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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보를 끼고 터벅터벅 하숙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철림의 속에서는 울기가 괴여올랐다. 이따위 학교를 더 다녀서 무엇하며 이따위 공부나 더 해서는 무엇에 필요하겠는가!…

오늘 하학후 전교생이 모인 강당에서 교장이 목청을 돋구어 지껄이는 강연은 고막을 긁듯 귀가 아프고 구역질이 나서 앉아 듣기가 무던히 뻐근하였다.

《…우리 학도 여러분은 모두가 천황의 적자라는 신념에 기초하여 〈신사참배〉에 성실해야 하구 초대총독 데라우찌각하의 취지대로 제국신민으로서의 자격과 품성을 갖추기 위하여 각별히 힘써야 하며…》 하고 돋보기안경알을 번뜩이며 이 말을 곱씹는 교장의 상판은 보기에도 진절머리가 났다. 그 상판은 마치도 검도광인 오꾸마가 쩍하면 늘메기껍질같은 왜옷차림으로 교단에 올라 주문을 중얼거리며 긴칼로 허공을 찌르고 베는 시늉을 할 때의 상통을 신통히 방불케 했다.

철림이 하숙집방문을 열고 책보를 책상우에 던지고 돌아서려는데 하숙집녀인이 문소리를 듣고 서둘러 나오며 《지금 오는가? 미옥의 오래비, 오늘은 고운 손님이 찾아왔네.》 라고 하는데 뒤따라 전번에 길에서 만났던 녀학생이 소리없이 나타났다. 그 녀학생은 《안녕하십니까? 한은해라고 합니다.》 하고 깍듯이 절을 하였다. 너무도 뜻밖이여서 철림은 당황해하며 어쩔바를 몰랐다.

하숙집녀인은 제 자식에게 그러듯 눈을 곱게 흘기며 나무랐다.

《온, 미옥 오래비는 사람이 쭐나기두 해라. 그렇게 뻥해 서있지 말구 귀한 손님을 방에 맞아들여야지. …》

은해는 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어머니두… 전 여기서 잠간 만나구 가면 됩니다.》 하고 황황히 말하였다.

하숙집녀인은 철림을 노상 《미옥의 오래비》 라고 불렀다. 본시 그는 남석면에서 살았다. 그때부터 철림의 어머니 김유영과도 잘 아는 사이여서 철림은 세번째 하숙을 정할 때 그 연줄로 여기에 옮겨앉은것이였다.

은해는 집모퉁이에 서서 광채어린 눈매로 철림을 쳐다보며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사실 제가 온건… 할아버지가 떠나면서…》

《할아버지가 벌써 떠나셨습니까?》

《네.》

《정말 안됐군요. 오래간만에 오셨다가 그런 봉변까지 당하셨는데 제한번 찾아가보지도 못하구…》

《그래서 어머니가 그런 봉변을 또 당할가봐 색다른 천으로 두루마기를 지어드리려고 했었지요. 그런데 할아버지는 펄쩍 뛰시며 구데기 무서워 장 못 담그겠느냐, 백의민족의 근본을 저버리다니 하시면서 흰 모시두루마기를 지어입고 떠나셨답니다.》

철림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로인의 그 고결한 강직성에 스스로 머리숙어지였다.

《어제 할아버지가 떠나시면서 철림씨에게 조용히 알려드리라는 말씀이 있어서…》

《그래요?》

《놈들이 여게 할아버지 와계시는걸 어찌 알았는지 그저께는 경찰서의 호출을 받고 가셨다가 무선오빠가 함흥형무소에 이감되였다는 소식을 알고 오셨습니다.》

《함흥형무소?!》

철림은 놀랍게 부르짖었다. 순간 그는 가슴이 와르르 무너져내리는듯 했다. 자기를 그토록 사랑해주고 진정으로 이끌어주던 한무선선생님이 형무소에 갇히다니!

한무선은 일찌기 아버지, 어머니를 여의고 맏삼촌인 은해네 집에 얹혀살았었다. 그는 거기서 보통학교를 마친 후 할아버지의 간곡한 만류도 부득부득 뿌리치고 서울향전고보에 진학했었다. 그는 삼촌의 사진업으로는 아름찬 학비를 충당할수 없어 물지게장사와 신문배달 등 온갖 잡역으로 고학을 했으나 졸업후 전망이 막막해지자 일절 단념하고 고향에 돌아와 사립대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것이다. 거기서 축출된후 압록강을 건너 어느 시골사립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다는 어슴푸레한 소식을 풍문에 들었을뿐이였다.

은해는 어릴적부터 한무선이 즐겨보는 책들을 몰래 빠짐없이 탐독하면서 시세에 눈이 튼지 오래였다. 그러하였기에 장마당의 봉변때에도 철림의 담대하고 과단성있는 행동에 내심으로 무척 탄복했던것이다. …

자연 발길이 호젓한 뒤골목을 거쳐 어느새 네거리에 이르렀다. 은해는 무언가 말할듯말듯 바재이다가 《저… 혹시 몇해전 방학때 태평령 아래집에 들린적이…》 하고 말꼬리를 흐리였다.

마침 철림이도 그렇게 짐작하고있던 참이였다.

《아, 그럼 그때…》

《그 집이 우리 이모네 집이였답니다.》

《아, 그렇습니까. 나두 처음 보는 순간 낯이 익다 했더니…》

철림은 별안간 웃음보를 터치였다.

《하하하, 그럼 그때 금방 죽을 지경이 됐던 제 몰골두 다 보았겠군요.》

《호호호, 그날 이모는 철림씨가 문지방을 넘는 순간에 초기만난것을 인츰 알아채셨답니다.》

《내 미처 알아보지 못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아니예요. 제가 먼저 인사를 드렸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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