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1


유별난 해였다. 이른봄인데도 숨막히는 왕가물이 지지리 계속되였다. 봄에는 생말가죽이 마른다더니 이 세상만물을 움틀적부터 애당초 말려버리려는가?

파릇파릇해지던 잔디도 다시 초들초들해지고 금시 단내가 날듯이 바싹 마른 길바닥에서는 구들재같은 먼지가 날렸다.

큰길가에 도사린 음침한 혜신경찰서정문곁에 늘어지게 엎드린 늑대같은 세퍼드는 혀를 한자나 잔뜩 늘어뜨리고 헐떡헐떡 숨을 톺았다.

어느 먼지투성이의 골목길에서는 엿궤를 짊어진 엿장사의 《엿사시우, 엿이요. 맛좋은 농마엿 사시우…》 하는 늘어진 목소리와 짤락짤락 하는 단조로운 가위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반공일이여서 오전공부를 끝낸 혜신고등보통학교 학생 최철림은 울적한 기분으로 내키지 않는 걸음을 무겁게 옮기고있었다. 일찍 들어간대야 기다려주는 사람도, 반겨줄 사람도 없는 하숙생활이였다. 철림은 큰길로 다니는것이 딱 질색이여서 우정 철뚝굽이소로길로 에돌아다녔다. 거기서는 여러단의 화강석계단우에 도사리고있는 해골박같은 《신사》가 마치도 군청을 위시한 혜신읍의 뒤덜미를 짓눌러 타고 앉은것 같이 바라보이였다.

그앞의 큰길을 지나려면 그 《신사》를 향해 눈을 감고 두손을 높이 들어 손벽을 치고 절을 하여야 했다. 그는 그런 미친놈같은 꼴을 하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그래서 철림은 내내 멀리 에도는 이 소로길로 남들의 눈을 피해 걷군 하였다.

오늘은 장날이여서 짐을 이고진 시골의 늦장군들이 사방에서 장거리로 꾸역꾸역 모여들고있었다.

방금 정거장을 벗어난 혼합렬차는 성난 소리를 지르며 화풀이라도 하듯 드높은 대천강철다리를 우당탕거리며 지나갔다. 또 무슨 변이 생겼는지 혜림려관앞 대통로에서는 먼지구름을 날리며 달려가는 《특설경비대》기마대의 황급한 말발굽소리가 어지럽게 울려왔다.

행길에 올라 한참 걸어가느라니 좀 드문드문해진 장군들속에서 눈같이 흰 모시두루마기에 단화를 받쳐신고 밤색중절모를 쓴 한 로인이 활개를 내저으며 걸어오는 모습이 얼핏 보였다.

어딘가 낯이 퍽 익어 찬찬히 살펴보니 아니나다를가 한무선선생의 할아버지였다. 철림은 반색하며 다가가 인사를 하였다.

《한무선선생님의 할아버님 아니십니까?》

로인은 흠칫하고 걸음을 멈추더니 인차 알아보았다.

《어이구, 이게 누군가. 대현교장선생님의 외손이군그래. …》

《할아버님, 그새 무고하셨습니까?》

《그저 그러하이. 자네 이 험한 객지에서 공부할내기 얼마나 고생스럽겠나. …》

《할아버님, 어떻게 이 먼길을…》

로인은 자그마한 보꾸레미를 들고 다소곳이 옆에 서있는 녀학생을 가리키며 《참, 내 손녀네. 애, 인사하거라. 이전날 네 사촌오래비의 제자다.》 하고 말하였다. 녀학생은 고개를 반쯤 숙이고 상냥하게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십니까?》 그 녀학생은 얼핏 철림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약간 놀라는듯 한 표정을 지었다. 검은색저고리에 깜장치마를 입고 밤색구두를 신은 몸매 날씬한 그는 퍼그나 단정해보였다.

단발한 머리칼 몇오리가 하얀 이마에 가쯘히 드리우고 가벼운 미소가 어린 버들잎같은 눈, 오똑한 코마루, 차돌같이 자름자름한 이가 보일듯말듯 방싯 열린 도톰한 입술… 어느모로 보나 지성미가 풍기였다.

철림은 그를 어디서인가 한번 본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데서 보았던가?…)

로인은 철림이와 함께 발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내 별루 하는 일없이 지내면서도 둘째 아들집에 와본지가 너무 오래돼서 그저 나들이삼아 오는 길이네.》

그때였다. 별안간 뒤쪽에서 《아-악!…》 하고 귀청을 찢는 경악한 울부짖음소리가 터졌다.

《이게 무슨 소린구?》 로인은 와뜰 놀래였다.

철림은 홱 몸을 돌렸다.

행길과 잇달린 장마당복판으로 누런 국민복과 검정양복차림을 한 젊은 떼거리가 쓸어들어 물총으로 흰옷을 입은 장군들에게 먹물을 마구 쏘아대고있었다. 장군들은 《흑비다!》 하고 새된 소리를 지르며 산지사방으로 흩어져갔다. 그 다급한 서슬에 장마당가녁에 앉은 한 파파늙은 할머니의 고추가루함지가 뒤엎어지고 방금 옹기전앞에 세워둔 지게가 나딩굴며 지게우에 낟가리처럼 쌓아올렸던 물동이며 쌀함박 등 오지그릇들이 와지끈 산산이 박산나버렸다.

그래도 그 떼거리는 얼간이들처럼 히히거리면서 뿔뿔이 흩어지는 사람들을 따라다니며 그들의 잔등에 시커먼 먹물을 쏘아댔다. 겁에 질린 아이들은 앙앙 울어대고 단벌옷을 망쳐버린 한 시골처녀는 가게방모퉁이에 비켜서서 쯜금쯜금 눈물을 짜고있었다. 삽시에 장마당은 온통 란장판이 되고말았다.

《할아버님, 빨리 이 자리를 떠야 할것 같습니다.》

《그러세. 》

철림이 로인을 부축하고 옆골목길에 들어서려는 순간 국민복에 각반을 차고 절구통만 한 대갈통에 전투모를 얹은 장대하고 험상궂은 사나이가 게다짝을 신은 발로 사람들을 마구 걷어차며 바싹 다가들어 물총질을 했다. 그 우악한 사나이는 어쩔새도 없이 로인의 새하얀 모시두루마기에 먹물을 확 뿜었다.

《어이구, 이게 무슨짓이야!》

녀학생은 어쩔줄을 몰라 《할아버지!》 하고 로인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거나말거나 우악한 사나이는 로인의 잔등이며 옆구리에 먹물을 마구 쏘아댔다. 대뜸 두루마기에서는 먹물이 줄줄이 흘러내렸다.

잠자코 쏘아보던 철림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여보시오, 이게 무슨 망나니짓이요.》

《뭐, 망나니짓? 어디서 꼭뒤에 피두 안마른 이따위 고보생나부랭이야? 주먹찜질이나 당해봐야 아가릴 다물겠어?》

그 사나이는 흰자위 많은 눈알을 희번뜩거리면서 주걱턱의 검은 기미가 유표한 낯짝을 험상궂게 찡그리였다. 손녀가 벗겨주는 두루마기를 들어보며 온몸을 후들후들 떨던 로인은 그만 격노하여 추상같이 호령하였다.

《에끼! 이 천하무도한 놈,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이따위 망나니짓을 하다니, 이 무도한 놈!…》

《이 두상태기, 뭐 무도한 놈? 아니, 그래 〈색복장려〉가 〈국책〉인것두 몰라? 〈비국민〉같은 두상태기. 그래 류치장맛이나 봐야 정신들겠어?》

철림은 그만 밸이 불끈 동했다.

《여보, 당신두 부모가 있겠지. 로인에게 무슨 말본새가 그렇게 험악하오?》

그러나 그 사나이는 들은척도 않고 물총을 사방에 대고 쏘아댔다.

《할아버님, 저런 불망종들과는 맞서지 않는것이 좋습니다. 얼른 자리를 피합시다.》

이 순간 사나이는 철림의 어깨를 와락 나꾸채여 제앞으로 홱 돌려세웠다.

《이 개새끼, 다시 말해봐. 뭐, 불망종?》

그 사나이는 대뜸 떡메만한 주먹을 내들었다.

철림은 날쌔게 한발 뒤로 물러나며 왼바깥팔목으로 그의 주먹을 맵짜게 막았다.

《이 새끼, 좀 쓸줄 안다. 죽어봐라, 이 개새끼야!》 하고 사나이가 씽 나오며 재삼 주먹을 내두르려는 찰나 철림은 왼팔로 그의 팔뚝을 후려막으며 오른손 앞주먹으로 그의 턱주가리를 번개같이 내질렀다. 철림의 철퇴같은 타격에 얼친듯 비틀하였다. 철림은 열기 오른김에 오른팔굽으로 놈의 코밑을 불이 번쩍나게 박아댔다. 그놈은 물먹은 담벽처럼 털썩 땅바닥에 너부러졌다. 큰 구경거리나 생긴듯 슬금슬금 모여들었던 장군들은 《어이구, 살인나겠다.》, 《이 일을 어쩌나.》, 《무슨 봉변을 당하려구 그러나.》, 《여보게 학생, 빨리 피신하라구.》 하고 겁에 질려 저마끔 한마디씩 던지며 비실비실 물러들 났다.

바로 이 순간 누군가가 바람같이 날아들며 제잡담 철림의 팔을 와락 그러잡았다. 그것은 난데없이 나타난 신경태였다. 그는 온통 사색이 되여 무작정 철림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가만! 할아버님, 빨리 자리를 뜨십시오.》 하고 어찌할바를 모르고 겁에 질려 서있는 로인과 손녀에게 소리를 쳤다.

처음에는 화닥닥 놀라 달아나던 사람들이 비로소 영문을 알게 되자 망나니들에게 걸죽한 욕을 퍼부었다.

《급살맞아 뒈질 놈들!》

《당장 날벼락이나 콱 맞아라!》

《옘병에 당장 뒈질 종간나새끼들아!》 …

얼떨떨하게 경태한테 손목을 잡히여 이끌리워가는 그 경황에도 철림의 눈길은 저 발치에 있는 중국인짜장면집 모퉁이에서 두손을 앞가슴에 포개여대고 매우 놀라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희멀쑥한 진설향의 얼굴이 미쳤다. 철림은 키가 웬간한 자기보다도 반뽐정도 더 큰 름름한 경태가 그렇게도 기가 질려 눈알이 뒤집힌 모양은 난생처음 보았다. 사람들의 눈이 미칠수 없는 담벽으로 둘러막힌 뒤골목구석에까지 와서야 경태는 철림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철림은 그가 너무 기급해서 허둥지둥하길래 금방 어느 왜경한테 꼬리를 밟히운줄 알고 두말없이 예까지 끌려왔던것이다.

《경태, 넌 어디서 벼락같이 나타나 날 예까지 끌구왔니?》

경태는 이마의 땀을 팔소매로 뻑 훔치고나서 목소리를 낮추어 말하였다.

《여, 이 도깨비야. 이자 네가 때려눕힌게 누군지 알기나 해? 박히택이라구 망나니패 두목이야. 거리에서 〈박부르도그〉라면 모르는 사람없어. 그놈이 지금 읍면소 소사루 들어가 마구 돌아치는 판에 건드렸다가 무슨 된코에 걸릴려구 그래? 거기에 경관까지 나타났더라면 어찌될번 했나 말야. 〈색복장려〉에 도전했다는 죄명을 들씌우면 어쩔려구 그래? 그땐 모든게 끝장이야. 또 〈박부르도그〉가 네 얼굴을 기억했다가 어느 모퉁이에서 달려들어 보복하면 어쩔테냐? 이젠 제발 그 생매같은 성미를 좀 죽여라.》

진정에 넘친 그의 말에 철림은 가슴이 훈훈해졌다. 철림은 헛기침을 하고나서 누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 하나 묻자. 그래 오늘 내가 잘못한게 뭐냐? 그래 너라면 한무선선생님의 할아버님이 그렇게 혹심한 모욕을 당하는걸 보고도 그냥 참아낼수 있었겠니?》

《아, 그런 행패야 그 할아버지만이 당한게 아니지 않니. 또 네가 나선다구 사태가 달라지기라도 할것 같니?》

이러한 말을 례사롭게 던지는 경태를 그는 힐끗 쳐다보며 언짢은 어조로 반문했다.

《경태, 너 그것두 말이라구 해?》

하지만 경태는 그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이 마치 철림이와 오래 마주서있는것마저도 사뭇 불안한듯 연방 사위를 두리번두리번 살피다가 《지금은 누구의 눈에도 뜨이지 않게 빨리 하숙집으로 사라지라구. 당분간은 장거리쪽에 얼굴을 내밀지 말라구. 특히 오늘일이 자기를 잡을번 했다는것만은 똑똑히 명심하는게 좋아. 너 2학년때 일을 벌써 다 잊어버린게 아니야?》 이렇게 말하고는 삑 돌아서 갔다.

*


느지막해서 짜장면집을 나선 경태와 설향은 발길이 가는대로 대천강가를 따라 스적스적 걸음을 옮기였다. 워낙 경태는 짜장면을 남달리 즐기였다.

설향은 경태의 구미에 맞추어 드문히 이 음식점에 다니기 시작하여 이젠 단골손님격이 됐다. 어느 공일이나 혹 저녁에 흥행극단이나 곡마단상연이 있는 날이면 의례히 이 짜장면집에서 한끼씩 굼때군 했다. 하숙생인 경태에게는 오히려 이것이 한결 편리하였다. 오늘도 그들이 짜장면집모퉁이에 이를무렵 저바로 장마당에서 별안간 아우성이 터지고 란장판을 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것이였다. 저마끔 물총을 들고 지랄치는 떼거리속에서 그중 드살스레 란탕치는자는 박히택소사였다. 그는 제 애비가 아편밑수업을 하다가 종시 아편중독으로 죽은 후 밀수거간, 운송점수위 등을 하던자로서 주먹행세를 일삼아오는 망나니패 두목이였다. 그런데 천만뜻밖에도 여직껏 눈에 뜨이지 않던 철림이가 난데없이 불쑥 나타나 박히택이와 맞서더니 눈깜짝할 사이에 그를 단매로 넘어뜨리는것을 보고 경태는 제잡담 그리로 살같이 달려갔던것이다. 질겁한 설향은 《경태오빠!》 하고 다급한 목소리로 불러세우려 했으나 그는 들은척도 안했었다. 설향은 종일 마음이 불안했다. 당장에 그 어떤 어마어마한 일이 터질것만 같았다. 철림은 말할것도 없고 그를 피신시킨 경태도 어느 밀정의 눈에 걸렸다면 결코 무사치 못하리라는 우려가 가슴을 졸이였다.

한참동안 머리를 다소곳하게 숙이고 걸음을 옮기던 설향이 먼저 말을 꺼내였다.

《오빠, 그렇게 아짜아짜한 판에 마구 뛰여들었다가 후날에라도 별일이 없을가요?》

그러지 않아도 위구를 버리지 못하고있는 경태였으나 설향의 앞에서 자존심을 세우느라고 례사롭게 눙치였다.

《별일이야 뭐… 그 혼잡판에 사람을 가려볼 놈 어데 있겠다구. …》

사실 설향의 우려도 공연한것이 아니였다. 그 혼잡판에서 그들이 날래게 몸을 뺐으니망정이지 즉석에 졸경을 치를번 한것이였다. 그들이 피신한 후 좀 지나서 뻐드러진 박가에게로 면소패거리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더러는 육중한 박가를 일으키고 더러는 그를 멨다쳐놓은 당자를 찾아내려고 골목골목을 누비며 설치였던것이다.

설향은 친오빠와 다름없는 경태의 신변에 뜻하지 않는 화라도 미칠가봐 속이 한줌만 해있었다.

《오빠, 다시는 오늘같은 일에 제발 나서지 말라요. 오늘 조금만 지체했어두 꼭 무슨 일 터지고말았을거예요. 난 가슴이 막 화들거려서… 그런데 어찌 체격두 호리호리하고 힘꼴을 쓸데라군 하나 있어뵈지 않는 철림씨가 단박에 그 황소같은자를 거꾸러뜨렸을가요?》

《하하하.》 하고 경태는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혜신읍거리에서는 제 주먹밖에 없노라고 뻐기던 〈박부르도그〉가 오늘 단단히 혼쭐을 뽑혔을거야.》

경태는 잠시동안 입을 다물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다가 철림이 권법을 익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본시 철림의 외할아버진 우리 다니던 사립학교를 설립하고 초대교장을 하셨댔지. 그런데 하루는 철림이더러 〈이녀석아, 너같이 기골이 변변치 못해가지구는 이 험한 세상을 못 살아간다. 사내란 제 몸 하나 건사할만 한 호신술이야 갖춰야지.〉 하며 그날부터 외손자에게 당수를 배워주셨지. 원래 소학시절부터 엄동설한에도 얼음구멍에서 랭수마찰을 하던 독종인 철림은 매일 새벽 버들방천에 나가 당수를 련마했지. …》

설향에게는 경태의 입에 늘 오르는 철림에 대한 표상이 오늘은 판판 다르게 안겨왔다. 경태처럼 세루복 아닌 무명학생복을 입고 다니지만 옷차림과 몸가짐이 남달리 단정하고 처녀같이 희고 참한 얼굴은 어딘가 연약하고 소심한 인상을 주던 그였다. 그런데 오늘 보니 견줄데 없이 담대하고 용력이 또한 이만저만하지 않았다. 설향은 아직은 학생으로서 너무나 당돌하고 화약같은 그의 기질이 어쩐지 두렵게 생각되였다. 엇서나가다는 언젠가는 필연코 예상치 않던 화를 입게 될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그와 남달리 자별한 경태에게도 필경 그 화가 미칠것이였다.

사실 설향은 경태를 통하여 철림이라는 인간을 속속들이 알게 되였었다. 경태와 이따금 만나는 때에도 그는 자기에 대한 이야기보다도 다분히 철림에 대한 이야기에 열중했었다. 소꿉시절부터 그와 이마를 맞대고 자란 어린시절의 이야기만 나오면 도취되여 시간가는줄을 몰랐었다. 그럴 때면 마치 설향이라는 존재를 아주 잊은듯 하여 야릇한 시새움이 일기도 했었다.

뭇별들이 알알이 무르익는 봄, 가을철이면 불방망이를 들고 얕은 내에서 뚝중이, 뚝지, 종개를 작살로 잡던 유년시절이며 좀 철이 들면서부터는 풍금타러 철림의 집에 가고 경태네 집 축음기로 류행가 들으러 철림이 자주 다녔다는 목가적인 이야기는 설향에게도 아늑한 감회를 불러일으키군 했었다. 본시 노래에 각별한 취미가 붙은 경태는 레코드에 자기의 노래를 취입하는것이 간절한 소망이였다. 그는 유명한 가수들의 경력에 정통하고있었으며 레코드회사와도 일정하게 편지거래가 있었다. 그들 두집은 나지막한 달래언덕을 사이에 두고 어지간히 떨어져있었으나 방학때면 단 하루도 번지지 않고 서로 찾아다녔다. 그처럼 그들은 마치도 한피줄을 타고난 쌍둥이마냥 유별난 정으로 융합되여있었다.

그러나 두집안의 래력은 너무나 대조적이였다.

철림의 아버지 최계수는 무슨 까닭인지 집에 혹간 들리기는 하나 라진부두공사장이요, 어느 목재소요 하며 거의 밖에 나가 살다싶이 하였다. 그리하여 철림은 외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손탁에서 컸다. 반대로 경태의 아버지 신병문은 꼬리없는 황소로 불리우는 한다하는 씨름군으로서 손수 숯을 구워파는 숯장사였다. 그런데 하루는 숯가마의 불이 번져 산불을 일으킬번 하여 왜놈산림간수한테 귀빰세례를 당하고는 밸김에 그놈을 허궁 들어 곤두박았었다. 그때문에 경찰관주재소에 갇히고 푼푼이 모아둔 돈과 숯가마며 숯막을 벌금으로 모조리 떼웠다. 이러한 곤욕을 치른 다음부터 신병문은 달팽이처럼 자기를 옹송그리고 헛눈 한번 파는 법없이 몰래 장작장사를 하여 번 돈으로 잡화가게를 차리고 거기서 긁어모은 돈으로 마침내 제재소까지 크게 꾸려놓고 차츰 남석면에서 떵떵거리게 된것이였다. 그 덕에 경태도 하숙생활을 호사스럽게 하고있었다.

  다음페지

←되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