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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어느날 설향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혜신서점에 들리여 새로 나온 책 한권 사들고 길모퉁이에 있는 문화용품상점에도 들렸다. 그의 눈길은 매대우에 펴놓은 레코드판들에 멎었다. 전번에는 보이지 않던 레코드판 미색겉봉을 찬찬히 훑어보다가 하마트면 《앗.》 하고 소리를 지를번 하게 놀랐다.

《나그네설음》이라는 류행가제목밑에서 《독창 신경태》라는 이름 석자를 발견한것이였다.

그는 너무도 미덥지 않아 별안간 뿌잇해보이는 이름을 몇번이고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분명히 신경태였다. 순간 가슴이 활랑활랑 숨가쁘게 뛰였다.

그는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서둘러 값을 치르고 나는듯이 상점을 나섰다.

설향의 손에서 레코드판을 와락 빼앗듯 받아든 경태는 저로서도 도무지 뜻밖인듯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혼자 웃기도 하고 《결국 이렇게 됐단 말이지. …》 라고 웅얼거리기도 하며 기뻐 어쩔줄을 몰라했다. 그러다가 문득 철림이한테 곧 알리자고 하며 서둘렀다. 거기서 철림의 하숙집까지는 꽤 거리가 멀었다.

철림은 그 소식을 듣더니 일순 얼굴이 확 밝아지며 자기일처럼 무등 기뻐했다.

《축하해! 드디여 성공했군. 이제야 경태의 노래를 전국이 다 듣게 됐군. 그렇게두 공을 들이더니 끝내… 정말 장해!》

경태는 그의 분에 넘친 칭찬에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여여, 그까짓 한곡이나 겨우 취입한걸 가지고 낯뜨겁게 뭘 그닥지나…》

《한곡이라니? 그게 누구나 할수 있는건가. 아니, 사문동에 살던 종섭형을 보라구. 집안일엔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하구 도를 닦으면서도 해마다 음악콩클에 가서 퇴방맞구 어정어정 걸어오던 일 생각 안나?…》 그들은 한참동안 웃었다.

《아니, 우선 축음기루 빨리 들어봐야지.》

《응, 나두 더구나 그래서 급히 달려왔어.》

철림은 곧 옆집의 향숙을 찾았다. 이어 열서너살 돼보이는 눈이 올롱한 소녀가 자박자박 걸어왔다.

《오빠, 찾았나요?》

《응, 엄마 있니?》

《네. 》

《너의 집에서 축음기를 좀 듣자꾸나. 저 오빠의 노래두 있는 레코드야. 》

《그래요?》

향숙은 할깃 쳐다보고 손벽을 딱 치며 콩당 뛰였다.

설향은 소녀의 모양이 참말 귀여워 머리를 쓸어주었다.

《이름이 향숙이?》

《김향숙.》 하고 소녀는 묻지도 않는 말을 제가 먼저 꺼냈다.

《난 철림오빠와 친해요. 내가 미옥이라는 녀동생과 꼭같이 생겼다며 얼마나 고와하는지 몰라요.》

그 집은 아담한 두칸짜리였다. 철림은 자기 집처럼 창문쪽에 놓인 축음기에서 가장자리에 금색레스장식을 한 비로도보를 벗기였다. 경태는 익숙한 솜씨로 축음기뚜껑을 제끼고 산두복수에서 무딘 바늘을 뽑고 새 바늘을 갈아꽂았다. 한편 철림은 손잡이를 돌리며 태엽을 감았다.

설향은 그들의 조화로운 솜씨를 홀린듯 지켜보았다.

축음기회전판에 실려 잠시 소리없이 돌아가던 레코드에서 마침내 경태의 노래소리가 울려나오기 시작했다. 경태는 제 목소리를 듣는게 좀 게면쩍은듯 얼굴이 불깃해지며 군소리처럼 한마디 했다.

《내 목소리 같잖은데…》

《왜 록음되여 나오니 더 맑지 않니?》

철림이 흥에 겨워 이렇게 추어주었다.

《그야말로 성공했어. 롱구로 학교의 명예를 떨치더니 이번에는 노래로 신경태의 이름 석자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됐어. 》

머리를 수굿하고 제 노래를 듣고있던 경태는 시쁘게 웃으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번에 보니 나처럼 음악기초가 없이는 어방두 없겠더라구. 가수들의 경력만 대충 봐두 거개가 윤심덕가수랑 교육을 받은 우에노음악학교졸업생들이 아니문 어느 대학, 어느 사범전문에서 음악을 체계적으로 배운 사람들이여서…》

《그렇게 실망할게 뭐 있니? 일단 도를 닦던바에야 이를 사려물구 끝까지 해내야지. 나한테 너만큼한 재간이 있다면 그까짓거 패권을 쥐구말겠다.》

설향은 돌아오는 길에 경태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빠, 아까 철림씨의 말대로 하는것이 옳지 않을가요?》

그 말에 그는 대뜸 쓴웃음을 지으며 자기의 견해를 그럴듯하게 력설했다.

《음악이란 그렇게 단순한게 아니야. 내가 서울에 머무는 스무날동안 여러 전문가들과 상담두 해보고 이름난 가수들의 노래두 직접 들으면서 자신을 허심히 가늠해보았지. 예술이란 천성적인거야. 더구나 가수는 육체적조건이 잘 갖추어져야 하는거야. 철림의 단순한 생각대루라면 세상에 가수가 못될 사람 없을거야. 》

설향은 그와 이런 론의를 더 한댔자 공연한 일 같아 입을 다물고말았다. 그렇다면 그는 본시 아무때든지 쉽게 달고 쉽게 식는 그러한 기질이였을가? 아니면 그의 꿈이란 그 어떤 삶의 목표로 정한 참다운 지향이 아니라 자기의 노래소리를 세상에 한번 남겨보려는 한낱 욕망에 불과했을가. … 설향은 금시 하늘에 닿을듯싶던 자신의 희망이 순식간에 꺼지자 너무도 실망한 나머지 노래이야기를 다시는 입밖에 내고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모처럼 단둘이 걷는 기회에 평소에 품은 생각을 그와 조용히 나누고싶었다.

《오빠, 내 아무 말 해두 일없지요?》

《원, 여느땐 아무 말이나 막 하다가 오늘은 별스레… 허허허.》

《그럼 기분에 거슬릴수 있는 말 해도 노여움을 안 타지요?》

《나는 그따위 노여움같은것두 모르구 자질구레한 감정의 구속두 모르는 사람이야. 말하자면 쬐쬐한 샌님이 아니라는것쯤은 알아야지.》

《그럼 말할래요. 왜 변호연이란 학생을 그렇게 가까이하나요?》

순간 경태는 너무나 의외의 질문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니, 그가 어째서? 지금 우리 학급에 그만한 친구가 도대체 몇이나 되게…》

《나는 왜서인지 그 학생이 딱 싫어요.》

《싫다니? 그처럼 박식하구 견문이 넓은 학우를 나무리다니, 아직 잘…》

《어쨌든 난 싫어요. 추근추근해보이는 그 성미, 능글능글한 그 눈웃음이 다 역겨워요. 한두번 보고 속단하는게 경망스러울지는 몰라도 싫은건 싫은거지요. 그런데 오빠방에는 왜 그를 자주 드나들게 하나요?》

《설향이, 사람을 겉모양으루 함부로 평가하면 안돼. 그는 세상 안 가본데가 없구 학과실력이랑 뛰여나서 철림의 다음가는 드문 수재라구.》 경태는 설향의 말을 애당초 들으려고도 안했다.

《물론 학우들과 사귀는건 오빠의 자유예요. 하지만 오빠는 그를 알면 얼마나 깊이 알구있어요? 또 사귄지가 불과 얼마예요? 또 그와만 지내 접촉이 잦으면 형제나 다름없는 철림씨와 간격이 나지 않을가요?》

문득 경태방의 절반크기만 한 하숙방이지만 흠잡을데 없이 알뜰하고 책상우에는 교과서와 학습장밖에 놓여있지 않던 철림의 검소한 방이 설향의 뇌리에 떠올랐다.

《오빠의 방에 서적도 많고 그가운데 혹 경찰들이 눈을 밝히는 금지서적들도 있을수 있지 않나요.》

경태는 자기가 우상하는 호연을 더 변호하고싶어하는것 같았으나 종시 입을 더 열지 않았다.


경태가 돌아간 후 철림은 학교에 불리워나갔다.

고보에 배치된 현역장교는 학급장들에게 요즘 학도들이 교련시간에 거뜰거리며 마지못해 참가한다느니, 이것은 국시를 건성 대하는 불온행위라느니, 심지어 《궁성요배》때 허리를 45도이상 굽히지 않는것까지 거들며 판박이훈시를 했다. 그 구역질나는 훈시를 귀아프게 듣다 나온 그는 심사가 잔뜩 사나와져 어슬어슬한 골목길로 터벅터벅 걸어오고있었다.

바로 그때 뒤에서 《여 생도, 거게 좀 서라구.》하는 거들먹진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장바 한기장쯤한 뒤에서 두 젊은 놈이 서슬이 퍼래서 쫓아오고있었다. 한놈은 다부진 체구에 아래턱이 쑥 삐여진데다 이마가 밭고 눈찌가 사나와보였다. 다른 놈은 키도 후리후리하고 양간하게 생겼으나 상판에 야비한 비웃음을 띠고 입귀를 실룩거리며 기신기신 다가왔다.

철림은 같잖게 놀아대는 꼴이 셈판없는 막놈들같아 흥 코웃음을 치며 되돌아서서 스적스적 걸었다. 그러자 《여, 너 귀머거리야? 서라는 소리 못 들었어?!》 하며 두놈은 씽 앞질러와서 철림의 앞을 딱 막아섰다.

《대체 거기는 누구들이요? 말이 좀 험하구만.》

철림의 어조는 예상외로 유순하면서도 위압적이였다.

남들처럼 흔히 대뜸 맞대들념을 않는 그의 여유작작한 거동에 한풀 꺾인 두놈은 잠시 머뭇거렸다.

체구가 다부진 놈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

《네가 우리 대장형님을 까눕힌 그 생도놈이지?》

철림은 피뜩 짐작이 갔으나 시침을 뚝 따고 천연스럽게 되물었다.

《뭐, 대장형님? 그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요?》

그러자 양간한 놈이 조그만 주먹을 들고 홀라닥거리며 《그래 네놈이 우리 대장형님을 장마당에 쳐눕히구두 무사할줄 알았어?》 하고 금방 달려들듯이 팔소매를 걷었다.

《아, 그러니까 그 〈박부르도그〉의 패거리요?》

《이 새끼 말 조심해. 〈박부르도그〉가 뭐야. 주먹맛 좀 봐야 정신 들겠어?!》

그 순간 철림의 얼굴색이 무섭게 확 변했다.

《야, 너네들 〈박부르도그〉가 단매에 뻐드러진 소문을 다 들었겠는데 쉬파리처럼 자꾸 시끄럽게 굴지 말구 당장 물러들가! 괜히 경치기 전에. 뼈마디가 성한게 근질거려 그래?!》 하고 철림은 눈섭 하나 까딱 안하고 막아선 두놈사이를 쇠통같은 어깨로 헤치며 배포유하게 발걸음을 느릿느릿 옮겼다.

두놈은 너무도 자신만만하고 침착한 그의 고압적인 태도에 기가 딱 눌리워 감히 덤비지 못하고 얼빠진 모양으로 멍청해 서있었다. 저바로의 토담모퉁이에서 《박부르도그》는 구원을 바라듯 돌아보는 두놈에게 빨리 따라가 까눕히라는 손시늉, 입시늉을 해보였다. 철림은 지금 박가가 필경 어디에 숨어서 이 광경을 낱낱이 보고있으리라는 짐작이 들었다. 이 두놈이 나를 까눕히면 즉시 나타나 나를 더 짓밟고는 마치도 제가 까눕힌듯이 허세를 부려 자기 체면을 구차히 회복해보려는 어리석은 흉심에서 꾸민 연극일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마음이 한껏 긴장됐다. 여차직하면 이 두놈을 단매에 족쳐버릴 강심을 먹고 등뒤로 놈들의 동정을 가늠하며 우정 걸음을 늦추었다. 얼핏 길도랑에 나딩구는 사이다병에 눈이 미쳤다. 그는 얼른 사이다병을 잡아쥐였다. 뒤따르던 두놈은 그가 사이다병으로 저들을 까려는줄 알고 비실비실 뒤로 물러났다. 철림은 왼손으로 사이다병을 움켜쥐더니 오른손칼로 손쉽게 병모가지를 툭! 잘라버렸다. 그 순간 눈이 꼭뒤까지 뒤집힌 두놈에게 철림은 씩 쓴웃음을 지어보이고는 목없는 병을 획 팽개친 다음 가던 길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두놈은 병모가지를 허둥허둥 주어들고 박가에게 황급하게 달려갔다.

지레 겁을 먹고 철림의 위압적인 서슬에 눌리워 꼼짝 못하는 제 졸개들의 꼬락서니를 속이 울컥울컥해서 낱낱이 지켜보던 《박부르도그》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나는듯이 담모퉁이를 벗어나 큰길로 씽 달려나오며 고함을 질렀다.

《야!- 최철림, 이 개새끼야. 거기 좀 서라!》

철림은 미친듯 한 고함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태연하게 돌아섰다.

금시 잡아먹을듯이 달려오던 박가는 정작 철림이와 정면으로 떡 마주치자 흠칫하고 우뚝 멈춰섰다.

박가는 험상궂은 상통을 잔뜩 구겨가지고 씩씩 숨을 톺으며 씨벌이였다.

《야, 이 새끼, 내 오늘도 네놈을 요정내지 못했지만 두고보자. 내 어느때든지 네놈을 기어코 보복하고야말테다!》

행색은 장마당때와 조금도 다름없었으나 단지 게다짝 대신 누런 군화를 신은 《박부르도그》가 더 다가오기 두려워 멀찌감치에서 게거품을 물고 을러메는 흉한 몰골을 가소롭게 마주보던 철림은 어처구니없어 힝 코웃음을 치고는 되돌아서 유유히 발걸음을 옮기였다.

《박부르도그》는 마치 울분을 마저 새기지 못한 분풀이를 하듯 발로 땅을 탕 구르며 제풀에 딩딩 날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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