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사로운 해빛아래
뜻깊은
이날을 맞으며 저는
지난 4월 8일
돌이켜보면 중학교시절부터 피타는 고학과 독학으로 가파로운 인생길을 톺아오르며 대학교수까지 되여 자수성가했다고 자타가 공인하던 제가 쉰두살에 극적인 인생전환을 하여 입북한것은 단 하루를 살아도
제가 의거한 이듬해였습니다. 남조선에서 오래동안 대학교단에 서있으면서도 돈이 없어 박사원을 마치지 못한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기였던 저는 평양체육대학 박사원에서 공부할것을 희망하였습니다.
나라에서는 저의 이 마지막소원마저 헤아려 박사원에 입학시켜주었고 4년동안 많은 장학금까지 받으며 마음껏 공부할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장학금을 받을 때마다 저는 남조선에서 학비가 없어 고학을 하던 때의 가슴아픈 일들이 떠올라 뜨거운 눈물을 남모르게 흘리군 하였습니다.
전주의 가난한 농가에서 8남매중의 둘째아들로 태여난 저는 열두살때부터 신문배달을 하며 고학을 했습니다. 30리 밖에 있는 학교에 다니며 신문배달을 한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습니다. 신문배달을 하다 사나운 개에게 물리고 신문이 늦었다고 억울한 매를 맞은적도 한두번이 아니였습니다.
이런 제가 반백의 나이에 장학금까지 받으며 편안히 공부하게 되였으니 그 감회를 무슨 말로 표현할수 있겠습니까. 나라에서는 박사원을 졸업한 저에게 부교수학직과 학사학위를 안겨주었습니다.
지난 10년동안 저는 세차례에 걸쳐 입원치료를 받고 건강한 몸으로 다시 태여났습니다.
의거한 이듬해인 1989년에 기관지가 파렬되여 두달동안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고 1996년에는 김만유병원에 석달동안 입원하여 담낭적출수술을, 1997년에는 조선적십자종합병원에 두달동안 입원하여 신석제거수술을 받았습니다.
따지고보면 이 병들은 제가 남조선에서 상류층이라고 할수 있는 대학교수를 하면서도 엄청난 수술비와 입원비를 감당할수 없어 신고를 하면서도 고칠수 없었던 오랜 질병들이였습니다.
저는 1986년에 시위투쟁에 떨쳐나선 대학생들을 후원하다가 전투경찰들의 폭행에 갈비대 두대가 부러져 45일동안 입원치료를 받은적이 있습니다. 그때 입원비가 로동자들의 20개월의 임금과 맞먹는 200여만원의 거금이였습니다. 저의 누님도 입원비를 마련할 길 없어 34살에 급성취장염으로 병원문턱에도 못가보고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마 제가 공화국이 아니라 남조선에서 일곱달 남짓한 기간 병원에 입원하여 그런 대수술을 받았다면 그 입원비와 수술비만 해도 수천만원에 이르렀을것이며 모름지기 입원비와 수술비때문에 누님처럼 한많은 생을 마쳤을것입니다.
그런데 공화국에서는 나라에 아무것도 보탠것 없는 저에게서 돈 한푼 안 받고 오랜 질병을 말끔히 고쳐주었습니다.
우리 인민이 누리는 무상치료의 혜택을 생각할 때마다 아들 통일을 생각하군 합니다.
저는 공화국의 품에 안겨 새 가정을 이루고 어린 아들과 딸을 키우는데 아들 통일은 30주 조산아로서 태여났을 때 몸무게가 1.3㎏밖에 안되였습니다.
늦게 본 자식이라 더없이 소중했지만 자식이 그 꼴이다보니 살지 못할것이라 생각했고 기적적으로 산다 해도 사람구실을 못할것이라고 단념하고있었습니다. 남조선에서라면 도저히 살릴 가망이 없는 아이였기때문입니다.
그런데 눈앞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통일은 최신식설비를 갖춘 평양산원의 보육기속에서 정상아로 자랐고 6개월 반동안 의사들과 간호원들의 지극한 정성과 간호속에서 건강하게 자라나 오늘은 씩씩하게 뛰놀고있습니다.
오늘 저는 건강한 몸으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원으로 조국통일을 위한 사업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치며 보람찬 삶을 누리고있습니다.
참으로 행복과 보람찬 삶으로 이어진 지난 10년은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원 리우갑
(《통일신보》 1998년 5월 2일부)