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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연의 출현은 36명의 학급생들속에서 각이한 반응을 일으켰다. 촉기가 예민한 학생들은 함흥 같은 큰 도시에서 온 그를 호기심을 가지고 일거일동을 지켜보았으며 학업성적이 높은 학생들은 그의 늘어진 팔자걸음을 비웃으며 시답지 않게 여겼다. 비교적 반응이 뜬 축들은 지내느라면 차차로 알게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그한테 별로 관심을 두지도 않았다.

그러나 함흥에서 전학해왔다는 그 한가지 리유로도 그한테 잔뜩 호감을 느낀 경태는 전학을 온 첫날에 벌써 그의 어깨우에 손을 얹으며 노죽을 떨더니 단 며칠동안에 그를 구면친구로 만들어버렸다.

변호연은 역시 낯들이 설어 가뜩이나 조심스럽고 어색한 공기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준 호남아인 경태가 여간만 고맙게 생각되지 않았다. 호연이 학급생들과 어지간히 어울려 지내던 어느날 경태는 그를 자기 하숙방에 데리고왔다. 그는 하숙방에 들어서자바람으로 입을 딱 벌리며 경탄했다.

《야! 경태씨는 대단한 책부자구만요.》

그는 한쪽벽면을 거의 채운 서재를 넋없이 바라보았다.

《여여, 아직두 무슨 씨야, 그저 경태 하면 되는거지…》

《정말 대단한데… 경태씨는 이 산더미같은 책을 이미 다 읽었겠구만요.》

《허허, 머리가 터지자고 그 많은걸 다 읽겠어? 그저 몇페지 피뜩 보구 무슨 내용인지 짐작하면 되는것이지. 하긴 공부할 때 필요한 내용을 참고하려면 있을 책은 다 있어야겠더라구.》

호연은 경태의 말을 듣는게 아니라 눈을 쪼프리고 책제목을 가려보는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나두 이제부터 이 방의 책을 계속 빌려다 봐야겠는데요.》

《다 가져다 실컷 보라구. 그러나 아무리 애써두 철림을 못 따를거야. 그는 거짓말 보태서 아마 이 서재의 책을 두세번씩은 몽땅 다 봤을거야.》

《그래요?! 학급장이 대단한 애독자구먼요.》

경태는 철림에 대한 말이 나오자 으쓱해서 그에 대한 자랑을 한바탕 늘어놓았다.

《말하자면 독서광이지. 그는 전교적인 수재야. 시험성적에서두 정해놓은 1등생이야. 소학시절부터 원래 머리가 특별히 좋거던. …》

한순간 호연의 머리속에는 학급생들과 노상 즐겁게 어울려지내면서도 절대로 허튼 말을 하는 법 없고 실없이 남들과 흐지부지하지 않는 절제있고 저으기 침착해보이는 철림의 만만치 않은 모습이 떠올랐다.

경태는 서재앞에 지써 붙어있는 호연에게 방석을 놓아주며 어서 앉으라고 자리를 권했다. 방석을 깔고 마주앉는 그에게 경태는 《내 언제부터 물어보려던 참인데 왜 함흥 같은 큰 도회지에서 이 잘난 혜신 같은데 오게 됐나?》 하고 물었다.

그러자 호연은 갑자기 낯빛이 침울해지며 처량한 목소리로 혜신에 오게 된 부득이한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난 사실 거길 떠나고싶지 않았지만 별수 있나요? 평생 청부업을 하던 아버지가 공사장에서 뜻밖에 횡사한 후 얼마 못 가서 어머니마저 중풍으로 돌아가니 나는 졸지에 고아신세가 되구말았으니…》 이렇게 말하는 호연의 눈구석은 돌연 축축히 젖어들었다.

경태는 가슴이 얼얼해지고 측은한 생각이 치밀었다.

《…그 기막힌 사정을 알구 여기 영근삼촌이 당장 오래서…》

그때 하숙집녀인이 사이문을 빠금히 열고 《들여와두 될가?》 하고 경태앞에 앉은 낯선 학생을 희끗 눈짓했다.

경태는 말없이 움쭉 일어나 이미 귀뜀을 한대로 두명분을 챙긴 밥상을 받아 한가운데에 놓았다. 호연은 급히 일어났다.

《왜 일어나?》

《아니, 난 가겠어요. 하숙생활을 하는데까지 와서 페를 끼쳐서야…》 경태는 이렇게 사양하며 가려는 그의 어깨를 눌러앉히였다.

《두말말구 어서 앉으라구. 별루 차린건 없지만 이렇게 만난김에 저녁이나 함께 들자구.》

호연은 내심으로 경태가 자기를 한사코 붙잡기를 바라면서도 우정 못이기는척 하며 밥상에 마주앉았다. 그는 좀 거북해하는듯 한동안 수굿하고 저가락으로 밥을 조금씩 떠먹더니 천연스럽게 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나두 좀 곡절있게 자랐다구 할가. 청부업자인 아버지를 따라 안가본데가 없이 떠살이를 했지요. 부산이요, 대구요, 서울이요, 함흥이요. …》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인 경태는 호기심이 동하여 다우쳐물었다.

《서울에서두 살아보았구만!》

《서울에서야 그중 오래 살았지요. 함흥에서는 얼마 살아 못 보구…》

《넌 진짜 괜찮아. 서울서 오래 살아보구. …여기 혜신 같은건 눈이 딱 감길거야.》

호연은 어리숙한체 하면서 롱구광인 그의 구미를 돋굴수 있는 난데없는 야구이야기를 꺼냈다.

《나두 한때는 체육선수였댔지요.》

《그래?》 경태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호연을 마주 보았다.

《동래고보에 다닐 때 야구부장선생의 강권에 못이겨 야구부에 들어 갔댔구… 선수는 모두 11명이였는데 나는 포수였어요. 그때 지구예선에서는 몇번 이겼지만 패권을 다투는 서울갑자원경기까지는 종시 출전을 못하구 말았지요. 하지만 기념으로 야구장갑만은 지금두 갖구있어요. 》

호연이 체육선수였다는 사실이 경태의 마음을 그한테로 바싹 떠밀어주었다. 경태는 속으로 이제야 비로소 호흡이 맞는 알짜 친구를 만나게 되였다고 환성을 올렸다.

《그래 서울서는 언제부터 살았댔나?》

《재작년부터. 정말 잊을수 없는 곳이지요.》

《넌 참으로 행복자야. 남들은 꿈도 못 꾸는 그 희한한데서 살아온 네가 막 부럽다. 나두 둬번 갔댔지만 그런데서 살아보는게 내 평생소원이야.》

호연의 말에 녹아빠진 경태는 호연이라는 인물을 너무도 희한하고 신비롭게 쳐다보았다.

그들은 밥상을 물린 후에도 마음을 든장질하는 그러루한 한담을 이어갔다. 실지 호연의 이야기는 거지반 꾸며낸것이였다. 그가 여기서 한동안 공부하는 과정에 첫눈을 확 끄는게 바로 신경태였다. 그는 남달리 부접이 매우 좋아서 대하기가 퍽 쉬웠다. 어딘가 모르게 속이 헤프고 호락호락해보이는 그와의 친밀한 관계를 은근히 바라던 차에 다행히 초청을 먼저 받은것이였다.

그러나 변호연은 특무로서는 아직 알쭌한 풋내기에 불과했다. 그 어간에 벌써 여러번 히라오까에게 은밀히 불려가 일체 행동거지에서 약간한 실수가 없을데 대해서와 예상외의 정황처리 묘득에 이르기까지 《실무강습》을 진저리가 나도록 받았었다. 얼핏 겉보기에는 얼뜬한것 같아도 촉기 빠르고 머리가 팽글팽글 도는 호연은 경태와의 생활적인 첫 접촉에서 벌써 허영에 뜬 그의 허점을 찾아쥐였다. 하여 호연은 그의 마음을 바싹 나꾸려고 눈섭 한오리 까닥않고 새빨간 거짓소리를 구수하게 엮어댔던것이다. 물론 그가 부산태생인것만큼 부산은 잘 알수 있고 서울에는 보통학교때 아버지를 따라 한 열흘 다녀온것만은 사실이였다. 그러나 동래고보이야기는 뜬금으로 들은 소리고 함흥에는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 그였다. 가령 경태와 덧나지 않게 곰살궂은 관계만 잘 유지하면 덜렝이형인 그의 속내는 두말할것도 없고 학급생들의 동향도 쉽사리 낚을수 있으리라고 넉넉히 짐작되였다. 또한 하숙방을 요란하게 꾸린거며 기름진 식찬이며가 그의 호강스러운 생활을 립증해주고있었다. 그보다도 그의 관심을 끄는것은 금지도서가 가끔 섞인 요란한 서재였다. 어쩐지 그 서재가 차츰 무슨 실마리로 될것 같은 짐작이 들었다. 또 경태의 방은 얼마나 노란자위같이 알뜰하게 꾸려져있는가. 건숭맞아보이는 경태로서 이렇듯 방치레를 아담하게 할수는 없는 일이였다. 필경 이에는 마음이 찬찬하고 여간 알뜰하지 않는 그 누군가의 손길이 미치고있는것 같은 륙감이 들었다. 그는 과연 누구일가?… 아무튼 여직껏 깊은 우려와 불안으로 막막한 생각에서 헤여나지 못하던 호연은 불과 몇시간동안에 예상외 소득으로 희망의 빛을 찾게 되였다.


*


어느날 오후 좀 느즈막해서 설향은 빨아서 다림질을 한 경태의 흰샤쯔를 꽃문양보자기에 싸서 팔에 걸치고 그의 하숙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하숙집에 이르러 활짝 열어놓은 뙤창으로 얼핏 방안을 곁눈질 해보니 경태가 제빠듬하게 앉아있는것 같았다. 그는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생각없이 반쯤 열린 출입문을 활짝 열어제끼며 《오빠!》 하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다음순간 화들짝 놀랐다.

《어마나!》

경태가 아니라 전혀 낯선 학생이 반사적으로 웃몸을 똑바로 일으키며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순간 눈꼬리가 치째진 그의 눈에서는 살기가 번뜩했다가 사라지는것이였다.

설향은 그만 가슴이 선뜩하였다.

《경태씨는?…》

《방금전에 누가 찾아와서 어데 좀 나간것 같습니다.》 낯선 학생은 상대가 녀학생이라는데 호기심이 동한듯 가느다란 눈이 맞붙도록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인츰 올것 같은데 좀 기다리지요 뭐. …》

학생복앞섶을 헤쳐놓고 추근추근하게 자기를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는 그의 눈길에서는 마치도 구태여 누구라는 소개없이도 층분히 짐작이 간다는 뜻이 느껴졌다.

설향은 샤쯔를 꺼내여 옷장보안의 옷걸이에 걸어둘가, 책상우에 보자기채로 놓고갈가 잠시 망설이다가 공연히 의심을 살것 같아 출입문을 본래대로 반쯤 도로 닫고 되돌아섰다. 그는 뙤창을 피하여 경태를 좀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설향은 자기들의 아늑한 생활속에 난데없이 뛰여든 불청객이 께름직하고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더우기 그의 능글맞은 눈길이 싫었다. 한순간 그의 머리속에는 혹시 그가 요즘에 와서 경태의 입에 자주 오르군 하는 전학생인 변호연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번개쳤다. 그가 분명해. 철림이 이외에는 남들이 그닥 드나들지 않는 경태의 방에 마치 제집이기나 한것처럼 떡 풀어붙이고 앉아있는 거만한 품이 그런 짐작이 가게 하였다.

(첫 대면에 싫은 저런 학생을 왜 그리도 마음에 혹해서 그에 대한 자랑만 잔뜩 늘어놓을가?…)

설향은 경태의 빈방에 낯선 학생이 렴치없이 버티고앉아있는 집뜨락에 점도록 서있기가 멋적은 생각이 들어 발길을 돌리고말았다. 무슨 영문인지 그는 종일 불쾌감을 금할수가 없었다.

마치도 뒤덜미에 붙어있던 송충이를 털어버린 뒤처럼 소름이 끼치였다.

더우기 요즘 설향의 마음을 언짢게 만드는것은 이따금 만나군 하는 경태의 입에서 소꿉동무인 철림에 대한 이야기는 점점 뒤전에 밀리고 변호연에 대한 숭상에 가까운 자랑만이 거듭 되풀이되는것이였다. 이것이 어쩐지 그의 마음을 허전하게 만들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는다더니 경태의 마음속에서 철림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둥지를 틀려는것일가? 경태는 어찌하여 그리도 짧은 기간에, 어찌하여 그리도 쉽사리 마음속 그루바꿈을 하였을가? 지나친 억측일는지는 몰라도 경태에게 별안간에 바싹 접근하는 그 불청객이 자기와 경태사이에, 경태와 철림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암초가 될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언제인가 경태는 변호연에 대한 자랑만 잔뜩 늘어놓던 나머지 그의 아버지가 노상 외우군 했다는 한문시구까지 그한테 들려주었었다.

《〈평생일기, 기좌여산〉, 즉 평생 한번 속임은 그 죄가 산과 같다는 뜻인데 어릴적부터 그런 교양을 받으며 자랐으니 그의 청렴결백성은 알고도 남음이 있지 않아. 보라구. 나는 절대루 친구를 함부로 허랑하게 사귀지는 않는단 말이야. …》 하고 흰소리를 하며 으쓱해하였었다.

그러나 오늘 여직껏 경태의 말만 귀에 못 박히게 들으며 머리속에 미지의 환상적인 인물로 그려지던 변호연을 제 눈으로 보는 순간 설향은 소스라치듯 경악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에 대한 인상은 순식간에 뒤죽박죽되고 그에 대하여 귀가 솔깃하게 들어온 말들은 죄다 거짓처럼 느껴졌다.

(사람을 너무 인상적으로만 보는 나의 지나친 속단이 아닐가?…)

그렇지만 자기 마음을 속일수야 없지 않는가. 그는 이날껏 경태가 좋다면 다 좋은것으로, 경태가 나쁘다면 그저 나쁜것으로 곧이 알아왔었다. 하지만 변호연의 경우만은 례외적이였다.

(그러나 별다른 일은 없겠지. 그토록 출중한 오빠가 사람을 잘못 사귀지는 않을것이다. ) 하면서도 설향은 처음으로 경태가 아무리 좋아하는 일도 자기한테 싫을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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