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유명한 교육자이며 발명가인 로렌드 힐의 창안으로 이 세상에 우표가 출현하여 쓰이기 시작한 때로부터 170여년 세월이 흘렀다.
무릇 사람들은 우표를 《나라의 명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것은 우표에 매개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를 상징하는 특징적인 면모들이 반영되기때문이다.
나는 우표애호가의 한사람으로서 일찍부터 이남땅에서 우표수집을 해왔다. 그러던 내가 공화국의 우표를 처음 본것은 1970년대 중엽이였다. 당시 외국출장을 다녀온 동료들을 통해 수집한 이 이북우표는 수십매정도밖에 안되였지만 그 우표들에서 받은 충격은 대단히 컸다.
우표의 종류가 다양하고 인쇄기술이 섬세한것은 물론 그 우표를 통해 하나의 피줄을 가진 우리 민족의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새롭게 절감하였다. 특히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3대원칙을 형상한 기념우표들을 보면서 그처럼 훌륭한 통일대강을 마련해주신
나는 그 우표들을 혼자 보는것이 무척 아쉬웠다. 그래서
군산실업전문대학 교수로 일하던 1985년부터
그후 나는 우표전시회를 통한 이북바로알기운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벌리면서
1988년 4월 15일, 뜻깊은 이날 나는 그처럼 동경하여마지 않던 공화국의 품에 안기게 되였으며 이때부터 우표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함께 나의 우표수집활동은 더욱 본격화되였다.
공화국의 품속에서 참다운 삶을 누려갈수록 나에게는 새 우표가 발행된 소식을 들을 때마다 한달음에 달려와 알려주군 하던 귀여운 딸들의 모습이 못견디게 그려졌다.
어느날 밤 우리 온 가족은 통일된 조국에서 행복하게 살 그날을 그리며 딸들에게 편지를 썼다. 하지만 봉투에 우표까지 붙인 그 편지는 보낼수 없었다. 분렬장벽이 아버지가 자식에게 보내는 사랑의 편지를 막아나섰던것이다.
우표란 편지를 보내는 값을 지불했다는 표시로서 그 어디에도 갈수 있다는 통행증이기도 하다. 하지만 북과 남사이에 가로놓인 장벽은 이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나는 이때처럼 분렬의 아픔을 뼈저리게 느껴본적은 없었다. 내가 그토록 애용하여 수집하고있는 우표는 단순한 종이보석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분렬비극을 절규하는 고발장이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나는 그저 우표수집가로서가 아니라 민족분렬의 수난자로서 우표를 통해 통일의 그날을 하루빨리 앞당겨올 일념을 안고 우표수집에 나섰다. 그 나날은 나에게 있어서 어둡던 분렬의 장벽을 가시고 통일의 밝은 앞날을 눈앞의 현실로 펼쳐보게 하는 가슴벅찬 나날이였다.
력사적인 4월남북련석회의를 기념하는 우표들과 조국통일상수상자들의 인물우표들 특히
참으로
그리하여 나는 2000년 10월 당창건 55돐에 즈음하여 진행된 조선우표전시회에 우표첩 《나는 통일을 보았다》를 출품하여 1등으로 당선되게 되였다.
력사적인 6. 15북남공동선언의 발표는 나의 우표수집의 절정기를 이루었다고 말할수 있다.
나는 6. 15북남공동선언의 기치밑에 전진해온 성스러운 5년에 펼쳐진 6. 15시대의 자랑찬 성과를 담은 우표를 통일의 환희에 넘쳐 정열적으로 수집하였다. 지난 3월 9일 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우표발행 60돐기념 조선우표전시회에
《백두광명성탄생》이라는 소제목으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다섯번째 제목 《통일의
우표를 통해 우리 민족끼리의 기치높이 3대애국운동을 힘있게 벌려가고있는 온 겨레의 거세찬 흐름을 뜨겁게 읽으며 나는 적은 힘이나마 조국통일을 위한 사업에 한몸바쳐나갈 결의를 굳게 다지고있다.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원 리우갑
(《평양신문》 2006년 4월 27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