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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은해는 수옥이와 만난 후부터 어느 하루도 마음을 안정할수가 없었다. 마치도 해빛밝은 봄날의 감미로운 꿈속에서 잠시 만났다가 총총히 헤여지기라도 한듯 속이 알찌근하고 허전하였다.

그날은 너무도 뜻밖이여서 그저 놀랍고 갑작스러워 보다 요긴한 문제들을 알아내지 못하고 선뜻 헤여진 그지없는 아쉬움이 그의 마음을 지꿎게 괴롭혔다. 그날 좁은 골목길을 벗어나자 빨래함지를 자기한테 넘겨주고는 그 자리에 박힌듯 서서 바래워주던 수옥의 모습은 잠시도 눈앞을 떠나지 않았다. 큰길을 가로질러 마지막 담모퉁이를 꺾어들 때 혹시나 하여 돌아보던 은해는 그때까지도 그 자리에 그린듯 서있는 그에게 눈길이 미치자 가슴이 화끈해졌다.

은해는 수시로 진정넘치는 그의 침착한 모습도 다시금 보고싶었고 그 부드럽고 담담한 목소리도 다시금 듣고싶었다. 그는 마치도 옛말에 나오는 《귀인》같기도 했다. 그에 대한 생각이 가슴에 가득차면서 마치 조그맣고 말랑말랑하고 따뜻한 애기의 손이 금시 볼에 와닿는듯 포근한 정이 온몸에 스며드는것 같았다.

어제도 설향이가 물리강의를 받아쓸념도 않고 멍해있는 자기의 손을 툭 건드리였다.

《얘, 너 요즘 왜 멍청이가 됐어?》 그리고는 교원의 눈치를 살피며 혼자 웃었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일뿐 은해는 또다시 마음의 심연속에 빠져들었다.

수옥의 출현은 흡사 암담했던 자기의 가슴에 밝은 빛을 던져주고 운명의 앞길을 선도하여 새로운 세계의 문전에 세워줄것만 같았다.

이러한 심정을 혼자 붙안고 지내기에는 가슴이 너무도 벅찼다. 설향이한테 슬쩍 터놓아볼가? 아니, 안될 소리. 설향은 바로 곁에 있으나 이런 면에서는 마음에 멀었다.

불현듯 은해는 철림을 만나고싶었다. 오빠가 곁을 떠난 이후부터 철림을 무선오빠처럼 존경하고 따르고싶었다. 은해는 철림이가 집에 오는 시간을 짐작하여 그의 하숙집에 이르렀다. 하숙집녀인은 부엌문앞에 씨솎음한 풋배추를 다듬고있었다.

《어머니, 안녕하십니까?》

녀인은 은해를 알아보고 반색하며 맞았다.

《어이구, 오래간만이구만. 》

은해가 녀인의 곁에 쪼그리고 다가앉으며 풋배추를 다듬으려고 하자 녀인은 펄쩍 뛰며 말렸다.

《아니, 손을 대지 마우. 괜히 손을 마치려구…》

《어머니, 괜찮아요.》 은해는 팔소매를 한매듭지게 걷고 풋배추를 솜씨있게 다듬었다.

철림은 저쪽 마루끝에 그들을 등지고앉아 조그마한 처녀애와 놀이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무슨 속임수가 드러났는지 서로 옳다거니 아니라거니 싱갱이질을 했다.

《저 미옥 오래비는 애들을 어찌나 고와하는지 집에 돌아오기만 하면 애들이 저렇게 공부할 짬을 통 주지 않는다우.》

철림은 밤톨만 한 공기돌을 밀어놓고 돌가보를 하려다가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은해에게 눈길이 피끗 미쳤다.

《아니, 은해씨가 어떻게?…》

그는 어지간히 쑥스러운듯 열적은 웃음을 지으며 일어섰다. 순식간에 그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었다.

은해는 순진한 인간미가 넘치는 그의 천진한 행동에 가슴이 짜릿해졌다. 그는 자기를 빠끔히 쳐다보며 새물새물 웃는 소녀의 볼을 쓰다듬어주었다.

《네 이름 뭐지?》

《향숙, 김향숙이야요. 이 언닌 전번 언니 아니네.》

《그래…》

철림은 방에 들어가 옷을 제꺽 갈아입고 나왔다. 그는 은해가 불쑥 나타난데는 필시 무슨 요긴한 일이 있기때문이라고 짐작되여 서둘렀다.

《어머니, 좀 나갔다 오겠습니다.》

《어서 그렇게 하라구. 체네학생두 종종 다니라구.》

《어머니, 안녕히 계십시오.》

은해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다소곳이 절을 하였다. 그는 철림의 뒤를 따르며 조용히 혼자 웃었다. 그는 철림에게 그처럼 동심세계를 즐기는 천진스러운데가 있는줄 오늘 처음 알았다. 그래서인지 별로 마음이 즐거웠다.

《아니, 왔으면 미리 기침소리를 내든가, 무슨 인기척을 내야지. … 허참.》 그는 아직도 점직한지 허거프게 웃었다.

《호호호. 》

《왜 웃습니까?》

《철림씨의 동심을 훔쳐본것이 흥미있어 그래요.》

그들은 함께 웃으며 골목길을 걸었다.

은해는 행인들의 왕래가 드문 바깥길에 나서자 정숙하게 말을 꺼내였다.

《오늘 철림씨와 심중하게 상론할 문제가 있어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그래요?》

철림이 역시 심중해졌다. 그는 은해의 담담해진 표정에 눈길을 주며 저절로 마음의 탕개가 조여졌다.

은해는 대천강빨래터에서 뜻밖에 송수옥을 만나게 된 경위와 그가 한말을 차근차근 옮기였다.

순간 철림의 얼굴에는 대뜸 열기가 확 피여올랐다.

《무선오빠의 소식도 풍문에 들었다면서 나를 눈물겹게 위로해주더군요. 지금 곰곰히 되새겨보면 그 언니가 해주던 말의 마디마디에 깊은 속뜻이 담겨있었어요. 그런데 이상스러운건 그 언니는 만나는 순간부터 제 속마음도 툭 터놓고싶도록 진정이 풍기는것이였어요.》

철림은 은해의 차근차근한 말을 심중히 새겨들었다.

(그 녀성은 과연 누구일가? 그가 어떻게 되여 은해를 지목하고 접근하였을가? 혹시 산에서? 아니면 또 혹시…)

그러나 제 속마음도 즉석에 터놓으며 진정이 풍기더라는 말에 그는 마음이 바싹 끌리였다. 진정이란 참사람에게서만이 풍길수 있지 않는가!

《그런데 그 말을 왜 이제야 합니까?》

《어찌하면 좋을지 갈피를 못 잡구 망설이다보니…》

은해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 그의 우선우선한 표정과 나무라는 말을 들으며 그간 지나치게 망설인 자신을 심심히 자책하지 않을수 없었다.

은해는 대뜸 마음이 거뿐해지고 철림이가 한결 더 미더웠다.

그들은 이번 일요일에 송수옥을 찾아가기로 약속하였다.

은해는 처녀다운 예민한 감각으로 아까 향숙에게서 피끗 들은 말을 묻고싶었다.

《저… 철림씨한테 다른 녀학생두 찾아온적이 있나요?》

《다른 녀학생? 있지요. 설향씨지요.》

《아니, 설향이가요?》 은해는 무척 놀랍게 반문했다.

《그럴만한 대단한 일이 있었지요. 글쎄 경태가 취입한 노래가 제작돼나왔지요. 그래서 경태와 설향씨가 향숙이네 축음기로 들으려구 헐레벌떡 달려왔댔지요.》

《아, 그래요. 정말 대단하군요.》

《은해씨, 나는 지금 그렇게도 애타게 고대하던 의로운 손길에 막 이끌리여가는듯 한 심정입니다. 송수옥이란분을 한번 만나기만 해두 앞길이 대번에 탁 트일것 같은 희망을 갖게 되는군요.》

《저 역시 수옥언니의 그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마음의 문을 계속 두드리는것만 같아요.》

《마음의 문! 정말 시적인 표현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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