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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밤 병보석으로 가석방된 한무선은 담가에 실리워 혜신역에 내리였다.
역홈에서부터 제창 손수레에 옮겨실리워 집에 이른것은 자정이 훨씬 지나서였다. 오랜 시간 차칸에서 시달리운탓인지 가뜩이나 엉망이 된 그의 몸은 신열에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은해는 해종일 무선의 침상곁을 잠시도 뜨지 못하였다.
사복차림을 한 형사 사이또는 밀정까지 달고와서 먼발치에서 집주위를 계속 감시하고있었다.
은해는 땅거미가 깃들고 놈들의 감시의 탕개가 좀 늦춰지는 틈을 타서 은밀하게 뒤문으로 집을 나섰다. 반달음으로 진두경의원네 집에 이른 은해는 설향을 찾았다.
설향은 자기를 찾는 은해의 숨찬 목소리를 인츰 알아듣고 반색하며 뛰쳐나왔다.
《이 어두운데 갑자기 웬일이니?》
마음이 급해진 은해는 그 말에 응대할 경황이 없었다.
《설향아, 아버님이 계시니?》
《응, 계셔. 얼른 들어와. 누가 위급해서 그러니?》
은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목소리를 낮추어 대꾸했다.
《무선오빠가 보석으루 나왔는데 상태가 매우 좋지 못해서…》
설향은 서둘러 아버지를 찾았다.
《아버지, 은해가 왔어요.》
《그래, 어서 들어오래라.》 설향의 아버지 진두경의 푸근한 목소리가 들렸다.
은해는 조심스럽게 치료실로 쓰는 두경의 방에 들어섰다.
두경은 훤칠한 키에 진중한 중년의 의원이였다.
그는 의술이 능해서 항간에서 인망이 높았다. 고학으로 평양의전을 졸업한 다음 순 독학으로 xx제국대학 의학부교재를 습득하고 수십년간의 림상경험을 쌓은 그는 고명한 의원으로 알려져있었다. 두경은 왕진가방을 든 은해를 앞세우고 곧 집을 나섰다.
설향은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두경에게 조용히 당부했다.
《아버지, 주의해서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두경은 딸의 말뜻을 인츰 짐작하고 대답하였다.
《응, 내 알구있다. 걱정말아.》
설향은 은해를 따라 어둑어둑한 골목길로 스적스적 걸어가는 아버지의 뒤모습을 불안한 눈길로 배웅하였다. 병보석으로 나온 《사상범》을 왕진하러 간다는 자체가 그 무슨 언터구를 잡힌것 같아 설향은 사뭇 두렵고 불안하였다.
두경은 침대우에 기신없이 누워있는 한무선의 무릎마디가 부서지고 열손톱, 열발톱이 모조리 뽑히운 험상한 상처에 줄곧 혀를 차며 진찰하고 체온도 재고 청진을 하였다.
《악귀같은 놈들, 한창 젊은 사람을 이렇게 페인으로 만들다니. …》 두경은 기가 막혀 꺼지게 한숨을 지었다.
은해의 아버지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두경의 입만 지켜보았다.
두경은 곪아드는 상처를 깐깐히 처치하였다. 지금상태로는 건질 방도가 없었다. 게다가 위장까지 망그러져 음식물을 전혀 받지 못하였으며 심장도 몹시 쇠약해지였다. 자기로서는 단지 환자의 육체적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치료에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두경은 떠날 때 사진실에서 은해의 아버지와 따로 만나 침통한 어조로 힘들게 말을 꺼냈다.
《한형, 이제는 병이 다 쇴는데 어떡하시겠수. 내 가능한껏 최선을 다하리다. 하지만 마음을 굳게 가지시우. …》
은해의 아버지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였다.
이 거리에서 그중 이야기 상대가 되고 속사정도 털어놓을수 있는 사람인 두경에게 그는 조카 하나 잘 돌봐주지 못했으니 저세상사람이 된 형님앞에 큰죄를 범했노라고 가슴을 치며 통탄했다.
며칠후 은해로부터 한무선이 자기와 경태를 찾는다는 기별을 받은 철림은 제 정신이 아니였다.
그가 병보석으로 실려나온것도 지금껏 감감 모르고있다가 뜻밖의 소식에 접하고보니 가슴은 화들거리고 걸음발이 제대로 놓이지 않았다.
그는 황급하게 경태의 하숙집으로 달려갔다.
《뭐, 무선선생님?! 언제 석방되셨대?》
너무도 뜻밖의 소식에 경태도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런걸 미처 물어볼 경황두 없이 막 달려오는 길이야.》
철림은 경태를 데리고 막 문밖에 나서려다가 피뜩 아까 은해가 조금도 덤비는 기색없이 침착하게 쳐다보며 귀뜀하던 말이 상기되였다.
《오빠는 저에게 자기를 만나는것만으로도 〈요시찰〉대상으로 점찍힐수 있으니 극력 조심하라구 당부하셨어요.》하고.
《경태, 우리 학생복을 갈아입구 가자구.》
《응, 그게 좋을것 같아.》
그들은 곧 학생복을 서둘러 벗고 경태방에 걸려있는 아무 옷이나 급히 벗겨입었다. 바깥에 나선 그들은 일부러 태연한 자세로 비좁은 뒤골목길로 스적스적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북일사진관이 저만치 바라보이는 길모퉁이에서 잠시 주위의 동정을 살피였다. 철림이 먼저 사진찍으러 오는척 하며 서슴없이 사진관에 쑥 들어가고 경태는 마침 사진찍으러 오는 신랑신부의 뒤에 묻어 사진관에 슬쩍 들어섰다.
그들이 아무 기척도 없는 방에 조용히 들어설 때 한무선의 침상곁에 있던 은해가 살짝 일어나 마주오며 입에 손가락을 대보였다.
《이자 방금 잠드셨어요.》
그들은 무선의 침대가에 바투 다가앉았다. 무선은 눈확이 움푹 꺼져내리고 관골만이 앙상해졌다.
바른쪽다리에는 온통 붕대를 감싸고 마치 침대에 잦아붙은듯 한 기신없는 무선을 보는 순간 왈칵 눈물을 쏟을번 했다. 그리도 펄펄하고 기력이 왕성하던 선생이 이 지경까지 되다니!… 철림은 가슴이 찢기는듯 아팠다. 그렇게도 끼끗하던 그의 옛 모습은 전혀 찾아볼수가 없었다. 사립학교시절 용모가 그리도 쑥 빠진 멋진 선생의 뒤를 따라 줄지어 걸을 때면 그처럼 긍지로와 《모두들 보세요. 우리 선생님이야요.》 하고 자랑스럽게 웨쳐보고싶었던 선생님이였다.
불현듯 선생님과 더불어 흘러간 가슴아픈 가지가지 추억이 물밀듯 뇌리에 떠올랐다.
무선은 무슨 기미를 감촉했는지 한참 지나서 스르시 눈을 떴다. 아직 정기만은 잃지 않은 그 두눈에 기쁨이 확 실리였다.
《아니, 이게 누구들인가! 철림이, 경태… 얘, 은해야.》
문앞에서 밖을 살피던 은해가 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웃몸을 일으키고싶어하는 무선의 눈치를 챈 그들은 무선의 어깨를 조심히 들어올려주었다. 은해가 담요를 두툼하게 접어 뒤잔등밑에 비스듬히 고여주었다. 그제서야 무선은 말하기가 한결 헐해진듯 철림이와 경태를 대견하게 둘러보며 말을 꺼냈다.
은해는 소리 안 나게 문을 여닫고 밖에 나갔다.
《이제는 다 끌끌한 장정들이 됐구만. 이렇게 다시 만나리라고는 꿈도 못 꿨는데… 정말 기쁘네.》
무선의 눈구석에 눈물이 그득 고여올랐다.
그는 철림과 경태의 손을 잡아주고싶었으나 손톱이 없고 곪아진 손이 스산하여 어쩌지 못하였다.
그것을 알고 두사람은 무선의 량팔을 각기 움켜잡았다.
《선생님! 어떻게 이 지경 되였습니까, 예? 그 악착한 놈들이 어떻게 했기에 선생님의 몸을 이렇게 망쳐놓는단 말입니까!》
철림은 울먹거리며 격한 심정으로 말하였다. 그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쭉 흘러내렸다.
《철림이, 진정하라구. 놈들은 내 육체를 이렇게 짓뭉개놓으면서두 내 정신만은 꺾지 못했네.》
무선은 잠간 말을 끊고 마치 먼곳에 있는 한없이 귀중하고 아름다운것을 그리듯 금시 눈에 광채가 돌았다. 이윽고 그는 낮으나 격정에 넘친 목소리로 말하였다.
《철림이! 경태!
갑자기 그의 목소리는 격정에 떨리였다.
《장백현의 자그마한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구있던 나는 어느날 뜻밖에도 이웃마을에 오신
철림이와 경태는 동시에 놀라며 물었다.
《
무선의 두눈에 눈물이 그득하게 맺히였다.
《정말 꿈같은 일이였지.》
무선의 젖은 눈에는 또다시 광채가 돌았다.
《그날
무선은 말을 멈추고 가슴이 벅차는듯 잠시 깊은 숨을 몰아쉬다가 다시 이었다.
《우리는
무선은 또다시 숨을 톺아올리며 동안을 두었다가 말하였다.
철림은 마치도 자기가 직접
《나는 그날 너무도 흥분된 나머지 무엄하게두
철림은 하루고 이틀이고 무선의 이야기를 끝없이 듣고싶었다. 그리고 당장 압록강을 건너 간도로 달려가고싶었다. 한무선이처럼
무선은 한숨 돌리고나서 사뭇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철림이! 경태! 나는 이제 당장 숨이 진대두 아무런 후회가 없네. 머지않는 장래에 2천만 동포가 높이 떠받들어모실 해님을 만나뵈웠구. …》
그는 아까보다 더 가쁘게 숨을 톺았다.
《선생님, 그만 말씀하시구 이젠 좀 안정을 하십시오.》
철림은 걱정에 싸여 이렇게 말하며 옆에 놓인 담요 하나를 더 접어 무선의 등에 받쳐주었다.
《괜찮네. 오늘은 속을 툭 터놓을수 있는 제자들이 곁에 있어 참으로 행복하네. 허허. 사립시절에 내 자네들을 데리구 꼬드래봉꼭대기에서 아슴푸레한 산발들을 바라보면서 그 무슨 형언할수 없는 그리움이 안타까이 손짓하는것 같아 눈을 뗄수 없다구 했었지.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것이
《옳습니다. 그 산발들 뒤에는
철림은 그때의 일이 눈앞에 다시금 떠올라 가슴이 뭉클해졌다. 별안간 그는 그 시절이 몸부림을 치고싶도록 그리웠다. 눈물겨웁고 가슴아프도록 그 시절의 모습을 다 잃은 무선이였으나 정신세계는 비할바없이 심원하고 강의했다.
《물론 여기는 간도와는 달라서 모든것이 놈들의 눈에 빤드름한건 사실이네. 그러나 자네들은 조금두 주눅들지 말구 꿋꿋이 살아나가야 하네. 우리앞에는
철림은 무선의 당부를 심중하게 새겨들으며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무선은 어제도 오늘도 훌륭한 선배이고 스승이였다. 그는 오늘 바로 이 혁명의 진리를 옛 제자들의 심장속에 새겨주고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