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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마지막 수업종이 울리기 바쁘게 학감이 교실문을 반쯤 열고 《신경태학도를 교장선생님이 긴급히 찾으시오.》 하고 마뜩지 않은 투로 알리였다.

오꾸마는 도수안경알을 번뜩이며 경태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땅딸보이지만 앉은키는 여느 사람만큼한 교장의 시퍼런 인상에서 경태는 무슨 심상치 않은 일로 불리워왔음을 직감했다.

《그래 경태학생이 여름방학기간에 류행가를 레코드에 취입했는가?》

그 목소리는 검도훈련시간마다 운동장교단에 올라 시범동작을 해보일 때 질러대던 소래기를 방불케 했다.

《녜. …》

《뭔가? 학도로서… 그래 반도인은 말을 해도 일본말을 하고 노래도 일본노래를 부르고 시도 일본시만 읊어야 한다는걸 모르는가. 물론 류행가중에도 당국이 허용하는 류행가가 따로 있는거야. 뭐 〈나그네설음〉? 그따위 신세한탄이 배일사상고취나 같다는것쯤은 고보생이면 알았어야지, 엉? 총독부 〈시학관〉이 군청에 전화까지 걸어왔단 말이다. 또 이미전에 레코드검열제가 실시되여 치안유지에 거슬리는 〈아리랑〉레코드판 판매도 중지당한걸 모르는가, 앙?》 그는 안락의자에서 움쭉 일어나서 허벅다리에 발이 달린듯 한 뭉툭한 다리를 무겁게 놀리며 계속 지껄이였다.

《부친의 낯을 봐서 한번 용서하겠다만 래일까지 사죄문을 써야 해. 벌써 오래전에 초대총독 데라우찌각하께서는 교육의 기본은 덕성을 기르고 일본어보급에 정진하여 제국신민으로서의 자격과 품성을 갖추는것이라고 가르치였다. 그런데 20년 지난 오늘까지도 그 취지에 어긋나게 행동하다니.》

경태는 하숙방에 들어서자바람 책보를 방바닥에 홱 던지고 침대우에 벌렁 나가누웠다.

《레코드바람이 한창 불고있는판에 빌어먹을, 겨우 한곡 취입한게 뭐가 어떻다는거야?! 내가 학생이 돼서? 쳇!》

그는 마치 오꾸마의 면전에 대고 항변하듯 투덜댔다. 그는 피뜩 생각난듯 훌떡 일어나 침대밑에 숨겨둔 빼주병을 들춰내여 물고뿌에 따라 단숨에 마시였다. 그리고는 병마개를 막아 제자리에 밀어넣은 후 두손을 깍지끼워 뒤통수에 베고 반듯이 누웠다.

(이런 판국에 철림이와 설향은 나더러 류행가수가 되라구? 흥, 어림두 없지.)

그러나 경태는 그까짓 류행가수가 되려는 개꿈은 줴버리더라도 졸업후 신사숙녀들이 수두룩한 번화한 도시에 가 살고싶었다. 지금도 눈만 감으면 그지없이 희한한 서울의 야경이 그림처럼 선명하게 안겨왔다. 그는 거기에 머무르는 기간 려관방에 학생복을 벗어두고 검정세루양복에 줄무늬넥타이를 금빛삔으로 찔러매고는 옷색갈과 대조되게 반들반들한 빨간 단화를 받쳐신고 다녔었다. 원래 키가 크고 미남인 그를 현란하게 양장을 한 숙녀들이 멋쟁이신사들과 팔을 끼고 산보하면서도 호기심에 찬 눈길로 넋을 잃고 바라보군 했었다. 경태가 카페나 술집에 나타나면 작부나 기생들이 그한테 지꿎게 추파를 던지는것이였다. 내심으로 으쓱해진 그는 겉으로는 무관심한척 하고 점잖게 앉아 료리를 기다리군 했었다. 시간이 한가했던 그는 유명한 공원, 명소들은 물론 계집들의 야지러진 웃음과 란잡한 노래소리 흘러나오는 카페, 료리점, 술집들을 매일이다싶이 드나들었다.

샴팡과 위스키의 독특한 맛도 종로네거리의 뒤골목카페 《흑취》에 뻔질나게 나들며 들인것이였다.

문득 그의 머리속에 사죄문 생각이 떠오르자 그 달콤한 환영은 일순 사라져버리고 부아가 동했다.

그는 벌떡 일어나앉았다. 그까짓거 속에 없는 말을 번지르르하게 꾸며내여 오꾸마쯤이야 얼려넘기지 못하겠는가. 선키가 자기의 가슴팍에 닿을가말가한 땅딸보에게 허리를 굽히고 사죄문을 두손으로 바칠 생각을 하니 코웃음이 나왔다. 그는 번열증이 나 일어서서 창문을 활짝 열어제꼈다. 그는 시끄러운 학생생활에서 하루속히 벗어나고싶었다. 우선 교내에서도 각방으로 구속을 받고 학생복차림으로 거리에 나서면 여우같은 형사들의 눈총을 더 받았다. 어디 가나 표적이 나서 노상 행동의 속박을 받는게 영 질색이였다.

(그렇다면 졸업후에는 무엇을 한다?)

창밑에 걸상을 끌어다놓고 앉았으나 그는 또다시 번거로운 상념의 소용돌이속에 휘말려들었다.

(뜻있는 사람들처럼 교편이나 잡아볼가?)

하지만 왜놈들의 촉수가 가장 예민하게 뻗치고있는데가 바로 학교부문이였다. 학과목과정안에 이르기까지 놈들이 제정한대로만 하도록 무자비하게 강요할뿐아니라 교원들속에 대성사립의 《조개턱》같은 밑정들을 박아두고있지 않는가. 그러나 큰 도시의 학교부문은 시골과 사정이 다를수도 있다. 아니, 이런저런 속박에서 벗어나는 길은 아버지가 벌써부터 목조르기를 하는대로 제재소운영을 넘겨받는것이 아닐가? 그러나 그는 그것을 곧 부정했다. 시끄럽기 짝이 없는 기업운영은 자기의 기호와 체질에 애당초 맞지 않는것이였다.

(아니, 그렇다고 하여 제재소운영을 고스란히 물려받지 않으면 돈줄이 끊기고말것이 아닌가?)

하긴 아버지가 한 10년쯤은 기업경영을 할수 있을것이다. 그러니만큼 공연히 미리부터 성가신 걱정을 앞세울 필요가 없었다.

이러한 혼란된 생각에 파묻혀있던 경태의 머리속에 서로의 신상문제를 하나로 결부시키던 설향의 간곡한 말이 문득 상기되였다. 물론 변호연을 지나치게 곡해하는 설향의 말에서 건져들을 소리는 별반 없었으나 금지도서라는 말은 비수처럼 속을 찔렀다. 그래서 그날 밤으로 하숙집녀인의 도움을 받아 금지도서들은 모조리 골라서 창고에 깊숙이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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