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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은해는 부엌에서 무명저고리소매를 걷어올리고 쪽바가지로 독안의 겉밀을 퍼서 자루에 담고있었다. 어머니는 사이문턱에 팔굽을 올려놓고 또 지청구를 했다.

《넌 왜서 코앞에 정미소를 두구두 부득부득 그 먼 물방아간에만 가려구 그리 극성이냐?》

은해는 부지런히 겉밀을 자루에 퍼담으며 순순히 대꾸했다.

《어머니, 잘사노라구 거드름 부리는 애들 눈에 창피스러운 꼴 보이기 싫어서 그래요.》

《온, 계집애두. 무슨 눈이 그리 잔뜩 높아가지구…》

사실 낟알찧기는 당장 급한 일도 아니였다.

그러나 오늘 송수옥을 만나기 위해서 일부러 일감을 만드는것이였다.

어쩐지 아직은 기연가미연가한 마음인데 무턱대고 빈손으로 가느니보다 낟알자루를 이고가는것이 여러모로 자연스러울것 같았다. 은해는 소두 한말가량되는 낟알자루를 머리에 이고 큰길에 나섰다.

좀 낡은 회색양복차림을 한 철림은 갈림길목에 초조히 서있다가 골목길로 바지런히 걸어오는 은해가 눈에 띄우자 성큼성큼 마중갔다.

그는 은해의 임을 무작정 내려 제 어깨에 메려고 했으나 은해는 무겁지 않다고 거듭 사양하며 내처 걸었다.

임을 인 은해와 가지런히 걷는 철림의 모습은 마치 다정한 오누이를 방불케 했다.

《은해씨, 그 임은 위장물같군요.》

《호호, 좀 자연스러운감이 들잖나요?》

《정말 기발한 생각이군요.》

은해는 미소어린 눈길로 철림을 힐꿋 쳐다보며 말하였다.

《철림씨, 아무래도 수옥언니를 만나면 찾아온 목적부터 밝혀야 하겠는데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나두 곰곰히 따져보니 벌써 다 투명해진것 같은데 뭐 잴거나 있습니까. 〈언니, 오늘은 언니의 가르침을 받으러 왔습니다.〉하고 직방 온 목적을 밝혀야지요.》

《호호, 철림씨는 무슨 일에서나 시원시원하구 단도직입적이군요.》

《허허, 별거 있습니까. 믿음이 간다면야 마음을 활 열어놓구 자기를 통짜루 내맡겨야지요.》

철림은 상종하면 할수록 더 존경이 가는 명백한 청년이였다. 그가 즉석에 표현하는 결단적인 말들은 흔히 한낱 혈기를 누르지 못하여 내뱉는 즉흥적인 말이나 객기와는 근본 달랐다. 그의 말 한마디한마디는 명확하고 사리에 딱 들어맞는것이였다.

철림은 호젓한 길에 들어서자 제잡담 은해의 임을 뉭큼 들어 제 어깨우에 올려놓고 씨엉씨엉 걸었다. 은해는 임을 도로 빼앗으려다말고 웃으면서 따라 걸었다.

그들이 물레방아집에 도착하였을 때 마침 마당에 나와있던 문성근이 은해를 보고 반색하였다.

《은해구나. 참 오래간만이다. 그래 집안이랑 다 무고하시냐?》

《녜.》

은해는 방긋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철림은 낟알자루를 마루바닥에 내려놓고 깍듯이 인사를 했다.

《아버님, 안녕하십니까?》

《예. …》

성근은 그를 유심히 쳐다보며 어정쩡하게 인사를 받았다. 그는 눈을 쪼프리고 잠시 철림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이 젊은이두 어데서 꼭 보던 얼굴같은데…》

《저두 아버님이 면목이 있어보입니다.》

《그럼 혹시 남석면에 사시는 대현어른의 외손이 아니던가?》

《예, 옳습니다. 혜신고보에서 공부하는 최철림입니다.》

《그러면 그렇겠지. 내 눈이 틀릴수야 있나.》

역시 남들의 래력에 귀신같이 밝다는 성근이다왔다.

그때 물레방아간문이 열리면서 낟알먼지를 온통 뒤집어쓴 송수옥이 머리수건을 벗어 뽀얗게 앉은 먼지를 털며 나왔다.

《언니! 그간 안녕하세요?》

은해는 수옥에게 반달음을 해갔다.

《은해군요. 그새 잘있었나요?》

《안녕하십니까? 저는 최철림이라구 합니다.》

수옥은 철림의 인사를 받으며 마당에 들어섰다.

성근은 인차 눈치를 차리고 《어서들 만나보게.》 하고 방아간으로 들어갔다.

물레방아간에서는 방아소리가 찌쿵찌쿵 단조롭게 들리였다.

그들은 수옥을 따라 웃방에 조용히 들어가앉았다.

은해의 말대로 수옥은 스물서넛에 나보이는 매우 침착하고 몸가짐이 의젓한 녀성이였다. 서름한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 그는 사뭇 온화한 얼굴로 철림을 뜯어보았다.

눈치빠른 은해는 《이 철림씨는 혜신고보에… 집은 남석면이구…》 하고 말꼬리를 흐리였다.

《그러니 미옥이 오빠군요.》

이렇게 말하는 수옥의 쌍까풀진 어글어글한 눈에 미소가 활짝 피여올랐다.

철림은 난생처음 보는 녀인의 입에서 미옥이라는 말이 불쑥 튀여나오자 그만 어안이 벙벙해졌다.

《애가 참 귀엽더군요. 내 여기로 오던 길에 집에 들려 어머님이랑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밤 묵은 일이 있답니다.》

《아, 그렇습니까!》

철림은 너무나도 뜻밖이였다.

수옥은 철림을 우정 찾아가 만날 작정을 했댔으나 저절로 찾아왔으니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그러고보니 우리는 서로 구면이나 같군요. 이렇게 한자리에서 만나니 정말 반갑습니다. 세상은 넓으면서도 좁다더니 참말 그렇군요.》 수옥은 거침없이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저도 은해씨로부터 선생님을 만나던 이야기를 듣고 몹시 감동되였습니다. 무슨 큰뜻을 품고있는분같아서 오늘은 직접 만나 가르침을 받구싶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수옥은 난생처음 들어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 별스러워 한참동안 웃었다. 그는 웃음을 거두고 잠시 있다가 진중하게 말하였다.

《내가 무슨 선생님이겠어요. 그저 동무라고 불러주세요.》

철림이와 은해는 그 말에 별안간 긴장감을 느끼며 동시에 얼굴을 번쩍 들고 수옥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나는 김일성장군님을 모시고 일제와 싸우는 조선인민혁명군 대원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송수옥동무라고 부르면 됩니다.》

《녜?! …》

철림은 천만뜻밖이여서 화닥닥 자리에서 튕겨일어나며 낮으나 경탄에 젖은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수옥은 조용히 일어나서 그들의 어깨우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어서 앉아 이야기나 나누자요.》

은해는 《언니!》 하고 울먹하게 웨치며 수옥의 품에 와락 안기였다.

《참, 이렇게두 쉽게 만나게 되다니!》

철림은 저도모르게 눈물이 글썽해진 눈굽을 옷소매로 닦았다.

은해도 수옥의 품에서 물러나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목메여 말했다.

《언니는 틀림없이 이런 훌륭한분일거라구 속으로 짐작은 하면서두…》

은해는 너무도 가슴아프게 오빠를 잃고 속에 맺혀있던 설음이 울컥 북받쳐 《흑!》 하고 어깨를 떨었다.

수옥은 은해의 어깨를 그러안으며 갈린 목소리로 위로하였다.

《은해동무, 진정해요. 우리 서로 알게 된 기쁜 날에 눈물을 흘려서야 되겠어요.》

《언니, 미안해요. 저도모르게 그만…》

은해는 인차 자기를 수습하고 몸가짐을 방정하게 가지였다.

철림은 추호의 주저도 꺼리낌도 없이 자신을 서슴없이 먼저 드러내놓는 수옥에게 대뜸 매혹되고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평소에 품었던 생각을 거침없이 터놓았다.

《사실 한무선선생님은 저희들에게 김일성장군님께서 하신 참으로 귀중한 말씀을 심어주고 가시였습니다. 특히 장군님께서 인간에 대한 사랑이 혁명의 근원이라고 하신 말씀은 저의 가슴에 불덩이를 안겨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무엇으로든 혁명에 이바지하고싶었으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막막하게 지내던 참이였습니다. …》

은해도 철림의 말에 사뭇 공감되여 말하였다.

《저도 그 고귀한 진리를 모르고 지금껏 헛살아왔다는 허무한 생각이 들더군요. 빨래터에서 언니가 뜻이 있어야 사람답게 살수 있다구 일깨워주던 말을 속으로 내내 되새겨보게 된답니다.》

수옥은 저으기 공감된듯 그들을 정겹게 바라보며 차근차근 말하였다.

《확실히 고보생들이 다르군요. 보는 눈도, 느끼는 감정도 다 훌륭해요. 우리도 장군님의 그 주옥같은 사상을 가슴속에 깊이 간직하고있기때문에 만난시련도 단두대도 두려워않구 일제와 싸우는거랍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없이는 불행에 대한 동정심도, 남을 위한 희생정신도, 참다운 생활의 목표도 생겨날수 없는거예요.》

수옥은 잠시 말을 끊고 철림과 은해를 마치 친동생들이기나 한듯 따뜻한 눈매로 번갈아보았다. 그들은 마디마디가 가슴을 찌르는 수옥의 말을 감심해들었다.

《동무들도 그 숭고한 사상을 신념으로 간직해야 인생의 뚜렷한 목표를 가지구 순간을 살아도 사람답게 살구 하루를 살아도 보람있게 살며 청춘시절을 빛내일수 있어요.》

그는 말을 멈추고 동안을 두었다가 푸근한 목소리로 다시 이었다.

《내 어릴적에 한동네 사는 머리 흰 한 로인이 거나한김에 자기의 인생을 개탄하던 말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나두 젊었을 때는 한뉘를 젊어있을것 같구, 인생길이 그저 멀구먼줄로만 알구 하루하루를 엄벙덤벙 넘기다가 갑작스레 말년에 이르구보니 지나온 인생이 반디불에 불과했어. 뒤를 돌아다보니 그 어떤 의로운 일에 자기를 바친것두, 세상에 흔적 하나 남긴것두 없이 헛살아왔더란 말이야.〉 얼마나 깊이 새겨보게 되는 말이예요.》

철림은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를 만난듯 수옥의 말을 마음속깊이 새겨들었다.

《… 오늘은 첫날이여서 특별히 강조하지만 동무들은 김일성장군님만 계시면 조국해방두, 창창한 미래두 있고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이 신념을 굳게 간직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두려운것도 모르구 그 어떤 임무든 자신심있게 해나갈수 있습니다. 우선 동무들은 앞으로 조직에 묶어세울 동지들을 규합해야 합니다. 혁명은 동지를 얻는것으로부터 시작되거던요. 자기와 제일 가깝고 혁명을 위해서 끝까지 뜻을 같이할수 있는 믿을만 한 학우들과 하숙집이나 이웃들속에서 일제에 대한 증오심이 강한 청년들을 하나하나 료해하여 혁명의 편에 쟁취해야 합니다.》

… 철림의 눈길은 아까부터 수옥이 팔뚝을 얹고있는 앉은책상우에 당그랗게 놓인 두툼한 수첩에 자꾸 쏠리였다. 그의 호기심을 감촉한 수옥은 미소를 입가에 그리며 말하였다.

《이건 혁명가요집이예요.》

《아, 그렇습니까?》 하고 철림은 수옥이 집어주는 수첩을 받아 펼치였다.

은해도 함께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참말, 노래가사를 정성담아 또박또박 곱게 썼군요.》

수옥은 그들을 정겹게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수옥은 은해를 데리고 물레방아간으로 들어갔다.

성근은 벌써 은해가 가져온 겉밀을 방아확에 쏟아넣어 찧고있었다. 방아공이 방아확에 찌쿵찌쿵 무겁게 꽂힐 때마다 풀썩풀썩 겨먼지가 일었다.

성근은 겉곡마대를 이고온 한 늙수그레한 녀인의 짐을 받아내려주었다.

수옥이 방아공이 올라갈 때 제꺽 들어잡자 은해는 날렵하게 고임대를 방아대 밑홈에 꽂았다.

그리고 은해가 확에서 밀쌀을 쇠버치에 퍼담아 풍구에 달린 조구통모양의 아구리에 조금씩 쏟아넣으면 수옥은 풍구손잡이를 부지런히 돌려 밀겨를 밖으로 불어내치였다. 정선작업을 다 끝낸 다음 수옥은 쇠버치에 담긴 밀쌀을 자루에 말끔히 담아주었다.

한낮의 해는 눈이 시게 밝게 비치였다.

철림은 그저 멀고 아득한것만 같던 일이 일순에 이루어지자 모든 행운을 도맡아안게 된듯 가슴은 시종 울렁이였다.

수옥은 머리수건을 깊숙이 쓴 일차림대로 방아간모퉁이에 그린듯 서서 조용히 웃으며 오누이같은 그들을 바래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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