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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학교에서 방금 돌아온 설향은 옷 갈아입을 생각도 잊고 창가에 우두 커니 서서 저 멀리의 천연산을 심란하게 바라보았다. 천연산마루에 비낀 짙은 락조는 음울한 어스름에 밀리워 점점 바래여지고 산턱에는 부드러운 안개가 목도리처럼 서서히 휘감기였다.

그는 날이 갈수록 마음은 더더욱 외롭고 착잡했다. 다른 누구들은 몰라도 박영란과 송찬숙의 기분이 류달리 명랑해진것이였다. 늘 표정이 정색하던 영란이, 고달픈 하숙생활에 시름겨워 늘 침울하던 찬숙의 갸름한 얼굴에도 생기가 돌고 눈빛들은 별처럼 반짝이는것이였다.

그 눈빛은 그들이 새로운 희망이 생기고 생의 희열에 넘치고있음을 말해주고있었다. 은해의 눈빛은 여전히 부드러우면서도 어딘가 엄숙하고 거동도 더 침착해졌울뿐아니라 말도 전에없이 사려깊었다.

남들은 그들의 눈빛, 마음의 변화에는 하등 개의치 않고 졸업을 앞둔 기분에 들떠 실없는 롱담과 헤픈 웃음으로 분위기나 즐겁게 했다.

그러나 설향은 그들과 호들갑을 떨면서도 속으로 영란이, 찬숙이들이 몹시 부럽고 그럴수록 고립무원해진 자기의 처지가 쓸쓸하게 생각되였다. 자기를 이렇게 만든것은 넌지시 친구를 멀리하는 은해나 경태의 잘못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그러나 전번날 은해를 별도로 만나고나서는 그것이 그들탓이 아니라는것을 비로소 알게 되였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누가 나를 그들 가까이에, 그들의 마음속에 세워줄수 있단 말인가?)

그는 복잡한 생각에 머리가 빠개질것만 같았다.

(내 왜 이럴가? 남들은 눈길조차 안 돌리는 일에 왜 이토록 집착되여 자신을 스스로 괴롭히는것일가?)

오늘은 롱을 모르는 련희까지 《네 눈에 쓸쓸한 웃음이 비끼군 하는걸 보니 혹시 너 실련을 당한게 아니야?》 하며 호호 웃었다. 설향이도 따라서 깔깔 웃으며 그의 부들부들한 옆구리를 꼬집어주었다.

어제 아침 아버지도 등교준비를 하는 딸의 얼굴을 유심히 뜯어보다가 이렇게 물었다.

《너 요새 무슨 고민이 있는게 아니냐?》

신통히 은해와 꼭같은 물음이였다.

《아니요. 아버지, 저한테 무슨 고민이 있겠나요.》

《허허, 네 눈이 다 말해주는데두?…》

《아니예요. 아버지, 그건 오진이예요.》 그는 응석부리듯 말했다.

《허허, 오진이라? 아니면 좋구. 하지만 네 나이땐 처신이랑 주의하는게 좋느니라.》

《알겠어요, 아버지.》

아버지는 그가 다 자라도록 언제한번 싫은 소리나 꾸지람을 하시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아버지는 명의로서 인망이 있을뿐아니라 호인으로서도 소문이 났었다. 어머니는 잔소리가 어지간했으나 아버지는 무엇이든 다 양보하였다. 그래서 집안에서는 마찰이 생기는 일이 별반 없었다. 설향이 학교에 가면 그의 집은 빈집같이 호젓했다. 그러나 환자들이 비지 않는 아버지의 진찰실만은 늘 웅성웅성했다. 어릴적부터 이러한 생활에 습관되여온 설향은 이렇듯 아늑한 생활환경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설향이 이런저런 생각에 골똘해있을 때 뜻밖에도 경태가 불쑥 찾아왔다.

그는 서둘러 경태를 따라나섰다.

설향은 전번처럼 꿰진 소리는 하지 않으려고 애써 명랑한 기분을 가지였다.

《그래도 나를 잊지는 않으셨군요.》

《잊다니? 내 일에 아무리 볶이워두 마음 절반은 설향이에게 맡기구 다녀.》

설향은 웬일인지 그런 능청은 싫었다. 한번만이라도 오손도손 보다 솔직한 심정을 나누고싶었다.

그러나 경태는 늘 그러듯 그의 이러한 마음은 아랑곳않고 자신의 립장이 옹색하거나 멋적을 때면 이런 능청을 잘 떨었다. 어쩐지 진실에 연막을 치는듯 한 싱거운 능청은 도리여 속을 토라지게 했다.

《그럼 마음 절반은 어데다 맡기구 그리 분주히 뛰여다니나요?》

느닷없는 반문에 그는 숨이 꺽 막힌듯 어리뻥하여 설향을 바라보다가 혼자소리로 중얼거리였다.

《허참, 성미두. 콩밭에 서슬치겠군.》

경태와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자던 생각과는 달리 마음은 또 엇나갔다. 너무 외롭던 타성에서일가.

《설향이, 날 너무 타박하지 말라구. 내 오늘 그 문제때문에 일부러 왔어.》

설향은 속으로 와뜰 놀랐다. 그는 얼굴을 반짝 들고 경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너무나도 심각해진 표정을 보고 살며시 눈길을 떨구었다.

마치 구답시험표를 뽑을 때처럼 마음이 조여들었다. 금시 그의 입에서 운명의 선고와도 같은 심각한 말이 불쑥 튀여나올것만 같았다.

《설향이, 내 설향을 자신처럼 믿기때문에 오늘 터놓고 말하겠어. 난 지금 비밀사업을 하고있어.》

설향은 전번에 경태를 만났을 때부터 그가 이러루한 일에 가담했으리라고 충분히 짐작은 해왔으나 확정적인 말을 듣게 되자 가슴이 후두두 떨리였다.

《이건 설향이외는 그 누구도 알아선 안돼.》

《그럼 그일에 은해두 철림씨두 함께?…》

《설향이, 그런건 물어보는게 아니야.》

설향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 자주 만나지 못하는걸 가지구 달리 생각하거나 원망스러워 말라구.》 그는 이렇게 설향을 안심시키고나서 한동안 덤덤히 발걸음을 옮겼다.

《설향이, 조국해방은 먼 장래일이 아니야. 형상적으로 표현하면 지금 미래가 마중오고있어.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서 우리가 떨쳐나선거야.》 순간 자기앞에는 경태가 아니라 다른 세계에서 온 미지세계의 인간이 당면한 큰일에 대하여 미리 일깨워주는것만 같았다. 그리고 경태자신도 보다 진중해지고 말투도 무게있고 침착하게 느껴졌다.

《나두 이런 일에 나선것만큼 한마디의 말, 행동 하나도 그래 매사에 극력 주의해야 돼. …》

설향은 겁이 더럭 났다. 자칫하면 그 어떤 파국적인 사태가 불의에 덮쳐들것만 같았다. 막연하게 느껴지던 불안과 두려움이 현실로 눈앞에 맞다든것이였다.

《오빠! 그렇다면 오빠는 왜 그처럼 위험천만한 일에 뛰여들었나요? 오빠가 자원해나선거예요? 아니면 그 누구의 부추김에 의해선가요?…》

《혁명투쟁에는 기본이 자원해서 참가하는거야.》

《그럼 하나 묻자요. 조국해방은 언제 되나요? 래년, 래후년 아니면 5년, 10년후에?》

경태는 그 물음에 아까 호기있게 말하던 품과는 달리 좀 누긋한 목소리로 아리숭하게 대꾸했다.

《그 광대한 중국대륙두 단숨에 삼키려구 윽윽하구 세계제패를 꿈꾸는 일제놈들을 쉽게 꺼꾸러뜨리겠어? 시일이야 걸리겠지.》

《오빠! 그럼 언제 찾게 될지도 모르는 그 래일을 위해서 사선에 나선단 말이예요?》

《설향이, 사람이 참다운 인생을 살려면 자신보다두 후대들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시키는데서 행복을 느낄줄 알아야 하는거야.》

《남들도 흔히 말은 그렇게 하더군요.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드문것 같더군요. 가령 자기만을 위해서 남의 불행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런 희생을 달가와할가요? 내 이런 말을 한다구 노여워 말아요. 혹시 오빠두 젊은 혈기에 그 어마어마한 사회주의바람을 타구 자기를 돋보이구싶어 그러는게 아닌가요?》

그는 불쑥 속심을 내비치고보니 지내 되바라진 말을 주제넘게 내뱉은것 같아서 경태를 할꿋 쳐다보았다. 그는 어처구니 없다는듯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설향은 판단이 지내 빠른게 탈이야. 그 입에서 어떻게 그런 말이… 그래 내가 설향이더러 나와 같이 그 길에 나서자구 요구하면 어쩔셈이요?》 하고 그는 시들하게 말을 꺼내며 그 대답을 찾으려는듯 설향을 뚫어지게 지켜보았다.

《예?!》

설향은 난데없는 물음에 머리가 뗑해졌다. 언제인가 은해도 이와 비슷한 의향을 물은적이 있었다.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이날껏 이런 문제와 자기자신을 직접 결부시켜 생각해본 일이 전혀 없는 그였던것이다. 또 자신이 이런 일의 울타리밖에 있는 까닭에 그토록 외로웠고 고독했다는것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였다.

그렇다고 하여 그렇듯 엄청난 일에 나설 용단을 한순간에 선뜻 내릴수 있단 말인가!

경태는 동안을 두었다가 마치 자신의 의사가 아닌것처럼 일변하여 내키지 않는 투로 말했다.

《지금 남들도 설향을 이 길에 들어세우고싶어들 하구있어. 그리구 설향을 옳게 이끌지 못하는 책임이 나한테 있다구들 하고있어.》

설향은 남들이란 필경 철림이와 은해일거라고 생각되였다. 그러고보면 일전에 은해가 하던 말도 그의 혼자생각같지 않았다.

《그럼 오빠는 내가 그 길에 나서기를 진심으로 바라나요?》

그는 얼굴에 결연한 빛을 띠우고 경태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는 방금전의 결단적인 의기는 움츠러든듯 설향의 눈길을 피하며 머뭇머뭇 맥빠진 답변을 하는것이였다.

《나로서는 솔직히 설향이까지 이 길에 내세우고싶지는 않아. 물론 설향이가 자원해나선다면야 별문제이지만.》

순간 설향은 자기가 그 길에 나서는것을 그가 그닥 달가와하지 않는 기맥을 느꼈다.

설향은 담담한 어조로 결패있게 말했다.

《오빠! 내가 좀 생각해볼 시간을 주세요!》

그 믿음은 이를데 없이 고마왔다.

그 믿음은 괴롭던 그의 마음에 생기와 희망을 안겨주었다.


그날 밤 야학을 끝낸 철림이와 은해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밤길을 걸었다. 철림은 전에없이 기분이 잔뜩 떠있었다.

《오늘 삼룡사립학교에 들려 오래간만에 풍금을 실컷 타보았구만.》

《그래요! 그 사립에 누가 있게요?》

《우리 상급생이던 현동무가 교편을 잡고있구 교장은 그의 외삼촌이지요. 풍금을 타느라니 〈고향의 봄〉을 타다 오꾸마한테 봉변 당하던 일이 생각나더군요.》

《그때 저의 이모네 집에 들렸댔지요?》

《맞습니다. 잊지 않고있군요.》

《잊을수가 있나요, 초기랑 만나구 지쳐서 겨우 문지방을 넘어서던 일을…》

《하하하, 그땐 나두 철이 없었지요. 고향집이 얼마나 그리웠던지… 지금집에 하숙을 정하기 전까지는 나두 찬숙동무의 처지나 별반 다름없었지요. 한번은 일기장에 쪼각달이 뒤동산 계수나무 우듬지에 걸린 고향의 밤풍경을 그림 그렸댔지요. 그리고 그밑에 〈배고픈 설음! 어머니 아시면 얼마나 가슴아파하시랴! 기다리는 사람, 반기는 사람 하나 없는 차디찬 하숙생활, 아, 나한테 즐거움이란 오직 추억속에 꿈속에…〉 이렇게 써넣었지요. 내 없는 사이에 하숙집에 들리였던 어머니는 그 일기장을 보시고 〈사내란 마음이 얕아서는 안된다. 꿋꿋이 이겨내거라. 어머니.〉 라고 써넣으셨더군요.》

《철림동진 어머니에 대한 정이 참 각별한것 같군요.》

철림은 다감한 표정에 넘쳐 다소 갈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도 다 그러하겠지만 우리 어머닌 아픈 꾸지람은 한번 안하시면서두 온갖 정을 다 기울여 나를 키우셨지요. 지금두 만날적마다 정을 소중히 간직하거라, 정을 잃으면 사람은 속모양도 달라지기 쉽다고 늘 당부하군 하신답니다.》

《어머니는 참으로 속이 깊으신분이구만요!》

《내 이거 제 말만 늘어놓아 안됐군요. 그래 오늘 학예회는 잘됐는가요?》

《녜. 서로 지식경쟁, 노래경쟁에서 지지 않으려고 승벽내기를 하는것이 정말 흥미있었어요. 이런 모임을 자주 가지는게 좋을것 같아요.》 은해는 어린 소녀처럼 명랑해지며 흥분에 겨워 말했다.

《나두 그 생각입니다. 수옥동지가 돌아오면 무슨 계기를 만들어 운동회같은걸 크게 벌릴 계획입니다.》

《수옥언닌 지금 안계시나요?》

《자리를 떴지요. 여기에 본거를 두고 여러곳을 다니며 조국광복회 하부조직들을 꾸리고있습니다. 활동하는걸 보면 장군님을 직접 모시구 투쟁하던분이 과연 다르더군요. 빈틈이 없구 모든 일을 자신만만하게 전개하구…》

《정말 수옥언니가 장군님의 사상을 심어주구 10대강령을 알려준 다음부터 대중속에 정신적변화가 눈에 막 알릴 정도랍니다.》

철림은 수옥을 통하여 장군님의 혁명사상을 수시로 깊이 파악할수있게 되였다. 더우기 혁명이란 인간에 대한 사랑을 떠나서는 못한다는 장군님의 말씀은 매일, 매 시각 현실에서 그 심오한 진리를 더욱 깨달을수 있었다.

이때 은해는 부지중 《앗!》 하고 가느다란 신음소리를 내며 쪼그리고앉아 왼쪽운동화를 벗는것이였다.

《아니, 왜 그럽니까? 》

철림은 깜짝 놀라며 급히 물었다.

《아, 아닙니다. 》

은해는 운동화를 털어 도로 신고 일어나서 조심조심 걸음을 옮기며 《발바닥에 생긴 티눈에 돌쪼각이 올리받치면서…》 하고 혼자소리로 말하였다.

《그런 발로 산길을 다니기가 몹시 불편하겠는데… 자, 내가 부축하지요.》

은해는 황급히 《괜찮습니다. 내 절로…》 하고 사양하면서도 철림이 한테 맡긴 팔을 뽑지 않았다.

철림은 늘 드바삐 지내면서도 어느 하루도 빠짐없이 춘산리야학에 들리여 은해와 함께 밤길을 걷군 했다.

《철림동지, 내가 부담이 되지 않나요?》

《아니요. 마음에서 우러나와 하는 일은 부담으로 느껴지는 법이 없지요.》

《전 막 미안해요. 하루이틀도 아니구 매번…》

사실 은해는 늘 미안한감이 들면서도 마다하지는 않았다. 그와 나란히 걷는것이 자못 즐겁고 가끔 저도 모르게 동심에 빠져들게 되는것이였다.

차츰 함께 걷는 일이 거듭되면서 철림이도 얼굴이 붉어지고 몸둘바를 몰라 거북해하던것이 덜해지였다. 감정변화가 그시그시 얼굴에 그려지고 어린애같은 천진한 인간의 향기가 가슴속에 차분히 스며들게 하는 그였다. 그는 말도 마디마디에 씨가 박히게 하고 남들이 열마디를 번져야 할 말도 단마디로 표현하였다.

오늘 은해의 팔을 덥석 잡아 부축하는것도 그로서는 《대단한》 발전이였다.

은해는 철림의 따뜻한 부축을 받으며 언제까지나 걷고싶었다.

《은해동무, 녀성의 몸으로 이렇게 밤에 나다니는걸 집에서 통제하지 않아요?》

은해는 밝은 달빛아래 알릴듯말듯 상그레 웃음을 짓고 말하였다.

《아버지는 걱정하시면서두 말리지는 않더군요. 〈은해야, 네 나다니는걸 내 모르진 않는다. 네 사촌오빠처럼 그런 일에 나서는게 걱정스럽다만 내친 걸음인데 내가 말린다구 네가 그만두길 하겠느냐. 그러나 온 거리바닥에 밀정들이 씨글씨글하니 매사에 주의하거라. 특히 사람을 정확히 믿어야 한다.〉 라고 하시더군요.》

《아버님은 참으로 훌륭하시군요.》

철림은 은해를 집까지 데려다주고는 일부러 길을 멀리 에둘러 돌아섰다. 그는 밤길에 네댓쯤은 맨손으로도 얼마든지 제껴버릴 자신이 만만했으나 련락장소인 자기의 하숙집으로 드나드는 밤길이 드러나면 재미없을것이여서 매번 방향을 바꾸어 에돌군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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