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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광복회10대강령》에 격동된 청년들은 저마끔 반일투쟁에 나설 열의를 표명하였다. 혜신반일회도 결성당시의 8명으로부터 26명으로 조직성원들이 늘어났다. 초기의 회원들이 우선 담당지구에 나가 핵심청년 3명정도씩 료해선발하여 흡수했던것이다.

그사이 송수옥은 철림으로부터 삼포목재소의 실정을 상세히 파악했었다.

지난 추석에는 최계수 누이동생의 명목으로 목재소에 들어가 산소를 찾은 다음 한 《친목계》성원의 집에 머무르면서 박포덕과의 긴밀한 련계밑에 최계수가 터를 닦은 《친목계》의 외피를 쓰고 반일조직을 결성하였다. 조국광복회 하부조직으로 된 《친목계》의 책임자로는 박포덕을 선출하고 조경룡을 위시한 원래의 《친목계》성원들과 반일감정이 강한 로동자들을 조직에 더 흡수하였다.

수옥은 박포덕에게 앞으로 핵심들을 적극 발동하여 많은 로동자들을 계속 흡수해서 조직을 확대할데 대한 구체적인 과업을 주고 떠났다.

박포덕은 수옥의 편에 불과 몇줄밖에 안되는 쪽지편지를 보내왔었다.

《철림동무! 소식을 알게 되여 정말 기쁘네. 이제는 계수형님의 소원이 풀리게 됐네. 서로가 백리밖에 있어도 한집안에 있으니 마음 든든하네. 건투를 바라며… 박포덕》

철림은 그 쪽지편지를 읽는 순간 포덕의 대틀다운 풍채와 푸근한 성미가 안겨와 가슴이 뭉클했다. 학생이라는 보이지 않는 사슬에 매인 몸이 아니라면 한달음에 달려가 가슴을 열어젖히고싶었다.

철림은 반일회전반사업을 보면서도 담당한 삼룡지구의 군중속에 들어가 반일교양에 힘을 넣음으로써 그들속에서 혁명투쟁열의가 급진적으로 고조되게 하였다.

삼룡리는 본시 면소재지였다. 비교적 평지대여서 태평면으로 불리우다가 리로 바뀌면서 삼룡리로 달리 불리우게 된것이였다. 대천강의 지류인 흐릿한 석계천이 세가닥으로 굼틀굼틀 흐르다가 멀리 아래굽이에서 합수되는 모양이 흡사 세마리의 룡이 엎딘것 같다 해서 삼룡리로 불리웠다고 한다.

철림은 거의 남석면소재지만 한 삼룡리가 지형도 지명도 다 마음에 들었다. 어느모로 보나 대성사립을 방불케 하는 삼룡사립학교도 있었다. 그 학교에서는 몰래 조선력사와 지리, 조선글도 가르치고있었다. 철림은 뜻밖에도 그전해에 혜신고보를 졸업한 상급생 현동무가 바로 삼룡사립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어느날 철림은 학생시절에 무척 가까이 지내던 그와 감격적인 상봉을 했었다. 또한 현선생과 매우 친숙한 고선생도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교원강습소를 거친 무던히 준수해보이는 사람이였다.

철림은 삼룡리야학을 운영한지 얼마 안되여 선생들과 함께 10대강령을 학습하고 당장 항일유격대 입대를 열렬히 탄원해나서는 화전민청년들을 조직에 인입하였다. 벌써 현선생과 고선생은 낮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밤이면 동떨어진 마을의 야학생들을 몰래 가르치고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현선생이 사립학교주변에서 사는 혜신고보 학생의 집에 낯선 학생이 와서 자고가더라는 말을 하는것이였다. 그래서 용모랑 상세히 들어보니 그가 호연이라는것이 대뜸 짐작되였던것이다. 그리하여 철림은 호연에게 선손을 써본것이였다. 본시 그는 무언가 께름직하거나 흐리터분한것과는 즉석에 흑백을 갈라놓고야마는 성미였다.

… 철림은 시간이 흐를수록, 생각을 거듭해볼수록 호연에 대한 의심이 더더욱 커갔다. 며칠전에 억철이한테 알아본데 의하면 그가 호연을 청한적도 없는데 제발로 기신기신 따라갔다는것이였다.

그런데도 초청에 못이겨 간듯이 새빨간 거짓말을 하지 않던가. 그가 경태한테 세림리도 물어보고 우정 삼룡리에 다녀온것도 우리의 뒤를 캐려는게 아닐가? 철림은 날로 수상쩍은 호연의 어스크레한 일거일동에 낱낱이 눈을 밝히고 기어이 그의 본색을 발가놓고야말리라고 단단히 별렀다. 그는 어떤 일에서나 항상 주동에 서고싶지 피동에 빠지고싶지는 않았다.

철림은 지하공작을 하면서도 놈들의 삼엄한 서슬에 위축을 당하거나 뒤를 밟히는것과 같은 수동적인 존재가 될 생각은 꼬물만큼도 없었다.

그는 반일회조직의 책임자로 된 이후부터는 조직의 안전과 회원들의 신변안전에 대하여 항시 마음을 쓰게 되였다.


×


《문형, 오늘은 내가 좀 너무…》

성근은 절반나마 축이 난 되병을 허순사의 잔에 기울이였다.

《내 뭐 허순사 주량을 몰라서?》

《아니, 문형두 좀…》

성근은 술이 절반 남은 자기 잔에 좀 따르는척 했다.

워낙 술고래인 허순사는 술이라면 오금을 못썼다. 그는 위현동에 나올 일이 생기면 의례 성미가 푸수한 성근의 집에 들리였다. 그가 속이 걸걸해서 들리기만 하면 성근은 물도랑에 발을 놓아 잡은 물고기를 안주로 술을 대접했다.

그의 안해는 드문한 술상치닥거리가 귀찮았으나 남편의 의사를 대강 짐작하고 반가운척 곰살갑게 맞이하군 했다.

허순사의 출입이 잦은걸 아는 구장은 성근이한테 거의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이것은 아지트의 그럴듯한 하나의 위장으로도 되였다.

《문형, 내 지내보니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게 사람이야.》 하며 허순사는 거퍼 잔을 비웠다. 그리고는 고추양념을 얼벌벌하게 한 물고기탕을 한술 떠서 입에 넣었다.

《아니,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사람이 무섭다니?》

성근은 그의 속심을 알아내려고 우정 반죽을 쳤다.

《아니야, 무서운게 사람이요. 보산면에서두 보구려. 일본순사가 거리 한복판에서 목이 비틀리워 죽지 않았소. 나는 이젠 밤에 나다니기가 끔찍하다니까. 엥이, 괜히 사람들을 악하게 굴다가는 쥐두새두 모르게 황천객이 될수 있단 말요.》

《아, 허순사야 별루 악한 사람 아닌데 크게 걱정할게 있겠소.》

《모르는 소리, 이 순경제복에 환도를 차고 다니면 다 원쑤로 여기는 판국에 나라구 어찌 무사할수 있겠소. 흥, 서내에서는 왜경들이 숙봐. 아, 그 고등계 사이또같은 헝겊막대두 조선순사들을 개똥만치두 안 여긴다니까. 바깥에서는 모가지를 노려…》 하더니 갑자기 목소리를 죽이며 혀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어디 그뿐이요. 연선엔 공산군이 자주 나타나지… 언제 국경을 넘어설지 모르니까 매일 경무국 보안과에 보고하는 판이요. 문형을 믿구 하는 말인데 연선일대는 주재소두 5리에 하나, 포대두 5리에 하나, 거기에 경찰대만두 3천 8백여명으로 늘였수. 아무리 그런다구 신출귀몰한다는 공산군을 당해? 어림없지. 그래서 얼마전에는 오가와 슈이찌가 우리 경찰서 부서장으로 부임해왔다구.》

《부서장?》

《그야 명색이 부서장이지 기본은 특설경비대 대장이야. 함흥 어느 경찰서 경부보였다는데 오자바람으로 공산군을 단번에 일망타진할것처럼 으시대더군. 문형두 주의하는게 좋아.》

성근은 취기가 올라 아무 말이나 지껄여대는 그의 말을 새겨듣다가 코웃음을 쳤다.

《내같은게 뭐 주의할거나 있소.》

《그런 모를 소리, 요즘엔 죄가 있어 잡혀들 가우? 제 비위에 거슬리면 죄명을 만들어씌우는 판국이라니까.》

원래 성근은 말을 십리에 한마디씩 하는것 같아도 사람을 다루는 솜씨가 여간 아니였다. 이따금 호구조사나 호적계일로 나오는 면소나부랭이들은 그의 주의를 별로 끌지 못했다. 만약경우를 생각해서라도 총칼을 쥔 놈을 업어야 방패막이가 될상싶었다. 그리하여 청결검열을 종종 나오군 하는 허순사를 주목해보았었다. 그는 무턱대고 갈퀴눈을 빨며 무슨 끈터구라도 잡아쥐려고 살기를 풍기는 여느 순사놈들과는 좀 달라보였다. 본래부터 어느 정도 물렁해보이였다.

한번은 물레방아간을 샅샅이 돌아보고 나와서는 성근의 방문을 열고 집안을 기웃이 살피더니 《아하, 좋은 내 풍긴다, 밀주?》 하고 성근을 돌따보았다.

《밀주는 무슨 밀주겠나요. 조카잔치에 쓰려구 좀…》

《당국의 허가없이 밀주를 하면 민법에 걸린다구.》

성근은 허순사가 공연한 엄포를 놓으면서도 구미가 당겨하는 기미를 제꺽 채고 술을 푼푼히 대접한 후부터 단골술친구로 만들어버린것이였다.

그도 술생각이 나서 쩍하면 그저 들리는것이 좀 멋했던지 올적마다 귀가 솔깃해지는 이야기거리를 펴놓았다. 그의 이야기거리란 다분히 경찰서안의 동태였다. 그런 까닭으로 성근은 방아간에 꾹 박혀있으면서도 차츰 얻어듣는 소리가 많아지게 된것이였다. 이것은 송수옥에게도 큰 도움이 되였다. 한번은 돼지바우로 알려진 우직한 미우라경찰서장이 주먹대장으로 소문난 면소사 박히택을 경찰서소사로 받아들여 유력한 형구격으로 부려먹는다는 내막까지 비양조로 말했었다.

허순사의 출입이 잦아지면서 성근은 경찰서놈들의 사소한 움직임까지도 낱낱이 알수 있게 되였다.

성근은 길수가 짬짬이 등사원지와 등사잉크며 강필에 이르기까지 다 구해들인 후에 인츰 등사간을 꾸리기 시작했다. 경험자인 길수의 방조밑에 딴살림을 할수도 있게 꾸렸던 뒤고방을 등사간으로 만들었다. 비워둔지 오랜 방을 말끔히 걷어내고 새 구름노전을 깔고 앉은책상 등을 가져다놓았다. 그리고 부엌바람벽밑을 수평으로 가로뚫어 등사기며 그 등속들을 깊이 감출수 있는 자그마한 굴을 만들어놓았다. 그것도 안심치 않아 농짝이 놓인 구석에 방아굴대에 치는 기계기름통과 석유병도 가져다놓았다.

… 일요일 이른아침 은해는 절지를 가지고 왔다.

수옥은 기뻐 어쩔줄을 몰라하며 절지를 받았다.

《종이를 많이두 구했군요.》

《이건 박영란동무가 매일 밤 규격지로 도전해서 조금씩 날라오기 시작한건데 이렇게 많아졌어요.》

은해는 수옥이 너무도 기뻐하는것을 보고 자랑스럽게 보태 말하였다.

《지금 이런 종이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겠는데 박영란동무랑 은해동무랑 정말 수고가 많았어요.》

《저야 뭐 별로…》

은해는 수옥의 칭찬이 거북한듯 상그레 웃어보였다.

《됐어요! 이제부터는 마음놓고 삐라를 꽝꽝 찍어낼수 있게 됐군요!》

그들은 수옥의 뒤를 따라 등사간에 들어갔다.

철림은 성근이와 길수의 주도세밀한 솜씨에 혀를 내두르며 탄복했다. 빤드름하게 아는 사람도 좀처럼 찾아내기 힘들게 장작까지 가려둔 등사기움이며 등사도중에 수색을 당해도 놈들을 감쪽같이 속여넘길수 있게 석유내, 기계기름내가 저절로 풍기게 한거랑 참으로 착상이 기발했다.

그들은 등사간을 깐깐히 돌아본 후 그 자리에 눌러앉아 변호연의 문제를 심중히 의논했다.

수옥은 즉석에 전학해온지도 오래지 않는 그가 학급생들의 집이나 하숙을 차례로 방문한다는것은 신통히 렴탐군노릇을 방불케 한다고 하였다.

《그 학생의 삼촌은 어떤 사람이예요?》

그 물음에 철림은 입이 굳어지였다. 변영근 하면 단지 혜신읍거리의 오랜 대장간주인으로서 수걱수걱 벼름질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는것 외에 더 아는것이 없었다. 그는 한갖 대장간주인일따름 세상의 눈에 거의 뜨이지 않는 존재였던것이다.

《물론 사람을 함부로 의심해서는 안되지만 일제놈들과의 대결이 치렬한 때 별의별 흉계가 다 있을수 있다는것을 우린 잠시도 잊지 말아야 해요.》

(나는 여직껏 호연을 께름해하면서도 왜 변영근에게는 눈길을 못 돌렸는가?!)

철림은 이런 후회가 머리속에 지꿎게 갈마들었다.

어느날 철림은 삼룡리야학생들의 학예회에 참가하고 오는 길에 성근에게 일부러 들리였다. 마침 방아간에 성근이 혼자 있었다. 수채의 물막이를 해놓고는 방금 물레를 세우고 방아채에 고임목을 받치고있었다.

철림은 그 일을 거들어주었다.

성근은 철림이가 자기를 따로 만나려고 온 눈치를 채고 풍구옆의 긴 나무토막에 나란히 앉았다.

철림이 말꼭지를 떼였다.

《성근동지, 읍에 있는 대장간주인의 래력을 좀 알고싶어 왔습니다.》

《그 뻔대 변영근?》 하고 성근은 쓴웃음을 지으며 시답지 않는 투로 말하였다.

《나두 남들의 래력에는 좀 밝아두 그 구두쇠집안만은 깜깜일세. 본시 술친구 하나 없구 그 누구든 제 집에 청하는 일 전혀 없는 구두쇠라구 하던데. …》

그는 입속말로 《변영근, 변영근이라…》 이렇게 되뇌이며 눈을 쪼프리고 기억을 더듬었다. 한참동안이나 눈을 쪼프린채 기억을 짜내던 성근은 별안간 제 무릎을 탁 치며 환성을 질렀다.

《아, 그렇지. 남석면 린접인 보산면 대전리에서 살던 그 변씨족속… 내 아이적에 들은 말이네만 기억에 생생해. … 그의 애비가 왜놈도적떼들이 고분들을 도굴할 때 길잡이를 한 죄루 어느 애국지사의 단칼에 목이 잘린 후 홀에미의 손에서 자랐다구 했네. 그의 에미는 영근을 공부나 시켜볼가 해서 두부장사, 콩나물장사를 하댔는데 그는 망나니짓만 하구 뚝딱질에만 정신이 팔려있어 종시 공부는 단념했다더군. 허, 이러루한 이야기야 들을 재미있겠나? 허허.》

《아닙니다. 그속에 새겨들을 내용이 있습니다. 어서 들은대루 다 말씀해주십시오. 》

성근은 또 잠시 생각을 더듬다가 말을 계속했다.

《작년이던가. … 한번은 내가 방아촉하구 굴대에 씌울 철띠를 벼름질하러 대장간에 간 일 있었지. 그때 흰수염이 석자나 되는 한 로인이 〈여보게 영근이, 내 가만 눈여겨보면 임자한테는 찾아오는 친척 하나 없어, 또 외인들 출입두 없은즉 외토리루 적적해서 어찌 살아가나?…〉 라고 말하더군. 그러자 영근은 〈할아버지, 난 삼대외독자외다. 그러니 밭은 친척은 없는거구요, 출가한 년들은 죄다 남의 집 사람 된거구요. 그러니 절간주지신세 됐지요.〉 이렇게 푸념하더군. …》

《삼대외독자》라는 말에 철림은 소스라치듯 놀랐다. 변영근이 삼대 외독자라면 마땅히 조카도 없겠는데 호연은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그는 아연해졌다. 그렇다면, 정녕 그렇다면 변영근은 과연 어떤 인물이며 그를 삼촌이라며 얹혀사는 호연은 또 어떤 인물이란 말인가?! 그는 문제의 실마리를 즉석에서 잡은것만 같았다.

《그리구 몇해전까지는 대장간을 달포나마 잠가두는 일이 빈번했다더군. …》

《그래요?!》

철림은 수옥의 귀띔이 아니였다면 낯을 돌릴념도 못했을거라는 생각에 부끄러웠다. 영근의 문제가 이렇듯 심상치 않은 사태를 예감하게 하는 실마리로 돌연 떠오를줄은 몰랐다. 영근이가 사람들과의 접촉을 꺼리며 단절하고있다는것, 조카 아닌 조카를 끼고있다는것, 이전에 대장간을 빈번히 닫아맸다는것 등 이러한 비정상적인 현상들이 스스로 한고리에 이어지는듯싶었다. 철림은 내심으로 무척 탄복하였다. 문성근이야말로 기억력이 이를데 없이 비상한 놀라운 《래력박사》였던것이다. 철림은 구경 변영근은 우리와는 멀고 왜놈들과는 친밀한 위치의 인물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더럭 들었다.


×


한편 너는 누구냐 하는 숨이 꺽 막히는 철림의 질문을 받은 다음부터 호연은 정신을 바짝 차리였다. 마치도 그가 자기의 정체를 낱낱이 내탐하고 낚시를 던져본것만 같이 생각되였다.

호연은 남들한테 본의아닌 무슨 티끌만한 단서라도 잡힐 말과 행동을 한적이 없었던가를 며칠동안 곰곰히 돌이켜보았으나 종시 짚이는데가 없었다. 단지 《공산당선언》소리를 경솔하게 던졌던 그 일이 가슴을 선뜩하게 했다. 하지만 덜퉁한 경태는 싱거운 소리로 넘기지 않았던가. 그래서 호연은 위험천만한 적수인 철림이가 자기의 속뽑이를 해보려고 짐짓 건드려본 얕은 수일거라고 지레 단정해버렸다. 물렁팥죽 같이 여겨지던 경태도 점점 실없는 소리는 두루 지껄여대면서도 씨알진 말은 거의 번지지 않았다.

호연은 자기의 임무를 더이상 늦잡지 않으면서 동아줄을 은근히 조일작정을 했다. 그러자면 히라오까의 방법 더하기 변영근의 방법 즉 대상인물들의 속에 지써 박혀 꼭지가 물러날쯤에 염통을 통채로 들어내는 방법과 미행, 잠복감시를 엎어말이하는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날 저녁 호연은 농군차림을 하고 경태의 뒤를 밟았다. 그는 앞서가는 경태쯤은 속여넘기는것이 식은죽먹기였으나 왕래자들의 눈에 표나지 않게 몸건사를 하기가 어지간히 베찼다.

호연은 경태가 여러명의 청년들이 모여드는 큼직한 방에 들어가는것을 보고서야 길가의 어느 집 나무더미뒤에 몸을 숨겼다. 그는 어슥어슥 땅거미가 깃들자 청년들이 모인 그 큰 집 가까이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그러나 문밖에 한 청년이 망을 보고있어 더 접근할수 없었다. 그 청년의 눈을 피하여 어느 한 농가의 토담모퉁이에 몸을 숨기였다.

먼데서 컹컹 개짖는 소리와 가까이에서 드레박질을 하여 동이에 물을 붓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바로 저것이 반도인들의 야학방이구나!)

야학방에서는 노래소리와 글읽는 소리, 웃음소리가 굴속에서처럼 아늑하게 들려왔다.

한시간쯤 기다리느라니 야학을 마친듯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하는 인사말들과 동시에 야학생들이 우르르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호연은 케를 보다가 일여덟명의 남녀청년들의 뒤에 슬그머니 섞이여 따라 걸었다. 그때 댓발자국앞에서 처녀 서넛이 경태를 두고 찧고 까불었다.

《야, 어쩌면 우리 선생님은 노래를 그리 기막히게 잘 부르니.》

《얘, 그 선생님이 고보생이래두 간단치 않대. 그 선생님의 노래가 축음기에서두 나온대.》

《그래! 참 대단하다 얘. 인물은 또 얼마나 잘났니?》

《요것 봐. 학생이 선생한테 쫄딱 반한게 안야.》

경태의 인물을 칭찬하던 처녀가 주먹을 들고 달려들었다.

누군가가 《애들아, 오늘 배운 〈녀성해방가〉를 다시 불러보자.》하고 말하자 그들은 《응, 그러자마.》 하면서 곧 노래를 불렀다.


권리를 박탈한 자본사회에

청춘의 붉은 꽃 못 피운 원한

아느냐 그대여 녀성동무들

남몰래 조용히 우는 눈물로

청춘의 고운 낯에 주름 생기고

매맞아 얻은 병 살기 싫어요


《정말 이 노래는 우리 맘에 꼭 맞지?》

《응, 그래. 》

그들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각기 자기 집으로 흩어져갔다.

호연은 그들과 점점 뒤떨어져 갈림길쪽으로 슬쩍 가로 빠졌다.

그는 그 노래를 들으며 자연 오금이 오스스 떨리였다.

(아! 야학이란 적색화의 거점이였댔구나!)

아마 순경들이 아무리 갈개며 돌아쳐도 그들의 수에 얼리워 허허 하고 지나쳤을것이다. 그는 어깨바람이 났다. 예상외로 수확이 컸다. 당장 히라오까에게 밀고하고싶었다. 그러나 다음순간 늘 미심스러운 눈찌로 흘겨보는 그를 뒤로 벌렁 나자빠지게 놀래우고싶은 엉뚱한 욕망이 고개를 들었다.

필경 경태처럼 야학을 운영하는 고보생이 한둘만은 아닐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누구의 지휘봉에 움직이는가? 지휘봉을 잡은자는 과연 누구이겠는가? 그 무엇인가 큰 세력이 그들의 뒤에 서있을것 같았다. 경태도 그 지휘를 받는 《인형》에 불과할것이였다.

그러나 그는 홀연 지금 자기의 거동을 낱낱이 지켜보는 눈이 있고 그어떤 무시무시한 손아귀가 자기의 뒤덜미를 노리는것 같은 몸서리치는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문득 일본인순사가 목을 비틀리워 죽고 어느 밀정이 생눈알을 뽑혔다던 말이 상기되여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였다.

그는 허둥거리며 허겁지겁 걸음을 다우쳤다.

(이런 일에 서툴게 끼여들다가는 쥐도새도 모르게 내 목이 날아날수 있다. 자신을 더 깊이 은페시키자. 끝까지 나의 진짜 존재를 그 누구도 몰라야 한다. )

호연은 땀투성이되여 제 방으로 돌아왔으나 뒤숭숭한 생각에서 헤여날수 없었다. 오늘 경태를 미행하고 무사히 돌아온것도 기적으로 생각되였다.

잔뜩 질겁했던탓인지 단도에 자기 목을 내대는 미행노릇은 더는 못할것 같았다. 그러나 경태만은 위불없이 약한 고리이면서도 절대 놓쳐서는 안될 유일한 고리였다.

그런데 요즘 경태가 자기를 시들하게 대하는품이 마음에 걸렸다. 초기에는 함흥쯤에서 왔다는 말에도 부러움을 금치 못했고 서울이야기에는 오금을 못쓰며 꼬치꼬치 캐묻고 황홀한 기분에 잠기군 했었다. 그의 마음을 계속 나꾸는데는 그저 새롭고 희귀한 소식이면 그만이였다. 그래서 호연은 소학교 6학년때 관부련락선을 타고 규수에 가서 4박 5일간의 수학려행을 한 이야기를 꺼냈었다. 당시 이 수학려행은 부산에서 태여난 일본인학생들에게만 한한것이였다. 그러나 본시 귀가 넓고 데면데면한 경태는 그 이야기에 혹했다.

호연이 부산과 시모노세끼사이를 매일 두번씩 왕복하는 이 배에서 창백한 달을 바라보느라니 자연 쓸쓸한 감회에 잠기게 되더라는 말을 하자 경태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며 감개무량해하였다.

《옳아, 바로 그 현해탄에서 유명한 가수 윤심덕이 극작가 김우진과 함께 창파에 몸을 던졌지. …》

《하긴 누군가가 현해탄에 유명한 인물들이 투신자살한 애길 하댔다구.》 호연은 들은 소리에 깃을 달았다.

《호연이, 넌 정말 괜찮아. 세상 안 가본데가 없거던.》

호연은 그가 자기의 꾸며낸 말을 귀가 항아리만 해서 듣는것을 보고서야 마음이 다소 안정되였었다.

수업이 끝난 후 좀 늦게야 교사를 나서던 철림의 눈에 마침 경태가 롱구대옆에 혼자 앉아 땀을 들이고있는 모습이 안겨왔다. 철림은 그에게로 스적스적 다가갔다.

《수고하누만. 》

그 말에 경태는 힐끗 돌따보고 싱긋이 웃으며 엄살을 피웠다.

《수고구 뭐구 요샌 정말 죽을 지경이야.》

《너야 주장이니 별수 없지 않니. 일단 패권을 잡았으면 고수해야지. 》

《그런데 생각 좀 해봐. 낮엔 공부, 밤엔 야학, 게다가 롱구훈련, 도대체 정신을 못 차리겠어.》

《이것두 저것두 다 해내야지. 전에두 경기날자가 박두하면 공부에서 뚝 떼더구나 뭐.》

《나야 래년 봄에 졸업인데 훈련해야 괜힐것 같애.》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별로 내키지 않아했다.

《그거야 학교에서 조절할탓이지. 체육선수면 대학붙기두 식은죽먹기더구나 뭐.》

《하긴 그래. 그런 특전마저 없다면야 누가 쓸개빠졌다구 기름뽑는 이따위 훈련을 하겠니.》

철림은 기분도 가라앉히는겸 실없는 말을 주고받다가 그와 의논하고싶은 문제를 꺼냈다.

《경태, 내 전번에두 말했지만 설향씨문제는 어떻게 할셈이니?》

그는 짐짓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설향의 문제라니?》

철림은 그가 대답이 궁해서 우정 시치미를 떼는게 좀 불쾌했으나 오늘은 그의 진짜속심을 밝혀낼 잡도리를 했다.

《이미 대강 말했지만 너의 립장이 그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봐. 그가 너를 자기 생활의 전부로 삼는 조건에서 네 립장에 그의 앞길이 달려있어.》

하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는 투로 시들히 대꾸했다.

《거 뭐 립장, 립장 하면서 심각히 끌고갈게 있어? 만약 그의 부모들이 반대없다면 졸업후 적당한 때 결혼하구 가정을 이루면 될거 아닌가.》

《그래 넌 그와 결혼을 하면 그의 운명을 책임져줄수 있다구 생각하니?》

《아니, 단란한 가정에서 그를 행복하게 해주면 운명을 책임져주는거지 그 이상 뭐가 있나?》

철림은 눈앞이 아뜩해졌다. 그야말로 단순하고 고루하기 짝이 없는 속물적인 사고방식이였다.

《그렇다면 너한텐 그를 옳바른 길로 이끌어줄 마음은 전혀 없다는거야?》 철림은 좀 격해졌다.

《나두 네 의견을 두고두고 심중히 생각해봤어. 그러나 솔직히 그를 우리 일에 끌어들이고싶잖아.》

《그래 설향씨의 립장을 한번 타진해봤나?》

《타진이나마나 그는 우리 일에 못 나설건 뻔해.》

철림은 그의 속심이 다 드러나자 엄숙한 표정을 짓고 진중하게 말하였다.

《그러니 결국 너는 순 그의 신변만을 념두에 두고있구나.》 그는 잠시 주위를 살피고 말을 이었다.

《그래 왜놈들에게 짓밟혀 숨도 크게 못 쉬며 누리는 생활이 진정 행복할것 같니? 우리가 지금 왜 군중계몽사업을 하니. 적은 힘이나마 조국해방위업에 이바지하려는게 아닌가! 오늘 좀 툭 터놓고 말하자. 우리가 아무런 생활의 목표도 없이 제살궁리에만 눈이 멀어 왜놈들의 노예로 코를 꿰워 맹목적으로 살아간다면 그게 무슨 참다운 삶이겠니.》

경태는 그의 의미심장한 론조에 그만 얼떨떨해진듯 묵묵히 앉아있었다. 그의 론조는 감히 론박할 여지없이 랭철하였다. 경태는 한참후 입을 열었다.

《난 너한테 말로는 못 견뎌. 하지만 설향의 처지는 좀 고려해볼 여지있어. 그는 그 집안의 외동딸이구 유일한 희망이야. 고정한 부모들은 딸을 동자질 한번 안시키면서 곱게만 키웠지. 집에 가보면 딱 절간 같아. 설향이 있어야 집안에 꽃이 피네. 까놓고말해서 혹시 그가 잘못되기나 한다면 그 집안은 망하는거나 같지.》

경태는 자신의 립장이 궁해지자 그의 집안사정에 빗대고 자기를 합리화해보려고 했다.

《나는 너한테 설향씨의 문제를 강요하고픈 생각은 없다. 그러나 너두 이젠 회원인것만큼 혁명적으로 사고하기를 바란다. 어떤 문제든 자기의 필요에만 귀착시키는 너무 리기적이구 타산적인 인간이 되지 말기를 동지로서 당부한다.》

경태는 고개를 수굿하고 잠자코 들었다.

철림이가 흉허물없는 그에게 동지적인 립장에서 이러한 따끔한 충고를 주기는 처음이였다. 그래서인지 둘사이의 공기는 서먹해졌다.

철림은 운동장에서 하급생들이 편을 갈라 축구시합하는것을 한참 구경하고나서 입을 열었다.

《너 요새두 호연이와 자주 만나니?》

《어디 자주 만날 짬이나 있니.》 하고 경태는 퉁명스럽게 대꾸하 였다.

《경태, 내 요즘에야 알게 됐는데 호연의 삼촌이라는 대장간주인이 삼대외독자래.》

경태는 그 말에 화들짝 놀래였다.

《뭐? 그럼 조카가 없다는 소리 아니야?》

《그래서 하는 말이야. 아직은 무슨 감투끈인지 모르겠는데 경각성을 단단히 높여야 할것 같애.》

철림은 철뚝밑굽이길로 혼자 걸으며 마음이 전에없이 뒤숭숭해졌다.

그는 경태를 송아지동무로서 늘 호의적으로만 대하면서 그한테 별다른 일은 없으리라고만 굳게 믿어왔었다. 그의 남다른 허영심도 흔히 누구에게나 있을수 있는 흠으로, 타고난 기질로 여겨왔었다. 그런데 어느덧 졸업림박에 이르면서 그의 거동에서는 전례없는 변화들이 눈에 띄게 나타났다. 설향과의 관계만 보아도 오빠, 동생하며 지내오다가 이제는 드러내놓고 설향의 주인행세를 하려들었다.

또한 학우들과의 관계에서도 절제가 없다보니 딴데서 온 호연도 제일먼저 그에게 눈독을 들였다. 왜 하필 학급생 36명가운데서 그가 유독 경태한테 바싹 들어붙었겠는가? 가령 호연을 연막에 가리운 수상한 인물이라고 가정한다면 그에게서 벌써 많은 사실을 렴탐했으리라고 짐작됐다.

어쨌든 경태를 그중 무른 고리로 여겼기때문에 나한테는 감히 접근을 못하면서도 그의 하숙방은 제 집문턱 드나들듯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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