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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회


제5장


4


1977년 3월 어느날 장현철은 백두산을 향해 평양을 떠났다. 렬차를 타고 혜산까지 와서 운이 좋게 인차 량강도혁명전적지건설돌격대의 자동차를 한대 잡아탈수가 있었다. 자동차는 혜산에서 식량을 싣고 삼지연으로 가는 길이였다.

얼굴이 우락부락하게 생겼지만 마음이 수더분해보이는 상고머리 운전사가 옆좌석에 앉은 장현철에게 물었다.

《그래, 준비를 든든히 하고 왔소?》

《무슨 준비 말입니까?》

《이렇게도 말귀가 어둡다구야.》 운전사는 답답하다는듯 혀를 찼다.

《백두산에서 살려면 간단치를 않아. 우선 옷을 두툼한것으로 껴입어야 해. 동무 솜옷은 좀 얇소. 도시에서 겨울을 나기에는 맞춤하겠지만 백두산추위에야 안되지.》

운전사는 현철이가 입은 솜옷을 만져보면서 말하였다.

《안에 많이 껴입었소?》

《예, 모내의를 입었습니다.》

운전사는 얼핏 보기에도 햇내기라는게 알리는 장현철을 가르치려들었다.

《동무같이 단련이 부족한 사람들은 동상고를 미리 준비하는것도 좋아. 얼굴도 얼고 손과 발도 얼수 있거던. 하지만 이젠 엄혹한 겨울은 지났어. 봄이 왔거던. 그래도 여긴 아직 추워.》

《난 각오를 단단히 하고 왔습니다.》

《아, 그렇지. 무엇보다도 마음의 준비가 중요한거지.》 운전사는 머리를 끄덕이고나서 계속하였다. 《먹는 걱정은 안해도 돼. 우리 돌격대는 식사질이 높아. 당에서 큰 관심을 돌려주고 전국적으로 지원물자들이 많이 들어온단 말이야. 그러니 동무가 배낭속에 뭘 가지고 가는게 있다면 미리 해치우는것도 괜찮아. 난 그런걸 싫다 하는 사람이 아니야.》

장현철은 부시럭부시럭 가방을 뒤져 빵과 당과류들을 듬뿍 꺼내 운전탁우에 올려놓았다.

《어서 잡수십시오.》

《허, 이거…》 운전사는 좋아서 입이 벌어졌다. 《동무한테는 말할재미가 있구만.》

그는 한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한손으로 닭알빵 한개를 집고 맛스럽게 뜯어먹는다.

《동무도 뭘 먹소.》

《아니, 난 먹고싶지 않습니다.》

현철은 그저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고싶었다. 마음이 좋으나 수다스럽게 느껴지는 이 상고머리운전사가 자기를 방해하지 않는다면 그 무엇이든지 다 주고싶은 심정이였다.

문득 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아버지 장종학은 몇달전에 건설부 부부장으로 조동되였다가 지금은 해외에 나가있었다.

현철이 조국을 떠나는 아버지를 바래우려고 비행장에 나갔을 때 아버지는 측은한 눈길로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현철아, 산호아저씨때문에 네가 설미와 다투고 갈라졌다는것을 내 다 안다. 다 내가 처신을 잘못했기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졌구나.》

《아니예요, 난 내 주장이 있어 내 맘대로 행동했어요. 아버지탓이 아니예요.》 현철은 머리를 흔들었다.

《하기야 너도 이젠 당당한 사내대장부이고 또 누구의 말에 따라가는 그런 약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라는것을 안다. 앞으로도 네 앞길을 네스스로 개척해나가거라.》

《알겠어요. 어제도 오늘도 난 별일없어요.》 현철의 코날이 두드러진 매끈한 얼굴에 도고한 웃음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외국에 나가서 건강을 해칠가봐 걱정될뿐인걸요.》

《내가 비판을 받긴 했어도 그게 다 사랑이고 믿음이라는것을 난 잘 알고있다. 오늘은 조국의 권위와 관계되는 중요한 사업을 맡겨주니 어깨가 무거워진다. 당의 신임에 어떻게 보답하겠는지 난 그게 걱정스럽구나.》

아버지의 살이 빠지고 수척해보이는 얼굴에는 결연한 의지의 빛이 어려있었다. 이윽고 그는 매 말마디들마다에 깊은 생각을 담는지 천천히 뜨직뜨직하게, 그러면서도 절절함이 느껴지는 간곡한 어조로 아들에게 말하였었다.

《내가 너에게 당부할건 사람은 사업과 생활에서 고지식하게 살아야 한다는거다. 에누리를 모르고 그저 순결한 마음으로 수령님과 당을 따라야 하는거야. 김일동지가 그렇게 살고있지 않느냐.》

현철은 이번에 량강도혁명전적지건설돌격대에 탄원하면서 해외에서 사업하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였다. 아직은 회답을 받지 못하였지만 아버지가 두손을 들어 찬동하리라는것을 현철은 믿고있었다.

(아버지의 기대와 당부에 어긋나지 않게 일해야 한다.)

자동차는 하얗게 흰눈이 덮인 수림을 끼고 뻗은 도로를 달리고있었다. 평양에서는 벌써 훈풍이 불고있었지만 이 백두산지구에서는 아직도 눈이 녹지 않았다. 현철의 손은 저도 모르게 솜옷 안주머니속으로 들어갔다. 사진 한장이 만져졌다. 그는 그 사진을 꺼내보려다가 곁에 운전사가 있다는것을 깨닫고 그만두기로 했다. 그 사진을 보면 수다스러운 운전사가 무엇이라고 시까슬러댈는지 모른다.

《…한번은 내가 한겨울밤에 원목을 실어나르다가 덜컥 차가 멎어버렸어. 왜 그랬는가? 그건 백두산의 엄혹한 추위에 디젤유가 얼어버렸기때문이야. 이런 난사라구야. 그래서 나는…》

현철은 손을 안주머니속에 넣고 사진을 만지작거렸다. 그 사진이야 말로 현철이를 백두산으로 향하게 한 요인이였다.

한설미의 아름다운 얼굴이 눈앞에 선히 그려진다.

(설미, 난 널 리해해.) 하고 현철은 마음속으로 말하였다.

현철은 설미와 다투고 김일의 부탁대로 영천시에 내려가 강산호를 도와 불비한 아빠트들을 보수증축하는 일에 몸을 잠그면서 자신을 돌이켜보게 되였고 또 설미라는 처녀의 모든것을 새롭게 알게 되였다. 지난날 그는 대체로 다른 사람들에 비한 자신의 우월감에 사로잡혀있었으며 따라서 많은 사람들을 눈아래로 우습게 보아왔었다. 그것은 설미에 대해서도 례외로 될수 없었다.

실지로 그는 설미보다 나이도 몇살이나 우여서 오빠노릇을 하는데다 머리도 훨씬 좋았고 아는것도 많았다. 그러나 총명하고 기민한 재능이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전부가 아니였다. 설미처럼 고결한 성격, 언제나 당을 따르며 정의롭고 고지식하게 살려는 지향이 중요한것이였다. 현철은 자기가 지금까지 설미를 놓지 못하고 은연중에 그 처녀에게 매혹을 느끼게 되는것은 그의 결곡한 성미때문임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였다.

하여 자신을 뉘우치는 모진 진통을 겪으면서 그는 더는 설미를 탓하지 않았고 이전보다 더욱 그 처녀를 사랑하게 되였다. 하지만 그는 설미를 더는 찾지 않았고 자기의 가슴속에 이글거리는 사랑을 억지로 죽여버리고저 안깐힘을 다했다. 자신을 새롭게 정립해가는 그 과정은 자존심이 지난날보다 몇배나 더 강해진 새로운 현철을 탄생시킨것만 같았다.

그는 한설미가 혁명전적지건설돌격대에 입대하여 백두산으로 간것을 알고있었다. 그러나 처녀의 뒤를 좇을 생각은 없었다. 이제 와서 설미는 그에게 사랑과 희망, 추억이 범벅이 된 아득히 먼 빛처럼 떠오르는것이였다.

《여 친구, 삼지연에 다 왔어. 여기에 우리 돌격대들이 자리잡고있소.》

현철은 운전사의 말에 생각에서 깨여났다. 가슴이 설레이였다. 아, 드디여 다 왔구나.

《차를 좀 세워주십시오.》

《가만 앉아있으라구. 돌격대지휘부까지 가자면 좀 더 가야 해.》

《아니, 난 걸어가겠습니다.》

운전사는 차를 세웠다.

《친구, 또 만나자구. 덕분에 잘 먹었네.》 운전사는 자기 배를 쓸어만지였다.

운전사는 호인다운 웃음을 남기고 차를 몰아 사라졌다.

현철은 맵짠 바람을 맞으며 서있었다. 빽빽한 수림우에 그지없이 깨끗하게 느껴지는 흰눈을 두텁게 들쓴 백두의 산발들을 휘둘러보았다. 그 어디라 할것없이 청춘의 심장을 격동케 하고 정신을 정화시키는 신비한 원소가 들어차있는것만 같은 항일의 옛 전장… 더 깊이 수림속으로 들어가면 붉은 기발이 날리는 항일빨찌산들의 숙영지를 만날수 있을것만 같았고 눈속을 헤치면 그분들이 쏜 총탄의 탄피들을 얻어볼수있을것만 같았다. 바로 여기 백두의 밀림속에서 조선인민혁명군 사령관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 항일혁명전쟁을 승리에로 령도하시였다!

현철은 자기의 심장이 쿵쿵 소리내며 흉벽을 들이침을 기분좋게 느끼였다.

(여기서 나는 혁명선렬들의 넋을 가슴에 새기며 새생활을 창조해나갈것이다.)

현철은 손을 솜옷안주머니에 넣어 사진을 꺼내였다. 그 사진에는 삼지연못가에 나란히 선 김일과 한설미의 모습이 찍혀져있었다. 닫긴깃 양복차림에 작업복을 덧걸친 김일은 엄숙했고 돌격대복을 입은 설미는 활짝 웃고있었다.

현철에게 이 사진을 가져다준것은 김일의 서기 허룡이였다.

《1부주석동지가 현철동무에게 이 사진을 전해주라고 해서 왔소.》

현철은 얼떠름하여 허룡을 쳐다보았었다.

《이 사진은 뭘 의미하는겁니까?》

《1부주석동지는 얼마전에 혁명전적지건설사업을 지도하러 백두산지구에 다녀왔소. 그때 한설미를 만나 사진을 찍었지.》

《그런데… 왜 나에게?…》

《1부주석동지는 다른 말이 없었소. 사진을 보고 동무가 잘 생각하고 결심하라는거였소.》

눈, 코, 입이 다 큼직큼직하게 잘생긴 허룡의 얼굴에 느슨한 미소가 어려있었다.

《무슨 결심 말입니까?》

《그건 나도 모르겠소. 1부주석동지가 한 말은 그게 다요.》

허룡이 돌아간 후 현철은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사진속에 깃든 뜻을 어렵지 않게 짐작하였다.

하여 백두산으로 가자는 결심이 내려졌다. 그렇다, 김일이 현철에게 바라는것이 바로 그것이였다. 현철은 말없이 자기에게 깊은 뜻을 깨우쳐주는 김일이 더없이 고마왔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세찬 바람에 눈발이 흩날리였다. 현철은 눈바람을 맞으며 걸음을 옮기였다.

(한설미, 난 널 찾아서 여기로 온것이 아니다. 난 우리 시대 청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며 나자신을 단련하기 위해 온것이다.)

현철은 가슴속에서 억센 의지를 가다듬으며 씩씩하게 걸어갔다.

(김일동지, 난 지금 기분이 상쾌합니다. 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백두의 혁명정신을 체질화해가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1부주석동지가 나에게서 바라는것이 아니겠습니까.)

한설미는 대대에 배치되여온 신대원을 보았을 때 깜짝 놀랐다. 장현철이 혁명전적지건설돌격대에 나올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설미였다.

대대장은 현철을 데리고 군대식으로 아담하게 지은 대대병실을 돌아보며 앞으로 지켜야 할 생활준칙에 대한 말을 하고있었다. 설미는 식당앞에서 높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현철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자기가 현철이를 사랑한다는것을 알고있었다. 설미에게 현철이만 한 남자는 눈에 뜨이지 않았다. 지성이 있고 인정이 많고 게다가 얼마나 잘생긴 남자인가. 처녀의 자존심에 그 어떤 죄의식까지 작용하여 현철의 곁을 떠났지만 결코 잊을수 없었던 남자가 현철이였다.

(어떻게 돌격대에 입대하게 되였을가?)

혹시 자기가 백두산지구건설돌격대에 있다는걸 알고 찾아온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현철이가 고맙게 생각되였다.

대대장이 현철을 이끌고 식당으로 다가오고있었다. 키가 크고 체격이 갱핏한 현철의 곁에 서니 작달막한 오달진 체구의 대대장은 더욱더 목이 앙바틈해보이였다. 설미는 후날 조용히 현철을 만나리라 생각하면서 주방안으로 몸을 숨기였다.

《여기가 식당이요. 식사시간은 아침은 7시, 점심은 12시, 저녁은 7시 30분이요.》

식당문을 열어제끼고 현철에게 설명을 하던 대대장이 큰소리로 설미를 찾았다.

《후방참모동무, 여기 나오시오.》

설미는 화뜰 놀랐다가 얼굴이 활딱 붉어진채로 밖으로 나왔다.

《인사하오. 우리 대대 후방참모인 한설미동무요. 그리고 이 동무는 신입대원 장현철동무요.》

대대장이 이렇게 소개말을 하는데 그들은 서로 지그시 마주 쳐다보고있었다.

현철의 매끈한 얼굴에 기쁨과 흥분의 파도가 일어번지다가 어느새 가라앉고 고통의 구름이 끼기 시작하였다. 이내 자기를 수습한듯 침착하게 말하였다.

《안녕하십니까?》

설미도 격앙된 감정을 억누르며 머리를 숙이였다.

《안녕하세요?》

대대장은 잠간사이에 그들사이에 오고간 감정의 교차를 눈치채지 못한채 설미에게 말하였다.

《후방참모동무, 신입대원 장현철동무를 축하해서 오늘 저녁 한상 잘차려야겠소.》

《알겠습니다.》

현철은 대대장과 함께 식당을 떠나가는데 설미는 가슴이 허우룩해져서 서있었다. 《안녕하십니까.》하는 현철의 엄숙한 인사말이 그렇게도 그를 놀래웠고 섭섭함을 자아냈다. 설미는 《잘 있었니?》 하고 동생에게 말하듯 하는 허물없는 인사말에 너무나도 습관되여있었던것이였다.

(괜찮아, 좀 생활하느라면 우리의 관계가 회복될거야. 그가 말했지. 용기를 내. 언제든지 희망을 잃어선 안돼.)

설미는 현철이와 함께 돌격대에서 생활하게 될 앞날을 그려보면서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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