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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은해는 비통한 소식을 가지고 철림을 찾아왔다.

창백한 갈구리달빛이 어수선하게 드리운 우시장쪽 뒤거리를 걸으며 은해는 울음에 잠긴 목소리로 말하였다.

《오빠는 숨을 거두기 전에 철림씨와 경태씨를 자꾸만 찾았어요.》

철림은 그만 숨이 꺽 막히였다. 그리도 빨리 가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것이다.

《아버지는 밀정놈들이 눈밝히는 기미를 채고 누구도 집에 얼씬하지 못하게 엄하게 신칙하셨답니다. 그래서 철림씨에게 제때에 알리지도 못했어요.》 은해는 또 울음을 삼키며 흐느끼였다.

《오빠는 림종시각까지도 노상 웃는 얼굴로 집안사람들을 위로하다가 조용히 혁명가요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2절은 마저 부르지 못한채… 오빠! 하고 아무리 안타깝게 어깨를 흔들어도 그만… 흑!…》

은해는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고 오열에 떨었다.

철림이도 눈굽이 확 달아오르며 눈물이 솟구쳐올랐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여 눈물을 닦았다.

은해는 곧 눈물을 거두고 경관놈들이 눈깔을 까뒤집고 장례를 훼방하던 자초지종을 말하였다.

사이또놈은 졸개를 달고와서 한무선의 묘는 아무데나 못 쓴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생때같은 조카를 죽게 만들고도 시신앞에서까지 모질게 구는 놈들을 칼날같이 쏘아보던 은해의 아버지는 결이 올라 쏘아붙였다.

《여보, 사람이 죽어서까지두 제 땅에 마음놓구 묻히지 못한단 말이요? 그것도 법이요?》

그러자 깔따구같은 사이또는 생쥐눈에 독기를 번뜩이며 꽥꽥 고아댔다.

《뭣이? 〈황국신민〉이란게 아직두 〈조선총독부령〉 제160호도 모르는가? 한무선 같은 사상범의 무덤을 쓰거나 묘비를 세우는것도 도지사의 허가를 받아야 한단 말이야.》

아버지가 형사놈의 면박을 당하는것을 보고 은해는 도저히 참을수 없었다.

《무선오빠가 형무소안에서 학살되였거나 사형당한것도 아니고 병보석으로 집에서 잘못된건데 그 부류와는 다르지 않는가요?》

《이것 봐라, 학식 꽤나 있다구 떡떡 맞서는데 이거나저거나 같구같단 말이야. 괜히 법과 엇서면서 제멋대루 당국의 허가없이 무덤을 썼다가는 네 애비는 1년 징역이나 금고형을 당하구 벌금 200원을 즉시 지불해야 한단 말이다.》

그날 사이또놈은 은해에게 못다한 화풀이를 하듯 무선의 방을 발칵 뒤지면서 은해가 미리 감추고 남은 책들을 일일이 번져보고는 방바닥에 마구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사진첩에서 무선의 독사진이든, 기념사진이든간에 그의 얼굴이 찍힌 사진은 모조리 뜯어 회수해갔다. 그로부터 나흘만에야 무덤허가가 나왔으나 그것도 형사의 립회하에 써야 했다.

철림은 기가 막히였다. 온몸이 경련이 일듯 부르르 떨리였다. 나라잃은 인민의 개개의 운명도 이제는 막다른 지경에 이른것이다.

《은해씨,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한무선선생님은 우리에게 삶의 등대를 안겨주고 가셨습니다. 선생님은 비록 우리곁을 떠나시였으나 우리 마음속에 언제나 살아계실겁니다.》

은해는 오빠에 대한 그지없는 존경심을 품고 높이 세워 말하는 철림을 동경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웬일인지 그는 오빠를 잃은 사무치는 아픔과 허전하기 이를데 없는 마음을 철림이가 가시여주고 고스란히 지켜줄것만 같았다.

이튿날 철림은 공부를 마친 후 경태와 함께 혜신물동에 나갔다.

물동은 역너머 철길뚝아래에 있어 사람들 왕래가 비교적 번잡은 했으나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장소로서는 그중 맞춤한 곳이였다.

금방 오후떼가 내린듯 대천강황토물이 솟구치며 흘러들어 물동에 고인 푸른 물에 물감을 들이듯 점점 퍼져갔다. 숱한 녀인들과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저마끔 식칼을 들고 방금전에 비끄러맨 떼뚝에 새까맣게 올라 원목껍질을 벗기여 광주리들에 담고있었다. 이 원목껍질은 주민들의 귀한 화목으로 쓰이였다. 한편 떼목사업소 로동자들이 두명씩 짝을 지어 긴 갈구리로 물에 뜬 통나무들을 찍어 끌어내면 든장군들이 레루식 통나무미끄럼대우로 올리굴려서는 토장에 쌓군 하였다. 그들은 토장로동자들과 초간히 떨어져 원목더미우에 나란히 앉았다.

철림은 오면서 경태에게 무선선생의 최후를 알려주려다가 그가 발작적으로 목소리를 높일것 같아 꾹 참고 여기까지 왔던것이다.

《경태, 한무선선생님이 돌아갔어.》

《뭐?! 언제?…》

아닐세라 그의 목청이 어찌나 높았던지 저만치에서 원목을 쌓던 사람들도 일제히 돌아보았다.

《목소릴 좀 낮추라구. 닷새전에 숨을 거두며 너와 나를 찾으셨네.》

한순간 경태의 눈구석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야- 그 선생님이 그렇게두 쉽게 가시다니…》

《정말, 귀중한분을 잃었어. 우리한테 형님같은분이였지.》

경태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야, 이젠 이 세상에서 그 선생님을 다시는 볼수 없게 되였구나. 사실 소학교때부터 내가 키두 크고 체육감각이 예민하다며 롱구를 배워주구 선수로 키워주신것두 바루 무선선생님이였어.》

철림은 가슴이 무너지듯 한숨을 지으며 갈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두 선생님의 비보에 접한 순간부터 줄곧 인생이란 과연 무엇인가? 삶과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더군. 그러나 선생님의 생은 짧았지만 참말로 보람있는 생이였어. 김일성장군님을 만나 뵈웠고 그 고귀한 신념으로 놈들의 그 무지스러운 고문두 끝까지 이겨냈거던. 남들같으면 한생을 다 살면서두 오르지 못할 상상봉에 오른 선생님이 나는 참으로 부러워. …》

경태는 심금을 찡 울리는 철림의 말을 묵묵히 새겨들었다.

《그런데 지금 우린 어떻게 사니? 머리 큰것들이 매일같이 그 치욕스러운 생활을 책장번지듯 하면서 무지렁이처럼 지내는 가련한 신세… 경태, 간도에서는 10대의 처녀들두 빨래방치로 왜놈순사를 까고는 총을 뺏어메구 유격대를 찾아간대. 얼마나 장한 처녀들이야. 그에 비하면 우린 산채루 썩고있는것 같아.》

《그렇다구 우리로서야 뾰족한 수가 없지 않니. 너한테 무슨 방도라두 있니? 당장 우리한테 일감이라두 있니? 또 일감을 주는 사람이 있기라두 하니? 더구나 여기는 간도땅하구 다르지 않니.》

경태는 열을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경태의 말이 옳았다. 지금은 사면팔방이 숨막히게 꽉 막혀있지 않는가. 마치 붕락으로 갱속에 묻혀 실날같은 바깥빛이라도 찾아내고싶어 단말마적몸부림을 치는 광부의 막막한 심정과 다를바없는 신세라고 생각되였다. 그 순간 철림의 뇌리에 삼포목재소 함바로동자들이 《친목계》를 무었다던 박포덕의 말이 피뜩 떠올랐다.

《경태, 우리 친한 동무들끼리 친목계 비슷한 조직을 무어보는게 어떨가?》

《뭐, 친목계?…》

《목재소에 가보니 그곳 로동자들이 친목계라는 조직을 뭇고있었어. 물론 도처에서 모인 사람들이 서로 마음을 합치구 서로 부조하고 협력하는 계였어. 이름은 달리 달더라두 우리들속에두 그와 비슷한 조직이 필요하지 않을가?》

《나두 어느 고보에 독서회, 어느 농전에는 동창회가 있다는 말을 풍문에 들은적 있어. 그런데 계나 회 같은 조직을 내오려해두 지반이 있고 주동인물도 있어야 하겠지?》

《…》

철림은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는 무선선생이 남기고간 고결한 뜻을 품고 자그마한것일지라도 이루어놓는게 도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실지 그 방도를 심심히 무르익혀본 일은 없었다. 경태의 말대로 지반이란 곧 정치적지반을 의미하는거겠는데 그러자면 뜻이 같은 사람들을 한데다 결속해야 할것이다. 이를테면 사람들을 결속하기 위한 중심축과 중심인물이 있어야 할게 아닌가. 하지만 지금은 이런 문제를 드러내놓고 상론할 사람이란 경태밖에 더 없지 않는가. 자신은 대중없이 윽윽하며 울분이나 토했지 그 어떤 형태의 조직을 꾸리기 위한 실질적인 방도를 심사숙고해본 일이 없었다. 또 주동인물에 대해서 심중히 생각해본적도 없었다. 더더구나 자기가 주동인물이 될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못해보았었다. 기초가 없이 건축물을 세울수 없듯이 지반없이 조직을 내올수 없는것이다. 가령 조직을 내오자면 무엇을 기준으로, 무슨 방법으로 꾸리겠는가? 철림은 지금처럼 막막한 상태에서 명백히 이끌어줄 따뜻한 손길이 안타깝게 그리워지기는 처음이였다. …


*


《아, 경태군이야 한갖 학도로서 우리 고보를 전국에 소문낸 학교의 자랑이고 재사지요.》

오꾸마는 입에 발린 칭찬을 늘어놓으면서도 아까부터 책상우에 놓인 병문의 자그마한 누런 가방에 넌지시 눈길을 주군 했다.

《교장선생님, 그건 지나친 과찬이십니다.》

덩지 큰 병문은 너무 황송하여 손을 마주쥐고 주무르면서 땅딸보교장에게 민망스럽게 발라맞추었다.

《아니지요. 그거야 세상이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좌우간 신상은 아들 하나를 잘 두었습니다. 또한 신상부터가 내지인 못지 않게 국어에두 능하구 황국신민의 본보기 되고있으니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구 경태군두 천황의 적자다운 모범학도지요.》

오꾸마의 과찬에 감지덕지해진 병문은 허리를 굽히고 일어나서 누런 가방을 열고 미농지에 겹으로 싼 돈뭉치를 교장앞에 슬그머니 밀어놓았다.

《교장선생님, 약소합니다만…》

오꾸마는 내심으로는 그 돈뭉치를 덥석 움켜쥐고싶었으나 공연히 손을 홰홰 내저으며 도로 내밀어놓는 시늉을 했다.

《아, 이러지 마시오. 번번이 이러시면 내 립장이…》

오꾸마는 낯빛이 지지벌개지며 능글맞은 웃음을 띠였다.

《그 못난 자식이 학교당국의 의사에 혹시 저촉되거나 우쭐해서 외람된 행동을 못하도록 교장선생님이 잘 신칙해주십시오.》

《앞으로두 아들 념려는 일절 마시우. 전교적인 모범학도로 계속 떠받들리울겁니다. 》

교장으로부터 아버지가 왔댔다는 말을 들은 경태가 하숙집에 들어서니 예상대로 병문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있었다. 그는 내심 반갑지 않았으나 선선히 인사를 했다.

《아버지 오셨어요?》

《응, 내 영림서에 볼일도 있구 두루 해서 왔다. 그새 무슨 별고라두 없었느냐?》

《네.》 경태는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책보를 책상우에 놓았다.

《네들 한무선선생이 일전에 잘못됐다지?》

《예. 》

《벌써 그 소문이 남석에두 쫙 퍼졌다. 그래 그 선생의 수제자들이였던 철림이나 너한테 무슨 탈이라도 잡힌게 없느냐?》

《참, 아버지두. 우리한테 탈 미칠거야 뭐 있겠나요.》

병문은 입이 쓴듯 권연 한대를 은담배곽에서 뽑아 입에 물고 성냥을 드륵 그었다. 그는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진중하게 말했다.

《지금 시국에야 소소한 일에두 그 잔뿌리까지 서캐훑듯이 참빗질을 해대는 판인데 어느 코에 걸려들지 어찌 안다더냐. 내 요샌 꿈자리까지 뒤숭숭해서 마음 못 놓구 지낸다.》

경태는 너무나두 세상물정에 어둡고 자살궂은 아버지의 생각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는 아버지의 지긋지긋한 잔사설을 꾹 참고 한참동안 듣다가 한마디 하였다.

《아버지, 앞으론 제발 제 문제때문에 학교에 찾아다니는 괜한 수고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그게 무슨 소리냐?》

병문의 부리부리한 눈살이 곳곳해졌다.

《내가 아직두 제 앞처리를 못할것 같아 창피하게 교장선생이랑 만났는가요.》

《아니, 내가 교장을 만나면 너한테 리로우면 리로왔지 해될것은 뭐냐? 해가 될건 뭐냐 말야?》

병문은 하숙방이라는것도 잊은듯 왈칵 어성을 높였다.

《아버지, 다 듣겠어요. 목소리를 좀 낮추라요. 난 정말 그렇게 하는게 싫어요. 다시는 내 자존심을 꺾는 일은 그만두십시오.》

《자존심? 허-어, 그따위 말라빠진 자존심이 뭣에 필요해. 이 아버지 하는 일은 하나에서 열까지 다 너를 위한것이다. 그 일이 뭐 맨주먹으로 되는줄 아냐?》

경태는 그 말에서 교장한테 또 돈을 찔러주었다는것을 직감했다. 그와 같은 굴욕적인 뒤거래를 철림이가 알게 될가봐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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