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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숙방에 돌아온 철림은 옷을 와락와락 벗어 말코지에 건 다음 두손을 깍지끼며 뒤통수에 대고 두다리를 쭉 뻗치고 반듯이 누웠으나 금시 질식할것만 같아 허리를 일으키고 앉았다.

닷새에 한번씩 서는 장날이라고 어쩌다 장농에서 꺼낸 흰옷의 나들이차림을 하고 먼먼 시골서 온 사람들이 시꺼먼 먹물칠을 당하던 그 광경이 다시금 눈앞에 떠올랐다.

일본놈들은 날이 갈수록 목에 피대를 돋구어 《색복장려》를 떠들다 못해 흰옷풍습마저 강압적으로 말살하려고 그따위짓까지 꾸며낸것이다.

놈들의 치졸한 처사가 가증스럽기 그지없었다. 더우기 새로 지어입은 듯 한 한무선선생 할아버님의 눈같이 새하얗던 모시두루마기를 먹물투성이로 만든 박가놈을 더 짓뭉개버리지 못한것이 분하였다. 그는 속이 가라앉기는커녕 자꾸만 울적해졌다.

(오늘 나의 행동이 너무 도를 넘겼을가? 아니야. 나로서야 정당방위로 그렇게밖에는 달리 어쩔수 없지 않았는가. …)

문득 고보에 입학하여 집을 떠날 때 외할아버지가 손바닥만 한 수첩에 써주신 다심한 주의사항가운데서 《철림아, 어디서나 무모한 행동은 삼가하거라.》 라는 조항이 상기되였다.

(내 행동이 무모한것이였을가? 아니야. …)

여느 늙은이가 그와 같은 모욕을 당한대도 참아낼수가 없었을터인데 하물며 옛 스승의 할아버님이 당하는 그렇듯 처참한 모독행위를 외면한다면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초보적인 도의를 저버리는거나 다름없지 않는가! 그런데 경태는 왜 오늘따라 하필 2학년때의 일을 새삼스럽게 상기시켰을가? 그 말을 듣는 순간 철림은 참을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으나 경황없이 황급하게 구는 그 서슬에 꾹 참을수밖에 없었던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일이 그때와 방불해질수 있다는 뜻에서일가? 그때일을 상기하면 지금도 낯가죽을 한벌 벗기우는듯 창피스럽고 홍두깨같은것이 속에서 치밀어올랐다.

…당시에는 왜 그런지 하숙생활에 도무지 마음이 붙지 않았었다. 앉으나서나 고향집이 못 견디게 그리울뿐이였다. 그날은 공일이여서 하숙비를 물어주고 떠나는 어머니를 그냥 따라걸으며 선뜻 발길을 돌리지 못했었다.

《철림아, 이젠 그만 돌아가거라. 사내장부가 그렇게 마음이 연해선 못 쓴다.…》

《어머니, 160리길을 어떻게 걸어가시겠어요.》

《일없다. 네가 열다섯살때부터 그 추운 동삼에두 노루꼬리만 한 하루해길루 저물기 전에 대이군 하던 길인데 이 엄마라구 못 가겠니? 집걱정일랑 말구 공부에 전심해라. …》

그날 철림은 돌아서는척 하고는 어머니가 검산령을 넘을 때까지 멀찌감치에서 따라 걸었었다.

철림은 허전한 마음으로 언저리에 일매지게 늘어선 뽀뿌라나무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운동장을 지나 교실에 조용히 들어섰다. 그는 교단옆에 놓여있는 풍금앞에 다가가서 뚜껑을 열고 풍금을 타기 시작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때아닌 풍금소리를 듣고 복도를 지나던 오꾸마 시게노브교장이 반쯤 열린 교실뒤문으로 슬그머니 들어섰다.

철림은 그만 선률에 심취되여 오꾸마가 자기뒤에 바싹 다가와 서있는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었다. 철림은 풍금에 맞추어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리

그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


별안간 어깨뼈가 부서지는듯 한 아픔과 동시에 지시봉이 와지끈 부러져 풍금뚜껑에 부딪치며 교실바닥에 나떨어졌다. 철림은 와들짝 놀라며 일어섰다.

《칙쇼! 반도놈새끼! 조선노래 불러? 앙!》

그는 땅딸보교장의 앙칼진 호통소리에 그만 얼떨떨해졌다. 다음순간 오꾸마는 황소처럼 씩씩 가쁜숨을 톺으며 저보다 키가 훨씬 더 큰 철림의 멱살을 움켜잡고 교단우로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목검체조시간에 벽에 세워둔 격검채를 와락 후려잡더니 철림의 종다리를 사정없이 짓조기기 시작했다. 철림은 종다리가 금방 터져나가는듯 했으나 작은 입을 꽉 다물고 끄떡없이 참아내였다. 이에 더더욱 약이 오른 오꾸마는 《반도놈새끼, 불량생놈새끼, 〈황국〉노래를 부르라고 가르쳤지 그따위 조선노래를 부르라고 했는가? 앙!…》 하고 소리질렀다. 오꾸마는 더 기광스럽게 격검채로 피가 흐르는 철림의 종다리를 마구 조겨댔다.

그때 교원 서넛이 급히 달려왔다.

《나니?!》 (뭐야!)

《교장선생님, 좀 자중하십시오.》

오꾸마는 쥐눈에 빨갛게 독기가 올라 씨근덕거리다가 교원들이 지켜보는것을 느끼고 라선생의 손에서 격검채를 홱 나꾸채여 교실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조선노래 부르는 저 반도놈새끼한테 당장 벌을 세우고 내쫓으라!》 아직도 더 분풀이를 못한것이 불만인듯 오꾸마는 웅얼거리며 교실을 나가버렸다. …

학생들속에서 어지간히 신망있는 라선생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교장선생의 령인데 별수 없지 않나…》 하며 철림을 교실구석에 세워놓고 두팔을 앞으로 펼치게 한 다음 걸상을 그우에 올려놓았다. 씁쓸한 표정을 짓고있던 다른 교원들이 나간 다음 라선생은 조용히 귀뜀해주었다.

《조용할 때 교장선생을 찾아가 사죄하라구. 이제 정학이요, 출학이요 하고 처분을 내리면 야단 아닌가…》

철림은 옹근 세시간동안이나 벌을 서있자니 두팔이 당장 떨어져나갈듯 저려들고 원통하기 그지없었으나 검도광인 땅딸보교장에게 빌붙을 생각은 꼬물만큼도 없었다.

이로 하여 사태는 험악하게 번질번 했으나 철림은 학급장이고 학업에서 1등생이라는 라선생의 변호와 이미 뢰물로 오꾸마를 삶아놓은 신병문이 경태의 성화에 못이겨 교장을 일부러 찾아와 사정을 해준 덕에 다행히 정학이나 출학처분을 면하게 됐던것이다. …


*


《할아버지, 이걸 좀 보세요. 요먼저 일이 신문에 다 났어요.》 하고 은해는 《동아일보》를 들고 할아버지곁에 다가가 띄염띄염 읽었다.

《 〈장거리에서 먹물을 뿌려 장날에 흑색비〉 지난 22일 xx읍 시장에서는 난데없는 검은 물방울이 쏟아져서 모였던 군중은 어쩔줄을 모르고 갈팡질팡 대소동을 일으킨 일이 있었다. …

…면에서 색옷장려로 직원과 소사까지 총출동하여 각기 물총을 가지고 일부러 검정물을 뿌리였다. …때는 마침… 장날이라 모처럼 새옷을 갈아입고… 왔다가 뜻밖에 먹물벼락을 당하고 어이없어 돌아갔다 한다.》

( 《동아일보》 193x년 3월 x일)

로인은 덤덤히 듣고있다가 그날의 기막힌 일이 상기되여 꺼질듯 한숨을 쉬며 한탄하였다.

《참말루 망할 놈의 세상…》 그러다가 피뜩 생각이 미친듯 《그날 철림군은 다른 별고가 없었겠지.》 하고 걱정했다.

《그날 신경태라는 든든한 고보생이 피신을 시켰으니 아마 별일은 없었을거예요. 근데 할아버진 그 학생을 어떻게 그리 잘 아시나요?》

《고명한 집안의 자손을 내 모를턱 있니. 그 사람의 외할아버지는 독립군출신의 사립학교 설립자인데다가 인품이 도고하여 마을에서 존대를 받는분이다. 철림이 그 사람 역시 례의범절이 깍듯하구 그의 어머니두 사립학교를 나온 처신이 의젓한 내인이다.》

은해는 이 이야기까지 듣고보니 일전에 철림을 만난 첫 순간부터 지금껏 머리속에 어디서 보았던지 잡힐듯말듯 하면서도 종시 아리숭하던 그에 대한 표상이 또렷이 잡히는것이였다. 순간 그는 가슴이 숨가쁘게 활랑활랑 들뛰였다. … 은해가 이모네 집에 놀러간지 사나흘 되는 어느날 한밤중에 누구인가가 조심스럽게 집주인을 찾는것이였다.

남포등밑에서 책을 보던 그는 얼른 일어나 부엌문을 열었다. 문밖에 학생복에 교모를 쓴 학생이 어슴푸레한 달빛속에 서있었다. 그 학생은 무척 소심한 어조로 《안녕하십니까? 밤중에 안되였습니다. 이밤에 태평령을 넘기 힘들어서 하루밤 좀 묵어갈수 없을가 해서 그럽니다.》 하고 말했다.

은해는 어찌하면 좋을지 몰라 집안을 돌아보며 망설이는데 잠자리에 들었던 이모가 벌써 바깥말을 다 듣고 《얼른 들어오래라.》 하고 머리를 비다듬으며 일어났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그 남학생은 좀 주춤거리다가 힘들게 문지방을 넘어서는것이였다.

이모는 남포등피를 들고 불심지를 돋구면서 《어머니, 안녕하십니까?》 하고 깍듯이 인사를 하는 그더러 밤길에 오죽 고생했겠는가고 하며 서둘러 자리를 권했다. 이모는 군말없이 가시장우에서 소반을 내려놓고 저녁상을 날래게 챙기였다. 그리고 손수 저녁상을 학생앞에 놓아주며 밥은 차지만 국은 따끈하니 얼른 요기를 하라고 제 아들처럼 각근히 구는것이였다.

그 학생은 잠자리에 누워 몸을 뒤척일 때마다 가늘게 신음소리를 내였다. 그런데 그 학생은 날이 푸름히 밝아지자마자 이모가 극성스럽게 말리는데도 시간이 급하다면서 거듭 사례를 하고 떠났었다. 그로부터 한 이틀쯤 지나 흰 광목치마저고리를 단정히 입고 낭자에 비녀를 꽂은 중년부인이 태평장 보러 왔던 길에 들렸다면서 조용히 집에 들어서는것이였다.

첫눈에 기품이 느껴지는 녀인은 이모에게 《혹시 그제밤에 한 남학생이 댁에 들리지 않았댔습니까?》 하고 묻는것이였다.

이모는 반색하며 《예, 그래요. 그 학생 어머니신게군요. 어서 오십시오.》 하고 녀인의 손을 잡아끌었다.

《글쎄 우리 애가 이 집 어머니의 신세를 크게 졌다면서 꼭 들려 인사를 드려달라구 신신당부하길래…》

《신세야 무슨 신세겠나요. 글쎄 그날 집에 들어서는 학생의 기색을 보니 몹시 초기를 만난게 첫눈에 알리지 않겠수. 그래 너무 급해서 밥을 새로 짓지 못하구 찬밥대접밖에 못했는데… 다음날 아침을 들구 떠나라는데두 부득부득 우기며 새벽길을 떠나더군요. 글쎄 빈속에 30리길이 어데라구. …》

《원래 걔는 성미가 너무두 쭐나서 아마 댁에서 먼저 식찬을 챙겨주지 않았다면 제 입으루는 밥달라는 말을 입밖에 꺼내지두 못했을거예요.》

두 녀인은 애모쁜 심정으로 같이 웃었다.

《나두 그 학생만 한 아들애가 객지에 나가 공부하는데 그날두 그 애 생각이 불쑥 나서 호-》

《걔가 며칠전에 학교에서 조선노래를 부르다가 교장한테 죽도록 매를 맞아서 두종다리는 다 갈라터지구 바오리같이 멍이 져서 한걸음 옮기기 힘든데두 이 어미를 찾아오느라구. …》

녀인의 목소리가 떨리며 류달리 어글어글한 눈가에 핑 눈물이 맺혔다.

그 순간 은해도 가슴이 화끈해지고 그 학생에 대한 련민의 정이 북받쳐올랐었다. 그 학생이 바로 다름아닌 오늘의 최철림이였던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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