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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태의 하숙방서재는 웬간한 도서관서고에 못지 않았다. 아들의 뒤바라지에 아끼는것 없는 아버지의 덕에 그는 객지생활을 하면서도 아무런 걱정을 모르고 지냈다.

어느 공일날 설향은 경태의 부탁을 받고 왔다가 별로 설핏해진듯 한 그의 서재를 정돈하기 시작했다.

《오빠는 책들을 부지런히 사들이기만 하구 별로 보는것 같지 않군요.》

경태는 팔걸이의자에 웃몸을 제끼고 앉아 심드렁하게 대꾸하였다.

《아, 오전에는 공부할래, 하학후엔 롱구훈련을 할래, 주장노릇두 꽤 베차구만. 야구같은건 이젠 줴버렸으니 그렇지… 그러나 나대신 여기 책을 죄다 읽어주는 사람 따로 있지. 나는 책을 사들이구 철림은 독서만 하고…》

《호호, 철림씨는 그렇게도 독서에 열중하나요?》

《그 친군 벌써 〈어머니〉 나 〈철의 흐름〉 같은건 아마 묘사문장까지 모조리 통달했을지도 몰라. 책 사들일 형편은 못되니까 자연이 서재의 단골손님이 돼버렸지.》

경태는 움쭉 일어나 창가에 다가서더니 느닷없이 시 한구절을 읊는것이였다.


...

머나먼 한줄기 희망이 때로 내 가슴 어지럽게 하나니-

그 어떤 흔적도 자취도 없이

이 세상을 떠나감은 저으기 구슬퍼

명성을 위해 살고 글 씀은 아니면서도

내 이 애달픈 운명을 찬미하는건

비록 내 노래의 한구절일망정

진실한 벗이였다는 한낱 기억을

세인의 가슴에 남기고자 함이여라

...


설향은 황홀한 심정에 잠겨 경탄의 눈으로 그의 름름하고 훤한 모습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뿌슈낀 시군요!》

《난 이 구절이 그중 마음에 들거던, 자꾸 외우게 되구. …》

설향은 책상우에 되는대로 놓여있는 《괴테시집》과 잡지 《음악계》 등을 책꽂이에 꽂으며 저렇듯 활달한 호남아가 감상적인 시구나 노래를 특별히 즐기는 까닭은 내심 리해되지 않았다.

전번에도 대천강가를 거닐며 《잘있거라 모란봉아》를 코노래로 흥얼거리기에 그 노래가 왜 그리도 쓸쓸한가고 했더니 현해탄에 몸을 던진 한 불우한 녀가수 윤심덕에 대하여 눈물을 머금고 이야기를 했었다. …

이때 《경태 있나?》 하며 초조하게 기다리던 철림이가 빙그레 웃음을 띠고 문가에 조용히 나타났다.

경태는 홱 몸을 돌리며 애상에 잠겨있던 그답지 않게 설레발치며 반겨맞아들였다.

《어서 들어오라구, 오늘은 공일인데두 무슨 행차가 그리 굼뜬가.》 《어이구, 설향씨도 와있구…》

《철림씨, 안녕하십니까?》

철림은 허물없이 다니는 집이여서 성큼 문지방을 넘어 돗자리우에 넌떡 앉아 올방자를 틀었다.

경태는 《설향이.》 하고 눈짓으로 독촉했다.

철림은 방안의 공기가 전에 없이 차분한데다 일부러 설향이까지 와서 각별히 반겨맞는 까닭을 속으로 짐작해보았다.

설향은 허리를 굽히고 철림의 뒤로 조용히 지나 사이문을 열고 나갔다.

《무슨 일 있기에 꼭 와야 한다구 두번세번 당부했나?》

이러한 철림의 물음에 경태는 히물거리며 딴전을 부렸다.

《내 미리 말 안해두 절루 알게 돼.》

철림은 첫눈에 책장이 알뜰하고 규모있게 정리된것이 확연히 알리였다. 창턱에 놓인 초롱꽃화분과 원탁우의 금붕어어항, 금실로 수를 놓은 책상보의 그 어느것에나 다심하고 살틀한 마음과 알뜰한 솜씨가 깃들어있었다. 철림은 경태가 생활의 구석구석에서 자기의 정성을 느끼게 하고 잠시도 그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으려는 설향의 남달리 갸륵하고 극진한 심정을 넉넉히 읽을수 있었다. 철림이 이러한 생각을 더듬고있을 때 사이문이 열리며 경태와 설향이가 긴 음식상을 맞들고 들어왔다. 철림은 벙벙하여 얼른 엉거주춤하고 일어섰다. 긴 상우에는 큰 접시들에 담은 찰떡, 송편, 절편, 편육, 명태자반, 적쇠에 노랗게 구운 이면수 등 잔치상같이 갖가지 음식이 무드기 챙겨져있었다.

경태는 그제야 철림을 주빈으로 특별히 초청한 까닭을 실토하였다.

《…사실은 오늘이 철림의 생일이라는 말을 피뜩 했더니 이 설향이가 한상 차린거야.》

설향은 손을 내저으며 생일상은 자기 어머니가 챙겨주신거라고 말하면서 거북하게 까밝히는 경태를 나무라듯 흘기였다.

철림은 전혀 뜻밖의 일을 당하자 너무 송구하여 몸둘바를 몰라했다.

《나두 잊고 지내는 생일을 이렇게…설향씨, 참말로 고맙습니다. 나같은게 뭐라구 이렇게 요란스럽게…》

그는 가슴이 뭉클해지여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말에 경태도 코허리가 시큰해진듯 헛기침을 하였다.

눈치빠른 설향은 《변변치 못하지만 그저 저희들 성의로 알고 많이 드십시오.》 하고는 누가 붙잡을 겨를없이 달아뺐다.

《자, 빨리 들자구.》

경태는 철림의 손을 끌어 자기와 마주 앉히였다.

철림은 눈을 슴벅거리며 《경태, 생일말을 왜 꺼내가지구 이렇게 페를 끼치게 만드나. …》 하고 진정으로 나무랐다.

그러나 그는 그쯤한걸 가지고 뭘 하는 투로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뭐래나? 그 집은 허물이 없어. 그래야 자네 턱을 대구 나두 대접을 받아볼게 아니야. 자, 어서…》

《나는 여태 이런 요란한 생일상을 받아본적이 없어. 좌우간 고마워. 그런데 넌 어떻게 그 집 부모들과두 한집안식구처럼 됐나. 너는 확실히 활량이야.》

경태는 찰떡을 먹으면서 《사실이야 기막힌 사연이 있었지.》 하고 설향이네와 인연을 맺게 된 사연을 말하였다.

…그때도 지금처럼 왜놈거류민들속에서는 어두워만지면 어스크레한 뒤골목들에서 갖은 폭행과 칼부림이 드문했고 지어 살인행위도 임의로 자행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날이 저물면 바깥출입을 삼가하고 더우기 녀성들은 감히 어두운 밤에 나다닐 엄두를 내지도 못하였다. 그런데 지난해 어느날, 밤도 어지간히 깊은 때에 한 청년이 달려와 어머니병이 당장 위급하다며 울면서 진두경의원의 왕진을 청하였다. 설향의 아버지 진두경은 여느때처럼 두말없이 그 청년을 따라나섰다. 헌데 공교롭게도 그가 나간지 얼마 안되여 천지를 진동하는 우뢰소리와 함께 소낙비가 쏟아져내렸다.

전등불밑에서 한창 공부를 하던 설향은 아버지가 왕진가방만 들고나가신데 생각이 미치자 서둘러 저고리를 입고 우산을 두개 찾아들고서 무작정 혜민동쪽으로 줄달음을 쳤다. 그는 혜민동어구에 미쳐서야 비에 흠빡 젖은 아버지를 따라잡고 우산을 펴드리였다. 그리고는 제창 돌따섰다. 아버지를 좇아갈 때에는 다급한 마음이여서 미처 몰랐댔으나 비가 창대처럼 쏟아지는 캄캄한 골목길을 혼자 걷자니 더럭 무섬증이 났다.

더구나 왜놈거류민망나니들이 날친다는 무시무시한 생각이 들자 우산을 접어들고 황급히 뛰기 시작했다. 타박타박 걷는 발자국소리도, 화닥화닥 뛰는 심장의 박동도 뒤를 바싹 따르는 어떤 괴한의 스산한 기척같이 느껴졌다. 별안간 번개가 비발이 자욱한 어둠을 짓찢으면서 우뢰가 울부짖었다. 순간 험악한 괴한이 아래도리를 허궁 나꾸어채고 동가슴을 떠박지르는 무서운 환각을 어망결에 느끼며 설향은 정신이 아뜩했다. 바로 그때 철림이한테 갔다오던 경태는 난데없이 《으악!》 하는 양철을 찢는듯 한 녀자의 비명소리를 들었다. 금시 머리칼이 곤두서고 온몸에 소름이 쭉 끼치였다. 비명소리 난 다음 돌연 사위는 쥐죽은듯 고요하고 가늘어진 비발이 내리는 소음만 적막하게 들리였다. 그는 무슨 끔찍한 일이 벌어진것만 같아 겁이 더럭 나고 오금은 무엇에 묶인듯 걸음이 제대로 옮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체육선수의 주력을 믿고 용기를 내여 비명소리 난 곳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전지를 비치며 걷던 그는 한순간 눈앞이 아뜩해졌다.

웬 처녀가 뚜껑을 제껴놓은 큰 망홀턱에 간신히 웃몸이 걸린채 죽은듯 늘어져있는것이였다. 그는 즉시 전지를 줴버리고 처녀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발을 뻗치며 가까스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자칫 실수하면 처녀는 두길나마되는 망홀에 허궁 떨어질수 있었다.

키가 늘씬한 처녀를 겨우 끌어올려 길바닥에 눕힌 경태는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망설이였다. 때마침 다행히도 처녀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새여나왔다.

그는 그 처녀를 조심조심 흔들었다.

《여보시오, 여보시오. 》

잠시후 눈을 뜬 처녀는 기급할듯 와뜰 놀라더니 경태를 한참동안 물끄러미 쳐다보고서야 안심되는듯 자기는 진두경의원집 딸이라고 떠듬떠듬 말하였다. 경태는 그 처녀를 둘쳐업고 밤이 퍽 깊어서야 진두경의원집에 이르렀다.

그때까지도 마당에 나와 딸을 기다리던 처녀의 어머니는 얼나간듯 딸을 안아 구들에 눕히면서 와들와들 떨었다. 어머니는 경태의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서야 눈물을 흘리며 경태의 두손을 와락 그러잡았다.

《자네 정말 고맙네. 자네가 우리 설향을 살려줬네. 자네 아니면 우리 설향이 그 깊은 구렁텅이에 빠져 어찌될번 했나, 응…》

경태는 그때를 추억하며 히못이 웃었다.

《…그후부터 설향의 어머니는 나만 보면 객지생활에 불편할것두 많겠는데 제 집처럼 생각하구 아무때나 허물없이 다니라구 얼마나 끔찍이 구는지… 그래서 외동딸인 설향이가 이 경태를 친오빠처럼 따르게 된거야.》

경태는 상밑에서 약주 한병을 꺼내여 상우에 올려놓았다.

《우리 약주 한잔씩 할가?》

철림은 덴겁하였다.

《야, 학생이 술마시면 되겠니. 큰변날라구.》

《이런 떨보라구야. 아니, 제 신변의 위험은 아랑곳않구 막 뛰여드는 네가 술 한잔에 떠는 졸장부라. 여여, 누가 엿보길 하니, 알기나 하니.》 하고 그는 알잔 두개를 내놓고 술병을 기울였다.

그들은 한잔씩 마시고는 인차 약주병을 상밑에 감추었다. 철림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넌 확실히 녀자로 태여날번 하다가 남자루 잘못 태여났어. 그런 한잔에 얼굴이 홍당무가 되다니. 우리 하숙집어머니두 뭐라는지 알아. 너를 처녀같은 총각이래. 웃을 때 손등으로 입을 가리는것두 꼭 처녀 모양이라나. 》

《너 벌써 취한게 안야? 싱거운 소리만 골라하는걸 보니.》

《뭐, 내가 취해? 흥, 내 학생만 아니래두 단숨에 병들인 넉근히 할수 있어.》

그들은 명쾌한 기분으로 담소하며 음식을 들었다.

이윽고 방안의 공기가 후끈해지자 철림은 한무선의 이야기를 꺼내였다.

《여 경태, 한무선선생님이 함흥형무소에 이감됐대.》

《뭐, 한무선선생님이? 아, 그 선생님이야 서간도에 망명하지 않았니?》

경태는 무척 놀라와하면서도 미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두 그렇게 알고있었는데 그 선생님의 할아버님이 경찰서 호출을 받고 가서 통지받았대.》

《그래… 이제는 그 선생님을 다시 보기 힘들게 됐구나.》

경태의 울먹한 목소리에 철림이도 감전된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를 얼마나 사랑해주시던 선생님이였니? 밀정들의 눈을 피해 꼬드래봉에 올라가서는 늘 조선력사와 애국명장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군 했었지. 〈학생들은 뜻을 품고 살라. 뜻이 없으면 금수나 다름이 없다.〉 이렇게 깨우쳐주셨지.》

그는 공부를 마친 후면 철림이와 경태를 자기 방에 불러 새로 구한 소설책이며 당시 류행되던 정치서적도 몰래 읽게 했었다. 철림이가 그를 특별히 더 따르게 된것은 홀어머니슬하에서 그중 극빈하게 지내는 석빈을 공부시키려고 몇푼 안되는 급료마저 그의 학비로 보태주는것을 알게 된 때부터였다.

철림은 지금도 그가 강제퇴직을 당하여 학교를 떠나던 날의 눈물겨운 정상을 잊을수가 없었다.

엉엉 울며 선생의 팔을 꼭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학생들을 붙안고 눈물이 글썽하여 꼭 다시 오마고, 너무 섭섭해들 말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달래였었다. 그래도 남녀학생들은 한번 헤여지면 다시 못 만날것 같아 십리가 넘는 아홉개등까지 따라가서 눈물로 헤여졌었다. 철림은 한무선을 두번다시 만나지 못하리라는 기막힌 심정을 안고 며칠밤을 뜬눈으로 새웠었다. 한무선이 떠나간 며칠후 어느날 밤 누군가가 그를 밀고한 《조개턱》의 뒤통수를 족쳤는데 그만 빗쳐서 한쪽눈깔만 뽑혀나갔다.

외눈통이 《조개턱》은 전보다 더 악착스럽게 학생들을 두들겨패며 발광했다. …

《여 경태, 한잔 더 붓게.》

철림은 상밑에 놓았던 술잔을 도로 올려놓았다.

경태는 너무도 의외라는듯 《이것 봐라, 〈꽁생원〉이 술을 또 청하다니?! 오늘은 무슨 변이 나는거다, 허.》 하며 그의 잔에 약주를 찰찰 넘치게 붓고 자기 잔에도 부었다.

철림은 마치도 가슴속에 무겁게 서린 울분을 술로 가셔내려는듯 매우 희한해하는 경태의 눈길을 받으며 잔을 비웠다.

《경태, 솔직히 나는 매일 속에 불이 일어. 이 망할 놈의 세상에서 노예처럼 사는게 무슨 사람다운 인생이냐. …》

《야, 너 벌써 취한게 아니야?…》

《난 술 할줄은 몰라두 그까짓 몇잔에 취하지 않아. 그래 나나 너나 지금 뼈있게 사니? 생각해봐. 눈을 떠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하루생활이 몽땅 왜식이 아닌가. 조선말도 못해, 흰옷두 못입게 해, 일장기게양 안하면 아무런 집회두 못해, 〈신사참배〉를 강요해. 도대체 〈신사참배〉라는게 개뼈다귀같은짓이 아니구 뭐니? 소위 천조대신따위, 명치천황따위의 귀신패쪽을 그 무슨 수호신으루 참배하라구… 내 어제 교무실에 갔다가 펼쳐놓은 문서장을 피뜩 보았는데 뭐 〈천황〉숭배사상침투가 조선통치의 최상의 방책이라는거야. 난 요즘 마치 삼복에 금고에 갇혀사는것만 같아. 그래 지금 우리한테 우리것이 뭐가 있니, 숨쉬는 자유밖에 더 있니? 그래 살아숨쉰다구 사는거겠니?…》

경태는 철림의 설분을 한참동안 듣다가 한마디 했다.

《나는 그런 생각보다두 네가 어느 곬으로든지 놈들한테 뒤를 밟혀가지구 어스크레한 골목에서 〈박부르도그〉의 주먹에 머리가 깨질가봐 마음이 조마조마할뿐이다.》

《아, 그까짓거야 언제일인데 아직두 허튼 걱정을 하나 말야.》

《아니야, 때린 사람은 잊어두 맞은 놈은 잊는 법 없댔어. 혹시 졸업을 앞두구 출학이라두 당하면 어쩔려구 그래. 넌 시세는 심각히 보는데 자기 존재는 너무나 뒤전에 두고있어.》

철림은 또 술병을 기울이였다.

《흥, 자기 존재란건 무슨 말라빠진거야. 왜식에 코를 꿰여 찍소리도 못하고 순종하는 무지렁이같은 나한테 무슨 자기가 있단 말이야. 넌 그렇지 않아?》

《하긴 나두 매일 아침 〈천황〉놈이 있는 궁성을 향해 허리를 굽히구 절하는 놀음이랑 무슨 례식때마다 〈천황〉놈의 〈교육칙어〉를 받는 수작질이 이젠 막 구역질이 나. 자, 또 들자구.》 하고 경태도 또 잔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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