깊은 이야기를 하시였었다.

밤은 이슥해졌는데도 길가의 일본료리집들과 뒤골목의 술집, 색주가와 카페들에서는 질탕거리는 란잡한 소음과 기생들의 야지러진 웃음소리, 닭울음같은 혀꼬부라진 일본노래소리로 소란스러웠다.

《지금 이 거리는 완전히 우리 거리같지 않구나! 내 여기서 태여나 자랄적에는 술래잡기를 하는 애들의 귀여운 목소리, 우물에서 드레질하는 도르래소리, 극상해서 어느 집 축음기에서 류행가나 들리던 거리였다. 그런데 왜놈들이 쓸어들더니 거리의 공기두 온통 흐려지구 모조리 왜풍에 오염되는것 같구나.》하며 아버지는 깊은 한숨을 지었다.

《읍면서기의 말이 이 읍에 사는 왜인들이 조선사람의 십분의 하나에 달한다는데 그 하나가 열의 넋을 다 더럽히는것 같아. 오죽했으면 한 외국인까지도 〈조선에는 지금까지 그와 같은 괴업은 없었다. 일본통치가 시작된 때로부터 비로소 유곽이라는것이 생겼다.〉고 개탄했겠니. 눈여겨보면 장래는 어찌되든 상관없이 제 한몸의 안락이나 꿈꾸며 살아가는 허접쓰레기 청년들이 이런 풍조에 쉽게 물드는것 같더구나.》 두경은 역겨운듯 잠시 묵묵히 달빛을 밟으며 걸었다.

《설향아, 너는 절대루 이 어지러운 풍조에 물들지 말구 평생 마음에 때가 끼지 않게 살아야 한다. 사람이 세상에 나서 비록 큰일은 못하더라두 남들을 위해서 조금이라두 바치는게 있어야 하지 않겠니. 그래야 사는 보람도 느끼게 되구 사람들 마음속에 살게 되지 않겠니. 나두 그래서 병자들의 치료에 최선을 다 하느라고는 한다만 마음뿐이지 그리 쉽지는 않구나.》

다음날 설향은 경태를 놓치지 않으려고 마지막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리기 바쁘게 교실을 나와 남고보쪽으로 총총히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꼭 경태를 만나서 책속표지에 감추어진 일본이름도 알려주고 그를 색다른 풍조에로 떠미는 호연을 단연 경계할데 대하여 단단히 일러주고싶었다.

그것이 곧 경태를 진정으로 돕는거라고 생각했다.

설향은 남고보정문에 이르렀다. 마침 수업이 끝난 학생들이 떼지어 밀려나오는것을 보고 정문옆 교장사택담모퉁이에 몸을 피해 서있었다.

맨뒤에서 동무들과 활발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나오는 경태가 눈에 띄였다.

경태는 큰길쪽으로 향하다가 어느결에 설향을 알아보고 슬그머니 걸음을 늦추었다. 동무들이 저쯤 멀어지자 반색하며 급히 설향이쪽으로 다가왔다.

《오빠, 그간 안녕하세요?》

《설향이, 정말 오래간만이군. 일요일에두 늦게까지 기다렸다면서?》

경태는 정색을 한 설향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며 무등 기뻐했다.

《우리 평토장에 나갈가?》

《오빠, 그게 좋겠어요.》

그들은 철길을 가로타고넘어서 철뚝아래 평토장으로 갔다.

조용할줄 알았던 물동은 방금 떼가 내린듯 떼뚝마다 녀인들과 아이들로 붐비였다. 그들이 방금 건너온 철길로는 《사다하》기관차가 무개화차의 귀잡이마다 굵은 나무기둥을 세우고 그안에 원목을 쌓은 일곱개의 방통을 끌고 헐떡헐떡 숨을 톺으며 민틋한 구배로 오르고있었다.

《혜신에서는 이 평토장에 나와야 희한한 저녁풍경을 감상할수 있거던.》

《정말 그래요. 온종일 먼지울안에 갇힌것 같다가 여기 나오면 마음이 탁 열리는것 같아요.》

《먼지울안이라, 표현이 참 그럴듯 하군.》 경태는 설향의 말꼬리를 잡고 너스레를 부렸다.

《오빠는 대체 이젠 내 생각을 통 잊은게 아니예요?》

《잊다니? 그 언제나 이 마음속에 꼭 붙안고 살지.》

《난 싫어. 그런 추접스러운 입담은…》

설향은 서글픈듯 한 표정을 짓고 저만치에 있는 떼뚝우의 사람들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경태만 만나면 즉석에 들이대자던 말이 서글서글한 그를 대하게 되자 자연 움츠러들었다.

《설향이, 그새 무슨 일 있었게 우정 이렇게 찾아까지 왔어?》

《오빠, 호연이라는 학생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예요? 오빠는 그 학생을 얼마나 깊이 알고있어요?》

일단 그에 대한 말을 떼자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아니, 전번에두 그렇게 묻더니 왜 또 그래?》 경태는 무척 이상스러워하며 설향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내가 그날 오빠의 책장에 있는 〈아딸라〉라는 소설책겉표지속에서 뜻밖에 스즈게 묘시라는 일본이름을 찾아냈어요. 그래 스즈게 묘시란 대체 누구나요?》

경태는 그런 난데없는 이름은 처음인듯 의아해하며 되받아 외웠다.

《스즈게 묘시라?…》

《거야 일본 이름 아니나요. 겉에는 변호연 속은 스즈게 묘시… 난 혹시 그 두 이름의 임자는 한사람이 아니겠는가 하는 짐작이 들어요.》

경태는 별안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설향은 그만 어안이 벙벙하여 마치 실성한것처럼 웃어대는 그를 쳐다보았다.

《아니, 그런 천진란만한 억측을 하다니. 하하하, 설향이두 철림이처럼 신경과민에 걸린게 아니야? 아, 호연이야 명백한 조선청년인거구 또 혜신바닥에 맨 일본사람인데 어느 일본친구의 책을 빌렸을수도 있구 고서점에서 샀을수도 있지 않아. 하하하, 별걸 다…》

한순간 설향은 속으로 소스라치듯 놀랐다. 자기는 그런 문제때문에 밤잠도 이루지 못하고 온갖 불길한 의혹에 시달렸는데 경태는 너무도 대수롭지 않게 웃음거리로 일축해버리는것이였다.

(내 생각이 그렇게도 마련없고 유치해보였을가?)

설향은 첫마디에 기가 꺾이자 색정출판물에 대해서 묻자던 말은 입밖에 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벼르고별러 만난 기회에 할말은 꼭 해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구 오빠, 그 깨끗한 책장에 추잡한 일본잡지들은 어떻게 되여 꽂혀있나요? 그것두 그 학생이 갖다준거겠지요?》

그 물음에는 좀 켕기는것이 있는지 그는 얼굴이 불그레해지며 애매한 답변을 하였다.

《그 친구가 가져다주길래… 당장 태워버릴가 하다 혹시 수색을 당해두 그렇구 위장을 위해서 팽개쳐두었지.》

《오빠는 그런 잡지들을 보나요?》

《설향이, 이 경태를 어떻게 보구 하는 소리야? 그래 내가 그딴데 눈을 팔 사람같아?》

그는 짐짓 어처구니없다는듯이 이렇게 천연스럽게 응대했으나 사실은 매일이다싶이 그 잡지들에 넋을 빼앗기고있었던것이다.

원래 경태는 머리를 썩여야 하는 일, 품이 드는 학구적인 일거리같은건 극력 피해왔었다. 가령 부피두터운 책을 읽은 경우에도 독서광들의 축에서 빠지지 않기 위해 주요인물들이나 대략적인 줄거리나 알아두는것으로 그쳤다. 그러나 짧은 시간에 눈요기나 심심풀이가 될수 있는 렵기적인 그림책이나 잡스러운 이색적인 잡지따위에는 각별히 재미가 있어했다. 하물며 관능을 자극하는 색정잡지들을 그가 외면할리가 만무했다.

그러나 옥같이 순결한 설향이로서는 그의 이러한 속내를 감히 가늠해볼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 학생이 오빠한테 그따위 책들을 자꾸 가져다주는 목적은 어데 있나요? 혹시 오빠를 딴데 기울어지게 하려구 일부러 그러는게 아닐가요?》

《설향이, 너무 곡해를 말어. 설사 그렇다구한들 내가 그런데 기울어질 사람이야? 그 잘난 책들이야 되돌려주면 그만일거 안야. 지내보면 호연은 괜찮구 또 처지가 불쌍한 사람이야. 그를 지내 나삐 생각지 말라구.》

설향이 마음을 도사려먹고 왔던 목적은 싱겁게 글러지고말았다. 경태는 설향이 그처럼 안타깝게 호소하는 말을 어느 한가지도 심중히 새겨듣는 멋도 없이 오히려 제편에서 호연을 변호하려고만 했다. 설향은 그지없이 야속하였다. 그는 실망감을 느끼였다.


며칠후.

철림이 하숙방에 들어서자 뜻밖에도 은해가 난딱 일어나 《철림동지,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하며 그의 책보를 받아 책상우에 놓아주었다.

《기다린지 오랩니까?》

《아니요, 그런데 퍽 늦어졌군요.》

《예, 오는 길에 문동지를 좀 만나느라구…》

철림은 인차 은해의 얼굴에서 초조해하는 심정을 읽었다. 그래서 그는 은해의 용건부터 알고싶어 곧 그와 마주앉았다.

은해는 먼저 설향이가 경태의 하숙방에서 본 이야기를 사실대로 차근차근 전하였다.

철림은 매우 심중하게 들었다.

《스즈게 묘시… 그것이 남의 이름일수 없겠는데. 그가 조선사람인데다 타고장에서 온지 얼마되지 않는새에 어떤 다른 왜인과 거래할 겨를두 없었을거구… 여기에는 필경 무슨 쪼간이 있는것 같습니다.》

《나두 상당히 의심스러워요.》

《가짜 삼촌에 왜놈이라?… 알겠습니다. 대단히 심각한 문제같은데 좀더 깊이 연구해봅시다.》

《그리구 철림동지, 춘산리동무들이 그간 지하족 50컬레와 의약품들을 마련해놓았습니다. 어디에다 집결시키겠는지…》

《은해동무, 그새 또 큰일을 하였군요.》

《그건 내가 아니라 춘산리 조직성원들이 다른 군에까지 다니며 조금씩 구해들인거랍니다.》

은해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서둘러 말하였다.

《그렇긴 하지만 은해동무 아니고서야 그런 조직사업이 이루어집니까. 이제 인민혁명군에 보낼 원호물자들은 삼룡리 선바위골 숯구이막에 은밀히 집결시키기로 했습니다.》

《그리구 또 박영란동무와 송찬숙동무의 입대청원문제는…》

《청원대루 다 됐습니다.》

《그래요! 참말 잘됐군요.》 은해는 조용히 탄성을 질렀다.

《그런데 수옥동지는 찬숙동무를 몹시 걱정하더군요. 세번씩이나 퇴학서를 쓰구 하숙집을 네번이나 옮기며 눈물겹게 공부한 동문데 졸업증을 못 받게 되면 섭섭하지 않겠느냐구 하면서…》

《나두 그렇게 말했더니 배울걸 다 배우면 됐지 그 잘난 왜놈학교 졸업증따위가 뭐냐고 하면서 만일 청원이 튀면 박영란의 뒤를 따라 무작정 가겠다는거지요 뭐.》

《삐라살포두 솜씨있게 하구 또 그러한 각오가 반영돼서 지지를 받은겁니다. 은해동무, 재삼 말하지만 매 걸음마다 경각성을 각별히 높여야 하겠습니다. 문동지의 통보에 의하면 요새 위현동주변의 경계가 몹시 삼엄하다구 합니다. 그러니 아지트출입은 극력 삼가해야 할것 같습니다. 》

철림은 요즘 학교에서 돌아오거나 어디로 나갈적마다 하숙집을 한눈에 바라볼수 있는 골목에서 싱겁게 서성거리는 낯선 사나이들이 가끔 눈에 띄였다. 철림은 어둑시그레해진 골목길로 꼿꼿이 걸어가는 은해의 뒤모습을 행인들속에서 놓치지 않으면서 뒤를 따랐다.

그는 은해의 신변을 위협하는 갑작스러운 정황이 생겨도 즉각에 선손을 쓸수 있는 알맞춤한 거리를 두고 걸었다.

드문 열정가인 은해는 조직에서 맡겨준 임무에 열중하여 밤길도 서슴없이 나다니였다. 그것때문에 철림은 늘 왼심을 써왔다. 비단 은해뿐아니라 동지라면 그 누구의 신변이든 자신이 도맡아서 보호해주고싶었다. 동지들을 돕고 신변을 보호하는 길이라면 백리 밤길도, 열밤의 새움도 마다하지 않을 그였다.

더군다나 은해는 그의 마음속에서 떠날줄을 모르는 참다운 옛 스승의 더없이 귀중한 녀동생이 아닌가! 은해라고 하면 달빛이 어수선하던 태평령이 떠오르고 한무선의 열정적인 모습이 안겨오며 스스로 마음이 부드러워지는것이였다.

다음날 밤 물레방아집에 수옥과 철림, 성근이 모여앉아 입대청원자들과 원호물자를 국경으로 은밀히 넘기기 위한 구체적인 조직사업을 하였다.

수옥은 입대청원자들의 길 떠날 차비를 빈틈없이 잘 시킬데 대하여 거듭 강조하였다.

《김길수동지는 두말할것도 없고 삼룡리, 춘산리의 4명의 동무들두 다 끌끌한 농민청년들입니다. 그리구 박영란, 송찬숙동무들은 남성동무들에 짝지지 않는거구요. 그래서 원호물자는 여섯짐으로 나누어 싸구 한명은 교대제로 전방감시임무를 맡기로 계획하였습니다. 지금 전국도처에서 로동자, 농민, 학생청년들과 지식인들이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지지하여 반일투쟁을 맹렬히 벌리면서 한편 인민혁명군 입대를 청원하고있어요. 우리도 그 흐름에 합류하는셈이지요.》

철림은 내심으로 금번 기회를 놓치는것이 알찌근하여 얼굴에서 서운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요즘은 그저 가슴이 울렁거리기만 하는데 참 부럽습니다.》

수옥은 그의 절절한 심정이 충분히 리해되여 방긋이 미소를 지었다.

《문동지, 길안내하기가 힘들지 않겠습니까?》하고 철림은 진중하게 물었다.

《책임자동무, 나야 방아간재목을 고르느라구두 그래, 약초캐러 제집뒤울안 다니듯 하던 길이니 마음 푹 놓으시우. 지금 왜놈들이 겁에 질려 5리어간에 주재소하구 통나무포대라는것두 세워놓았다지만 그거야 제놈들 숨을 둥지에 불과한거구 우리가 건늘 곳은 얼마든지 틔여있는거지요. 》

성근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모두 조용히 웃었다.

《뒤따르는 놈들이 나지면 그건 내가 전적으로 맡겠습니다.》

철림은 시원시원하게 장담하였다.

《그런데 수옥동지두 특별히 주의하십시오. 요즘 놈들이 잠복감시망을 사방에 늘이였습니다.》

《나두 벌써 감촉했어요. 문흥에까지 나타나 내뒤를 밟는 대장간주인놈을 피끗 알아보았는데 그놈은 내 얼굴을 딱히 모르는것 같더군요.》

《문흥에까지요? 어쨌든 상당히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구 문동지, 전번에 길을 미리 밟아볼 때 국경초소들에 세퍼드들을 매두었더라구 하지 않았습니까?》

철림은 미흡한 구석이 있을세라 세심히 따져보며 건건이 물었다.

《그건 별문제우다. 호무우를 몇개 구워가지고 가면 되지요.》

《구운 호무우를요?》

《세퍼드가 으르렁대려 할 때 그걸 슬쩍 던져주면 그놈이 넙적 받아물지요. 일단 한번 깨물었다가는 개이몸이 몽땅 물크러져서 주둥이를 벌리지도 못하구 낑낑거리며 태치느라구 언제 짖어볼새두 없게 되지요.》

《하하하, 언제 그런 방법을 다 익혀두었습니까?》

《아이때 좀 해본거지요, 허허허.》

…모임에서는 국경이 그중 가까운 선바위골 숯구이막에 은밀히 집결하였다가 어두워지면 출발하기 위한 제반 절차와 방법이 상세히 론의되였다.

그러나 신경태만은 변호연과의 관계로 하여 일단 조용히 이번 일에서 돌려놓기로 하였다.


×


사이또형사는 메밀눈에 잔뜩 살기가 등등해서 단속된 행인들에게 마구 밸풀이를 해댔다. 약간이라도 순순히 응하지 않는 사람은 무작정 따귀를 후려치거나 구두발로 정갱이를 걷어찼다.

혜신바닥에서 삐라사건이 있은 후 골목골목에 잠복감시를 붙이고 수사진을 펼쳤으나 아무런 소득도 없어 신경을 칼끝처럼 도사리고있는 때에 날벼락같이 률곡면소재지에서 똑같은 삐라사건이 련이어 터진것이였다. 성급하고 독살스러운 사이또는 미쳐날지경이였다.

이미 《요시찰》대상으로 점찍힌자들을 제잡담 마구 잡아들여 불쇠꼬쟁이로 생살을 지지거나 코구멍에 고추물을 부어넣든가 장작개비로 주리를 틀면 모조리 게워놓을판이다. 그런데 송사리꼬리를 휘여잡고 큰고기를 단번에 홀치려고 무한정 늦잡는 히라오까의 지구전에는 화가 울끈울끈 치밀었다. 그래서 심사가 잔뜩 뒤틀린 그는 조금이라도 눈꼴이 시게 놀거나 눈에 거칫거리는것들은 제잡담 단방에 쏴갈겨버리고싶었다. 어느날 사이또는 변영근과 품을 놓고 만날 작정을 하고 사복차림으로 넌지시 대장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낮에 사이또의 눈짓암시를 제꺽 알아챈 영근은 뒤골방에 술상부터 차려놓고 날이 저물기를 기다리고있었다.

영근은 히라오까의 심복이면서 동시에 사이또의 심복이기도 했다.

영근은 그가 성미가 까탈스럽고 경망한데는 있으나 즉시즉결의 급진적인 기질만은 마음에 들었다. 그는 격하기 쉽고 일단 수틀리면 리성을 잃고 사정을 보지 않는 사이또의 마음을 눅잦히려고 술상을 알속있게 차렸다.

어스름해질무렵 뒤문을 열고 타조같은 껑충한 다리로 문지방을 넘어서는 사이또를 영근은 제창 술상에 안내하였다.

《아, 이 어스크레한 판국에 술상까지?…》

《보는 눈, 듣는 귀도 없는데 괜히 그러지 말구 얼른 술상에 다가앉으시우다.》

영근은 한술 더 떴다.

《에라, 오늘 또 못 이기는척 해봐. 내 영근씨의 이런 성화에는 못견딘다니까.》

사이또는 영근이가 거퍼 따라주는 위스키 몇잔에 속이 다소 가라앉았다.

참새 굴레씌우게 약은 영근은 술과 기름진 안주로 위장이 어지간히 누지근해지자 먼저 사이또의 귀가 항아리만 해질 희한한 소식부터 꺼냈다.

《사이또나리, 내 그새 큰 고기 그림자를 찾아냈수다.》

《뭐, 큰 고기 그림자?! 그것이 사실인가?》

사이또는 안주를 꿀꺽 삼키고 눈이 퀭해서 반문했다.

《사실이구말구요. 귀신의 눈은 속여두 변영근의 눈은 못 속인다니까요, 흐흐흐. 》

영근은 제풀에 흉심이 돋쳐 강아지울음같은 소리로 웃었다.

《그래 어디서 사는 어떤 놈인데?》

《놈이 아니라 처녀지우.》

《뭐, 처녀?》

사이또는 호기심이 울뚝 북받쳐 놀랍게 물었다.

《예, 겉보기에는 머리수건을 푹 쓰고 중년녀자차림을 한 방물장사군인데…》

영근은 그 방물장사에게 주목을 돌리게 된 경위를 사이또에게 들려주었다.

그 누구에게서나 수상한 기미를 알아채려고 늘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다니는 영근이마저도 처음에는 그 녀인을 아무데나 흔한 촌뜨기방물장사로만 무심히 스쳐보았었다. 그런데 전번 문흥장거리를 지나가는 한 녀인의 차림새며 보짐을 머리에 이지 않고 한쪽팔에 걸친 뒤모양이 신통히 혜신거리에서 한두번 눈에 익혀두었던 방물장사의 뒤모양과 너무나 방불해 보였다. 그는 즉시 가던 길을 바꾸어 장바 한기장쯤 거리를 두고 녀인의 뒤를 슬그머니 밟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마주오던 한 촌할머니가 그 녀인더러 무언가 묻자 그 녀인은 보짐을 길가에 놓고 푸는것이였다.

영근은 장군처럼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체 하며 슬쩍 다가갔다. 보짐에는 가위, 인두, 손칼, 참빗, 얼레빗, 빈침, 머리빈침, 바늘, 실타래, 비녀 등이 들어있었다. 그 녀인과 정면으로 마주서있던 영근은 그가 참빗을 할머니에게 주고 돈을 받을 때 그만 소스라치게 놀랐다.

옷차림이 허술해서 그렇지 그는 얼굴이 새파랗게 젊은데다 무척 상냥하고 용모는 매우 기품이 있었다. 이 시골구석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인물이였다. 게다가 그의 침착한 거동이며, 보짐을 도로 싸는 날쌘 솜씨며 할머니를 대하는 례절바른 몸가짐은 그가 항간의 보통녀인이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다. 이 순간 그는 그 녀인을 한달전에 남석면에서도 보았던것 같기도 했다.

(아니야, 지레짐작은 말자. 인상좋은 사람은 초면인데도 자주 보던 사람같은 착각이 일수 있으니까.)

영근은 그 녀인의 뒤를 멀찌감치에서 밟다가 그가 소재지를 벗어나 호젓한 길에 나서자부터 걸음이 어찌나 재빠른지 굽인돌이에서 그만 놓쳐버렸던것이다.

그런데 바로 2~3일전에 혜신남고보앞 길목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량곡창고모퉁이에서 잠복감시를 하고있던 영근은 그 유령같은 녀인이 어디서 나타나 마침 학교에서 나오는 최철림이와 만나는것을 보았던것이다. 그는 내심으로 환성을 올렸다. 영근은 철림과 헤여져 보짐을 팔에 걸치고 태연스럽게 걸어가는 그의 뒤를 어깨바람이 나서 추적하였다.

그런데 위현동주변에서 무슨 싸움판때문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혼잡을 이루는 바람에 놓치고만것이였다.

《그야말로 영근씨는 타고난 렴탐군이야. 덤불숲에서 바늘두 찾겠군요.》

《사이또나리, 렴탐군이 뭐요. 기분상하게…》

《아-아, 그러면 특수정보원이라구 부르지. 하긴 엎치나뒤치나 같구같은 소린데… 그래 그 녀가 최철림과 손을 잡구있다, 혜신읍과 문흥면이라? 그렇다면 문흥이 혜신과도 줄이 닿아있다는것이 아닌가?!》 사이또는 대뜸 눈이 둥그래졌다.

《으흐흐, 두고보시우. 이제 큰 횡재가…》 영근은 또 강아지울음같은 웃음소릴 내였다.

《으음, 위현동주변이라… 이제야 우리 손에 꼬리를 꽉 잡히운셈이지. 아니 거 문흥에서 제창 덮쳐 달구었더라면 공연한 수고를 더 안해두 될걸 그랬댔군.》

영근은 마른낙지를 찢어서 씹으며 그것도 말이라고 하는가라는 식으로 손을 내저었다.

《온, 나리두. 그 지구야 불순세력이 살판치는데다 또 녀자가 만약 공비라면 호신용권총두 가졌겠는데 허투루 덤비다간 선자리에서 저승객이 되겠는데두요. 나리, 마음 푹 놓으시우. 이제는 후리그물에 들었으니까요.》

사이또는 영근의 의기양양한 장담에 구미가 바싹 동했다.

《나리, 이건 내 아직 주임님한테는 한마디두 직고하지 않은거우다.》

사이또는 그 말을 단마디로 일축했다.

《무슨 쓸데없는 잔걱정인가. 내가 오늘 괜히 온것 같은가, 술맛이 써지게.》

《아직은 추리단계에 지나지 않아서 좀…》

《그러게 영근씨두 큰 고기 그림자라구 하지 않았는가. 이 사이또가 그만한 리해두 없을것 같은가!》

《하잇! 실례했습니다.》

《하하하! 좋아좋아, 조선인중에 영근씨같은 황국신민은 없어. 없단말이야. 이담에 공산주의자들과 결판을 내면 영근씨두 내 고향 요꼬하마에 같이 건너가 살자구요. 멋있는 해변가마을이지. 자, 또 마시자구.》 사이또는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여, 이 사이또를 숙봐선 안돼. 알겠지?》

《나으리, 내 다 알다뿐이겠수.》

《그는 그고 나는 나야. 음, 그렇구말구. 거기두 내 말뜻을 알만 하지?》

《아, 그러문요. 알구두 남습지요.》

사이또는 자기 가슴을 툭툭 쳐보이며 못을 박았다.

《이 사이또와 영근씨 이렇게 단둘이서 그 큰 고기를 홀치잔말야. 꼭 단둘이서, 알겠지?》

《아, 그러게 그 누구한테 말 안한것두 사이또나리한테만은…》

《나두 알아. 그래서 내 영근씨를 나처럼 믿는거라구. 영근씨는 오늘 내 마음에 날개를 달아주었어. (두손을 합장하고)아리가또 고자이 마스.》하고 너덜대였다.

영근은 비칠거리는 사이또를 부축하여 경찰서관사까지 데려다주고서야 주변을 살피며 황급히 돌아섰다. 평생 도적고양이놀음으로 살아온 영근은 남의 뒤를 밟으면서도 제그림자에 놀라는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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