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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림은 찾아온 현선생과 마주앉아 삐라의 출처를 독이 올라 캐려는 놈들의 발광적인 책동에 대처할 대책을 상세히 의논하였다.

어제 허순사가 성근이한테 알린바에 의하면 삐라의 단서를 잡으려고 온 경찰서가 모조리 떨쳐나섰을뿐아니라 산하 면의 경찰관주재소들에도 수색전에 총동원하도록 긴급지령을 떨구었다고 하였다.

《보십시오. 이 방두 도배지까지 찢어내며 샅샅이 수색했습니다. 현동지가 있으니 거기야 어련하겠습니다만 놈들이 지식청년들에게 주의를 집중하고있습니다. 특히 삼룡리에는 사립학교가 있는것만큼 놈들이 더 주목할수 있습니다.》

《녜, 그래서 각별히 대책하고있습니다. 그리구 혜신장마당에서 사들인 천과 신발 같은 원호물자들은 숯구이막 숲속에 묻어두었습니다.》

《잘했습니다. 재봉침바늘이나 실 같은건 별문제인데 등사판이나 그 부분품들 은페는 특별히 잘해야 할것 같습니다. 놈들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바로 그것을 노리구있습니다.》

《돌아가면 다시 철저한 대책을 세우겠습니다.》

《현동지, 밀정들이 곳곳에 쭉 깔린것 같습니다. 밤에 나다니는것두 주의해야 하겠지만 핵심대렬의 순결성을 꼭 보장해주십시오. 원종장에 잡종이 섞이면 야단 아닙니까!》 철림은 시름없이 웃으며 말했다.

현선생도 따라웃으며 걱정했다.

《거, 다른 일은 그리 걱정스럽지 않은데 어느놈이 밀정인지를 가려내기는 조련치 않거던. 허허.》

《그거야 현동지가 직접 파악했으면 믿을수 있는거구, 그렇지 않은 다음에야…》

《나두 그런 각도에서 하느라 합니다만…》

철림은 진중한 표정을 짓고 엄숙하게 말하였다.

《아마 사람의 량심을 귀중하게 봐야 할것 같습니다.

장군님께서는 량심에 때가 오르면 신념에도 때가 오른다고 하시면서 그런자들과는 같이 걸어갈수 없다고 말씀하셨답니다.》

현선생은 그 말을 심중하게 들으며 그 심오한 뜻에 감복을 금치 못해하였다.

《참으로 뜻이 심오한 금언이시군요! 철림동무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혁명사상을 받아안게 되니 짬만 생기면 계속 만나구픈 생각뿐이랍니다, 허허.》

현선생이 돌아간 후에도 철림의 마음은 그냥 뒤숭숭해졌다. 요즘 놈들이 자택생과 하숙생들의 집을 모조리 수색한것이라든가 행인들에 대한 단속과 검색소동이 전례없이 더 그악스러워진것이 사뭇 의심스러웠다. 혹시 송수옥이 와있는 낌새를 챈것이 아닐가?! 혹시 조직의 비밀이 본의아니게 샐 틈사리가 있는게 아닐가?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중 허서분한 고리로 마음에 짚이는것이 경태였다. 나날이 의심이 짙어가는 정체불명의 변호연(그렇다고 하여 지금시세에서는 당장 그의 정체를 해명할 방도가 없었다.)이와도 그중 친교가 두터운것도 경태였고 일전에 야학에 안 나와 야학생들이 장밤 기다리다가 종내 그냥 돌아가게 한것도 경태였다. 이것은 매우 심중한 문제였다. 그는 고뿔에 걸렸댔노라고 우물우물 핑게를 대지만 그것은 무슨 의뭉수같이 느껴졌다. 오늘도 경태에게 요즘 호연이가 하숙방에 자주 드나드는가고 슬쩍 비쳐보았더니 그의 답변은 고작 이러했다.

《내가 짬이 없으니 출입이 좀 뜸해졌어. 그런데 한번은 네 말을 듣고 대장간주인이 진짜 삼촌이 맞는가고 직판 건드려보았지.》

철림은 귀가 번쩍 열리여 다그쳐물었다.

《그러니 뭐라던?》

《처음엔 발끈해서 역증을 내더니 자기 어머니가 숨을 거두면서 외토리된 그에게 학교를 마저 마치구 직업을 구할 때까지만이라도 혜신삼촌한테 가 얹혀살라구 당부했다며 눈물을 줄줄 흘리지 않겠나. 들어보니 정말 처지가 불쌍하더라구.》

《그게 연극이 아니야?》

《연극이라면 눈물이 그렇게 쉽게 나오겠니?》

철림은 귀가 넓은 경태가 그에게 얼리운것만 같았다. 꼬리가 긴 영근의 정체가 차츰 드러나기 시작한 이상 이 수수께끼같은 인물을 마땅히 심중하게 대해야 할것이였다.


×


그동안 문흥지구에 나가 붙박혀있던 변영근은 히라오까의 긴급지령을 받고 며칠간 그 린접인 남석면에 은밀히 다녀왔다.

그는 남석주재소에 꾹 박혀 최철림과 신경태, 한무선의 호적등본을 서캐훑듯이 파보았다.

그 과정에 영근은 매우 신통한 사실을 발가내였다.

10여년전 반일의병대출신이며 독립군자금조달을 맡은 《수상지인》 김대현을 김재회로 자기가 이름을 잘못 알고 밀고한적이 있었다. 그런데 바로 철림이가 당시 증거불명으로 놓여나와 사립학교까지 설립한 그 김대현의 외손자라는것을 알아낸것이였다. 뿐만아니라 그가 또한 자신이 1년가까이 온갖 변장수를 써가며 추적하여 마침내 총살형에 처하게 만든 독립군 최성만의 친손자이기도 했다.

신경태의 호적등본에서는 별로 걷어쥘만 한것이 없었다. 그의 애비는 돈벌이에 환장된 한낱 교묘한 수전노에 불과했다. 그러나 한무선의 할아버지는 서당훈장을 할 때부터 김대현과 친교가 두터웠고 한무선은 김대현이 설립한 사립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었다. 이렇게나 저렇게나 두루 뒤엉켜있는 집안들이였다.


호연은 자기를 점점 이상한 눈초리로 주시하는것 같은 경태의 마음을 눅잦히려고 생일상을 꾸며낸 후에도 지꿎게 뒤가 께름했다. 혹시 내가 취중에 말실수라도 한게 없었을가? 혹시 그가 속내를 눈치채고도 일부러 속는체 하는게 아닐가?

아니야, 아직은 마음놓아도 돼. 그가 그날 술 한두잔에 얼근해지자 야학도 별찮게 뚜꺼먹고 색정에 대한 화제로 슬그머니 유도하자 확 불이 달리지 않던가! 또 히라오까의 《지시》대로 일본 신간잡지들을 비롯한 출판물들을 그에게 한보따리 갖다주었더니 《이런 추잡한것들을 보면 되나뭐.》하면서도 침대밑에 감추고 탐독하지 않던가.

생일연극때에도 인생이란 돈더미우에서 자기 대에 쾌락, 향락을 누리는게 근본이라고 하자 인츰 공감했고 색주가에 대한 말이 나오기 무섭게 호기심에 불붙지 않던가. 이것이 호연을 안심시켰다.

어느날 땅거미가 들무렵에 변영근이 절뚝거리며 자전거를 끌고 집뜨락에 들어서는것이였다. 때마침 소풍겸 뜨락에 나와있던 호연은 깜짝 놀라며 그에게 다가갔다.

《어찌된 일입니까? 어디서 다리를 상하지 않았습니까?》

채양이 긴 검은 캡을 꾹 박아쓴 영근은 게면쩍어하며 응대하였다.

《아, 그놈의 자동차가 옆골목에서 쑥 빠져나오는통에 그만… 엥이.》

영근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사위를 휘휘 둘러보며 자전거를 부엌간으로 들고 들어갔다. 그는 부엌에 들어가 흙투성이된 손도 씻고 진창으로 매닥질이 된 양복바지를 갈아입느라고 한참동안 부시대다가 호연의 방에 들어왔다.

《그새 여기서 삐라소동이 인게로군.》

《예, 그것때문에 요즘두 줄창 법석댑니다.》

영근은 방바닥에 올방자를 틀고앉으며 말을 이었다.

《벌써 그 소문이 내 가있던데두 쫙 퍼졌네. 좋은 소문은 떠두 흉한 소문이라는건 참말 빠르기두 해.》

영근은 양복저고리주머니에서 은담배갑을 꺼내여 거기서 담배 한가치를 뽑아 성냥을 그어대고 빨았다. 담배고질은 아니였으나 외간사람들과 마주앉는 법을 모르는 그는 호연이와 대면할 때면 좀 거북해서인지 담배부터 붙여물었다.

《임자두 좀 볶이우겠구려.》

《나같은거야 뭐 볶일거나 있나요. 그저 작문같은거나 써내라면 써내구. …》

《음, 필적감정을 한거구만.》

히라오까가 그들이 각기 은밀하게 하는 일의 고리를 이어주지는 않았지만 피차 밀정노릇을 하는 과정에 스스로 맥이 통하게 된것이였다.

처음에는 그저 어리뻥해서 눈치만 슬슬 살피며 어림짐작으로 지내던 호연도 물계가 어느 정도 트이자 영근이와 접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간에 입을 봉해야 하는 말도 수군수군 주고받으면서 스스로 밀접해졌다.

《내 이번에 남석면에 들려서 임자네 동급생들인 최철림이하구 신경태의 족보를 모조리 캐보고 왔네.》

《그래요? 그런데 그것까지 어떻게 다…》

《자넨 내가 그러루한 일루 늙어오는걸 몰라?》하고 영근은 남석면에 가서 호적등본들을 밑뿌리채 들추어낸 전말을 자랑삼아 이야기해주었다.

《그런데 그 최철림이란 치는 주먹이 굉장히 세다면서요?》

《그래?》 영근은 귀가 번쩍 뜨이여 반들거리는 이마에 깊은 주름을 세우고 그를 뚫어지게 치떠보았다.

《장마당에서 박히택이같은 주먹대장두 단매에 꼬꾸라뜨렸다던데요.》

《그건 누가 그러던가?》

《그치와 딱친구인 신경태가 그런 자랑을 잔뜩 늘어놓더군요.》

영근은 얼결에 제 무릎을 탁 쳤다.

《역시 자네하군 마주앉을 멋이 있거던.》

《무슨 단서라두 잡히는가요?》

《아니, 그저 내 해보는 소리네.》하고 영근은 구렁이 담넘듯 화제를 슬쩍 돌리였다.

《그러니 임자는 안구석일을 보구 나는 바깥구석일을 맡은셈이지, 허허. …》

호연은 영근의 추한 얼굴을 난생처음 보기라도 하듯 경탄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자네나 나나 이왕 정보일에 명을 맡긴 몸들이니 아차 실수가 없게 매사에 조심해야겠네. 우리 일이란 공산군지하공작원들처럼 사자밥을 걸머진 일이네. 우리가 그네들을 노리는것처럼 그들 역시 우리를 노리거던. 피차에 그같은 재앙을 피하려면 자기를 귀신모르게 깊숙이 감추는거네. 그게 땅수야.》

영근은 부지중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길게 한숨을 지으며 동안을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나이 들고보면 인생이란 벼락불같은건데 평생 두더지생활을 하면서 좋은 시절을 다 놓친 생각을 하면… 그러나 어찌겠나. 기왕 내친 걸음이니 불온분자들과 끝까지 결판을 봐야지. 이젠 그래두 말동무가 생겼으니 답답한 속두 이렇게 털어놓게 되네그려.》

호연은 그가 오늘 그 어떤 심상찮은 일을 당했는지 전에없이 초췌한 몰골로 뇌까리는 감상적인 신세타령이 마치도 자신의 불우한 앞날을 예고해주는것 같아 불쾌감을 금할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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