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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어느날 오후 첫 교수가 끝난 뒤였다.

라선생이 검정세루학생복에 검정운동화를 신고 한쪽옆구리에 책보를, 다른 손에는 학생모를 구겨쥔 낯선 학생을 데리고 들어와 교단아래에 세우더니 그에 대한 소개를 하는것이였다.

《함흥영생고등보통학교에서 공부하던 변호연학생이 우리 학급에 전학해왔습니다.》

고개를 수굿하고 어색스럽게 서있던 변호연이란 학생은 꾸벅 학급학생들에게 인사를 하였다.

철림은 매우 숙성하고 어리무던해보이는 그를 유심히 뜯어보았다.

중키에 몸이 부둥부둥하고 웃머리가 넓은데 비하여 하관이 좁아서 얼굴모양이 놋주발 비슷한감을 주었다. 두터운 눈까풀밑의 눈꼬리가 좀 치째진 게슴츠레한 눈에는 어줍은 미소가 담겨져있었다.

《서루 면목을 빨리 익히구 잘 어울려서 학업에 전념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변호연학생, 저 뒤 창문옆 빈자리에 가앉으시오.》

변호연이 라선생한테 다시 경례를 해야 할지 몰라 주춤거리다가 완연한 팔자걸음으로 빈자리에 가는것을 보고 아까부터 키득키득하던 학생들이 와 하고 웃음보를 터치였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이 둥그래져 학생들을 둘러보던 라선생은 《웃지들 마시오!》 하고 성내듯 쏘아붙이고는 교단을 내려 나가다가 한마디 던지였다.

《학급장은 수업후에 좀 남으시오.》

철림은 수업을 마치는 마지막종이 울린지 얼마 안되여 교실문을 조용히 열고 눈짓하는 라선생을 따라 밖에 나갔다. 그는 뽀뿌라나무 그늘이 길게 드러누운 철봉대옆의 눈이 덜 미치는 자리에 라선생과 같이 앉았다. 라선생은 남달리 어려운 형편에서 공부하는 철림의 고달픈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리해해주고있었다. 더우기 수학교원인 그는 수학실력이 특별히 월등한 철림에게 각별히 관심을 두었다.

《내 하나 묻자구. 왜 요즘 철림학생은 전에없이 멍해졌나?》

《예?》

철림은 묻는 말의 뜻을 몰라 반문했으나 이내 깨도가 되여 잠자코 있었다.

《나두 몇번 감촉했는데 교수시간에 강의에 집중하지 않고 생각이 딴데 가있는게 뻔히 알리던데… 그래 그럴만 한 어떤 사정이라도 있나?》 그는 방학기간에 아버지의 사망과 그밖의 겪은 일들을 말할가말가 망설이다가 그런 말을 옮겨서 좋을것은 없을것 같아 슬쩍 피했다.

《별일은 없습니다. 제 좀 고달픈 생각에 옴하다보니… 고치겠습니다. 》

라선생은 동정어린 눈길로 철림을 잠시 바라보다가 리해성어린 어조로 말하였다.

《나두 겪어보았지만 고달픈 객지생활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겠소. 뜻이 없구 생활의 목표가 없이는 끝까지 이겨내기 조련치 않지. 하지만 철림이, 얼굴표정에 자기를 지내 드러내지 말아야 하네. 벌써 여러 선생들이 학급장은 별내졌다구, 교수시간에두 멍해서 창문밖만 내다본다구 말하더라구. 이런 말이 자꾸 나면 재미없을수 있네. 게다가 어떤 일본인교원은 일부 학생들이 〈신사〉 앞 큰길을 우정 피해다닌다는 소문이 돈다구 내놓고 말하더군. 당국이 〈천황숭배〉, 〈문명동화〉의 시책에서 〈신사참배〉를 최상의 방책으루 내세우는 판국에 매사에 각별히 주의해야 하네.》

철림은 그 말이 자기를 점찍고 해주는 말같아 속이 띠끔 찔리였으나 라선생이 고마왔다. 라선생은 교원들속에서 수상한 공기가 흐를적마다 그에게 슬그머니 귀띔해주군 하였다. 그는 철림이 《고향의 봄》을 부르다가 교장한테 당하는 봉변을 목격한 후부터 철림에게 남다른 관심을 두고 은밀히 이끌어주는 인정많은 스승이였다.

《선생님, 번번이 일깨워주고 도와주시니 참으로 고맙습니다.》

라선생은 허거픈 웃음을 지으며 겸허하게 말하였다.

《내 뭐 학급장을 도와주는거야 있나. 그저 철림이 겪는 일이 남같지 않길래. … 나두 솔직히 왜놈 흉내를 내며 교원노릇 하자니 체신두, 인격두 다 짓밟히는것 같아 자존심이 허락치 않을 때가 많지.》


한편 면장실을 막 나서는 박히택은 당장 쥐구멍에라도 뛰여들고싶었다.

방금전 면장이 어제밤 비행을 저지른 한 직원을 닦아세우던 악에 받친 목소리가 귀청을 쑤시였다.

《…그 잘난 〈다모토리〉몇잔에 고주망태 돼가지구 하필 〈신사〉앞에서 일본인작부를 히야까시하다가 경찰에 검속되다니?! 앙, 이게 무슨 망신꼴인가 말야. 지난번에는 박히택소사가 일개 생도의 주먹에 큰 대자루 장마당복판에 뻐드러져 소동을 피우구. 그가 일개소사에 불과하지만 소속이 면소이니 면청이 귀뺨을 맞구 너부러진거나 같잖나 말야, 앙! 황아장사 망신은 고불통이 시킨다고 전탕 이따위 께적지근한것들이 면소의 얼굴에 똥칠을 한단 말이야. … 면소에 밥줄을 달고있는게 싫거든 제갈데루 다 가란 말요!…》

박가는 남들이 뒤에서 킥킥거리는것도 자기에 대한 비웃음같고 쉬쉬하는 소리도 자기를 비난하는 소리같이 들리였다. …

기실 박가는 그사이 철림을 기어이 보복하려고 여러번 그의 뒤를 밟아서 하숙집이며 그가 늘 다니는 골목길도 눈에 익혀두었었다.

상현달빛이 으스레한 어느 늦저녁에 박가는 철림의 뒤를 바싹 따르다가 곤봉으로 그의 뒤통수를 까려는 찰나 인기척을 느끼고 제꺽 손을 움츠리였다. 그러나 아무런 낌새도 못 느끼고 씨엉씨엉 걸어가는 그의 펄펄한 기상을 보고 함부로 달려들지 않은것이 도리여 다행으로 생각되였었다.

만일 곤봉이 빗나가기라도 했다면 그 불범같은 학생놈한테 즉각 결딴났을는지도 모를 일이였다. 문득 장마당때의 일이 떠올라 오금이 떨리였다.

그날 자기가 내지르는 팔뚝을 번개같이 막는 그의 팔목은 사람의 뼈가 아니라 쇠몽둥이였다. 련이어 그자의 쇠메같은 주먹이 자기의 턱뼈를 부시는 순간 마치 고압전류에 감전된듯 골이 찡 흔들리우고 귀가 윙윙 울며 땅바닥이며 장군들이 눈앞에서 빙빙 돌았다. 련달아 날아드는 팔꿈치타격엔 숨이 컥 막히고 아래도리가 휘청거려 픽 꼬꾸라진 기억밖에 없었다.

그놈을 서뿔리 건드리다가는 뼈도 건지지 못할것 같았다. 그리하여 오늘 박가는 자기의 이전 패거리중에서 그중 날쌔고 주먹다시 센 졸개 두어명 데리고 아무때든지 기어코 보복하여 망신꼴을 좀 면하고 체면유지나 할 결심을 굳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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