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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두번째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리자 학생들은 교실에서 우르르 밀려나와 계단아래 운동장으로 흩어져갔다.

셋째 시간은 체조여서 철림은 학급생들과 함께 높낮이로 잇달린 철봉대가까이로 다가갔다. 어떤 학생들은 목마를 여섯개 단으로 틀에 맞추어 올려쌓고 체조발판과 깔개를 목마앞뒤에 들어다놓고있었다. 그런데 변호연은 그중 제일 높은 철봉에 가볍게 매달려 뽐내듯 몸을 앞뒤로 폭이 크게 휘돌리며 대차를 하고있었다. 여러 학생들이 입을 헤벌리고 부러운듯 바라보고있었다.

철림은 뒤따라오는 경태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저 친구 보기와는 다른데. 대차를 꽤 하누만.》

《넌 아직 모르니? 체질이 저래뵈두 한다하는 야구선수야. 동래고보 포수였대.》

경태는 큰 자랑거리나 알고있는듯 시틋해서 그를 추어주었다.

《너는 저 호연에 대해서 모르는게 거의 없구나.》

《그걸 모르면 경태가 아니지. 사귀여보니 진짜 괜찮은 친구야. 우선 아는게 많거던. 실지 수학이나 리과에서는 너 다음자리는 차지할것 같애. 거기에다 세계명인들의 일화에두 정통했더라구. 〈공산당선언〉두 다 통달한 치야.》

철림은 눈이 휘둥그래지며 목소리를 죽여 놀랍게 물었다.

《뭐, 〈공산당선언〉을? 그래 제 입으루 그런 말을 하던?》

《응, 조금도 꺼리는 기색이 없이 막 말해.》

《그 말을 듣고 너는 뭐랬니?》

《너 과연 대단한 열독가구나. 혹시 너 무슨 주의자가 아니야? 했더니 픽 웃고말아.》

철림은 별안간 마음이 바싹 긴장되였다. 그렇듯 위험천만한 말도 꺼리낌없이 드러내놓고 한다는것이 저으기 미심쩍었다. 그에 대한 인식이 한순간에 홱 달라졌다.

《철림이, 호연은 너한테 범접하기가 힘들대. 너무 깔끔하고 꼬장꼬장하다나. 그는 벌써 우리 학급생들의 집이나 하숙집을 거의 방문하는것 같애. 그래서 그와 친해진 학생들이 많다구. 너두 좀 그와 친숙해져보라구. 그래서 손해볼거야 없지 않나.》

그때 공부시작종이 울렸다.

키가 구척같은 엄격한 체조교원이 벌써 교원실앞 계단으로 내려오고있었다.

철림은 학급생들을 철봉대앞에 체조대형으로 세웠다.

철림은 호연에 대한 말을 들은 다음부터 평소에 품고있던 석연치 못한 생각들이 지꿎게 머리를 들었다. 본시 아무와나 엄벙덤벙 함부로 사귀지 않는 철림은 솔직히 호연이 전학해온 첫날부터 그닥 마음에 싸하지 않았다. 두꺼운 눈까풀밑의 눈꼬리가 치째진 게슴츠레한 눈에 노상 비양스러운 웃음기를 담고있는거며 별안간 그 누구의 호통소리나 그 어떤 둔중한 울림에도 그 웃음기가 싹 사라지고 은연중 살기가 비끼는 그 눈초리가 싫었다. 또한 말도 일부러 꾸며서 멋지게 하려는거며 자기의 개방적인 성미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조심하는것 같은 행동거지가 비위에 거슬리였다. 아무리 주목을 돌려야 진실미가 없는 그와 마음의 가면을 쓰고 친숙해질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가 왜 학급생들의 집집을 차례로 극성스레 찾아다닐가?

문득 호연이가 《공산당선언》을 통달했다던 말이 칼끝처럼 상기되였다. 그가 왜 그 말을 하필 경태앞에서 꺼냈을가? 그 어떤 효과를 노리는 심리적 미끼는 아닐가? 다음순간 철림의 뇌리에는 그런 말이 그 누구의 귀에 들어가도 (설사 고등계의 귀에 들어가도) 무방하다는 담보에서 한 말일수 있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신경이 곤두서고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오늘 히라오까는 해종일 저기압상태에 있었다.

(쳇, 고작해서 판임관인 주제에 걸핏하면 고등계일을 시비하고 시까슬러? 티껍게!)

워낙 그는 사상범을 덮어놓고 몽둥이찜질로 가혹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줄곧 주장하는 경찰서장 미우라 사마또를 우습게 보고있었다. 그 상통부터가 마주 대하기 역스러웠다. 몸집이 거쿨진 그는 이마가 좁고 털구멍이 숭숭한 볼따귀가 축 늘어진데다 귀바퀴에 테굵은 안경다리를 걸치고 별찮은 일에도 밭은 목을 잔뜩 뒤로 젖히며 큰입을 벌리고 와하 웃음을 터뜨릴 때에는 보철투성이의 이발과 이몸까지 벌겋게 드러났다. 게다가 말을 한마디 하고는 입을 쩝쩝 다시는 추한 버릇이 있었다.

그는 오늘 조회시간에 묵은 한무선건을 들추며 고등계가 졸고있다고 시비했다.

《보란 말야. 한무선두 장백현에서 검속됐다지만 그의 본터야 여기 혜신이 아닌가. 그와 련관있는자들이 적지 않을텐데 보석기간에 련루자 단 한명두 색출 못하지 않았는가! 미행과 감시를 전업으로 하는 형사들은 눈깔이 다 멀었는가. 이렇게 멍청해들 있으니 관할구역내의 치안유지가 바로 될턱 있나 말야.》

《사상범》을 다루는 묘리 하나 터득 못한 우직한 미우라의 심술이 못마땅하기 이를데 없었지만 실지 그의 말이 그른데야 없지 않은가. 히라오까는 언제인가는 필경 미우라의 눈을 화들짝 뒤집어놓게 될 문흥지구의 첩보활동을 건건이 지휘하면서도 손수 제가 씨를 뿌린 혜신고보에 대한 정보수집에 늘 신경을 날카롭게 도사리고있었다.

…어느날 저녁 히라오까는 혜림일본료리집 뒤골방에서 연미복차림을 한 변호연과 만났다. 그는 먼저 접대부한테 그 누구도 얼씬하지 않도록 침을 놓았다.

히라오까는 백학주병을 기울여 술잔에 찰찰 부어 호연에게 권했다.

《호연군, 우선 한잔 들라구.》

호연은 《전, 학생인데…》 하고 너무 송구하여 몸둘바를 모르며 굳이 사양하였다.

《오늘 저녁은 학생이 아니야. 마음놓구 쭉 들라구.》

히라오까는 그가 술 한잔을 다 들이키도록 지켜보고서야 자기도 잔을 들었다. 그는 그동안 호연이 렴탐한 내용들을 심중하게 새겨들으며 내심으로 나무랄데 없는 적임자를 택한 자부심을 느꼈다.

아직은 석연치 못해도 희망의 싹은 찾은셈 아닌가!

학급생들의 가정과 하숙집 방문같은것은 미리 튕겨준것도 아닌데 자체로 고안해낸 그 방법이 신통하게 여겨졌다. 그는 벌써 스물두명 학생들의 집주소며 학부형들의 성명, 직업, 래력, 그들이 즐기는 도서에 이르기까지 가능한껏 알아낸것이다. 또한 그들과 함께 자면서 그들의 속내도 자연스럽게 뽑아낸것이였다.

히라오까는 지지콜콜한 밀고를 흥미진진하게 듣다가 경험자연하며 훈계하였다.

《이제부터 가정방문같은것은 그쯤했으면 당분간 좀 삼가하는게 좋아. 모조리 찾아다니면 딴 속심에서 그러잖나 하는 의심을 살수도 있어. 무슨 일이든 도를 넘지 않는 정도에서 일단 멈추는것도 나쁘지 않아.》

《네. 저도 좀 그런 생각이 없지 않았습니다.》

《자, 또 들라구. 오늘은 맘 푹 풀어놓아두 돼. 보는 놈두 올 놈두 없어. 》

히라오까는 돼지발쪽접시며 은어안주접시를 호연의 앞에 가까이 옮겨놔주었다.

《그새 속이 꽤 클클했겠는데 실컷 들게. 그래 그 두상태기네가 섭섭히 구는 일은 없던가?》

《네. 눈치를 슬슬 살피면서도 푸대접은 안합니다.》

《그럴테지. 고등계덕으루 살아가는 능구렝이같은 놈들이니까. … 그래 지금 학급생은 서른여섯이라구?》

《네. 자택생이 스물한명이구 하숙생은 열넷, 자전거통학생 한명입니다. 》

《음, 그만했으면 학급생 반수이상은 초벌로 주물러놓은셈이군.》

《그런데 학급장만은 만만치 않습니다.》

그 말에 히라오까는 들었던 잔을 도로 상에 놓으며 날카롭게 반문했다.

《뭣이, 학급장?》

《네, 최철림이라구 하숙생입니다. 그는 동정심이 많아서 인기가 대단합니다. 한번은 자전거통학생이 철봉을 하다가 발목이 부러졌는데 학급장은 그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그밤으로 오십리길을 되돌아왔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부터 인기가 더 바싹 올랐습니다.》

히라오까는 안경속의 송곳눈을 쪼프리면서 그의 말을 들었다.

《그런데 그는 너무 깔끔하고 절대로 허투루 놀지 않고 빈소리를 모르는 꼿꼿한 성밉니다.》

《바루 그런 놈한테 바싹 접근해야 돼. 허접스러운 놈 열명보다 그렇게 속에 알이 박힌 한놈이 더 쓸모있단 말이야. 그런데 군은 동급생인데 왜 그와의 접촉을 꺼려하는가?》

호연은 어색한 표정을 짓고 뒤더수기를 긁으며 변명하듯 말했다.

《그에 대한 말을 많이 들었대서 그런지 정작 그와 마주서면 마치 저의 속을 파헤쳐보는것 같아 마음이 켕기군 해서…》

《그렇단 말이지. …》

머리를 주억거리며 듣던 히라오까는 그가 학급장을 어지간히 두려워한다는것을 직감했다.

《그러면 학급장의 측근들가운데서 그중 나꾸기 쉬운 학생은 누구던가?》

그 물음에 호연은 자신있게 답변하였다.

《그건 신경태입니다.》

《음, 신경태. 롱구주장 말이지?》

《네, 옳습니다. 어떻게 그리 잘 아십니까?》

《아, 혜신고보를 전국에 소문낸 신경태라는 이름을 모를수 있나. 오꾸마교장두 코에 걸구 자랑하더군.》

《그와는 첫날부터 제꺽 친해졌습니다. 본시 신경태는 귀가 넓어서 내 적당히 꾸미는 말두 죄다 진담으로 믿구 호기심이 동해하거던요.》

《하하하, 괜찮아. 참 걸작인걸.》

《그리고 제가 초점을 두는건 경태가 바로 학급장과 한고향에서 자란 짝친구라는것입니다. 사립대성학교두 같이 다니구…》

《뭐, 사립대성학교 동창?》

《네. 》

그렇다면 이미 밀고받은대로 그들이 바로 혜신고보에 진학해왔다는 어제날의 한무선의 제자들이 아닐가? 히라오까는 여직껏 뜬금으로 알고있던 산발적인 현상들이 한타래에 점점 꿰여지는것 같아 속이 흥그러웠다. 들어보면 경태라는 인물은 남달리 흥미를 끄는 주목할만 한 가치가 있었다.

그는 호연이 술 몇잔에 얼근하게 술기가 올라 경태의 일거일동에 대하여 불어대는 말을 꺾지 않고 귀담아들으면서 제딴의 생각을 정리해나갔다.

신경태가 실지 독서에는 별로 취미없으면서도 각종 서적을 도서관처럼 장서해놓았다는것, 여름방학에는 류행가수로 이름을 날리고싶어 서울에 가서 류행가 한곡을 취입하였다는것, 그때 서울에서 본 한 일본의 발성영화에 혹해서 두고두고 이야기하더라는것, 아버지의 덕에 호강한다는것… 호연이 자기의 생각을 보태지 않은 사실이기때문에 그는 더더욱 흥미있게 들었다.

(신경태- 허울, 겉치레, 인기, 호색기, 류행…)

그는 마치 경태의 본성을 몇개의 단어에 함축하듯 예상하여 머리속에 새겨넣었다. 그의 지난 경험에 의하면 이런 류의 인간들은 대체로 다루기 쉬웠다.

그러나 그는 묘연한 일을 서뿔리 파헤쳐보려는 얕은 수는 극력 경계하도록 호연에게 단단히 못을 박았다.

《조선속담에 〈서둘러 씨를 뿌린자는 미숙한 결실을 낳는다.〉는 말이 있어. 우리 일에서 조급성은 금물이야. 언제인가 말했지만 벙어리처럼 눈치가 빠르면서두 눈건사는 잘해야 돼. 지나친 호기심은 겉에 드러내지 말구. …》

《예, 명심하겠습니다.》

한순간 호연은 경태의 속을 슬그머니 뽑아보려는 조바심에서 어망결에 《공산당선언》이야기를 꺼낸 실수가 섬찍하게 뇌리를 쳤다. 그렇지만 주임의 앞에서 감히 그 말을 입밖에 꺼낼수가 없었다.

《지금은 텅빈 공간에서 무엇을 찾는것 같은 허망한 생각두 들수 있을테지만 불원간에 필경 큰고기가 잡힐수 있을거네. 그러니 〈꼭지가 물러야 감도 떨어진다.〉고 지구성, 진지성, 인내성, 이것이 성공의 비결로 될수 있는거야. 내 말뜻을 알만 하지?》

《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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