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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서 누구인가 야학방출입문을 세번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위험신호였다.

그때 출입문이 벌컥 열리며 번대머리구장이 안경알을 번뜩거리며 들어서고 뒤따라 골패짝같은 코수염이 붙은 상판대기가 네모진 일본순사가 환도를 절컥거리며 들어섰다.

카바이드등불이 환하게 비치는 흑판에 써있는 글을 읽어보던 순사는 《아, 〈춘향전〉. 리도령과 춘향이 련애하는거, 존것이 존것이…》

구장이 순사의 턱밑에서 께끼였다.

《여기선 일본어를 배우면서 그저 심심풀이루 이런것도…》

순사는 《좋아! 하지만 공산선전을 하면 당장 이거야.》 하고 자기 손칼로 제 목을 베여버리는 시늉을 해보였다.

《이런것 일없어. 음, 존것이, 존것이…》

구장과 순사가 문밖에 나서기 바쁘게 웃음보를 터치려는 야학생들에게 경태가 《쉿!》 하고 입에 손가락빗장을 질러보였다.

경태는 대체로 남녀청년들이 과반수를 이룬 야학생들속에서 인기가 대단했다. 워낙 생김새부터 미끈한데다 언변이 좋아서 여기 세림리 버드내마을 야학생들의 마음을 대번에 사로잡고말았다. 어떤 날은 경태가 어지간히 늦어져도 야학생들은 이전날의 서당으로 쓰던 이 야학방에 빼곡이 모여 지그시 기다리군 했었다. 이번 야학선생은 류행가도 명창이고 력사와 전설이야기도 아주 구수하게 잘한다는 소문이 삽시에 퍼져 이제는 로인들까지도 곁따라 나왔다. 그가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해설할 때에는 마치도 말로 그림을 그리듯 실감있게 하여 야학생들은 감동깊게 들었다. 그리하여 야학생들과 마을사람들속에서 경태의 인기가 날로 더 오르게 되였다. …

송수옥이 안고온 혁명열풍에 너무도 격동되였던 경태는 높뛰는 흥분과 열정을 안고 이 사업에 맹렬히 뛰여들었던것이다.

야학을 끝내고 밤이 이슥해서야 돌아오는 경태의 생각은 오늘따라 별로 번거로왔다. 아까 흑판의 글을 미처 지우지 못했더라면 즉각에 발각되였을것이다. 왜경이 공산선전을 하면 당장 이거야 하며 목자르는 시늉을 하던 몰골이 다시금 상기되였다.

철림은 10대강령을 주면서 절대로 놈들이 겨냥하는 묘준점이 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야학선생이야말로 첫 묘준점이 될수 있었다. 가령 밀정 한놈이라도 턱밑에 있으면 즉석에 죄다 드러날판이였다.

경태는 이와 같이 아슬아슬한 일에 설향이까지 끌어들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의술로 인망이 있는 집안의 하나밖에 없는 귀동딸로 고이 자란 그를 이렇듯 위험천만한 일에 내세울수 없었다.

설향이만은 언제나 자기의 가슴을 끓게 하는 순수한 아름다운 모습그대로 고스란히 남아있게 하고싶었다. 그러한 설향을 은해처럼 걸음마다 위험이 따르며 어느 경로로 탄로날지 모르는 비밀사업에 끌어들일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설향을 적극 이끌어 혁명투쟁의 길에 내세우라는 철림의 간곡한 요구는 어떻게 감히 외면할수 있겠는가? 그로 말하면 모든데서 자신의 표본으로 삼고있을뿐아니라 자기에게 그지없이 진실하고 다정다감한 귀중한 벗이였다. 정직하기 이를데 없고 에누리없는 그앞에서는 자신도 스스로 솔직해지고 아무 생각이나 기탄없이 터놓게 되였다. 동요시절부터 너무나도 많은 애틋한 추억을 간직하고있는 철림이와 함께라면 세월끝까지도 가고싶었다.

그는 이러한 갈피없는 상념에서 헤여날수가 없었다.


이튿날 오후 호연은 그새 너나들이친구로 무척 각별해진 경태의 뒤를 따라 스적스적 걸었다.

그는 별스레 능글능글 웃으며 말을 건네였다.

《요새 경태한테 노상 바쁜 일들이 있는게지? 하숙방이 자주 비더군. 》

《바쁜 일이야 뭐. 내 노상 훈련이요, 뭐요 하며 들볶이는걸 몰라서 그래?》

그는 이렇게 둘러대면서도 호연이 무슨 낌새를 채고 말하는것 같아 속이 띠끔했다.

《체육선생이 한번 찾지 않더나?》

《아니, 왜?》

경태는 처음 듣는 소리였다.

《전주후던가 내 딴일때문에 학교에 나갔댔는데 체육선생이 노발대발하며 경태를 당장 데려오라는거야. 지구별롱구예선이 코앞에 닥쳤는데 훈련열의가 점점 식어간다는거야. …》

《그래서?》

《바삐 하숙집에 뛰여갔더니 비였더군. …》

경태는 그 말이 미심쩍게 들렸다. 오늘 운동장에서 체육선생을 만났댔으나 아무 말도 없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워낙 호통을 잘 치는 체육선생이 가만있을리 만무했다. 혹시 호연이가 나의 행처를 짐작해내려고 어림 떠보는 수 아닐가?

《경태, 여기서 세림리는 얼마나 뭐나?》

《멀기야 뭐. 한 십리쯤 될가…》

《십리면 일본의 1리나 같군그래.》

《너 일본리수는 어떻게 그리 잘 알아?》

엉겁결에 이 말을 꺼냈다가 역습을 당한 호연은 그만 아차실수를 피뜩 깨닫고 가슴이 철렁했다.

《남들이 하는 말 들었지. …》

(야가 왜 하필 내가 담당한 리를 짚어 물어보는것일가?)

《그건 왜 갑자기 묻나?》

《우리 삼촌의 5촌조카가 거기서 산다길래…》

호연은 지나가는 말처럼 적당히 둘러댔다. 사실 그는 요즘 경태가 계속 없어지는게 사뭇 수상쩍게 생각되였다. 그리하여 그는 어느날 저녁 경태의 하숙집이 빤히 바라보이는 골목에 숨어있다가 수수한 농군차림으로 나오는 경태의 뒤를 밟은것이였다. 그는 세림리어구까지 은밀히 갔댔으나 히라오까의 오금을 박던 말이 피끗 떠올라 위치와 지명만 알고 곧 되돌아섰었다. 노상 철학자연하는 히라오까는 서푼짜리 명구같은 두가지의 말을 모를 박아 신칙하군 하였다. 그 하나는 잔고기 성하는 곳에 큰 고기가 있기마련이라는것, 다른 하나는 잔가지를 성급히 꺾지 말라, 그 잔가지를 잡고 줄기를 따라 뿌리를 캐야 한다는것이였다.

바로 경태는 그 잔가지에 불과한것이였다. 그래서 아직은 그 정도에서 머문것이였다.

오늘 호연은 요즘에 만날 기회를 좀처럼 주지 않는 경태를 헛수삼아 슬쩍 놀래워보려는것이였다.

그가 탐내는것은 경태가 세림리에는 왜 가며 가서는 어떤 사람들과 만나 무엇을 하는가였다. 더구나 그는 오늘 철림으로부터 상당히 기분잡치는 일을 당한것을 핑게로 경태를 만나려는것이였다.

그는 오가는 사람들을 흘금흘금 살피며 철림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였다.

《경태, 학급장이 어때?》

경태는 힐끗 그의 얼굴을 살피며 뜨아하게 대꾸했다.

《왜, 몰라서 묻니?》

《나두 원래 그치가 꼬장꼬장하다는건 알구있는데 오늘 보니 형편없는 직팡내기야.》

경태는 그가 철림을 《그치》라고 얕잡아 말하는게 몹시 비위에 거슬리였으나 그 까닭을 알아내려고 꾹 참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오늘 두번째 휴식시간에 철림이가 호연이 앉은 계단옆에 와앉으며 이렇게 물었다는것이였다.

《너 요새 신선놀음을 한다면서?》

《뭐, 신선놀음?》

《바깥출입이 뻔질나구 외박두 잦다면서? 그래 좀 출출한김에 하는 집돌이야?》

《학급장 생각엔 내가 출출하게 지낼 처지같아?》

《그야 그렇겠지. 삼촌이 대장간주인이니 궁하지야 않겠지. 그렇다면 학급생들과 하루속히 친해지려구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 되지 뭘… 이것두 생활 아닌가. …》

《하긴 그것두 생활이지. 그러나 자고 다닐 생각까지 할 때에야 무슨 방문목적이 있을게 안야?》

《목적은 무슨 목적… 그런데 학급장은 내 일에 관심이 꽤나 큰데?》

《학급장이니까 그렇지. 호연이, 3일전에는 삼룡리에 가서두 하루밤 자구왔다면서? 그래 여 호연이, 너는 도대체 누구야?》

《아니, 누구라니? 나야 변호연이지 누구란 말이야, 몰라서 묻나?》 하고 호연은 발끈했다.

철림은 그가 그러거나말거나 히죽거리며 반죽좋게 응수했다.

《거야 너의 부모가 달아준 이름-이를테면 겉표지에 불과한거구 너 진짜 알속은 누구지?》

이때 상학종이 요란히 울리여 이야기를 더 끌수 없었던것이다.

호연은 그것이 속에 맺힌듯 불만을 토했다.

《지금껏 같이 공부해오면서 생뚱같이 너 누구냐, 알속은 누구냐가 뭐야? 참, 내 턱자없어서…》

경태도 그런 질문 들이대는 철림의 능청스러운 표정이 눈앞에 떠올라 큰소리로 웃어댔다.

《남은 후끈 달아 그러는데 웃음이 나와?》

《호연이, 그만 노여워하라구. 철림은 바늘틈두 없는 친구야. 너한테 좀 미심쩍은데가 있어보여 롱삼아 그래보았겠지.》

경태의 생각에는 그가 이런 불만을 터칠데가 없어 자기를 따라온것같기도 했다. 그리고 자기의 말이 철림의 귀에 들어가게 하려고 우정 도수를 높여 하는 말 같기도 하였다.

그는 그 말을 또 곱씹으며 듣기 역하게 투덜거렸다.

《허참, 이마를 맞대구 공부하면서두 너는 도대체 누구냐? 이게 얼마나 상대방을 모욕하는 망발이야. 그치는 확실히 별난치야.》

《여, 아무 말이나 망탕 말라구. 철림을 보구 그치가 뭐야. 터놓고 말해서 철림은 너를 열주구도 바꾸지 못할 재목이야. 나는 그와 동년배이지만 그를 존경해.》

경태는 기분에 거슬리여 엄한 투로 말했다.

호연은 그만 혀가 얼어든듯 멍해서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경태를 놀랍게 치떠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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