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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향아, 우리 오늘 또 대천강에 나가지 않으련?》

은해는 어딘가 모르게 서글픔이 어린 설향의 얼굴을 살피며 이렇게 물었다.

《응, 나가자. 마침 나도 거기에 나가고싶었더랬어.》

오늘은 오전에 두 수업만 했기때문에 한낮이 썩 되기 전에 교문을 나선것이였다.

은해는 요즘 웬일인지 전과 달리 사뭇 침울해보이는 설향의 속내를 타진하고싶은 생각이 들어 오늘 그를 강가로 이끈것이였다. 설향의 집안에 무슨 걱정거리가 생겨서일가, 아니면 경태와의 사이에 어떤 언짢은 일이라도 있었을가?…

그들은 대천강뚝을 등지고 펀펀한 자리를 골라 강을 면하고 나란히 앉았다.

은해는 입가에 방그레 웃음을 그리며 설향의 옆얼굴을 찬찬히 곁눈질해보았다. 그 눈길을 감촉한 설향은 본래의 성미대로 너스레를 떨었다.

《얘, 넌 왜 요새 내 얼굴만 자꾸 세세히 살펴보니? 내 뭐 총각인가 하니?》

《호호호. 》

그들은 한참동안 깔깔 웃어댔다.

《아니, 처녀끼리는 반하면 안된다던?》

말을 꺼낼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지자 은해가 먼저 말꼭지를 뗐다.

《설향이, 너 요새 무슨 고민이 있니?》

《고민은 무슨 고민, 내가 고민할 좀팽이같아보이니?》

불쑥 내뱉는 그의 토라진 투의 말에서 은해는 그 어떤 불만을 감촉하였다.

《아니야, 내 눈은 속이지 못해. 너 요새 무슨 속편찮은 일 있지?》

설향은 그 말에 대답을 피하고 먼산만 바라보았다.

《…》

《이젠 나한테까지두 담을 쌓을래?》

《담?》

설향은 피뜩 은해를 쳐다보고 다시 강물에 눈길을 던지며 불만을 토했다. 《말은 바른대루 마음의 담이야 네가 쌓지 내가 쌓니?》

《넌 못하는 소리 없구나. 근데 넌 오늘 무엇이 마뜩지 않아 잔뜩 찌뿌둥해서 그러니?》 은해는 웃음어린 표정을 바꾸지 않고 골리는 투로 물었다.

《그게 다 너때문이야.》

《뭐, 나때문이라구?》

《응, 그래 네가 요즘 나한테 속을 주는게 있니? 이전날의 은해는 내마음에서 달아난지가 오래.》

허투루 뱉는 말같으면서도 속뜻이 박힌 그의 말마디는 은해의 마음을 예리하게 찔렀다.

한편 설향은 자기를 따돌리고 하는 일의 내막을 은해에게 타진하고싶었다. 경태는 그럴듯한 구변으로 귀맛좋은 말은 하면서도 자신이 몰래 하는 일에 대해서는 말이 샐가봐 무척 두려워하며 은근히 계선을 긋고있었다. 그러나 그중 미더우면서도 그중 약한 고리가 은해로 생각되였다.

《호호, 너 표현이 정말 형상적이구나. 네 마음에서 달아났어두 지금 네곁에 앉아있지 않니. 설향아, 너무 곡해하지 말어. 아무리 친해두 툭 터놓지 못하는 일도 있는거란다.》

《그러니 결국 내가 못미더워서 그러지. 나두 너랑 내 알아서는 안될 일을 한다는것쯤은 알아. 그렇다구 너무 시틋해서 그러지 말아. 은해, 네 언제 한번이라두 내 마음이 되여본적 있니? 사람이 벗들의 외면을 당하구 믿음을 못 받고 살 때의 눈물겨운 고독과 쓰라림을 네 알기나 해? 그것두 모르는게 무슨 우정이야?!》

설향은 가슴속에 옹치였던 설분을 거침없이 토했다. 은해는 가슴이 뻐근해졌다. 그가 이 문제를 그처럼 심각하게 곡해하고있을줄은 몰랐다.

그의 고민을 알려다가 도리여 면박을 당하자 은해는 여직껏 그를 진정으로 돕지 못한 자신을 뼈아프게 자책하였다.

《설향아, 내 잘못했어. 너를 진짜로 돕지 못했어. 그러나 우리 하는일은 너두 차차 알게 돼. 나는 네가 변함없는 내 동무로서 우리가 하는 사업을 툭 터놓고 의논할 때가 꼭 있게 되리라구 믿는다.》

설향은 시원시원한 그 성미대로 곧 기분을 바꾸며 자기 생각을 터놓았다.

《솔직히 너와 내가 다른게 뭐니, 내가 너보다 못한게 뭐구? 호호호, 그래 내가 너같이 되려면 어떤 자격을 갖춰야 하니. 또 무슨 조건이 필요하니?》

은해는 그의 숨가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불현듯 설향을 앞으로 동지로 만들어야 한다던 수옥의 말이 떠올랐다.

《설향아, 네가 다 짐작하는 일을 굳이 숨기지는 않겠다. 이 일에는 무슨 자격이나 조건이 근본문제가 아니야. 기본은 너자신이야.》

《뭐, 나자신?》

《혁명투쟁은 누가 시키거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누구나 자원해서 참가하는거야. 네가 바라구 너의 각오정도만 훌륭하다면 네 소원이 아무때나 성취될수 있어. 그런데 경태씨의 생각은 어떻던?》

《그 오빤 그저 그런 말이 입밖에 나올가봐 쉬쉬할뿐이야. 그 일의 내막을 한번두 귀띔해준적도 없구. …》

은해는 그의 보호자연하는 경태가 설향을 이 일에 내세우기를 무척 꺼린다는것을 직감했다.

《내 오늘 너를 만난게 참 다행이였어. 너의 그러한 심정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내 잘못이 정말 커.》

《아니야. 내 생각이 너무 옹졸했지 뭐.》

은해는 설향의 기분도 돌려세울겸해서 화제를 돌리였다.

《넌 이제 학교를 졸업하면 어떻게 하려니?》

《아버지는 평양의전에 진학하라시는데 어쩌면 좋을지…》

《아버진 무남독녀인 너한테 집안의 대를 잇게 하시려는구나. 너 솔직히 말해봐. 경태씨는 네가 녀고를 당장 나오면 빨리 결혼할 생각부터 하지 않니?》

《내 그걸 알게 뭐야.》

은해는 문득 경태가 설향은 앞날의 귀부인으로밖에 생각지 않을것 같다던 철림의 말이 상기되였다.

《설향이, 장차 경태씨가 진짜 너의 일생을 끝까지 책임져주리라고 믿겠지?》

《그야 두말하면 잔소리지.》

그러나 은해의 생각은 달랐다. 설향에 대한 경태의 진심은 가늠할수 없으나 실지로 자기의 비밀사업에는 그를 접근시키지 않고있지 않는가. 순 오누이정으로만 대상하지 동지로는 념두에 두는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설향은 분별없이 맹목적으로 따르고있지 않는가?

《설향이, 이담에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면 그것이 행복의 전부일가?》

《그럼, 그 이상 더 무엇을 바라겠니?》

《하지만 사람이 세상에 태여나 그 어떤 의로운 일에 자기를 바치는 삶이 보람있는게 아닐가?》

《넌 그럼 무엇을 할려니?》

《나는 오빠처럼 교단에 설가 해.》

《그 일두 쉬울것 같니? 밤낮 당국의 강압을 받으며 쩍하면 쫓겨나구. …》

《그까짓 왜놈들 무서워 제 할일도 못하구 살가.》

《넌 그새 담이 꽤 커졌구나.》

은해는 그 말에 개의치 않고 담담한 어조로 말하였다.

《설향아, 왜놈들 폭압에 잔뜩 겁을 먹구 놈들이 하는대로 자기를 내맡기구 되는대로 살아가는것이 바로 그놈들이 바라는거야.》


은해로부터 오늘 밤 춘산리 야학생들의 이번 학예회에는 꼭 참가해달라는 청탁을 받은 철림은 아지트에서 곧바로 야학에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바로 그때 송수옥이 돌아왔다.

그는 사뭇 흥분된 기색으로 들어서자바람 철림에게 일장기말소사건에 대하여 들려주었다.

《동아일보》가 1936년 8월 베를린에서 있은 올림픽경기대회 마라손종목에서 1등수상자인 손기정을 사진과 함께 소개하면서 그의 앞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렸다. 독이 오른 일제는 《동아일보》에 당장 정간처분을 내리고 관계자들을 모조리 구금하였다는것이다.

얼마나 자랑스럽고 통쾌한 일인가! 철림은 온몸에 힘이 부쩍부쩍 솟구치였다. 이 희한한 소식을 삼룡리 야학생들과 춘산리 학예회참가자들에게 속히 알려주고싶었다. 그래서 발걸음을 다우치는데 뜻밖에 석계천다리목에서 우악스러운 한 경관이 행인들을 검속하고있었다. 전에 없는 일이였다. 한 녀인의 보짐을 샅샅이 뒤지던 왜놈순사가 저만치 질버치를 이고 타박타박 걸어가는 토스레옷차림을 한 소녀를 앙칼지게 불러세웠다. 그 틈에 녀인은 보짐을 급급히 싸가지고 사라졌다.

《야, 이 조꼬만 계집애, 거기 서라! 쌍 계집아이 제멋대루 어디루 막 가는거야?》

미옥이또래의 새들새들한 소녀는 손으로 질버치밑굽을 잡고 몸을 돌렸다.

왜경은 《요 계집애, 새끼공산군스파이 아니야?》 하며 와락 달려들어 다짜고짜로 머리에 인 질버치를 왁살스럽게 나꾸챘다. 그 서슬에 질버치는 허양 길바닥에 떨어져 와지끈 박산이 났다.

순간 소녀는 얼을 먹고 후들후들 떨며 어쩔줄을 몰라했다.

왜경은 버치가 부서지며 나떨어진 쌀주머니같은것을 제꺽 움켜쥐였다.

그제야 눈물이 그렁해있던 소녀는 왜경의 손에서 쌀주머니를 도로 찾으려고 엉엉 울며 왜경에게 왁 매달려 눈물겹게 사정을 했다.

《그 쌀주머닌 안돼요. 도로 달라요! 내 다래랑 머루랑 팔아서 겨우 산 귀밀쌀이예요. 앓는 우리 엄만 이틀째나 낟알구경도 못했어요. 빨리 달라요, 엉엉…》

왜경은 시끄럽다는듯 발길로 소녀의 배허벅을 걷어찼다. 소녀는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가 기를 쓰고 다시 일어났다. 놈은 베주머니속의 쌀을 손으로 모조리 뒤져보고는 길바닥에 신경질적으로 홱 내던지였다. 소녀는 급히 달려가 길바닥에 널린 귀밀쌀을 손으로 그러모으기 시작했다. 순간 왜경은 씽 다가가더니 벨풀이를 하듯 고사리같은 소녀의 손을 구두발로 마구 짓밟아댔다. 소녀는 《아-악.》 하고 숨넘어가는 비명을 지르며 태질을 하였다.

이 광경을 눈에 불이 일도록 지켜보던 철림은 그만 더는 참지 못하고 씽 달려나가 왜경을 제잡담 허궁 들어 다리밑으로 내리곤두박았다. 그는 곧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길바닥의 귀밀쌀을 말끔히 그러모아 베주머니에 담아주었다. 철림은 둬되박 되나마나한 쌀주머니를 소녀에게 안겨준 다음 그를 냉큼 업고 신속히 다리목을 떠났다. …

철림은 삼룡리 야학을 필하고 이어 춘산리의 학예회에까지 참가하고 오면서도 마음이 이를데 없이 번거로왔다.

(내 오늘 또 무슨 본의아닌 일을 저질렀는가! 아니, 그런 참혹한 광경을 직접 보고서야 심장이 막돌이 아닌 이상 어떻게 감히 참아낼수 있겠는가. …)

이렇게 위안도 해보았다. 그는 그날 그 황급한 경황에도 주변에 사람그림자 하나 얼씬하지 않는것을 피뜩 확인했었다. 그래도 어쩐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아닌게아니라 놈들은 다음날부터 삼룡리소재지에서 얼마간 떨어진 석계천다리목을 삼엄하게 봉쇄하였다.

그리하여 철림은 부득불 춘산리를 거쳐 삼룡리로 다니지 않으면 안되였다.

토요일 오후 철림은 그 사실을 송수옥에게 보고하러 갔다. 그런데 송수옥은 문성근을 통하여 벌써 그것이 누구의 소행인지는 몰라도 이 사실과 관련한 놈들의 동향을 어느 정도 알고있었다.

그날 왜경의 대갈통이 깨여지고 목뼈가 부러져 목숨이 간들간들하는걸 병원에 실어갔다고 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행인들에 대한 놈들의 검색이 더욱 극심해지고 눈에 쌍심지를 켜고 련일 삼룡리일대에 대한 수색소동을 일으켰다.

철림은 송수옥이앞에 그날일을 솔직히 죄다 보고하였다. 송수옥은 천만뜻밖의 사실에 깜짝 놀라며 눈이 휘둥그래지였다. 그는 한참동안 말없이 있다가 한숨을 지으며 엄정하게 말하였다.

《나는 철림동무가 아직도 자제력을 잃고 감히 그렇게 위험한 행동을 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어요. 혜신반일회가 금방 조직되여 한창 움직이고있을 때 놈들을 그렇게 서뿔리 건드렸다가 무슨 엄청난 봉변을 당할려고 그래요. 정의감에 못이겨 그렇게 엄청난 일을 불쑥 저지르기는 쉬워도 그를 수습하기는 몇갑절 힘겨운거예요. 우리 유격대원들은 적구공작에 나가서 자기의 부모와 어린 자식들이 놈들에게 치떨리는 악행을 당하는것을 눈앞에 빤히 보면서도 입술을 피터지게 깨물고 피눈물 뿌리면서도 참아내고 이겨낸답니다. 무기를 휴대하고도 자신의 뼈아픈 고통보다도 혁명의 리익을 먼저 생각하기때문에 총 한방 쏘지 못하고 돌아서는거예요. …》

철림은 그후 며칠동안 심각한 회오의 소용돌이속에서 헤여날수가 없었다.

은해도 그날일을 위험천만한 경거망동이라고 허물없이 충고했고 문성근도 사람의 담력이란 큰일을 위해서 순간적인 감정을 듬직하게 누르는데서 표현되는게 아니겠는가고 점잖게 귀띔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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