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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메트를 쓰고 커다란 몸집을 단장에 거의 싣다싶이 하며 마당에 들어서던 신병문은 대뜸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마루기둥에 붙어있던 《국어가정》이라는 표쪽이 없어진것이다. 그는 금시 큰변이라도 난것처럼 널마루에 올라서며 바깥미닫이를 드르륵 왁살스럽게 열었다.

《여기 붙였던걸 어떻게 했어, 엉?…》

그의 독살스러운 호통소리에 놀란 체소한 녀인이 아래방문을 열고나왔다.

《무엇때문에 또 그러시우?》

그는 마루기둥을 단장끝으로 툭툭 치면서 《여게 붙었던 표쪽을 어쨌나 말야.》 하고 잔뜩 독이 올라 어성을 높였다. 안에서 그 말을 듣고있던 경태가 전실로 맞받아나오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 잘난 표쪽을 내가 떼버렸어요. 그따위 시시한 표쪽때문에 남들의 손가락질 받으려고 그래요?》

체소한 경태의 어머니는 그제서야 영문을 알고 귀찮은듯 아래방으로 훌 내려가버렸다. 병문은 전실에 들어서며 경태의 불손한 말을 누가 듣기라도 할세라 미닫이를 꽉 닫았다.

《이놈아, 네 제정신이냐? 무슨 말을 함부루 망탕 해? 네 목이 붙어있는게 원쑤같애서 그래? 그게 다 관청에서 하는노릇이지 우리 멋대루 뗐다붙였다하는 아이들 놀음인줄 아느냐?》

《아버지는 뭐가 그리 겁나서 벌벌 떨어요. 〈국어가정〉따위 표쪽이나 붙여둔다구 누가 쳐다보기나 할것 같아서 그래요?》

병문은 성이 독같이 올라 다리를 후들후들 떨며 아들을 쏘아보았다.

《그만해라! 너 그새 나쁜 물이 들어두 단단히 들었구나. 게 좀 앉거라.》

병문은 구척장신의 유들유들하게 살진 몸집을 희전의자에 무겁게 실으며 경태를 맞은켠 의자에 턱짓으로 앉게 하였다.

경태가 점점 뻑뻑 맞서며 엇서나가는것이 그의 속을 어지간히 언짢게 하였다. 외아들인 경태의 성장에 특별히 관심하고 무진 왼심을 써오는 그였다. 세 딸이 주런이 달린 뒤에 난 경태는 그의 유일한 희망이고 집안의 기둥이며 상속자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경태를 고보에 보낸 뒤에도 남한테 축잡히지 않게 숱한 돈을 들여 하숙방도 그중 큰 방을 골라 번듯하게 꾸려주고 생활상부족을 느낄세라 뒤받침을 해주고있었다. 올해 방학기간에도 자기 노래를 기어코 레코드에 취입하겠노라며 눈만 뜨면 축음기에 미쳐 돌아가는것이 민망스럽기 짝이 없었으나 꾹 참고 정작 떠날 때에는 거래관계가 깊은 모모한 회사사장앞으로 소개신도 써보내고 사례금도 넉넉히 주어보냈었다.

그것은 아들의 요구에 순응해서라기보다 시체 청년들이 기울어지기 쉬운 사회주의운동이나 그 어떤 적색물이 들지 않도록 일단 그가 소원하는 취미에 얽어매놓자는 속심에서 베푼 관용이였다

그래서 경태는 스무날가까이 묵으면서도 소개신과 사례금의 덕으로 류행가 세곡중에서 요행 한곡을 취입하고 돌아왔다. 병문으로서는 그것도 무척 다행스러웠다. 그런데 요즘 집에 와 노는 꼬락서니를 보면 필경 무슨 재앙을 입을것 같은 위구심이 들었다. 그래서 이왕 말이 난김에 단단히 신칙할 잡도리를 했다. 그는 일부러 으험으험 건기침을 깇으며 위엄을 돋구었다.

《내 너한테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해준 말이다만 다시금 명심해듣거라. 네 바깥에 나가 멋대가리 없이 그랬다간 당장 오라를 지게 될거다. …》

경태는 골살부터 찡그리였다. 또 아버지의 뻔한 판박이설교를 들을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지끈 쑤시였다.

《…네 우선 쩍하면 세상 무서운줄 모르고 우둘렁거리는 버릇부터 고쳐라. 지금은 누구를 쳐다보거나 바라볼것도, 또 어느 누구를 믿을것두 없느니라. 단지 저만 믿구 제 수완껏 살아갈 생각만 해야 한다.》

아닐세라 아버지는 또 그 말로 허두를 떼였다.

《지금에야 통채루 일본세상인데 별수 있니. 지금 너처럼 우뚤거려 그네들의 눈밖에 나지두 말구 하라는대루 고분고분해야 살아가기 편리하다. 지금세월에는 그네들을 등에 업구 제살궁리를 하는 사람인즉 가장 령리하고 살줄 아는 사람이다. 내 경우를 봐라, 그네들한테 고분고분했기에 열손톱 다 닳아빠지도록 재산을 모으구 먹구살 걱정없이 자수성가를 하지 않았냐. 달리 될수 없는 일에 우쭐하고 나서서 사회주의니, 무어니 하구 헤덤비다가 간도루 망명한 저 장춘관집사위꼴을 좀 보려마. 너는 절대루 그런 쓸개빠진것들의 풍에 놀아나지 말아야 한다. …》

아버지의 퀴퀴한 설교를 듣다못해 한마디 툭 내뱉았다.

《지금이 아버지 젊었을 때와 같은줄 알아요? 눈알이 똑바로 박힌 청년치구 새로운 사조에 속으로 공감하지 않는 청년이 있는줄 알아요?》

병문은 제빠듬히 앉아있던 큰 몸을 곧추 세우며 날카롭게 반문했다.

《뭐, 새로운 사조?!》

《새로운 사조를 외면하는 미물은 사람축에도 속하지 못하구요, 또 누가 거들떠보기나 하는줄 알아요?》

《뭣이, 그래 너는 제 몸의 금새나 올리려구 그따위 망녕이 든 풍조에 말려들려구 몸살이냐?》

경태는 사색이 된 아버지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고는 눙치듯 말했다.

《아버지가 너무두 락후한 말씀만 하시길래 한마디 한거예요.》

《그렇다면 좋다만… 너는 이젠 다 자란 장정이야. 집안일을 걱정할 때두 됐다. 이 집안의 장래는 너한테 달린거니 네 처신이 중하다는걸 깊이 명심해야 한다.》

신물이 나게 구는 아버지한테서 놓여나온 경태는 하루속히 집을 떠나고싶었다. 퀘퀘한 설교만 하려드는 아버지가 점점 싫어지고 지지한 력설에 넌더리가 났다. 워낙 병문은 성미가 투박하고 남의 말은 귀등으로 들으며 고집이 여간만 세지 않았다. 저녁에 집에만 들어오면 잔소리가 그칠새 없고 안해와 딸들을 그저 욱박지르지 못해 안달이 나했다.

한번은 어머니가 경태에게 이렇게 하소연했다.

《하루종일 조용하던 집안이 네 아버지만 들어오면 화기를 싹 거둔다. 가까운 친구 하나 있기를 하니, 손님이 있길 하니, 그저 집안식구들만 모질게 구니 나는 먹은게 살루 안 간다.》

가뜩이나 겁많은 어머니는 쩍하면 트집을 걸고 우락부락하는 아버지의 구박에 기를 못 펴고 살아왔다. 체통이 항우만 해가지고 관청의 우두머리나 일본경관이나 헌병들앞에서는 고양이앞의 쥐처럼 설설 기면서도 집안에서는 무서운 존재로 군림하는 아버지가 한편 가련해보이기도 했다. 경태가 이런 불쾌한 상념에 사로잡혀있는데 어머니가 들어왔다.

《얘야, 네 또 아버지와 티각태각하지 않았니?》

《아니요.》

《내 뭐랬니. 그걸 떼버렸다간 또 야단이 인다구 하지 않던. 글쎄 령감이 구장네 집안에서는 일본말을 다 쓴다면서 일본말을 배우라구 얼마나 들볶았는지 아니. 그래서 나두 뜯개말이나 번지니까 그 표쪽을 갖다붙여주더구나. 그랬으니 령감성미에 그냥 넘길수 있겠니.》

《쳇, 구역질나게 놈들 비위나 맞춰 뭘한대요. 참 어머니, 이사올 때 내 방에 건사해둔 애국명장들의 초상하구 책은 다 어떻게 했나요?》

어머니는 또 겁에 질려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건 네 아버지가 다 태워버렸다.》

《뭐예요? 정신이 쑥 빠지지 않았어요? 그거야 할아버지때부터 가보로 전해오던건데 불태워버리다니? 이거 정말 이 집안에 망조가 들었군. …》

경태는 격해졌다.

《얘, 목소릴 낮추어라. 또 무슨 불벼락이 일게 하려구 그러니. 꾹 참구 모르는체 하려마.》

어머니는 사정하듯 말했다. 그리고는 인츰 정지에 내려가 소반에 경태의 점심밥을 챙기다가 문득 철림이네 말을 꺼냈다.

《얘야, 네 서울 간 새에 철림의 아버지가 삼포목재소에서 객사했다누나.》

경태는 화들짝 놀랐다.

《예?! 그게 정말이예요?》

《글쎄 철림이하구 어머니랑 갔댔는데 그만 기별이 늦어서 벌써 장례를 다 치른 뒤였다더구나. 한뉘 객지생활하며 객고를 겪더니… 그 마음씨들 비단결같은 집안에 그런 기막힌 상사가 나다니. …》

경태는 잠시 뻥뻥해있다가 벌떡 일어나 발끝에 신발을 대충 꿰고는 횡하니 집을 나섰다.

《얘, 점심은 안 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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