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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두고 궁리를 짜고있던 철림은 누군가가 출입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는 손기척소리를 들었다.

《예.》

문이 조금 열리더니 향숙이가 문짬으로 얼굴만 들이밀고 해쭉 웃으며 《오빠, 아버지가 좀 오시래요.》 하고 말했다.

가뜩이나 마음이 뒤숭숭하던차에 무슨 수라도 생길듯싶어 선뜻 일어나 향숙의 뒤를 따라갔다.

방에 들어서니 길수는 밥상앞에 앉아 기다리고있었다.

《어서 오게.》

길수는 그에게 반갑게 자리를 권했다.

《아니, 난 저녁을 벌써 먹었습니다.》

《빨리 와앉게. 하숙집밥이라는게 그저 그렇지 뭘.》

그가 마지못해 길수와 마주앉는데 향숙의 어머니가 쟁반에 구수한 토장국 두사발을 담아들고 들어왔다.

《미옥이 오빠, 찬이 변변치 못해두 많이 드세요.》

성미 삽삽한 안주인은 수저통에서 수저를 뽑아 철림의 앞에 놓아주었다.

《앞으로는 제 집처럼 생각하구 아무때나 들리라구. 저 사람두 내 농업학교에 다닐 때 읍려인숙집 딸이였다네. 그만한 눈치는 다 있으니 아무 걱정일랑 말게.》

《당신은 별난 소리를 다…》

《별난 소리라니? 이 철림군은 우리 집안의 귀인이나 다름없는데. …》

《향숙이 아버지, 말씀을 낮추십시오. 저같은게 무슨 귀인이 되겠습니까.》

길수는 밥술을 크게 떠서 입에 넣었다. 그는 정색을 하며 철림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 이건 내 진정이네. 이 험악한 세상에서 갈길을 가르치는 사람이 귀인이 아니문 누구겠나. 난 요즘 눈앞이 탁 트이니 세상만물이 다 달라져보이네.》

아래방에서 향숙이가 어머니와 재잘거리는 소리가 아늑히 들려왔다.

저녁상을 물린 후 길수는 흥분된 심정을 걷잡지 못해하며 뭔가 계속 말하고싶어했다.

《나두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벌써 몽땅 외웠네. 행운이 이렇게 눈섭밑에 뚝 떨어질줄은 정말 몰랐네. 그때 우리 독서회성원들두 항일유격대선을 잡아보려구 여러번 간도에 들어가 헤매다가 종시 헛물만 켜구 락심천만해서 되돌아서군 했었네. 그러나 이젠 됐네. 가야 할 목표두 확정되구 갈길두 명백해졌으니… 고맙네. 자네의 믿음이 없었다면야 서무과일에 밥줄을 달고있는 외토리된 나같은게 감히 이 길에 나설 엄두나 내였겠나.》

《형님!》

철림은 저도 모르게 이렇게 불렀다.

《그렇게 믿어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러나 조선민족의 넋을 잃지 않고 조국광복을 지향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든지 의로운 손길이 와닿게 되는가봅니다. 뜻밖의 행운을 받아안게 된 제 마음두 형님의 마음과 꼭 같습니다.》

길수는 별안간 철림의 손을 굳게 잡으며 낮으나 웅근 목소리로 말하였다.

《철림군, 그저 감격해하고 흥분해있기만 해서야 그게 무슨 도리겠나. 10대강령을 선전하자면 그 몇부밖에 안되는 강령을 다 돌려가며 볼수는 없는 일이구… 그런 선전물을 찍으려면 등사기가 필요하겠지?》

철림은 귀가 번쩍 뜨이여 기대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필요하구말구요! 어디 구멍수라두 생겼습니까?》

《못쓰게 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네만 나한테 있네.》

《녜? 그게 정말입니까?!》

길수는 대답대신 웃으며 있다는 표시로 눈을 끔쩍해보였다.

《형님, 됐습니다! 그런데 가택수색에 걸리면 어쩔려구 지금껏 보관해두었습니까?》

《그 등사기는 우리 독서회영향하에 있던 시흥금융조합 소사를 통해서 목숨걸구 뽑아낸건데 어찌 소홀히 할수 있겠나. 아무때든 꼭 요긴하게 쓰일데가 있을것 같더군. 그래서 김치움속에 깊이 감췄댔네.》

철림은 당장 이밤으로 달려가 수옥에게 알리고싶었다. 가슴은 금시 숨막힐 정도로 화들거렸다.

다음날은 마침 일요일이였다.

김치움벽을 움푹이 파고들어가 방수지에 겹겹이 싸서 보관한 자그마한 고리짝도 성성하고 그속에 유지로 꼼꼼히 감싼 등사기는 기계기름이 즐펀한채로 있었다.

길수는 철림의 도움을 받으며 등사기가 든 고리짝을 삼마대에 넣은 다음 보통짐짝처럼 두리뭉실하게 꾸리여 자전거에 실었다.

철림은 하숙집에 들려 옷을 갈아입었다.

그들은 5일장이 서는 날이여서 이른아침부터 시골에서 흘러드는 장군들의 번잡한 틈에 어울려 스적스적 발걸음을 옮겼다.

길수는 번잡한 거리를 벗어나자 속말을 꺼내였다.

《요사이 내 마음은 태동치고있다구 할가? 전번에 군으로부터 장군님께서 혁명이란 인간애로부터 시작된다고 하신 말씀을 전해듣구 내내 가슴이 울렁거려 도무지 자제할수가 없었네. 그런데 그 고귀한 진리를 10대, 20대에 벌써 알구 혁명의 길에 나선 수다한 혁명가들이 있는 반면에 나와 같은 인간은 30대에야 비로소 알게 됐으니 어언간 반생을 헛살아온셈 아닌가. 난 속으로 결단을 내렸네. 이제라두 혁명에 적극 이바지하자. 생존을 위한 무의미한 삶이 아니라 혁명에 바치는 값있는 인생을 살자! 그렇게 생각을 굴리는 과정에 피뜩 짚인것이 이 등사기였네. 대업에 비하면 모래알같은것이지마는…》

《형님, 자신을 지내 낮추지 마십시오. 이 등사기로 찍혀나오는 수백수천의 선전물이 수천수백만 사람들의 심장에 불을 달아주는게 바로 그 큰일에 이바지하는것이 아니겠습니까!》

길수는 경탄의 눈빛으로 철림을 바라보았다.

《철림군은 확실히 모든 면에 명백하구 전개하는 안목이 비상하거던. 그렇게 튕겨주니 어깨가 으쓱해지는걸, 허허.》

철림은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통하여 단시일안에 김길수와 같은 귀중한 동지를 얻게 된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이때 난데없이 《야! 거기 서라! 자전거!》하고 꽥 지르는 소리가 귀따갑게 들렸다. 철림이 넌지시 돌따보니 장군들속에 있는 시커먼 제복의 순경이였다. 철림은 김길수와의 이야기에 도취되여 마음을 푹 놓고 걷다가 불의에 단속에 걸리자 가슴이 덜컥하였다. 그는 자기 한몸이라면 꿈만했으나 등사기때문에 마음이 마구 허둥거리였다.

배불뚝이털보 왜경은 곤봉을 휘두르며 느릿느릿 다가왔다.

왜경은 길가는 장군들에게 비켜서라고 떡떡거리며 서슬스럽게 거드름을 부렸다. 왜경은 곰눈으로 길수와 철림의 아래우를 한번 쭉 훑어보고는 《자전거에 실은 짐짝은 무언가?》하고 을렀다.

그러나 김길수는 자못 천연스럽게 대꾸하였다.

《이 짐은 속새골에 사는 우리 백부님이 위장염때문에 너무 신고하시길래 그 병에 좋다는 약초들을 두루 구해가지고 가는 길입니다.》

왜경은 들은척도 않고 《마대를 풀라!》하고 꽥 소리를 질렀다.

순간 철림은 눈앞이 캄캄해지고 가슴이 얼어들었다. 이제 마대가 벗겨지면 고리짝이 드러날것이고 고리짝뚜껑을 여는 날에는 등사기 !

어쩔수 없는 이 운명적인 시각 철림은 왜경을 눈깜빡할사이에 까눕히고는 고리짝을 메고 바리봉숲속으로 순식간에 내빼려고 마음을 굳게 도사리였다. 바로 그때 김길수는 자제하라는 뜻으로 철림의 옆구리를 툭 치며 제꺽 고리짝뚜껑을 열었다. 천만뜻밖에도 그안에는 호프가 가득차있는것이였다.

철림은 순간 얼떨떨해졌다.

왜경이 먼저 지껄이였다.

《아니, 이거 호프 아닌가?》하고 길수를 힐끗 쳐다보았다.

《예, 노란색꽃이삭때 그늘에 말린 호픈데 위염, 불면증, 방광염, 페결핵치료에 특효라고 해서…》

왜경은 길수의 말을 들으며 곤봉끝으로 호프를 마구 헤집었다.

《호프밑엔 오미자가 아닌가?》

《예. 보약잰데…》 왜경은 또 오미자를 헤집었다.

왜경의 곤봉끝에 오미자속에 있는 산삼 두뿌리가 불쑥 드러났다.

《아니, 이거 산삼까지…》

왜경은 대뜸 산삼에 눈독을 들이며 《너희네 말대루 넌 효자야…》하고 싱거운 소리를 지껄이였다. 길수는 인춤 왜경의 속심을 눈치채고 《아, 이런 산삼이야 얼마든지 캘수 있으니 나리가 정 필요하다면 먼저… 몸보신에도 좋구…》하며 바지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여 산삼 두뿌리를 얼른 싸서 왜경에게 주었다.

왜경은 입이 헤벌쭉해서 산삼을 받아 바지주머니에 슬그머니 넣으며 《좋아, 좋은거시. 이젠 가두 돼. 어서 가봐.》하고 뜨적뜨적 물러갔다.

철림은 마대짐을 도로 싸는 길수의 일손을 거들어주며 그의 림기응변하는 담대한 기지에 무척 탄복하였다.

《형님은 나두 모르게 어느사이에 그렇게 빈틈없는 준비까지 다 해놓았습니까. 정말 놀랍군요!》

《곰곰히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안심치 않더군. 그래서 허허… 지난 시기 〈적색독서회〉실패의 교훈에서 배운거라 할지… 아까는 나두 눈앞이 아뜩했수다. 철림군이 왜경을 와닥닥 쳐갈기구 등사기를 메구 번개같이 내뺄것만 같더란 말이요.》

《솔직히 그런 잡도리를 했댔습니다. 그런데 산삼 두뿌리가…》

그들은 한참 웃어댔다.

철림은 위기일발의 순간에도 하등 덤비지 않고 여유작작하게 왜경을 깊은 수로 업어넘기는 그의 비상한 기지에 머리수그러졌다. 자기라면 직방 족치는 단순한 방법이 고작이였을것이다.

그들은 어느덧 물레방아집 뜨락에 이르렀다.

철림은 곧 자전거에 실은 짐끈을 풀고 마치 낟알마대처럼 꾸린 짐을 들어올렸다.

《형님, 잠간만 여기 서있어주십시오. 내가 얼른…》하며 철림은 마대짐을 안고 방아간으로 향했다.

때마침 방아간문을 열고 나오던 수옥은 무척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반색하였다.

《수옥동지, 안녕하십니까?》

철림은 방아간에 성큼 들어서며 벌쭉 웃었다.

《철림동무, 또 위장낟알짐인가요?》

수옥이 느슨한 미소를 지으며 짐을 받아 풍구뒤에 내려놓았다.

철림은 기쁨에 젖은 목소리로 수옥을 마주보며 말했다.

《수옥동지, 큰 문제가 풀렸습니다. 등사기가 해결되였습니다!》

《등사기요? 갑자기 그걸 어디서…》

《하숙집옆집주인이 독서회때 쓰던건데 그 형님이 수옥동지가 보낸 10대강령을 받아보구 너무나 감격해서 수년간 보관해두었던것을 내놓았지요. 지금 밖에 와있습니다.》

《그래요! 빨리 만나보자요!》

수옥은 그중 난문제였던 등사기가 너무도 손쉽게 해결된것이 꿈만 같아 눈에 눈물이 글썽해지기까지 했다.

그는 쌀겨로 등사기집을 꼼꼼히 덮은 다음 손을 털며 앞장서나왔다.

철림은 급히 달려가 자전거를 끌어다 문옆에 세우고는 길수와 함께 호젓한 내가로 나갔다.

수옥은 조금도 서슴지 않고 키가 후리후리하고 진중해보이는 길수에게 다가와서 《김길수동지를 알게 되여 참말 기쁩니다. 저를 송수옥이라고 불러주세요.》하고 손을 내밀었다. 수옥의 의젓하고 활달한 기품에서 다소 위압감을 느낀 길수는 서둘러 그의 손을 움켜잡았다.

《많이 가르쳐주십시오!》

《저는 철림동무를 통해서 길수동지에 대하여 많은걸 알고있습니다.

손을 잡구 일을 잘해나갑시다. 저는 등사기가 이렇게 쉽게 풀릴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길수동지는 벌써부터 큰일을 해놓으셨습니다. 오면서도 위급한 고비를 솜씨있게 넘겼다더군요.》

길수는 얼굴이 불깃해지며 겸양하게 말하였다.

《큰일이야 뭐… 그저 보관해두었던것을 내놓았을뿐인데…》

《아니예요. 앞으로 일을 마음껏 전개할수 있는 기본조건이 구비됐으니 막 힘이 생깁니다.》

수옥은 길수로부터 아마공장 형편이랑 상세히 알아보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옥은 길수가 먼저 돌아간 다음 철림에게 그 기간에 자기가 직접 은해와 처음 알게 된 대천강빨래터에서 송찬숙과 박영란을 만났던 이야기를 하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반일감정이 강하고 그 어떤 과업이든 해낼수 있는 각오가 되여있었다.

수옥은 그들 두사람이 률곡면에서 살며 송찬숙의 삼촌은 우편국직원이고 박영란의 6촌오빠는 면서기라는것도 알게 되였다.

그리하여 그 줄을 타고 등사기를 해결해볼 궁리를 짜고있을 때에 예상외로 등사기가 해결된것이였다.

수옥은 진정으로 기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오늘 비밀회합장소는 혜신일대의 지리를 환히 꿰뚫고있는 철림이가 선정하였다. 그가 회합장소로 선정한 천연산의 절덕은 옛날절간자리로서 바위굽으로는 샘물이 사철 넘쳐흐르고 여기에 오르면 마치도 덕대우에 올라앉은것 같아 혜신읍까지의 10리어간을 한눈에 굽어볼수 있었다. 게다가 산길을 타고 률곡면과 보산면으로도 질러갈수 있었다. 이 절덕에는 봄, 가을철에 학생들이 간혹 원족을 오는 외 사람들의 발길이 드물었다. 지금도 옛풍습대로 음력 삼월삼짇날이면 부녀자들과 아이들이 지짐감을 이고 올라와서는 세발솥을 걸고 등걸불에 진달래꽃지짐을 부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화전놀이를 하는 곳이기도 했다.

며칠전 수옥은 철림이와 은해를 불러 새로 결성하게 될 조직의 명칭이며 련락장소와 련락방법, 삐라등사와 같은 문제들을 사전토의했었다. 그 기간 은해는 박영란과 련계를 가지고 면서기로 있는 그의 6촌 오빠를 통하여 백로지 한퉁구리를 뽑아내였다.

중낮쯤 되여서 여러 갈래의 숲속길을 타고 모임참가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수옥이와 철림, 은해 등은 남먼저 와있었다.

수옥은 찾아오는 동무들에게 자기의 소개를 하였다.

제일선참으로 도착한것은 륙상선수 박영란이였다.

이번 첫 회합에는 신경태, 김길수, 전춘일, 송찬숙, 박영란, 문성근 등이 참가하였다.

회합운영은 송수옥이 하였다. 그는 먼저 회합에 참가한 동무들이 서로 낯을 익히도록 이름과 소속을 알려준 다음 이어 혜신반일회조직결성을 엄숙히 선포하였다.

반일회책임자로는 최철림, 부책임자로는 김길수를 선출하였다.

수옥은 하나같이 격정에 휩싸여있는 동무들을 둘러보며 말하였다.

《오늘부터 동무들은 운명의 한길에 오른 혁명동지들입니다. 그래 다른 의견을 제기할 동무들은 없습니까?》

아까부터 동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유심히 눈여겨보던 길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나는 오늘 조국광복회산하 반일회원이 된것만 해두 지극히 과남합니다. 그러나 회원들 과반수가 고보생동무들인데 제가 부책임을 맡는것이 타당치 못할것 같습니다. …》

그러나 철림이가 대뜸 그 의견을 막아버렸다.

《아닙니다. 김길수동지야 이미 독서회활동경험도 있구 놈들의 악형두 꿋꿋이 이겨낸분인데 하나의 큰 조직두 당당히 맡을수 있는 재목이라구 생각합니다.》

수옥은 조용히 웃으며 철림의 의견에 긍정을 표시했다.

《길수동지, 저두 철림동무의 의견이 옳다구 생각합니다. 손을 굳게 잡구 같이 일해봅시다.》

워낙 겉보기에는 뚝해도 성미가 온화하고 속내가 깊은 길수는 인차 자기의 소심한 우려를 철회하였다.

《그렇게들 믿어주시니 일을 힘껏 해보겠습니다.》

회합참가자들은 가볍게 웃었다.

수옥이 말하였다.

《나는 오늘 동무들이 모처럼 모인 기회에 내가 국내에 와서 직접 보고 느낀 점을 몇가지 이야기하려구 합니다. 지금 동무들은 어떻게 살아가고있습니까? 일제놈들은 지금 우리의 모든 생활을 가혹하게 모조리 짓밟고있지 않습니까! 생각해보라요. 학교나 기관들에서 하루생활은 무엇에서부터 시작되나요. 〈천황〉놈이 있는 궁성을 향해서 45도로 허리를 굽혀 요배하구 낮 열두시에는 정오묵도를 하고 〈신사〉앞을 지날 때는 참배를 해야 하구… 내 하나 읽을게 좀 들어보세요.》

수옥은 저고리앞섶에서 너덜너덜해진 종이장을 꺼내였다.

《이것이 놈들의 〈체육지도기준〉이라는 문서장인데 제1조의 일부 골자만 좀 들어보십시오. 〈체육운동을 통하여 내선일체의 결실을 촉진하기 위하여 엄격한 규률밑에 실시할것이며 체육대회를 시작할 때에는 궁성요배, 히노마루(일본국기)게양, 기미가요(일본국가)합창을 하고 황군의 무운장구를 빌것이다. 일체 용어는 일본어를 사용한다.〉 보십시오. 얼마나 날강도적입니까. 심지어 밥곽안에 왜놈기발을 련상케 하는 제놈들의 부식물인 〈우메보시〉를 넣게 강요하구… 이러한 실례는 수다합니다. 이렇게 일제놈들은 우리 민족의 넋을 무참히 짓밟구 갈기갈기 찢어버리는데 놈들과 맞서 싸우지 않는다면 죽은 목숨이지 무슨 산목숨이겠어요. 》

철림은 일제의 간악한 죄행을 쉬운 말로 정통을 찌르는 수옥의 분석판단에서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자기자신도 여직껏 그렇게 살아온 심심한 자책에 낯이 뜨거웠다.

《동무들은 일제놈들에 대한 증오심도 강하구 투쟁각오도 높은것만큼 무맥하게 사는 사람들, 울분을 어떻게 터뜨릴지 몰라하는 사람들을 깨우쳐주구 곳곳에서 반일투쟁에 떨쳐나서도록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동무들은 장군님께서 우리 혁명을 이끄시는 한 조국해방은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고한 신념을 간직하는것이 중요합니다.

장군님께서는 우리 나라의 청년학생들은 일제의 민족적억압과 천대를 받기때문에 민족적각성과 애국심이 대단히 높다고 하시면서 그들을 옳게 교양하고 조직적으로 단련한다면 선진적인 사회주의사상을 보급하고 광범한 로동자, 농민들을 계몽각성시켜 혁명운동에 안내하는 선도자적역할을 훌륭히 수행할수 있다는 믿음을 주시였습니다.

장군님의 그 믿음을 잊지 않고 투쟁을 벌린다면 오늘은 혜신반일회성원이 8명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80명, 800명이상으로 계속 확대될수 있습니다. …》

수옥은 당면한 과제로 각계층 군중에게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해설선전하며 동지들을 획득하고 조직을 확대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행방도를 일깨워주었다.

송수옥의 눈앞에는 불현듯 장군님께서 1936년 7월 10일 시난차전투승리후 조선인민혁명군대원들이 준비한 연예공연도 보아주시고 만강에서 대원들에게 《조국광복회10대강령》해설을 비롯하여 정치사업방법과 방도를 하나하나 가르쳐주시던 감동적인 일들이 가슴뜨겁게 안겨왔다.

뒤이어 철림은 조직책임자로서 특별한 사정외에는 전원이 자주 모이지 않으며 련락장소로는 철림의 하숙집과 북일사진관으로 정한다는것과 매일 밤과 일요일에 주변부락들에 나가 야학을 통한 선전활동을 벌리면서 한개의 부락에서 3명정도의 핵심들을 장악교양할데 대하여 강조했다.

경태가 철림이와 헤여져 하숙집에 이르니 하숙집녀인이 부엌문을 열고 나오며 말했다.

《이자야 오는걸… 글쎄 늘 기신기신 오는 그 학생 있잖수, 눈이 게슴츠레한…》

경태는 제꺽 직감하였다.

《예-에, 호연이…》

《오늘은 공일인데두 어델 가서 그렇게 오래 있느냐며… 엉치가 어찌나 질긴지 좀전까지두 이 마루에 걸터앉아 기다리다가 금시 갔다우.》

《그래요. …》 경태는 들을만해 하였다.

사실은 어제 오늘 회합을 알리려고 찾아온 철림에게 호연은 사람이 괜찮고 《공산당선언》도 다 통달한 선진분자같은데 인입하면 어떤가하는 의견을 비쳐보았다. 그러나 철림은 잠시 심중히 생각하다가 《경태, 말로만 듣구서야 어떻게 그를 다 믿을수 있니. 생활과정을 통해서 파악된것도 아니지 않니.》하고 대번에 자르는것이였다.

경태는 그가 사람을 지내 야박스레 보는것 같아 좀 두둔하려다가 입을 다물고말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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