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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자별열람


33


철림이와 길수는 삐라등사에 여념이 없었다. 길수가 등사기로라로 미는족족 철림은 날래게 용지를 뽑고 새 용지를 갈아넣군 했다.

철림은 손을 잽싸게 놀리면서도 머리속에서는 좀전에 수옥이 하던 말이 거듭 되새겨졌다.

《그만하면 변영근이 고등계특무라는것이 어느 정도 밝혀진셈이군요. 그렇다면 변호연은 누구일것 같아요?》

《그놈도 고등계의 끄나불이라고 짐작됩니다. 그렇지 않다면야 무엇때문에 없는 조카의 탈을 쓰고 같이 살겠습니까. 그런데 더욱 수상한것은 가까운데서도 얼마든지 그쯤한 청년을 고를수 있겠는데 하필 함흥에서 끌어왔겠는가 하는겁니다. 이것도 어떤 흉계가 아닐가요?》

《듣던바대로 철림동무는 참 예리하군요. 모르는 적은 위험하지만 아는 적은 두렵지 않아요. 이런 때일수록 피동에 빠지지 말고 주동에 서서 활동하자요.》

벌써 두번이나 물도랑에 나가 머리를 찬물에 적셔가지고 들어서는 철림을 유심히 살펴보던 길수는 등사를 멈추고 말했다.

《철림동무, 잠시 눈을 붙였다가 하지 않겠소?》

《이젠 고비를 넘겼습니다.》

《확실히 철림동문 끄떡없거던.》

첫닭이 홰를 칠쯤에야 등사를 끝내였다.

그사이에 수옥은 방구석에 벗어놓은 철림의 학생복목달개가 덞어진것이 눈에 띄우자 아래방에 들고내려가 새 목달개로 갈아 달아주고 겨드랑이 따진것도 알뜰하게 꿰매주었다.

수옥은 자기를 친누나처럼 믿고 따르는 철림을 대할 때마다 불쑥 집에 두고온 남동생 생각이 머리를 들군 했다. 부끄러움을 잘 타는것이라든지, 격하기 쉬운 성미라든지, 그러나 일단 일이 생기면 제잡담 뛰여드는 결패라든지 너무나 자기 동생을 방불케 했다.

은해는 또 얼마나 정이 가는 동무인가! 수옥은 무엇인가 그들을 위해 정성을 쏟아붓고싶었다.

그들에 대한 생각에 잠길적마다 저도 모르게 입가에 정겨운 미소가 방긋이 그려지였다.

철림이와 길수는 굉장한 일을 치르기라도 한듯 희색이 만면하여 앉은책상우에 무드기 쌓인 선전물을 바라보았다.

철림의 곁에서 삐라 한장을 들고 읽어보던 수옥은 《어쩌면 길수동지는 왼손으로두 글을 이렇게 잘 씁니까! 정말 명필이군요.》 하고 탄복하였다.

길수는 게면쩍은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나는 본시 왼손잡이 아닌데 글만은 왼손으로 쓰기가 더 쉽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한번은 왼손으로 부지런히 숙제를 하고있는데 글쎄 난데없는 회초리가 왼손등에 벼락치듯 하는게 아니겠소, 허허.》 길수는 그 시절을 회억하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었다.

《나는 금시 손등이 바스라지는것 같이 아파서 으앙 하고 울음을 터치며 손을 붙잡고 태질을 했지요. 그런데 등뒤에서 할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지더군요. 〈너 이녀석, 다시 왼손으루 글을 쓰면 애당초 손목을 잘라버리구말테다!〉 허허허.》

《그 할아버님두 우리 외할아버지만큼 엄한분이시군요.》

철림은 그때의 형상을 눈으로 보는듯싶어 이렇게 말했다.

《습관이란 한번 붙으면 떼기 힘들더란 말입니다. 그렇게 혼쌀먹은 다음부터는 바른손으로 글을 쓰게 되였지만 지금두 왼손글씨가 쉽거던요.》

별치않은 한담인데도 피곤은 말끔히 가셔버린듯 분위기가 흥겨워졌다.

《이 선전물만 나붙으면 왜놈들은 당장 기가 질릴것 같습니다. 우리 〈적색독서회〉때 삐라라는것은 고작해서 〈일제학정 물러가라!〉, 〈무산청년 단결하자!〉, 〈조선독립 만세!〉 이런 식이였지요. 그런데 이번 선전물에는 10대강령과 창립선언의 핵을 딱 밝혔으니 대중의 눈이 대뜸 확 트이게 될거란 말입니다. 〈동포들이여, 조국광복은 멀지 않았다.〉, 〈2천만민중이 일심동체되여 반일조국광복전선에 총동원되자!〉 … 얼마나 피를 끓게 하는 호소입니까!》 길수는 격동에 겨워 이렇게 속을 터치였다.


×


다음날 밤 12시!

철림이가 주도세밀하게 조직한대로 선전물과 풀그릇을 든 혜신반일회성원들은 야음을 타서 방향별로 일제히 은밀하게 움직이였다.

늦도록 식당과 료리집, 객주가들에서 질탕거리던 소음도 멎은 밤거리였다. 지척을 분간할수 없게 캄캄한 밤거리에서 이따금 가랑잎들이 소시락거리는 소리가 간간이 들리고 먼 변두리에서 개짖는 소리가 적막을 건드리였다.

철림과 은해는 군청과 군경찰서, 야시장, 네거리쪽으로, 경태와 찬숙은 영림서와 사립병원쪽으로, 길수와 춘일은 혜신역과 떼목감시소, 물동토장쪽으로 갈라져 갔다.

철림은 새벽 2시에 이미 약속한 지점인 혜림려관 뒤골목굽이에서 각 조성원들을 와닿는 차제로 만나 간단히 총화짓고 주의사항을 주어 감쪽같이 각기 돌아가게 하였다.


새날이 훤하게 밝아지자 온 혜신땅의 거리거리에서는 일대 소동이 일었다.

통치집단의 아성인 군경찰서담벽에, 군청앞 전주대들에, 야시장의 기둥들에, 영림서, 사립병원, 혜신역출입문과 기다림칸벽 등에 나붙은 삐라들, 네거리와 물동토장일대에 흰눈처럼 하얗게 살포된 삐라들은 마치도 금방 지진이 들이닥친듯 삽시에 온 시가지를 뒤흔들어놓았다. 삐라가 붙은데마다 욱 몰켜서서 읽고 땅에 널린 삐라를 주어 감추며 곧 자리를 피하는 사람들…

한 중년남자는 《김일성장군 만세!》라고 쓴 삐라를 들고 경탄하여 말하였다.

《야, 과연 대단들 하군! 이거야말로 조선의 대통운이군!》

사람들은 기세충천하여 감탄을 토하였다.

《당장 천지개벽이 될것 같군그래!》

《이것은 나라가 당장 광복된다는 통고장이나 같지 않소!》

《일본놈 개새끼들 꽉 망해빠져라!》

뒤미처 아연실색하여 호각을 불어대며 미친듯 달려든 경관무리들은 삐라를 미처 감추지 못한 사람들의 손에서 삐라장들을 와락와락 나꾸채면서 귀쌈을 후려갈기였다.

《헤쳐가라!》

《당장 물러가라!》

온 경찰서 경관놈들이 몽땅 떨쳐나와 악에 받쳐 왝왝 고아대는 그 복새통에 기마경찰패들이 쏟아져나와 어지러운 말발굽소리로 아침공기를 더럽히며 중심거리를 올리훑었다.

그러거나말거나 사람들은 환희에 넘친 얼굴로 성수가 나서 말을 주고받으며 스적스적 흩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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