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공화국의 사회주의가 제일이다
내가 남쪽에서 살 때 그곳에서는 해마다 녀대학생들을 상대로 《어느 직업을 제일 좋아하는가》라는 문제를 내서 여론조사를 하군 하였는데 그때마다 제1의 직업으로 당선되는것이
의사였다. 의학이 돈벌이를 위한 영업수단으로 되고있는 자본주의사회에서 가장 안정적이면서도 명예와 재부를 함께 얻을수 있는
나는 공화국북반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의사직업을 택하는것을 보고 처음에 몹시 놀랐다. 그 의문은 후에야 풀리였다. 공화국의 품에 안겨 나는 여러차례에 걸쳐 입원치료를 받았다.
의거한 다음해인 1989년에 기관지가 파렬되여 두달동안 입원치료를, 1996년에는 김만유병원에 석달동안 입원하여 담낭적출수술을, 1997년에는 조선적십자종합병원에 두달동안 입원하여 신석제거수술을 받은것을 비롯하여 지난 20여년동안 다 합해서 1년남짓이 입원생활을 하였으며 여러차례 수술을 받았다.
남쪽에서 나는 6월인민항쟁때 시위투쟁에 나섰다가 전투경찰들의 폭행에 륵골이 골절되여 45일동안 입원치료를 받았었는데 당시 입원비가 로동자들의 20개월분의 임금과 맞먹는 거액이였다.
그런데 공화국에서는 45일보다 열배나 많은 기간 그것도 대수술을 받으며 입원생활을 하였으니 그 비용이 얼마나 엄청난것이겠는가 하는것은 더 론할 여지도 없다.
그러나 공화국에서는 모든 치료를 무상으로 해주었다. 그뿐아니라 남쪽에서 얻은 온갖 질병들을 말끔히 고쳐주었다.
그 나날 의사, 간호원들의 지극한 정성에 눈물도 많이 흘렸다. 친혈육의 정을 안고 피가 모자라면 피를 서슴없이 바치고 움직이지 못할 때에는 밤을 새워가며 곁을 떠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은 인정이 메마른 남쪽현실에서는 상상조차 할수 없는 현실이였다.
나의 누님은 돈이 없어 급성취장염으로 병원문턱에도 못 가보고 34살 한창나이에 한많은 세상을 떠났다. 나도 남쪽에서 비교적 여유있는 생활을 해왔지만 공화국에서 받아안은 의료적혜택을 돈으로 환산한다면 모름지기 내 로임으로도 갚지 못하고 누님처럼 생을 마쳤을것이다.
돈이 없어 병을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 높고낮은 사람이 따로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무상치료의 혜택을 누리는 나라가 바로 공화국이다.
비단 이뿐이 아니다. 나라에서는 나의 건강을 념려하여 담당의사도 붙여주었다. 거의 매일이다싶이 집에 찾아와 보살펴주는 고마운 담당의사선생의 극진한 지성에 의해 나는 건강한 몸으로 지금도 통일사업에 전념하고있다.
내가 남조선에서 살 때 서울대학교 의학대학에 가정의학과라는것이 있었다. 《가정의》라는것은 쉽게 말하면 특권족속들의 가족을 전문치료하는 주치의사를 말한다. 남조선에는 가정의를 채용하는 특권족속이 1%밖에 안된다. 절대다수의 근로대중은 진찰이나 간단한 검사 한번 받자고 해도 지방에서 도시의 집중된 병원에 수백수천리를 달려와야 하며 그것도 돈이 없으면 문전거절을 당하기가 일쑤이다.
하지만 공화국에는 도, 시, 군은 물론이고 동과 리에까지 진료소가 있고 진료소에는 일정한 세대별로 담당한 의사선생들이 있어 주민들의 건강을 병이 나기 전에 책임지고 돌봐주는 예방의학체계가 정연하게 세워져있다. 남쪽식으로 표현하면 북의 주민전체가 자기의 가정의, 주치의사를 가지고있는셈이다.
나는 남쪽에서 대학교수로 있을 때 여러 대륙과 나라들을 돌아보았지만 병이 날세라 예방치료를 하는 공화국과 같은 나라는 보지도 듣지도 못하였다.
이 세상에
그러나
그래서 나는 딸 리하나를 의학공부를 전문으로 하는 대학에 보냈다. 하나된 통일조국을 바란다는 이름그대로 내 딸이 조국이 통일되면 남쪽의 동포들도 무상치료, 예방치료의 혜택을 마음껏 누리도록 작은 힘이나마 바쳐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원 리우갑
(《통일신보》 2010년 5월 15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