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제 3 회


제 1 장. 귀신바람(가미가제)


3


겐따는 아버지가 있는 별장으로 차를 몰아갔다. 별장은 도꾜교외의 바다기슭에 자리잡고있었다. 소란스러운 도시 한가운데서 퍼그나 떨어져있는 이곳에서는 지금 전쟁이 한창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외계와 등진 조용한 이곳 바다가 별장에서 겐따는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내였다.

별장은 크지 않았으나 푹신한 양털주단을 깔고 유럽에서 가져온 침대와 가구를 놓아 서양식으로 꾸린 침실도 있고 마루를 깐 일본식살림방과 조선식온돌방도 있다.

이 별장은 취미와 기호, 온갖 생활조건과 편리를 도모할수 있는 자그마한 호텔인셈이였고 한때 겐따를 위한 료양소였다고 할수 있다.

이 별장은 겐따를 위해 아버지, 어머니가 많은 돈을 들이며 지어주었다. 겐따의 십년남는 어린시절이 이 별장에서 흘러갔다.

겐따는 호화롭고 풍족하게 어린시절을 보내였으나 그의 생활에는 즐거움과 웃음이 없었다. 그는 다리상처의 아픔때문에 십년이나 절뚝거리였다.

겐따는 대여섯살났을 때 아버지의 방에서 빛갈곱고 반짝거리는 옥색쪼각을 보게 되였다. 겐따는 그 돌같기도 하고 쇠같기도 한 쪼각에 유혹되였다. 겐따는 아버지의 응접실에서 그 쪼각을 꺼내여 바지주머니에 넣었다. 그런 후 그 쪼각에 대해 까마득히 잊은채 주머니에 옥색쪼각이 들어있는 바지를 입고지내였다.

그것이 말썽을 일으켰다. 옥색쪼각이 들어있는 바지주머니쪽 다리에 덴것 같은 상처가 생기였다.

별치 않은 외상으로 생각하고 마키롬과 요드팅크를 바르고 피부병에 좋다는 외용약을 다 썼으나 종처는 점점 세를 냈다.

주사를 맞고 약도 먹었으나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그 옥색쪼각은 당시 도자기공업에서 빛갈을 내는데 사용하던 우라니움광석을 처리한것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라니움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고 방사선이 인체에 주는 피해에 대하여 의학박사들조차 모르고있었다. 당시의 과학성과나 의학발전수준으로는 발병원인과 치료대책을 세울수 없었다.

세계학계가 우라니움에 대해 관심을 돌린것은 베를린과학원 방사화학실험실에서 당시 《삼두마차》로 불리우던 옷토 한과 슈트라이스만, 녀성과학자 리자 마이트네르에 의하여 핵분렬때 방대한 에네르기가 나오는것이 발견된 1938년 12월 22일 이후였다.

천연우라니움을 리용하여 굉장한 폭발력을 가진 폭탄을 만들수 있다는것이 과학기술적으로 해명되면서부터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미국과 도이췰란드를 비롯한 군사렬강들은 대량살륙무기제조에 필요한 우라니움확보에 열을 올리였다.

이전에는 방사선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고 누구도 우라니움에 대하여 관심을 돌리지 않았다.

겐따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의 다리상처가 방사선화상이라는것을 알지 못했고 당시의 의학으로써는 방사선화상을 치료할수 없었다.

겐따의 아버지는 도꾜일대에 소문난 돈부자의 한사람이였고 군부와 정계, 학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치고있었으나 아들의 병치료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긴병에 효자가 없고 자식을 아무리 사랑하는 부모라 할지라도 병치료의 끝이 보이지 않으면 포기하기 쉽다. 겐따의 아버지는 아들의 병치료에 점차 무관심해지였으나 그의 어머니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의가 나쁘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들의 병때문에 원쑤처럼 되고말았다. 피를 함께 나눈 형제사이를 2촌이라면 남남끼리 모여사는 부부는 0촌이라고 할수 있다.

가까운 부부사이가 일단 갈라지면 제일 미워하는 원쑤가 되고만다. 더구나 녀자의 경우에는 갈라진 남편에 대한 원망과 증오가 극도에 이른다. 남편이 아들의 병치료에 등을 돌려대자 겐따의 어머니는 남편과 절교를 선언하고 갈라질 지경에 이르렀다.

아버지에게는 겐따의 어머니와 가정을 이루기 전에 좋아하던 미모의 녀인이 있었고 그들사이에는 호지로란 아들까지 있었다.

겐따의 어머니는 호지로의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그럴수밖에 없었다. 남편을 쥐고 흔드는데서는 호지로의 어머니힘이 더 컸다.

겐따의 어머니는 대은행가의 딸이였고 명문가의 후손이였다.

겐따의 아버지는 처가의 덕을 입어 돈주머니를 불구었고 군부와 정계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겐따의 아버지는 겐따의 어머니와 사이가 나쁘더라도 리혼은 하려고 하지 않았다.

겐따의 아버지는 《천황》숭배의 감투를 쓰고 가정생활에서 가부장적인 무사도를 주장하는 사람이였다. 한갖 아녀자때문에 가부장적인 가문의 전통을 흐리였다는 비난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호지로의 어머니는 절색이였다. 가무에 능하였으며 일본세화를 제법 잘 그리였다. 알쯘한 게이샤(기생)를 거느리고 부사산의 눈아가씨란 예명(기생의 별명)을 가진 오까미(기생집 녀자주인)였다.

호지로의 어머니도 족보를 따지면 지방무사의 후손이라고 할수 있었고 돈주머니가 텅 비여있지 않았으나 세력이 뜨르르하고 돈주머니 역시 불룩한 하야마니쯔이찌의 가문에서는 서민정도로밖에 취급되지 않았다.

호지로의 어머니는 출신가문의 힘이나 돈주머니덕으로는 겐따의 어머니를 당할수 없었다. 호지로의 어머니는 녀인의 유력한 무기인 미색과 남자들의 마음을 후려잡는 재간이 있었고 머리가 잘 돌아 남편에 대한 영향력에서는 겐따의 어머니보다 주도권을 장악할수 있었다.

겐따의 어머니와 호지로 어머니사이의 알륵과 불화는 겐따의 병이 심해지면서 더욱 격화되였다.

두 녀인들사이의 불화는 자식들의 성장과 생활에 영향을 주었다.

도꾜교외에 자리잡고있는 겐따네 별장에는 이런 복잡한 가정사가 비껴있었다.

별장은 아담하고 화려하여도 이 별장에 깃들어있는 겐따의 추억은 유쾌하고 아름답지 못하였다.

겐따는 먹고 입고 쓰고 사는데서 불편이 없었으나 아물지 않는 다리상처의 아픔때문에 늘쌍 얼굴을 찌프리고 살아야 하였고 육체적고통과 함께 정신적진통을 겪어야 했다.

두 어머니사이의 암투가 번져가는 불길처럼 확대되여갈수록 겐따는 아버지와 어머니, 친어머니와 호지로의 어머니짬에서 밝게 웃으며 즐겁게 지낼수 없었다.

겐따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이가 나쁠 때 어머니를 옹호하는 립장에 섰고 호지로와 그의 어머니에 대하여서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였다.

겐따 친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가정불화는 일단락지어졌고 집안에는 안정이 찾아왔다고 할수 있었으나 겐따의 마음속에 생겨났던 아버지에 대한 불신감은 좀처럼 가시여지지 않았다.

다리병이 낫게 되고 아버지덕으로 군사대학과정을 거치고 해군성본부에 소환되면서부터 겐따는 아버지에 대한 의존심이 생기고 부자사이의 정을 어느 정도 느낄수 있었다.

겐따는 아버지에 대한 혈육의 정이 그리워지고 커갈수록 호지로나 그의 어머니에 대한 반감 역시 커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겐따는 아버지와 호지로의 어머니가 한자리에 같이 있으면 애당초 그앞에 나타나려고 하지 않았다.

요즘 아버지는 호지로의 어머니와 함께 겐따가 친어머니와 함께 어린시절을 보낸 별장에서 살고있다.

겐따는 아버지한테서 별장으로 오라는 련락을 받고 마음이 좋지 않았으며 오강뚜껑으로 물을 떠먹어야 하는것 같은 께름직한 기분마저 들었다.

꺼려하던 일은 생기지 않았다. 호지로의 어머니는 보이지 않고 아버지는 손님맞이방에 혼자 앉아있었다.

오래간만에 별장에 온 겐따는 친어머니가 살아있던 때에 비하여 방안꾸밈새들이 많이 달라졌음을 보았다. 아버지가 등지고 앉아있는 벽면의 장식장은 이전에 없었었다. 장식장에는 상감무늬고려청자기와 조선봉건왕조백자병이 놓여있었다.

조선에서 가져온 진품이였다.

겐따의 아버지는 일본이 미국이나 도이췰란드, 영국, 프랑스 같은 나라들에 비하여 아직 까마득히 뒤떨어져있고 돈주머니의 크기와 과학기술문화의 발전측면에서 어깨를 겨를수 없음을 통탄하고있었다.

그는 일본이 하루빨리 대동아의 맹주가 되기를 꿈꾸고있었다.

지금처럼 꾸물거려서는 일본이란 섬나라가 땅이 크고 돈이 많은 유럽나라들의 속국으로 되고말리라는 불안마저 느끼고있었다. 그러면서도 조선은 일본의 속국이라는 생각이 골수에 가득찼다.

큰집 종은 같은 종이라고 해도 작은집 종을 깔본다.

조선을 일본의 속국이라고 얕잡아보면서도 그는 조선의 도자기나 의술은 숭상했다.

그럴수밖에 없었다. 그는 치부의 첫걸음을 도자기로 떼였고 자기의 도자기와 공예품들이 고려가문의 후예들 손을 빌어 고려자기와 조선봉건왕조도자기를 흉내낸데 있음을 알고있어 고려청자기나 조선봉건왕조백자기를 집안의 가보로 치고있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것들은 금이나 보석보다도 더 값이 나갈것이다.

겐따의 아버지는 조선도자기들을 가보로 여기지만 겐따는 아버지가 네데를란드인지 어느 유럽나라에서 가져왔던 빛갈고운 옥색쪼각때문에 고생을 했고 그 돌이 도자기와 련결되여있어 시답지 않아했다.

겐따의 아버지는 판단이 빠르고 예민했다. 그는 장식장의 도자기들을 마깝지 않게 바라보는 겐따의 눈을 보고 아들의 속마음을 넘겨짚었다.

《이제 가정을 이루게 되면 이 별장을 네가 써라. 이 별장엔 너의 친어머니돈이 적지 않게 들었다. 도자기와 골동은 내가 건사한다 해도…》

겐따는 그 말이 싫었다. 아버지가 건사한다는것은 호지로에게 넘긴다는것을 의미했다. 깨버리면 깨버렸지 호지로한테 주고싶지 않은 겐따의 마음이였다.

호지로가 겐따보다 며칠 먼저 태여났지만 가문의 대를 이을 적자는 겐따였고 호지로는 서자였다. 그래서 이름마저 바뀌였다.

이때 시녀가 진하게 푼 홍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차를 한잔씩 마시고나서 아버지는 아들을 부른 자기의 의사를 슬며시 내비치였다.

《너 왜 어제 아버지한테 오지 않았냐? 별 하나를 더 박았다면서?》

아버지는 모든것을 알고있었다. 출세의 길을 틔워준 아버지한테 아들로서 응당 알려드리고 사의를 표하는것이 도리였다.

《급하게 제기된 출장때문에…》

급하게 출장이 제기된것은 사실이였으나 어제밤을 슝꼬네 집에서 보내지 않았더라면 겐따는 아버지를 찾아왔을것이다.

겐따의 아버지는 좀스럽게 따지지 않았다.

《너한테 좋아하는 녀자가 생겼다면서?》

아버지는 겐따가 말하지 않은 생활의 뒤면까지 속속들이 알고있었다. 그가 오늘 아들에게 이것저것 따지는것은 사생활령역에 속하는 리면까지 꼬치꼬치 알자는데 있지 않았다.

겐따를 정보장교로 만들고 노구찌재벌이 조선의 동해안북부에 벌려놓은 군수복합체에 대한 정보를 장악하는데 그는 적지 않게 왼심을 썼다. 돈은 정보가 뜨면 벌지 못한다. 돈나올 구멍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야 남보다 빠르게 투자할수 있다.

영국의 로스챠일드은행가문이 돈으로 세계를 쥐락펴락할수 있게 된것은 세계 여러 나라 정보망을 장악한데 있었고 그 정보가 빠르고 정확한데 있었다.

겐따의 아버지가 대동아의 맹주로 되기를 꿈꾸는것은 그 넓어진 땅에 돈줄을 뻗치고싶어서였다. 그는 아들 겐따가 대일본제국의 해군첩보장교로 활약하면서 금융의 정보촉수가 되여주기를 바라고있었다.

재벌의 시야로 보면 전쟁은 막대한 재부를 소모하는 하나의 큰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에서 누가 이기고 지는가 하는것은 재벌의 관심사가 아니였고 은행가들은 전쟁에서 자기 나라가 져도 얼마든지 돈을 벌수 있다. 아버지는 아들을 가볍게 닥달질하고나서 그가 가려워하는데를 긁어주려고 하였다.

《하나꼬이모가 흥남에 살고있을게다. 조선에서 오래 살았으니 이모를 만나면 너의 사업에 도움받을수 있을게다.》

《고맙습니다.》

겐따는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깍듯이 례의를 표하였다.

고와하든 미워하든 아들을 보는 아버지의 눈은 제자를 보는 스승의 눈 못지 않게 정확하다. 겐따는 아버지가 베푸는 성의가 어떤 비극으로 이어질지 알수 없었다. 설사 안다고 하더라도 이모와 만나는 기쁨을 버리고싶지 않았다.

이전페지   다음페지

←되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