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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직 저물녘은 아닌데도 소낙구름이 무겁게 떠도는 바깥은 어둑컴컴하였다. 먼 산너머에서는 우뢰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분절이네 집에 심부름을 왔던 최미옥이 부엌문을 열고 막 나서려는데 웬 녀인이 《주인님 계십니까?》하고 조심스럽게 주인을 찾았다. 한창 딸한테 지청구를 하던 안주인의 성가신 목소리가 열린 문틈으로 쟁쟁하게 새여나왔다.

《얘, 분절아, 또 누가 온 모양인데 나가봐라. 오늘은 왜 귀찮게 찾아오는 사람이 많니. …》

그 녀인은 이어 부엌문밖에 나서는 미옥에게 한발 다가서며 물었다.

《네 이 집 애냐?》

미옥은 컴컴한 어둠속에서 녀인의 얼굴을 빠금히 쳐다보며 어정쩡하게 대꾸했다.

《아니예요. 이 집에 심부름을 왔다가…》

미옥은 흰저고리에 깜장치마를 받쳐입은 몸매가 그쯘하고 목소리가 유난히 부드러운 그 녀인이 한갖 촌녀인같지 않았다.

《어디서 오시는지?…》

《먼데서 오는 길인데 날두 저물구 비가 당장 쏟아질것 같아서 어느 집에서 좀 묵어갈려구 그런다.》

미옥은 다시금 새파란 녀인의 얼굴이며 행색을 찬찬히 뜯어보다가 상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지미라고 불러야 할지, 언니라고 해야 할지…》

소녀의 웃음어린 가느스름한 눈이며 말할 때마다 드러나는 가쯘하고 자름자름한 이발과 조그마한 입이며가 다 귀염성스러웠다.

《네 좋을대루 부르려마.》

그때 금방 천지를 들부실듯이 우뢰가 울부짖었다. 그제서야 분절은 정지문을 빼서 열고 내다보았다.

《언니, 그럼 우리 집에 가자요.》

《너의 집은 어디게?》

《한참만 걸으면 돼요.》 하고 미옥은 자박자박 앞서걷다가 문득 돌따보며 이렇게 말하였다.

《언니, 이자 저 집안에서 하던 말을 나삐 듣지 마시구 좋은 기분을 가지세요. 아까 분절 엄마가 짜증스럽게 말한건 너무 가난한 살림에 부대끼다나니 저절로 그런 듣기 거북한 말 나온거야요. 본심이 글러서 그런게 아니니 언니, 달리 생각지 말아주세요.》

녀인은 분절의 어머니를 대신하여 사과하는 나어린 소녀의 말이 어찌나 씨알이 들고 어른스러운지 코마루가 찡해졌다.

《호호, 너는 말하는것두 꼭 어른같구나. 지금 몇살이지?》

《열세살이예요.》

《이름은?》

《최미옥.》

《너는 얼굴처럼 이름두 곱구나.》

《내가 고와요? 힝, 어머닌 나보구 남자번지기래. 외할아버진 괄랭이라는데두요.》

《그건 다 네가 너무 귀여워서 일부러 그래보는거겠지.》 수옥은 미옥이가 너무도 귀엽고 재롱스러워 연해 말을 시켜보고싶어졌다.

《호호, 그럴가요? 근데 언니 이름은요?》

《내 이름은 송수옥.》

《아이, 언니동생처럼 옥자는 꼭같네.》 하고 두손을 포개여 가슴에 대였다.

《그래 집에는 누가 있니?》

《외할아버지는 나들이 가시구 나와 엄마, 그리구 오빠는 혜신에 나가 하숙생활하면서 고보에서 공부하구…》

수옥은 미옥이가 대답을 지내 헤프게 하는것 같아 웃음을 머금고 중떠보았다.

《너는 그 누가 묻든지 그렇게 집안일을 숨기지 않구 척척 다 말하니?》

미옥은 할기죽 수옥의 얼굴을 치떠보고는 뽀로통해서 당돌하게 응대했다.

《언닌 내가 뭐 어린앤줄 알아요? 나두 사람 가려볼줄 다 알아요. 사람의 얼굴에는 진실과 거짓이 다 그려져있어요. 근데 언닌 첫눈에 내 마음에 꼭 들었거던요.》

《호호, 애두. 넌 정말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수옥은 내심으로 혀를 내둘렀다. 속이 깊은게 이만저만하지 않는데다 노는양이 정이 폭폭 들게 깜찍하고 귀염성스러워 담쑥 안아주고싶었다.

아득히 뢰성이 울던 캄캄한 하늘에서 비발이 후둑후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언니, 이젠 다 왔어요. 엄-마, 언니가 왔어요.》

미옥은 집에 대고 소리를 쳤다.

《뭐, 언니라니?》 하더니 잠시후 방문이 열리였다.

등잔빛속에서 유영은 자리에서 방금 일어난듯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올렸다.

수옥은 깍듯이 머리를 다소곳이 숙여 인사하였다.

《어머니, 안녕하십니까?》

《누구신지?…》 유영은 나직이 물으며 불그레한 등잔빛을 마주하고 서있는 수옥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길가다가 그만 날이 저물어서 하루밤 좀 쉬고갔으면 해서…》

《그럼 얼른 들어오잖구. 그런데 집이 루추해서…》

유영은 머리를 비다듬어 낭자를 틀어올린 후 비녀를 꽂았다. 베개와 담요를 한쪽구석에 밀어놓았다.

수옥은 때를 쑥 벗고 몸가짐이 의젓한 유영의 앞에 단정하게 앉았다.

《어머니, 어디 편찮으신거군요.》

《나야 늘 이런걸… 미옥아, 빨리 나무를 들여다 불을 때려마.》

유영은 자기와 마주앉은 수옥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볕에 가무스레해진 둥글납작한 얼굴에 쌍까풀진 류달리 큰 눈은 웃을 때 더 인상적이였다. 더구나 그의 상냥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어루쓸듯 정겨운 온기가 느껴졌다. 유영에게는 그가 어쩐지 범상한 녀자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아지미는 어디서 오는 길인가?》

《저, 무산쪽에서 옵니다.》

무산이라는 말에 유영은 문득 가슴이 뭉클해졌다. 행방을 모르던 철림의 아버지를 품들여 요행 찾아낸 곳도 무산 그 어느 협제공사장이 아니였던가. 웬일인지 무산쪽에서 온다는 그가 남같지 않았다.

《편히 마음놓구 앉아있으라구.》

《네.》

유영은 베개와 담요를 들고 웃방에 올라갔다.

수옥은 날렵하게 들고온 보꾸레미를 풀고 쌀주머니를 꺼내여 좀전에 미옥이 부뚜막에 내려놓은 쌀함박에 얼른 쏟았다. 그리고는 이어 저고리소매를 거두고 옷고름을 어깨뒤로 넘긴 다음 바가지로 물을 퍼서 붓고 썩썩 쌀을 일었다.

이때 장작을 한아름 안고 부엌에 들어서던 미옥이 무슨 큰일이나 난것처럼 《언니, 제발 이러지 말아요. 아이참, 누가 손님이구 누가 주인인지 모르겠네.》 하며 쌀함박을 나꿔채려했으나 수옥은 그냥 쌀을 일면서 《미옥인 빨리 불이나 때렴.》 하고 웃었다.

부엌간에 내려온 유영이도 펄쩍 뛰였다.

《아이구 참. 아니, 집에 손님 대접할 쌀 없을가봐 그러나. 주인이 손님에게 되려 페를 끼치게 하다니!》

《어머니, 그런 말씀을 마십시오. 제 오늘 어머니를 만나보니 열살때 돌아가신 어머니를 꼭 다시 만나뵈는것 같아서…》 수옥은 목이 갈리며 말끝을 채 맺지 못했다.

《아지미 고향은 어디댔나?》

《원래 고향은 성진 업억이예요.》

유영은 별안간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그가 하는 동자질을 더 말리지도 않고 래력을 굳이 더 캐여묻지도 않았다.

《언니는 얼굴은 예쁜데 손은 농군손같이 크고 터실터실해. 험한 일도 많이 한가봐. …》 미옥은 장작불을 때며 이렇게 말하였다.

《저 괄랭이같은게 저렇게 그저 까분다우.》

《힝, 엄만 남자번지기라더니 할아버질 닮아 이젠 괄랭이래. …》

그 말에 두 녀인은 한참동안 허거프게 웃었다.

유영은 수옥이가 쌀을 세번 일은 뜨물을 질버치에 따르는거며 무거운 질버치도 빈 광주리처럼 가볍게 냉큼 들고 부엌문을 나서는거며 동자에 손이 싸고 동작이 날랜데 주의가 갔다.

구김살 하나 없었을뿐아니라 인정스럽게 구는 그의 찬찬하고 단아한 모습이 마음속에 포근히 안겨들었다.

그들은 한집안식구처럼 한상에 둘러앉아 저녁식사를 한 후 밤이 퍼그나 깊도록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온밤 우뢰가 울고 이따금 번개불에 방안이 대낮처럼 밝아지군 했다.

《엄마, 난 래일부터 학교에 나갈래.》

《나가려마. 글쎄 저 어린것이 내 병시중을 들래, 부엌일을 도맡아 하느라구 빈번히 공부를 번지는데 애초에 학교에 넣지 말았어야 좋았을걸. …》

《힝, 우리 할아버지 세운 학교인데 난 왜 못 가요?》

유영은 허거프게 웃으며 미옥의 말에 줄을 달아 이야기를 꺼냈다.

《여기 사립대성학교는 얘 말대루 면내 힘있는 유지들의 기부금을 받아 얘 외할아버지가 주관해서 설립한거라우.》

《네- 그래요!》

수옥은 경탄의 눈으로 유영을 바라보았다.

《원래 얘 외할아버지는 독립군이였는데 후에 군자금모연공작을 했다우. 그런데 어느 놈이 밀고하면서 이름을 틀리게 밀고하는통에 스무날만에 놓여나오긴 했는데 그다음에 더 큰 소동이 일지 않았겠수 글쎄. 로할아버님은 머리를 빡빡 깎은 아들을 보더니 류치장살이에 고생했다는 말씀은 고사하구 이놈, 내가 죽은 다음 머리를 풀기두 전에 왜놈들한테 머리를 깎이웠느냐 하며 든장을 들구 뒤쫓는통에 온 동네를 피해다니며 집에두 못 들어오구 류치장에서보다 더 막심한 고생을 했다우. …》

유영과 수옥은 눈물이 찔끔 나오도록 한참동안 웃어댔다.

《그후 얘 할아버지는 독립군명두 다 된것 같다시며 학교 세우는 일에 나섰던거라우. …》

수옥은 그날 밤 유영으로부터 아들 철림이가 조선노래를 부르다가 교장놈한테 무지한 행패질을 당한거며 장마당에서 불망종을 까눕힌 이야기를 그지없이 괴로운 마음으로 들었다. 그는 첫눈에 자기를 정확히 헤아려보는 미옥의 영특함에 우선 놀랐고 초면부지의 길손인데도 어느 겨를에 자기의 진속을 찬찬히 알아맞추고 마음을 꺼리낌없이 통채로 주는 유영의 사려깊은 기품에 속으로 무척 탄복했다.

미옥은 수옥의 어깨에 머리를 갸웃이 기대고 앉아서 그의 크고 터실터실한 손을 쓸어보기도 했다.

《언니는 래일 또 어디루 가야 하나요?》 미옥은 응석어린 어조로 물었다.

수옥은 너무 귀여워서 미옥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언니는 또 멀리 가야 해.》 하고는 유영에게 《어머니, 혜신읍에서 조금 벗어난 위현동에 저의 이모부가 산답니다. 그래서 제가 그리루 가던 길이랍니다.》 이렇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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